뮬(mule) / 박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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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2. 1. 16.

그녀가 있었다.

그녀의 손동작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다. 그것은 숙련공의 자존심이자 저력이다. 5센티미터 간격으로 줄지어 서있는 구백여 개의 스핀들에 지관(紙管)이 꽂힌다. 뮬이 레일을 따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뮬은 산업혁명시기에 영국의 크롬프턴이 발명한 방적기다. 수력방적기에서 생산되는 실은 튼튼했지만 거칠었고, 제니방적기에서 생산되는 실은 가늘었지만 쉽게 끊어졌다. 두 방적기의 장점만을 조합해서 만든 것이 뮬방적기다.

뮬의 조상을 물레라고 해야 할까. 전통물레는 물레질로 한 가닥의 실을 자아낸다. 현대의 뮬은 완전 자동화된 스핀들의 회전으로 구백여 가닥의 실을 뽑아낸다. 뮬은 바닥에 깔린 레일의 수만큼 바퀴를 달고 있다. 레일을 따라 앞걸음의 꼬여진 실감기와, 뒷걸음의 솜실 물고나오기와, 제자리걸음의 실꼬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그러면서 방추형의 실몽당이를 만들어나간다.

뮬은 노새다. 노새는 다시 그녀다. 수나귀와 암말의 교배종인 노새, 아버지인 당나귀의 끈기 있는 지구력과 어머니인 말의 강건한 체질을 물려받았다. 노새가 부모의 장점만을 닮은 잡종인 것처럼 뮬도 두 방적기의 장점만을 가지고 태어난 혼성기계다. 노새가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 가파른 산길과 길고 긴 행군을 마다하지 않듯이 뮬도 하루 스물네 시간의 강행군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 또한 노새처럼 동생들의 학비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발등이 부어오르도록 걷고 또 걷는다.

그녀는 6,70년대의 지독한 가난과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만들어낸 산업전사였다.

그녀가 노새를 따라 앞걸음과 뒷걸음으로 끊어진 실을 잇는다. 비 오듯 실이 내려앉는다. 그녀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진다. 좌우로 뛴다. 종아리에서는 거미줄 같은 실핏줄이 퍼렇게 돋는다. 맺힌 땀방울은 흘러내려 귀밑머리를 적시고, 속옷은 후줄근하다. 생산량에 온 힘을 쏟는다. 생산량은 그녀의 능력이다. 능력은 임금으로 이어지고 학비라는 무거운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게 한다. 노동력에 비해서 턱없이 적은 임금이지만 그녀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는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동생들이 자신처럼 배움에 굶주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행복하다.

야식시간. 그녀가 흰죽 한 그릇을 받아와 간장종지가 올려져 있는 식탁 앞에 앉는다. 흰죽은 기(氣)를 돋우고 몸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고 했던가. 노새의 연결부위에 윤활제를 넣듯 비어있는 위(胃)에 흰죽을 채워 넣는다. 때로는 위(胃)가 항의 하는 소리를 듣는다. ‘밥을 달라! 죽 먹고는 일을 못하겠다!’ 배고픔보다 더한 굶주림. 어느 음식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기. 그것은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다. 가슴 한편에 활화산으로 들어앉아 시도 때도 없이 목구멍으로 치미는 불덩이다. 그녀가 흰죽과 함께 불덩이를 꿀꺽 삼킨다.

새벽녘에 그녀가 졸고 있다. 숙련공의 자존심도 내려앉는 눈꺼풀을 어쩌지 못한다. 그녀는 생각한다. 졸음이 오는 것은 주야간의 2교대 근무체제의 노동착취 때문이 아니라고. 일요일의 특근, 스물네 시간의 곱빼기작업 때문은 더더구나 아니라고. 동생들이 벗어놓은 빨래를 하고, 펄 벅 여사의 ≪대지≫를 읽고, 그리운 이들에게 편지를 쓰느라 빼앗긴 잠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라고. 노새가 크르릉거린다. 밤새 들이마신 먼지로 목안이 칼칼한가 보다. 그녀가 세면장으로 달려간다. 수돗물을 콸콸 틀어놓고 머리부터 들이민다. 정신이 번쩍 든다. 목안 가득히 고여 있는 가래를 뱉어낸다. 다시 작업장으로 달려간다.

노새를 세운다. 돕핑을 한다. 방추형의 실몽당이를 스핀들에서 뽑아내어 바구니로 휙휙 던진다. 정확히 바구니 속으로 떨어진다. 손놀림이 점차 빨라진다. 가속도가 붙는다. 움직이는 손가락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느 정점에 다다르면 어깨의 힘이 빠지면서 가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미 열손가락은 감각을 느낄 수 없지만, 그녀는 속도를 늦출 수가 없다. 노새의 쉬는 시간이 단축되면 될수록 생산량은 증가되기 때문이다. 바구니에 가득 담긴 실몽당이를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그녀의 능력을 단다. 평균 생산량을 넘어선다. 그녀가 핏기 없는 미소를 짓는다.

해가 떠오른다. 햇살이 눈부시다. 그녀는 소망한다,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 그녀는 갈망한다, 가슴 한편으로 타오르는 향학열을 활활 태울 수 있기를. 그녀는 기도한다, 더 이상 이 땅에 가난과 배움에 굶주리는 자가 없기를.

산업전사는 꽃다운 젊음을 그렇게 산업현장에 묻었다.

반백의 그녀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 민주화에 굶주린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절규를 듣고 있다.

* 뮬(mule) : 노새, 뮬방적기.
* 스핀들(spindle) : 방추, 물렛가락.
* 돕핑(doffing) : 스핀들에서 실몽당이를 뽑아내는 작업



박옥근 수필가 △부산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수필과비평》 등단 △《부산수필과비평》편집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원 △수필과비평문학상 수상 △수필집 『글의 씨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