김영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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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2. 1. 17.

김영찬 시인
충남 연기군에서 출생. 한국외국어대학 프랑스어과를 졸업했다. 패기만만한 문학청년이었으나 졸업 후 입사한 종합무역상사의 해외지사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및 이집트 카이로 등지에서 1977년부터 1984년까지 근무했다. 2002년 《문학마당》과 2003년 《정신과 표현》에 시가 있는 수필을 각각 게재, 연재한 것을 계기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와 『투투섬에 안 간 이유』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부주간.

 


 

추억의 문 밖에 선 등불 / 김영찬
생각해봐요, 우우~ 생각을, 생각 좀 해봐요 시간의/ 양쪽 끝을 너무 팽팽하게 잡아당기면/ 끈이란 끈은 모두 끊어져 못쓰게 되잖아요// ( (( ((( (( ( 우우 )))/ (우/우/우) ) )) ))) )) ) )) )))// 감긴 실이 끊어지면 양철 지붕 흙벽에 기대어/ 까만 눈을 깜박이던 첫사랑 소녀가 울음 터트릴 수밖에,/ 우우~/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눈물은 봇물로 터져 갈피 못 잡아 헤매겠죠, 우우우~// 빨간 지붕 흙담은 무너져 내리고 갈 곳 없는/ 소녀는 멀리~ 아주 멀리 기억에서 너무 빨리 사라져/ 다시 올 수 없겠죠, 우우우~ 우우// >>> 생각해봐요~ 우우~, 생각을, 생각 좀 해봐요 <<</ 시간의 양쪽 끝을 잡아당길 땐 언제나 문밖에 선 추억을/ 생각해야죠!//

두 시간 저쪽 / 김영찬
두 시간 전에 갑자기 봄이 왔다/ 두 시간 저쪽에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두 시간 전에 그녀는/ 천천히/ 안개비 속으로 들어왔다// 두 시간 전에 만나/ 두 시간 후에 떠나야 하는/ 우리는/ 영영 되돌아오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두 시간 저쪽 꽃바람 속에서/ 늘어지게 한가한 봄/ 두 시간 후엔/ 안개비 속에 머물다 흩어질 물방울들아// 어느 행성에선 갑자기 성운이 일고/ 두 시간 건너편 그녀는/ 내게 수선화 노란 꽃을 건넨다// 두 시간 전에 멈춰선 봄// 두 시간 저쪽으로 거세게 부는 바람//

오후 세 시에 부는 바람 / 김영찬
오후 세 시에 바람이 찾아와서 물었지요/ “모자는 마음에 드니?”/ “누군가에게 모자를 선물한다는 건 하여간 슬픈 일이야”// 오후 세 시에 그 바람이 찾아와서 다시 물었지요/ “모자 아래 가려진 너의 안녕은 정말 안녕하니?”// 나는 정중히 모자를 벗어 오후 세 시/ 정각에 만나기로 한 벗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오후 세 시가 흘러가면 머리카락 냄새 풀풀 날리게 될/ 모자 위의 시간//

측백나무, 별 / 김영찬
오늘도 안녕하시다 측백나무는// 잎사귀는 오늘도/ 축제일 같이/ 푸르고 무성하시다// 내가 그 곁으로 걸어가면/ 싱싱한 기운 내뿜어 나를 유혹한다// 측백나무 열매는 밤마다/ 푸르른 별/ 별들은 측백나무 가지에 놀러와 깊은 밤의/ 포로가 된다// 측백나무는 그래서 사철 푸르고,/ 젊다// 나는/ 측백나무 곁에 한참 머물다 간다/ 측백나무 이파리에 스스로 인질로 잡혀/ 사철 푸른 꿈속에 포로로 살고 싶어서…/ 측백나무는 오늘도 안녕하시다, 나는/ 그 향기에 취한 나그네// 무성한 그 그늘에 지치도록/ 오래 쉰다// 내 그늘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아이스크림에 거는 희망 / 김영찬
벚꽃이 지는 속도는/ 초속 1mm// 내 사랑 아이스크림이 혀를 녹이는 기간은/ 영겁(永劫)에의 억류// 무한대 ∞에 닿아/ 불멸(不滅)을 스칠 수 있겠다//

짐 자무쉬에게 묻고 싶지 않은 질문 / 김영찬
버스운전사 패터슨의 아내 로라는/ 행동예술가이자 요리사, 아기 대신 애완견을 키웠지/ 버스운행을 쉬는 자투리 시간에/ 패터슨은 습작시를 썼고/ 잠꾸러기 그의 아내는 페르시아의 왕자가 된 남편 패터슨이/ 은색 코끼리를 타고 거들먹거들먹/ 시타델citadel의 대낮을 활보하는 꿈을 꾸다가/ 늦잠 잔 날도 있었지// 패터슨왕국의 대형버스를 모는 대신 패터슨 부부가 넉넉히/ 등 기대고도 남을/ 거대한 코끼리 등짝이 필요했던 듯/ 퀴노아 샐러드요리 솜씨에 기타연주까지 곁들여 업그레이드된/ 여가를 즐기려는 로라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선호할 수밖에 없지// 책꽂이에는 월레스 스티븐스의 시집도 꽂혀 있지만/ 가령,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에/ 이런 것도 있기 때문이지// “냉장고에 있던/ 자두를/ 내가 다 먹었다오// 아마 당신이/ 낼 아침상에 차려놓으려고/ 아껴 두었던 것을// 용서해요/ 그 자두가 어찌나 달고/ 맛있고/ 차디차기도 하던지”// 짐 자무쉬가 스크린 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잔잔히 흘러가듯 사는 방식이/ 모범적인 삶이라고?/ 불협화음도 조용히 아이스크림처럼 녹일 수 있어야 금슬 좋은/ 부부가 되는 거라고?// 시시껄렁한 질문을 차치하고 진눈깨비 질퍽거리는 극장 밖/ 퇴계로의 한 선술집에 앉아 훌쩍훌쩍 울듯 마신/ 깡소주에 대취하여/ 집에 갈 생각만 버스 태워 먼저 보냈네//

구름의 망명정부2 / 김영찬
예바부엔나(Yerba Buena) 허브차를 우리는 시간,/ 찻잔에 내려앉은 파리 한 마리와 얼떨결에/ 겹눈 마주쳤지/ 구름의 망명정부에서는 흔하디흔한 일?/ 그건 아니고/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장미를 떠올리니까 장미가 피어나고 있었지// 장미금지구역인데 어떻게 가시만 두른 장미가 멋대로/ 피어날 수 있담?// 이건 진실이야, 구름공화국의 경비초소에는 당번병이 따로 없지/ 교대병들은 휴가를 연장하거나/ 애인이 면회 온 것을 핑계로 외출외박 후 결코 돌아오지 않지/ 모두들 예바부엔나 허브 향에 취해 조는 사이/ 국적 없는 흰 구름이 솟아올라/ 허리 아래는 무너지지만/ 제 철 만난 줄장미가 마음껏 몸단장 뽐내도록 놔두지/ 그거야 충분히 그럴 수밖에 아무도/ 남의 일에 간섭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이건 아닌데, 입국심사대엔 아직 계류 중인 구름장미가 한 묶음/ 날개라곤 없는 뜨내기 장미구름도 한 무더기/ 드높은 콧등을 타고/ 모두들 높이 떠 흘러가고만 싶을 뿐/ 이건 진짠데,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흘러가버리도록/ 놔둬도 될 텐데/ 차를 달이다만 찻잔을 뒤엎어도 되는 시간/ 오갈 데 막막한 사막의 바그다드카페,(Cafe Baghdad)에 갈 일이라곤 애당초/ 전혀 없었지만 그런데 아마/ 아마도 곧 갈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길 것도 같다고// 함께 떠나겠다는 무리들이 식은 커피잔 주변에 몰려든다.// 이건 정말, 밀항한 구름을 눈감아준 유리창의 이빨이 흔들리도록/ 두려워할 일인데/ 카페를 찾아온 가객들은 한결같은 장미향 흡입의 마니아들/ 뜨내기구름이 빚은 향유를 몸에 바른 뒤/ 특별한 기분에 들떠/ 구름의 엉덩이를 쓰다듬지/ 혼몽 중에/ 장미의 본고향인 여기가 바로 성지라고/ 여기에서 비롯된 분명한 속살은 마치 청춘을 되살릴 듯/ 강렬한 것이라고// 가객들은 그렇게 끝내 감격스런 울음을 터트릴 것이다./ 초라한 행색에 혼란했던 대낮의/ 오후 3시/ 찻잔 난간에 불시착했던 파리 떼의 황망한 변신을 망명객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필경/ 울먹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렇지만 마뜩찮은 이야기, 꿈꾸고 싶은 와중의/ 내 졸작 시의 행간에 미끄러진 파리 한 마리가/ 하필이면 된똥을 쌌다./ 퇴고 중인 나의 엉터리 설문지/ 거기에 나쁜 대답 대신 침묵을 지키는 독자들을 대변하듯/ 나를 꼬나본다./ 소심한 그자들과 함께 사막의 한가운데/ 바그다드의 카페로 떠날 명분을/ 그런데 나는 어디서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툭하면 바그다드로 출장 가겠다고 차표를 끊는 그자들은/ 모래바람 부는 카페의 창가 쪽 테이블을/ 선점하겠지/ 그리고는 뜨거운 예바부엔나차가 미처 끓기도 전에/ 골치 아픈 삶/ 복잡한 난제들을 쓸어내 머릿속을 정리하고 딱딱한/ 나무의자에 등을 기댈 것이다/ 누가 말릴 수 있으랴/ 사막을 가로지르는 떨거지들의 행렬이 나날이 거칠어지면/ 벌써부터 그 길은/ 황량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정답 모를 질문과 정답이 필요 없는 응답, 사막화 돼 가고 있거나/ 사막화 된/ 알 수 없는 저녁이 기어이 닥쳐온다// 낮에 구름의 이동경로를 자세히 봐둘 걸 그랬나?// 비행기가 비행운을 금 긋고 지나간 하늘에 어설픈 밤이 펼쳐지고/ 들장미는 푸른 밤의 잎을 떨궜지/ 성지를 돌고 온 순례자들이 휘파람을 불어댄다./ 마치 가슴 한켠에 봉분이라도 들여앉힐 듯이/ 민감해진 밤/ 낡은 문짝들은 삐걱삐걱 야릇한 신호음을 보내고/ 사막은 불을 밝혀/ 길을 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카페바그다드가 이윽고 문을 연다./ 빗장을 풀고/ 오지 않을 손님을 끝까지 고집 부려/ 기다릴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밤이 왕소금 모래알을 뿌린다./ 그 뒤로/ 달빛에 밀린 꽃구름이 번진다./ 카페테라스에 여장을 푼 구름나그네는 쉽게 잠이 올 리 없다./ 잠결에 문득 일어나 장미향 퍼지는 곳/ 어디 론가를 향해/ 행방 묘연한 구름에 모습 감추기도 한다./ 그리고 아무도// 혼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에 함부로 없는 것들 / 김영찬
아르장땅(argentan)에 없는 것은/ 헤테로토피아에 있고/ 헤테로토피아에 없는 것은 아르장땅에 있다// 아르장(l'argent, 프랑스어 純銀이자 돈, 곧 財貨)이다) 아르장 ‧ 아르장,/ 돈줄 땡기게/ 기왓장 깨지는 집들 즐비한/ 아르장땅의 거리들// 아르장땅을 용케도 벗어나 멀고먼 폐허의 양지쪽/ 햇볕에 둔감한 아가위나무 울타리 외곽에는/ 세상과의 불가피한/ 경계를 고집하는/ 마을이 하나쯤/ 이름만으로도 남아 있어 어느 날은 그리도 쉽게/ 깜박이기도 하는 법// 거기서 쉽게 늙어죽을 생각에 미동조차 아끼는 길고양이들은 밤마다/ 발음도 불분명한 아르장땅의 사투리로 가르릉 갸릉/ 찌그러진 양은냄비 소리를 낸다// 아르장땅에 없어도 되는 것들이 그런데 어째서/ 헤테로토피아의 편의점에는 버젓이/ 있거나 있어야 하고/ 헤테로토피아에 있거나말거나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 어찌하여/ 아르장땅에서 함부로/ 발생하는지/ 왜 그래야 물풍선 터지는 희열이 치솟고 짓무른/ 의식은 양철지붕 밑으로 녹아내리다가/ 삭아버리도록 방치하는지// 아르장땅의 자치구에서는 한 포대기 은화를 가득 채운 돈자루가 찢어진다. 찢어진 돈자루에 발등 찍히는 불상사가 비일비재 너무 잦은 사건들을 일컬어 공짜로 꾼 길몽쯤으로 해석해버리는 원로들. 그런 관행에 익숙해진 족속들의 턱수염 아래로는 아직도 헤테로토피아의 물안개가 찌걱거린다.//

 

불멸(不滅)을 힐끗 쳐다보다 -밤의 가스파르(La nuit de la gaspard) / 김영찬

고양이를 죽여라, 저 음습한 밤의/ 모반// 고양이를 죽인 자들은 고향을 음해한 자들일 뿐// 그러므로/ 고양이의 눈동자 속에 파고 들어가/ 분노를 읽을 때/ 복수의 칼은 눈알 번득인다// 나비의 눈을 보라/ 어둠의 중핵이 박힌 나비의 양 미간을 후벼 파/ 들어가 보라/ 눈동자와 눈동자가 맞부딪혀 소용돌이치는 곳에/ 야심한 밤이 흐르리// 고양이는 그래서/ 고향을 할퀸 자들의 표적/ 그믐달 야위는 밤에만 암행, 자해를 일삼는다// 슈퍼마켓 처녀는/ 고양이 눈을 흉내 낸 마스카라 화장술, 미간에/ 검은 숯덩이 묻힌 커다란 눈으로/ 계산대 앞의 나를 노려본다/ 밤의 폭군/ 밤의 가스파르가 검은 망토를 펄럭~/ 나는 재빨리 몸을 접는다// 고양이가 섭정하다 놓친/ / 밤을 놓친 실향민들의 격정적인 불면/ 죽여라, 고양이!/ 이 깊은 밤의 상처를 혀로 핥는 고양이는/ 너무 많은 양의 고독을/ 두 눈의 백내장 안구에 축적했었구나// 쏘아라, 고감도 반사광!/ 저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노리는 고양이/ ~ //

꽃이 바람의 등을 밀다 / 김영찬
헤이~ 미련 곰탱아,/ 치맛자락 파고든 우직한 촌사내의 옹고집처럼/ 속살 고운 연꽃 위에 우격다짐/ 무대포로 짓눌러 앉아/ 천년학을 기다릴 태세로구나// 몽키스파나로 잘못 조인 세월의 못대가리마냥/ 뭉뚝한 얼굴에/ 목주름 심한 턱주아리는 차라리 믿음직스럽다마는/ 무식한 무쇠 솥 잔등이라니// 그런데// 천년학이 날아와 너를 안고 솟구쳐 날아오를/ 그날까지/ 알 아닌 알, 무정란인 세월을 포란,/ 어정쩡한 시간일랑 아예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발가락 하나 꼼지락거림 없이/ 웅크려 긴장하고 있구나// 에효~ 이런 미련둥이 거북아,/ 세상천지 다 놔두고 하필 연잎에 품은 알들/ 사바세계에 부화돼 연꽃 흐트러지게 피운 뒤 납총알처럼/ 연밥 터트릴 태세라면 내려와야지,/ 어서 내려서라니까/ 꽃이 바람의 등을 밀어// 1cm씩 1mm씩 하여간 곰탱이 네 얼굴 어루만지는 달빛/ 고요히 감응하고 있구나!//

올리브 동산의 7월 칠석七夕 / 김영찬
‘그 여름에 리키아로 떠나는 건 아니래’/ ㅡ故 김희준의 시 「7월 28일」중에서// 그 여름의 7월은 김희준 시인에게 태양력에서 녹아내린 밀가루반죽/ 올리브 동산의 급경사면이었을까// 서로의 발톱을 깎아주다가/ 몸에 새긴 패랭이꽃/ 꽃 모양이/ 입체적이 아니라고/ 서로의 모서리가 아프도록 뾰족한 말을 주고받다가/ 웃기도 하다가// 그러다가 사슴뿔을 새긴 허리 아래 문신이/ 외벽을 타고 허공으로/ 파고들던// 계절이 아닌 여름이 비를 뿌리고 오다가 꽃들이/ 저물기엔 너무/ 이른/ 밤으로 멀리 떠나는 심야의 불빛처럼 포말하우트의 농무처럼/ 몽롱한 안개 속에 꺼내든 시는 발가락이 갯벌에 닳는/ 막연한 기분/ 마틸다,/ 어서 짐을 싸자 마틸다/ 순결한 키스는 열 살 때 상처 밖에 없는 파과처럼 파삭파삭// 눈두덩에 접혔다/ 그랬다// 금기된 사랑이라 발설하지 못했던 7월이 기승을/ 부렸다/ 라고 고백한 것도 7월// 방황하는 너 영영 발음되지 않는 이름을 지우개로 지우기 위해/ 마틸다, 너는 떠났다// 그 여름에 리키아로 떠나는 건 아닌데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

눈치코치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 / 김영찬
나는 카프카스에서 온 청년//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해안사구海岸沙丘를 걷다가/ 신두리 모래밭은/ 신두리 원시사막 그대로/ 놓아두고// 차탈회이위크까지 맨발로 혼자 걸어가지/ 걸어가서/ 먼지 쌓인 고대문명의 위캔드 분위기를 재량껏/ 휘젓다올 생각// 코주부 코끼리 일가가 코로나바이러스, 코비드19를 몰고 온들/ 애이불상哀而不傷 코끼리 큰 코를 막아설/ 처지는 아니지/ 놀란 멧돼지가 굴뚝 타고 올라가/ 검은 달빛을 파먹어도// 득템 없는 일에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 눈치코치 없이 하르마탄 열풍을 핑계로/ 속수무책/ 방역마스크에 콧구멍 가리고/ 도심을 활보할 것인가// 콧김 센 바람을 피해/ 신두리 해안사구 깊숙이 코호트 자가격리, 나 몰라라/ 갇혀 지낼 것인가//
* 마밀라피나타파이Mamihlapinatapai : 눈치보기. 세상에서 뜻이 젤 긴 단어(1993년 기네스북)

아이발릭(Ayvalik)에서 일박(一泊) / 김영찬
여행이란,/ 운엔트리혜 보흘게무트하이트!/ unendliche Wohlgemutheit// 호롤롤롤로~ 호롤롤 입술 오므려 발음하면 의미는 사라지고/ 물거품만 남는다// 보스포루스 갈라타 다리(Galata Bridge)를 가로질러 말마라,/ 마르마라Marmara해(海)를 말도마라 말없이 건너자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야 옳고 그래야만/ 군말 없이 맘 편해진다/ 안탈랴 구시가지에 이글거리는 버닝 썬/ 그 동안/ 봄 없이 계절 없는 여름이 몇 번이나 지나간 것일까/ 까탈 부리자는 게 아니다/ 따질 건 분명히/ 따져야지// 터키 돈 25리라면 5달러거나 4유로 남짓/ 그 돈이면/ 카파도키아산(産) 단물 밴 오렌지를 한 자루나 살 수 있다// 이스탄불 신시가지 탁심광장 길바닥의 악사들에게/ 호롤롤로 호롤롤~/ 까짓 거 일 백 리라 쯤 통 크게 쾌척하려다말고/ 쪼다같이 주머니 속만 계산하다가/ 그냥 돌아서비린 것 후회막심/ 마음에 걸린다// 여행이라는 게 다 그런 것 뒤돌아서면 멋있었고/ 생각해보면 아쉽기만 한 것/ 관광버스로 관광지 몇 군데 호로록 둘러본 것만으로도/ 그 나라를 다 보고 온 것 맞지요, 맞다/ 거기가 참 멋졌다고/ 거기 안 가본 사람은 천국 비슷한 곳 근처에도 못 가본/ 가련한 족속들이라고 수다를 떨다가/ 빈털터리로 출발지에 돌아오면/ 거기가 어디였더라/ 졸면서 영화 한 편 보는둥마는둥 극장 밖으로 풀려나온 사람처럼/ 이런 제길 일상이 이렇게 대기하고 있었을 줄이야/ 기왕 이럴 줄 알았으면/ 아야소피아 대성당의 뚱뚱한 석조기둥이나 끌어안고 악착같이/ 소원을 더 빌었어야 하지 않았나// 아이발릭Ayvalik이라는 소읍에서는 어느 호텔에 묵었더란 말인가/ 겨울 포도밭 쉬린제에서 와인 없이 간단한 점심을 먹고/ 언제 트로이로 목마를 보러 이동했던가?/ 제 철을 놓친 편도나무/ 아몬드 꽃은 의문부호 같은 꽃망울 매달고 있는데/ 되돌아보면 아이발릭이라는 마을은/ 골든 혼에서 실종된 목선처럼 기억에서/ 종적 없이 사라지고 없다//

뜻밖의 여행 / 김영찬
상파울루의 안 가본 거리 마나카스, 아라라콰라에나 가볼까./ 이름도 멋있잖아, 아라라콰라~/ 가볼까 말까/ 구두끈이 풀리네.// Avenida Alberto Benassi no. 33770 Jardin dos Manacas,/ Araraquara, State of Sao Paulo, Brazil// 야라콰 아라라콰라Jaragua Araraquara가 뭔 뜻인지 내가 알게 뭐람?/ 야, 이리 좀 와 봐!/ 아라라콰라의/ 아라라콰라 거리로 콰라콰라/ 입술 추스르며 와보라니까!// 마나카스 아라라콰라를 향하는 마음.// 상파울루 브라질을 풍선 띄워 배낭에 매달면 필렐레 팔렐레/ 왜 발바닥부터 간지럽지?// 남미(南美), 라틴 아메리카.// 야라콰 아라라콰라에 가서 한 삼백 오십년 동안만 쾌지나칭칭 떠돌다오면/ 찌그러진 한반도 지도가 남태평양 발뒤꿈치에 가닿아/ 고래등 슬쩍 떠밀겠지!//

비 오는 날의 우리 Sunna* / 김영찬
Sunna가 나를 잊고 나는 Sunna를 잊은 적 없다고/ 우기니까 비가 온다.// 잊지는 않았는데 모르는 척하니까 비가 온다.// 구름 낀 입천장에 마른기침 Sunna를 잊을만하면/ 오지 않던 비가 한사코 내린다.// 생각은/ 먹구름 뚫고 오는 것./ 오늘의 빗속으로 오늘의 우산장수가 지나가고/ 우산 밖이란, 잃거나 잊을 것 없는 곳이니까 하는 수 없이/ 비가 온다.// 의기소침, Sunna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까./ 비가 온다.//
* Sunna: 조향(조갑제)의 시 「ESQUISSE」에서 만난 ‘Suna’ 참조

미술관에서의 소동(Riot in the gallery) -움베르토 보초니(Umberto Boccioni) / 김영찬
구름에스컬레이터에 몸 싣고 구름 지하갱도로 흘러 들어가/ 빌렌도르프의 대륙적인 젖가슴에 풍덩/ 안기면/ 뭐가 되던 되겠지/ 살찐 유방과 원시적인 허벅지 사이에 뿌앙뿌앙/ 메추라기 배꼽은 부풀어 오르겠지/ 그러면 뭐가 되겠지/ 그런데 메추라기는 배꼽이 없다는 사실 그것이 큰 문제/ 라고 그러던데 그렇지만/ 그건 또 뭐가 그렇게 문젯거리라고/ 겁먹은 겁쟁이들/ 아무르장지 도마뱀에게 장짠지 된통 물렸나/ 꼬리 잘린 하반신에 정신은 말캉말캉/ 줄행랑 놓기 딱 좋은 조건/ 뭐가 되긴/ 될 것도 같은데// 꽃그늘/ 나비날개 하느작하느작/ 입소문 탄 구름향기 드높이 그래그래/ 눈높이에 맞게/ 헬리오가발두스 황제정원의 고급품종 장미꽃 만개한 길/ 거리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다가 맨몸뚱이 쓰러져 눕는/ 백주의 애인들/ 진한 립스틱 때문에 질식해 죽는 연인들의 수효가/ 철 지나 시들어 죽는 꽃보다 훨씬 더/ 많다는 얘기를// 사랑에 굶주린 돌고래에게나 던져줘야 한다// 그럼 그렇잖고 150살 넘도록 '눈빛이 하늘에 가닿'지 못하면/ 레 죄 쥐스꼬 씨엘(les yeux jusq'au ciel)/ 라흐쌩(larcin), 라흐쌩/ 라흐쌩은 좀도둑이라는 뜻/ 그러나 엉두스 라흐쌩(undoux larcin)이라고 수식어를 달면/ 달콤한 '도둑키스'로/ 의미는 뒤바뀐다고 주워들었다// 꼬랑지 끊고 도망간 아무르장지 도마뱀과 나비도둑 따라 잠적한/ 움베르토 보초니가 버럭 화를 내면 어쩌나/ 무관심한 나는/ 미술관 수장고에 숨어 들어가/ 엉거주춤 발가벗다 만 비너스상이나 훔쳐봐야겠다//

두 대의 피아노와 당나귀 / 김영찬
두 대의 피아노와 한 마리 당나귀가 있다// 당나귀는 귀가 너무 커서 타악기소리를 싫어한다/ 그러나 과도하지 않게/ 언제나 피아노 건반 위를 뚜벅뚜벅 걷는, 걸어가면서 산책 중/ 명상에 잠기는 습관이 있다// 당나귀 발굽을 닮은 내 손바닥엔 두 대의 피아노/ - 한 대는 피아니시모/ - 또 한 대는 피아노포르테/ 흰 포말 부서지는 해안에서 안단테와 비바체/ 그리고/ 하얀 건반을 두드리고 지나가는 광풍들/ 해안선 저쪽에는/ 반라의 연인들을 그늘에 숨기는 검은 건반의 숲도 있다// 두 대의 피아노와 한 마리 당나귀라고 나는 썼지, 그랬지/ 두 대의 당나귀와 한 마리 피아노라고/ 고쳐 적으련다/ 한 마리의 검은 피아노가 두 대의 당나귀 갈기와/ 말총꼬리를 붙잡고 속도를 내겠지// 그러면 고리타분하기로 소문난 저 지구의 한 쪽 모서리가/ 발굽 닳아서/ 일상이 기우뚱 기울겠지// 그러므로 과도하지 않게 ‘알레그로 마 농 트로포’로 가자고/ 당나귀 귀에 대고 속삭여야겠다/ 사랑은 allegro ma non troppo, 라고 피아노가/ 알아차릴 때까지//

해바라기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 김영찬
못됐어, 무지막지 무식하고 참 못됐어 정말!// 세상에 좋은 시는 지가 다 짓고 세상 좋은 노래는/ sunflower, good morning~^*/ 저 혼자 다 불렀네!// 태양 아래 아쉬움이 남아 있어 달무리구름까지 피워 올렸나?// 독불장군, 구름사다릴 타고 그 높이까지 집 지으려다가/ 허리 꺾이는 줄 왜 몰랐나// 해바라기 꽃은,/ 그럼에도 건방진 태양 볕 북회귀선 거미줄 아래 나직이/ 남모르게 혼자 늙을 뿐,//

바르도 퇴돌(Bardo Thoedol)* / 김영찬
펼칠 페이지를 다 펼치면 다시/ 덮어야/ 하더라도// ‘닫힌 책으로 시작하여 닫힌 책으로 남는다’*// 그것은/ 파드마 삼바바가/ 덮어둔 책 바르도 퇴돌Bardo Thoedol// 바르도 퇴돌, 퇴돌/ 퇴로의 골안개/ 안개가 먼 길 찾아와 헛기침 뿌리고 간다// 그럴 때/ 그럴 때가 좋아/ 디아스포라Diasphora문학 보다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말도 안 되는 말로 오독을 일삼을 때/ 그런 때/ 시는 다가와 써지지// 그런 시를 쓰지 말라는 법 없으니까/ 샨티 샨티 옴/ 옴 샨티 샨티// 나는 아주 멀리 에로틱한 아트만의 훼절毁節/ 대수롭지 않지만 억세게도 잘 자라난/ 뿔을 잡아 흔든다//
* Bardo Thoedol : 티벳 死者의 書
* 닫힌 책으로 시작하여 닫힌 책으로 남는다 : 위 경전의 말
* 아디아포라Adiaphora : 무관함. 아무래도 상관없음

내가 뺏은 고양이의 고향 / 김영찬
마을엔 굴참나무가 없다/ 마을엔 가을이 없다/ 마을엔 내가 없다// 마음 떠난/ 동네// 마을엔, 마을이 없다// 시인을 자처하는 동네노인이 늙은 그늘만 남은/ 굴참나무 아래 졸고 있다// 어르신네에게 시가 될 만한 무엇이 좀/ 남아있습니까// 안킬로사우루스의 꼬리 악력// 첫사랑을 꽃으로 압착한 화석을 도굴꾼들이 파헤쳤다// 훼절된 발걸음/ 자각몽 중에 실수로 헛발질 한 그림자가 뭉개진다// 봄이 떠나고 휑한 겨울만 남은 빈집에 눌러앉아/ 길고양이가 길들여 놓은/ 굴참나무 밑동/ 응달을 통째로 차지한 고양이가 나를/ 노려본다// 여기는 요람기의 내 영역, 끈질기게 빼앗거나 되찾는/ 투기지역이 아니다//

불멸을 꽃 피운 시, 나의 시인에게 / 김영찬
시는 유리창 박살내는 광풍(狂風)일 수 있으되 고요히/ 눈 깜빡이는 가로등이어야 하고/ 시는 심해를 물결치는 물고기의 발광체(發光體) 은비늘일 수 있으되/ 등줄기에 물을 뿜는 고래의 심호흡(深呼吸)이어야 하고/ 시는 짙푸른 녹음에 놀라 질겁하고 날아오르는 새의 비상(飛翔)이어야 하되/ 수풀에 길을 더듬는 뱀의 낮은 포복(匍腹)이어야 하고/ 시는 침묵에 값하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 죄 암담한 모순에/ 오히려 빛나야 하고 주술사의 주술에 귀동냥,/ 범상(犯上) 속의 적막(寂寞)을 캐낸// 고요에 몸을 던진 절체절명의 파멸(破滅)이거나/ 불가능을 향한 자유혼 그 자체이어야 한다// 인간의 통박으로는 도무지 잔머리 굴려서 도달(到達)할 수 없는 저 곳,/ 불가사의한 임계(臨界)에 깃발 꽂고 서있는/ 당신은 누구, 정말로 멀쩡한가?//

아낭케(anatkh), 밤의 피크닉상자를 열고 / 김영찬
어떤 밤은 어떤 밤의 피크닉상자를 끼고 덜거덕 덜거덕 졸면서/ 산음승흥(山陰乘興)/ 산음에 흥겨워/ 스웨기(swaggie) 스웨거링(swaggering)/ 아흐렛날 흩어진 달빛 아래/ 흘러갈 뿐이다// 이런 날/ 이티비티 티니위니 비터브 타임(itty bitty teenie weenie bit of time)/ 흥진이반(興盡而反)이면 뭘 어떻고// 뜬금없는// 스웩(swag)/ 스웨기(swaggie)/ 스웨거(swagger)들의 실력 없는 거들먹거림// 밤을 모르는 부랑아들은 아무도 모르는 밤에 아무 것도 모르지 단지// 밤을 좋아해야할 이유를 묵살하고/ 아, 아낭케(ANATKH)/ 밤에/ 밤의 블랙박스를 발로 걷어차며 삐뚤삐뚤 걷는다/ 걷다가 허풍쟁이와 만나면 밤길에/ 최대한의 허장성세/ 가령 자투리 시간까지 빈 술병 비워내는 간다르바(gandharva),/ 건달바(乾達婆)들의 핑계 좋은 일탈/ 살찐 엉덩이만 흔든다// 이런 때 나는 각촉부시(刻燭賦詩)// 불현 듯 모든 걸 차치하고 사타구니에 불길 솟는 기분/ 마이아스트라(Maiastra)에 황금빛 날개를 접은 ‘금의 새’처럼 웅크리고/ 포란(抱卵)하는 시를 쓴다// 교령회(交靈會)의 스마우그(Smaug the Golden)들처럼 SF무대를 단박에/ 장악하는 시/ 그래, 세상을 제멋대로 내 맘 대로 재구성해야 직성이 풀리지/ 아마도, 아마 느그들 뜻대로 그렇게 되진 않겠지/ 그렇게는 안 될 거야, 아마도 아마/ 느그들 멋대로// 홀대받는 외지인 포가니(Pogany)는 루마니아 태생/ 그녀의 촌스럽게 쪽진 머리 시뇽(chignon)의 정결함, 절박한 상황에도/ 두 손 모은 숭고미/ 나는 왜 그토록 염결한 초절주의에/ 둔감했을까/ 조타수 없는 방향타// 그대 위해 언제든 랜덤액세스(random access)가 가능토록 도와다오/ 그대 울타리 너머 들장미가 만발하듯이/ 그대 밤의 영역에 쌓이는 사사로운 고독감의 피로에/ 나도 물들고 싶다/ 노에시스 - 노에마?/ 농담이시겠지/ 노에시스(noesis)(의식작용: 노에마가 일시 정주(dwell)하는 과정)/ 노에마(noema)(의식의 지향점: 결과)에/ 주사위를 던진/ 상제나비(swallowtail butterfly)에게는 공유개념이라는 게 없다/ 그렇잖고, 사랑의 대피소란 서로에게/ 무의미 한 것/ 가령 귀소본능 없이도 마카로니웨스턴 영화필름 속에 올연(兀然)한/ 총성이 캉 캉 캉/ 황야의 어둠을 뚫고 방점만 찍을 뿐// 건방지게 휘어진 콧수염을 과시하며 존 업다이크는 오늘밤에도/ 공복에 9시 반의 당구를 칠 것이다/ 나는 가끔 내 각촉부시의 습작 관행에/ 달의 서쪽/ 과/ 바람의 동쪽을 분명히 선 그은 다음 머릿속을 휑하게/ 빈터로 비워둔다// 자유방임 무방비로 방종해도 될 때를 가정하면/ 동고비는 알을 낳고/ 두꺼비는 두껍두껍 논두렁을 뛰어넘어도 아무 상관없잖은가/ 그러므로 허리 아픈 체위란 무모한 짓/ 허드렛일 치고는 체력소모가 아깝더라도 하찮은 벌레 한 마리라도/ 허리 다치지 않게/ 배려하는 마음이 곧 천국이다// 소심한 자이나교도들은 밤길에 무거운 피크닉상자 대신/ 가벼운 빗자루만 들고/ 길바닥을 쓸며 조심조심 장도에 오른다// 그래, 우린 자이나교도가 아니지// 칼을 찬 나는 피크닉상자를 들고 웃체다 와다(uccheda vada), 단멸론자로서/ 아나크(anarch)/ 아나키(anarchy)/ 아나키스트(anarchist)만의 고집스런 행보/ 아낭케(ANATKH)의 신성을 위하여/ 물벼락이라도 맞을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빅토르 뚜르비아노는 평화를 위한 조건 없는 대안/ (절대로 그는 시를 쓰지 않았다)/ 우주의 고요함에 값비싼 향수를 뿌리는 대신/ 질문 없이도 가능한/ 대답/ 프라나(prana) 호흡법을 전수시켰지// 흰 개의 꼬리와 흰개미의 더듬이 기능을 둘 다 갖춘/ 한 여인의 행적이/ 사라진 풍경 속에 되살아난다/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가?/ 누군가는 이 시간/ 개목거리를 들고 어둠의 골짜기에 들어간 뒤/ 나오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여인과 흰 개 중 어느 쪽이 행간에 잘 숨어/ 비유로 풀리는지/ 결과를 보기도 전에 산음(山蔭)에 승흥(乘興)/ 밤의 테라스에 외등을 켜둔다// 빛나는 밤의 소격효과(疏隔效果)와 시의 안녕을 위한 등업/ 패스워드(password)를 바꾸고/ id를 변경한 피크닉상자 속에서 밤은 거대한 귓불/ 늘어뜨린다//

아마데우스를 위한 후일담 / 김영찬
모짤트 모짤트, 그대와 나는 슬픈 종족이어서/ 키가 한 치 모자란 상태로/ 짜리 몽땅 모짤트/ 마술피리 숲속 긴 터널을 간신히 빠져나와 더 이상 피리소릴/ 안 듣게 된다하더라도 그대와 나는/ 외롭고 슬퍼서 종루 없는 종탑에 앉아/ 반주 없이/ 모짤트를 노래함!// 모공을 파고드는 별빛, 두개골에 쏠리는 꿈 없는 꿈이/ 달처럼 희쁌하게 신발짝 끌고 오는데/ 잠 없는 밤이 조금씩 모자란 듯/ 혀를 내미는/ 모짤트// 마콘도의 건강한 아낙이 배가 고파 등가죽 푸석푸석한/ 아르마딜로 한 마리를 산채로 삼키고/ 그 때문에 수유 한 번 안 해본 젖퉁이가 그날로/ 퉁퉁 부어올라/ 할 수 없이 애 하나 낳고/ 흉년에 강바닥 들어난 물길 건너 원주민 마을을 등지게 됐는데/ 어린아이 엉덩이에 아마데우스 문양을 새긴/ 높은음자리표가 또르르/ 말려나왔지// 융통성 없는 얘기의 전말을 다 듣지도 않고 반신반의/ 반만 믿는다 하더라도/ 모짤트,/ 모짤트는 슬퍼서 우리들은 슬프다// 갈대밭의 한탄은 금물, 달빛이나 실컷 훔쳐 먹다 탈이 나도/ 백악기의 단층을 뚫고/ 오케스트라 단상을 향해 풀떡 뛰어올라야겠는데/ 유조선 전복사고로 꽁지와 날개에 기름 범벅이 된 가마우지들이/ 피난처를 간청해오는 바람에/ 빈털터리인 우리가 귀환할 곳은 아무려나/ 100년 동안 먼지 풀풀/ 곰팡이 퀴퀴한 골방 안의 빈 의자// 주인 이름을 망각한 책들은 무덤덤 말이 없고 젖은 귀를 말리며/ 대서양을 건너야 하는데/ 마술피리가 그나마 녹슬어 승선한 배는 기우뚱/ 뒤집힐 운세/ 모짤트/ 그대와 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탱자나무 가시에 찔린 몸을/ 달래고 달래서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천오백년 후 어느 날 여기서 나를 밀어내고/ 섬광 터트릴/ 사랑과 우정의 충격적인 사건, 낭만을 끌어 담을/ 불사조의 신화!//

수탕나귀가 아닌 나와 감탕나무와 만난 적 없는 나타샤와 / 김영찬
수탕나귀는,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감탕나무숲에 셋방 얻어 월세로 산다// 남신의주 유동 박씨(朴氏)가 아닌 나는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욕심이 많다/ 감탕나무는 나뭇가지 몸에 박힌 가시가 많다// 박정한 나는 지나친 욕심꾸러기 임대업자 쪽방에 사글세 든 입주자들한테서 매월 목돈을 뜯어먹고 산다 청빈한 감탕나무는 돈이 별반 필요 없는지 꼬박꼬박 받아야할 월세를 대폭 탕감해 준다 나는 노후를 위한 거액의 나뭇잎 돈을 긁어모아 거창한 겨우살이를 준비한다// 주고받지 않고/ 안 주거나 못 줘도 가난하지 않은/ 수탕나귀와 감탕나무// 수탕나귀는 감탕나무 이파리마다 바늘 돋은 뾰쪽한 가시 때문에 감탕나무 잎을 먹지 못한다 그렇지만 당나귀는 오줌이 마려워도 말오줌나무 밑에 방뇨하지 않고 감탕나무 아래로 가서 뿌리가 흥건히 젖도록 정성껏 오줌을 눈다 가진 자인 나는 세입자들의 똥구멍이 막히거나 말거나 내 알 바가 아니라고 눈살 찌푸려 외면해버린다// 감탕나무와 당나귀는 무산층/ 프롤레타리아/ 코피 터지도록 나는 캐피탈리스트/ 자본을 떠나서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주먹을 쥐었다 펴면/ 바른 말이라고 호응하는 민중들 덕분에/ 외롭지 않다// 말오줌나무야, 사실은 너한테 늘 미안하단다/ 수탕나귀는 암탕나귀에게 구애 하듯이 말오줌나무에게도 다정다감/ 감탕나무 왼쪽 그늘에 풀썩 주저앉는 걸/ 멀찍이서 나는 바라보지만,/ 냉담하게 세입자들을 몰아세워 월세를 대폭 인상해버린다/ 보증금을 올려주던가 월납 155% 인상/ 그렇잖으면, 당장/ 쪽방을 비우고 나가시오!// 가난뱅이들을 닦달, 보증금이 불어나면 불어날수록 부자가 되는 길// 이 겨울의 초입에 나타샤야, 이럴 땐 딱 잘라/ 모른 체 하는 게 좋아/ 톨스토이가 횡사한 것도 라스코리니코프가 살인을 저지른 것도 명백히/ 자본주의의 입김 때문, 그렇지만/ 모르는 건 모른다고 그냥 모른 체 해!//

구름의 헛기침 / 김영찬
누군가가 짙은 속눈썹을 달고 솟구치는 밤이다// 오장육부에 색이 웅크리는 밤이다// 더 이상 아쉬울 것 없잖느냐고 아까울 게 없잖느냐고/ 목구멍에 수면제 털어넣고 오물거려도/ 잠 안 오는 밤이다// 공갈빵이 부풀어 오르는 밤이다// 구름의 헛기침이 또 잦아지는 밤이다// 어렵사리 술 취하고난 뒤 그리 쉽게 술 깨기가 싫어서/ 모르겠다, 몰랐다고 솔직히 시인하면 될 텐데/ 허파에 털만 숭숭 솟는 밤이다// 개판(개판…이라는 게 도대체 뭔데…,) 5분 전이다! 와/ 개판 5분 후라니까! 의 차이점, 을 천명할/ 자유와 오독의 근거는 무얼까/ 무얼까, 로 고민하고 싶어지는 밤이다// 벽 쪽에 돌아누운 시간들이 몸뚱이 뒤집는 밤이다// 자신에게 돌아앉은 집들이 문 닫는 밤이다// 복화술이 발달하고/ 푸른 속눈썹이 내장에 툭툭 떨어져 낚싯줄 엉키는 밤이다/ 아니,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를 찬찬히/ 풀어줘야 길들여지는 밤이다//

수박 / 김영찬
세상은 수박// 수다스런 수박/ '씨 없는 수박의 세상'이 확실하다싶으면 목구멍에 아무것도/ 걸릴 것 없어 편해야 옳지만/ 심어도 싹 나지 않을/ 씨알머리 없는 씨가 아직도 판을 치는/ 수박// 손바닥에 일일이 씨를 뱉어 음식물찌꺼기통에 버리는 노역은/ 마뜩찮은 일/ 하지만 가족들은 각자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고 성실히/ 아주 착하게도 열심히/ 수박 속을 비우지// 쪼그리고 앉아서 씨를 파내는 독경(篤敬) 또는 독경(讀經) 난해한/ 문장들일랑 대충/ 입술 건너뛰고/ 끈끈한 타액 흥건히 게걸스럽기 그지없지// 수박 속 덩그런 빈터에 원형극장 황홀한 한여름 밤의 무대를 들어앉히고/ 단내 나는 인생3막5장 야심 찬/ 생애를 연출해낼 꿈에/ 들뜬 사람들// 수박의 문을 그런데 어떻게 열 것인가// 은밀한 거기 배꼽 밀고 들어가 보면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대궐 같은 그 속은 충분히/ 붉고 넓어서 수박씨보다 훨씬 더/ 많은 공해상의 난민들을 수용할 수 있으리라// 무거운 몸을 비운 수박 속의 그녀는 불현듯 외로움에 젖겠지/ 얼결에 쟁반 위로 불려나온 나는 황망한/ 시의 행간에/ 종이배나 띄울까// 결국 문 열릴 수밖에 없는 단물 흐르는 수박의 집// 서재와 침실이 따로 없는 원룸이라서 은밀한 금서를 탐독할/ 게재는 아니지만/ 커튼 드리운 창가에 기댄 그녀가 오늘은 나를/ 찾지를 않네// 안에서 문 열어 줄 생각이 도통 없나보네// 그녀 없이 생과일 즙 신선한 로맨스, 허투룬 몽상이란 애시당초/ 렘마(lemma)에 불과할 뿐/ 하염없이 먼 곳에 빗금 긋는 수박//

검은 발등에 솟은 눈물 / 김영찬
검은 발등에서 깨끗한 눈물에 이르기까지/ ‘눈물은/ 인간이 만든 가장 작은 바다이다‘* 라는 말이 귓가에 닿기도 전에/ 재빨리 나의 입술을 겁탈하는 해일이/ 문장 전체를 집어삼켰다// 너는 백장미 그룹 Die Weiβe Rose*을 아는지?// 우아한 침묵, 이어야 한다고 돌무더기에 새기듯 꾹꾹 눌러쓴 문맥을 나는/ 왜 신경질 부리듯 북 찢어버리고/ 애먼 책상다리 들먹였던가// 어물쩍, 어설픈 결심이 뭉게구름처럼 흩어지고 황량한/ 불모지에 비바람 몰아친 날들// 어둠의 모서리를 강타하는 파도가 다시 거세게 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답적인 늦저녁이 슬금슬금/ 슬그머니 불안정한 행복의 뒷주머니를 챙길 때/ 나는 배고팠다// 폭풍에 둥지를 잃은 메추라기 새처럼 움츠러든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홉뜨고/ 결심한 듯 일어선다/ 새로운 골디락스 존(Goldilocks zone)을 찾아 머나먼 우주로 길 떠나는 개척자처럼// 그토록 불온하고도 거칠었던 순정, 순결하였던/ 사랑 하나를 끝까지 사수하기 위해/ 온전히/ 섬 하나를 가슴에 품고/ 저기 저/ 눈물은 뜨거운 배꼽을 건너야 한다// 마치 밀항자처럼// 백장미 꽃잎이 새긴 명문장 하나하나가 해안을 적시고 검은 발등 엄숙히 접수하였듯이//
* 테라야마 슈우시(寺山修司)의 시, <나의 이솝> 중에서
* 뮌헨대학 학생 및 교수가 결성한 순결하고 거룩한 구국단체

산세리프(sans serif) / 김영찬
그러면 뭐가 그리 달라지겠어요?/ 책 제목이/ Borges and the eternal Orangutans' 라는 데 그렇다고는 하는데/ 외국어 좀 안다고 으스대면/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서/ 귀가 길어질 것도 아닌데// '보르헤스와 그리고 불멸의 오랑우탄'의 정확한 직역을 통해서 횃불 밝은/ 거리를 걸으면/ '국가와 황홀(송상일)'/ ㅡ그것은 여자의 구멍에서 비롯된 사건을 끝까지 추궁하겠다는/ 집요한 의도로 짐작된다 하더라도/ 나는 낼부터 호주머니 깊숙이 첼로농장이나 하나씩 집어넣고/ 16분음표처럼 떠돌 예정// 스트링 늘어난 첼로가 jabbering jabber 재버보키의 말도 안 되는/ 시를 모방하려 한다면/ 이봐! 이스라펠, 이스라펠 그거 정말 생각나나?/ 나는 잠깐 졸다가 후다닥 깨어나도/ 아무 것도 짚이는 거라곤 없는/ 한밤중입니다// 오리무중인 나는 아무 것도 짚이는 게 없는데 무너져 폐허가 된/ 피라미드 돌무더기 위로 올라간 그녀는 아무런 이유 없이/ 옷을 벗었고/ 가랑이 벌어진 그녀와 맞닥뜨려 침묵이 흘렀을 때/ 그것은 별반 놀랄 일도 아니어서/ 꼬리 접은 오랑우탄이 나뭇가지를 놓아버리는/ 꿈을/ 아니 현실을 놓아버리고// 허공에 나뒹굴어 등뼈가 부러지는 걸 목격하게 되겠지 아마도, 아마// ㅡ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들, 이 무더기로 등장하게 된 연유/ 리얼리티라는 게 오랑우탄의 언어로는 도무지 통하지 않는/ 어떤 얘깃거리일 뿐이라는 것// 그런 것이기도 하고 그게 아니기도 하기 때문에 순전히// 오랑우탄이 제 엉덩이 긁는 일이 요즘 들어 매우 빈번해졌을 뿐, 이다 아니다//

투투섬에 안 간 이유 / 김영찬
나 투투섬에 안 간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투투섬 망가로브 숲에 일렁이는 바람/ 거기서 후투티 어린 새의 울음소릴 못 들은 걸/ 후회하지 않아요/ 처녀애들은 해변에서 하이힐을 벗어던지겠죠/ 물살 거센 파도에 뛰어들어 미장원에서 만진 머리를/ 풀어 제킨다죠/ 수평선을 끌어당긴 비키니 수영복 끈은/ 자꾸만 풀어져/ 슴새들의 공짜 장난감이 된다는/ 투투섬에// 나 그 섬으로 가는 티켓을 반환해버린 걸 결코/ 후회하지 않아요/ 쓰리 당한 핸드백처럼 볼품없이 행인들 틈에 섞이다가/ 보도블록에 넘어진 사람 부축한 일 없지만/ 옛날 종로서적 해묵은 책먼지 생각이 떠올라서/ 풍선껌이나 사서 씹죠// ―나 투투섬에 안 간 것 정말 잘한 결정이죠// 발자국 수북이 쌓인 안국역 지나 박인환을 꼭 만날/ 예정은 아니더라도/ 마음속에 *마리서사 헌책방이나 하나 차리고/ 멀뚱멀뚱 토요일의 난간에 기대어/ 낡디낡은 태엽에 감긴 시간을 풀어주기도 하며/ 후투티 둥지 안에 투숙할까/ 그런 계획이죠//
* 마리서사: 시인 吳章煥이 운영하던 책방을 박인환이 인수, 새롭게 운영하던 서점.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산실인 마리서사는 당대의 문인들이 응접실처럼 드나들던 곳.

마리포사Mariposa* 내 사랑 / 김영찬
산 중턱에 호수가 누워 있었네// 팜파스*에서 한참 원거리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8부 능선 산등성에/ 비밀처럼 창백한 산상호수가/ 나를 맞았네// 마리포사,/ 나비처럼 유약한 날개를 가진 담수호// 마음 아프면/ 아픈 맘 거기 적시고/ 노독에 부르튼 발 첨벙 담가도/ 전혀 상관없다 하네// 내 영혼은 망망대해를 건너는/ 부정기 운항선/ 낮은 구름이 수시로 내려와 호수의 하복부를/ 쓰다듬고 가겠지만/ 오늘밤 나는/ 카라카스에서 발렌시아 반대 방향 수리남* 쪽으로/ 몸을 옮겨/ 카리브연안 항구 낮은 지붕 카페에/ 지친 몸을 풀 것이네// 부에나스 따르데스, 부에나스 노체스!*/ 내 호리호리한 영혼은/ 밤이면 밤마다 길 잃은 사랑을 위해 떠나지// 사랑은 길을 잃고/ 밤마다 섬 하나로 떠돌지// 마리포사, 그 이름은/ 깨끗한 손수건에 피어나는 향신료// 내 혼을 휘저어 열대화 꽃 피게 하고/ 육두구(肉荳蔲)* 붉은 열매 맺으라 암시하는 것 같네/ 마리포사는 그러나/ 수줍은 꽃/ 한 송이 해도에 표시 안 된 무명섬을 가슴에 품고/ 한갓 담수호로/ 지친 발걸음 멈춰가게 할 뿐//
* 마리포사mariposa: 서반아어로 나비, 호접. 모음이 멋진 음소가치(euphonic value) 때문에 여인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단어.
*팜파스pampas: 방대한 남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대초원.
* 수리남Surinam: 베네수엘라 서쪽에 위치한 나라. 베네수엘라에서 그 나라 쪽으로 길게 카리브해를 바라보며 펼쳐진 해안이 매우 인상적. 이 해안에 당도했을 때 바다는 춤추어 나를 반겼던가.
* 부에나스 따르데스, 부에나스 노체스: 영어의 good afternoon, good night에 해당되는 서반아어.
* 육두구nutmeg: 중남미에 분포하는 열대성 상록관목. 그 붉은 열매는 최고의 향신료가 됨.

바니타스 바니타툼(Vanitas vanitatum)* / 김영찬
‘소녀’라고 자꾸 귀찮게 구니까 ‘소녀’를 자청하던 소녀가/ 어느 날의 소녀로부터 가출,/ ‘가출소녀’의 이상한 계절로 바뀐다.// 피아노를 경원한다고 자꾸만 손가락 못살게 구니까/ 신경쇠약에 걸린/ 피아노가 어떻게 되었나.// 폐허의 쓰레기더미를 코끼리가 밟고 지나가더라도 책상만은 제발/ 책상으로 온전히 있어다오./ 알았나, 책상!/ 주먹으로 꽈당 내리치니까 책상다리가 삐끗/ 겁먹은 걸상마저 안녕을 버리고/ 도주했다.// 이봐요, 그런데 나 좀…, 오늘만은 괜찮겠죠?/ 오르가즘을 모른다던 사랑은 오늘밤의 흥분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물어뜯겠다고/ 헐렁한 시간의 목덜미를 쪼이고 당긴다.// 정의의 가치를 정의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들.// 대위법, 대화법이 안 먹히는 연애는 치명적으로 외롭고 불행을/ 따돌린 행복만이/ 상상력에 등 기댄 채 환각 속을 넘나든다.//
* 바니타스 바니타툼 옴니아 바니타스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 킹 제임스성경Vanity of vanities.

마라케시의 구둣방 / 김영찬
나뭇잎을 붉게 물들여 무엇 하시게요 멀쩡한/ 종이에/ 글을 남겨서 뭐 하시게요?// 낯선 곳에 가서 구두 탓만 한 것 부끄럽다.// 가고 싶은 곳 나대다가 구두 굽 닳아버리면 그만/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뻐쩍/ 길바닥에 나뒹굴 때/ 바보 멍청이 같았던 헌 구두가 오히려/ 똑 부러지게 철학자답지 않던가.// 붉나무는 가을이 오기 전엔 절대로 낯붉히지 않는다./ 알면서도/ 얼간이처럼 헌 구두 탓이라니// 오늘 일과는 끝, 잘 가라!/ 온종일 나를 따라다닌 발자국들아, 너희도 이제 좀/ 쉬어야하지 않겠니./ Good Night 이라고 말해도 충분한 시간이/ 구두밑창에 깔린다.// 자, 이제 불편했던 대낮에게 이만 안녕!/ 나를 따라온 그림자와 함께 꺼져줘, 라고 함부로/ 말하는 건/ 버릇없고 기분 나쁜 일.// 이것 봐요, 헛 똑똑이 아가씨! 구두코가 언제 어떻게 닳는지/ 붉나무가 언제 단풍들어 얼굴 붉혀야 하는지/ 물비린내에 콧등 깨질 일만 남았지!// 개똥지빠귀 꼬랑지에 개똥 묻어날 연휴는 대책 없이/ 떠밀려가고/ 시시콜콜 따지고 살아야할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꽃의 이름으로 꽃향기 뿌리고 다닐 명분을 찾아서// 사막체험 1박 2일 코스 :/ 마라케시 - 메르주가 - 마라케시// 사막 ·유목민 천막체험 2박 3일 코스 :/ 마라케시 - 메르주가 - 페스// 오늘밤 마라케시로 떠나 나의 생애 가장 저급한 가죽신을/ 경배하기 위한/ 구둣방부터 찾을까.//

안나 아흐마토바를 위한 밤 / 김영찬
원스이너블루문(Once in a blue moon)의 깊은 밤./ 아주 오랜만에 그는/ 달무리구름 아래 춤을 추었네./ 달빛을 배불리 먹고/ 달빛을 포란/ 고집 세게 부풀어 오르는 몸뚱이를 힘차게/ 월훈(月暈) 속으로/ 밀어 넣네.// 모처럼 그랬던 거였어, 달뜨는 언덕길에/ 하나밖에 없는 여인숙./ 낡은 창틀에 손기타 소리는 멎고/ 두꺼운 유리벽 묵직한 철대문은 그때 게으르게 열렸지./ 그리고 너는 나를 위해/ 한 여인의 이름을 달밤에 불러들였어./ 그림자처럼 행방 묘연한/ 한 여자.// 안나 아흐마토바, 그녀는 제정러시아의 시인 니콜라이 구밀료프와/ 생이별 상태였고/ 종국엔 옛 남편이던 그가 볼셰비키에게 처형당하는/ 꼴을 목격하고 말았지./ 빌어먹을 그런데 그런 불상사가 이제 와서/ 내게 뭐란 말인가./ 러시아 아크메이즘에 대해서 도통 아는 바가 없는 나한테/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해파리에게 남근을 쏘여 물렁뼈를 다쳤어도 눈썹 하나쯤/ 흔쾌히 던져놓고 당당하게/ 버틸 사람./ 시집 속의 사글세 쪽방 안에 마른 오징어처럼 오그라들다가도/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야,/ 창밖을 지나는 여자/ 아직 인연이 닿지 않은 묘령의 한 여자를./ 강한 흡입력 입천장 안으로 빨아 당겼지// 창밖의 그 여자는 그런데, 세상을 한참 몰라도 되는 여인./ 여자는,/ 운명이 얼마나 끈끈한 액체인가를 생각조차 않고 덜컹/ 내 뜨거운 혀를 깨물어 끊은 뒤/ 종적 없이 사라졌지./ 나에게서 멀리 떠나 달그림자 뒤에 숨었지.// 실종된 그 여자를 파묻어 두고 나는 이처럼 시나 쓰네./ 시답지도 않은,/ 시답잖은 시를 왜 쓰느냐고/ 안나 아흐마토바가 아무리 힐난해도/ 나는 연애하듯 시를 쓰고/ 또 버리네.// 푸른 깃발 뒤덮이는 그믐밤이 오네./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에게 보여줄 졸작 시는 퇴고 중이고/ 원스이너블루문(Once in a blue moon),/ 달빛은 더욱 푸르고 농염하지.// 아무리 넓은 길을 향해 창문 열어젖혀도 끝끝내/ 다듬어지지 않는 고집스런/ 밤은 완강히/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버틴다.//

삼각형이 생각할 줄 안다면* / 김영찬
삼각형이 생각할 줄 안다면, 플라톤의 생각이 달랐겠지/ 삼각형 건물이 난세에 판을 치거나/ 골치 아픈 삼각형공리가/ 수시로 바뀌겠지// 자동차 바퀴가 생각할 줄 안다면, 운전수는 곤혹스럽겠지/ 제발 좀 가자는 데로 가자!/ 타이어가 닳지 않는 곳으로만 굴러가겠지// 담뱃불이 생각할 줄 안다면, 애인 있는 애연가는 애가 탈 것/ 담배연기가 눈을 찔러/ 새 애인이 등 돌린 뒤 본의 아니게/ 연막(煙幕) 친 길// 우산이 생각할 줄 안다면, 비오는 날들을 더 많이 만들겠지/ 우산 속에 젖지 않을 것들만 모여들고/ 우산 밖에서 불빛은 꺼지겠지// 삼각형이 생각할 줄 안다면, 글쎄 좀 큰일이야/ 내각의 합이 180도가 아닌 지구는 삼각형을 유지하려고/ 찌그러진 지구본이/ 바다로 떠난 배들을 대양의 꼭짓점 위로 내몰겠지/ 삼각뿔처럼 뾰쪽뾰쪽 허리가 아파도/ 주어진 대로 살 수 밖에/ 누구한테 함부로 개떡 같은 삼각형 세상이 싫다고/ 투덜투덜 모서리 진 세상을/ 비난하겠어?//
* 「만일 삼각형이 생각할 줄 안다면, 그(삼각형)는 틀림없이 神을 삼각형으로 그릴 것」 —베네딕트 드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

나의 시집 / 김영찬
나 오늘밤 새로 집 한 채 지을 것이네// 창문만 있고 질문 없는 집/ 손님만 있고 주인 없는 집/ 응답만 있고/ 주제도 없어 이상하지만 말없는 가구를 사들이고/ 과묵한 벽면을 색칠해야지/ 꽃 피울 유실수와 그늘 푸른 관목들/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을 새들을 위한 둥지들조차 글쎄/ 꾸며놔도 나쁠 거야 없지// 그래야겠네,/ 불필요한 질문과 쓸데없는 대문은 생략했지만/ 누구나 함부로 지붕 뜯고 들어와/ 한참을 울다가 떠나도 상관할 사람/ 아무도 없는 집// 있어도 없는 집/ 없어도 좋은 집/ 처음부터 끝까지 울타리는 없지만/ 울타리 둘러치고 앉아/ 담장 밖의 바람소릴 끌어 모으기 아주 편한 집// 푹신한 소파에 잠깐 동안 가면을 취해도 햇살 달려와/ 이불 덮어주는 집/ 때 되면 달빛 출렁 창문 흔들어/ 커튼 가려주고/ 꿈결에 흔들린 꿈들이 푸른 원고지에 검은 잉크를/ 풀어놓는 집// 가정법 과거완료가 아니라 눈 깜빡거리는 이 순간의/현재완료 진행형으로 가용 가능한/ 가상의 힘// 밤이면 밤마다 나 집 한 채 지었다가 허물고/ 또 다시 꾸미며 살아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