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복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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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2. 1. 20.

박복영 시인
1962년 전북 군산출생. 방송대 국문학과 졸업.

1997년 《월간문학》 시 등단. 2014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천강문학상 시조대상. 성호문학상 등,

시집 『낙타와 밥그릇』, 『햇살의 등뼈는 휘어지지 않는다』, 『거짓말처럼』, 『눈물의 멀미』와 시조집 『바깥의 마중』. 오늘의 시조회의와 전북작가회 회원

 




갈매새, 번지점프를 하다 / 박복영
아찔한 둥지난간에 올라 선 아직 어린 갈매새는 주저하지 않았다./ 굉음처럼 절벽에 부딪쳐 일어서는 파도의 울부짖음을/ 두어 번의 날갯짓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어미가 날아간 허공을 응시하며 뛰어내린 순간,/ 쏴아, 날갯짓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하강하던 몸이 떠올랐다.// 한 번도 바람의 땅을 걸어본 적 없으므로 가는 발가락은 오므린 채 가려웠다./ 하강은 추락을 꿈꾸지 않는 법./ 가슴 깃털을 헤집고 파고드는 처녀비행의 속도는 두려움이 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밀려와 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꽉, 물고/ 허공에 길을 찾는 갈매새가 잠시 수평선을 읽었다./ 굽은 부리에서 거친 파도의 현이 흘러나오자/ 휜 바람줄을 따라 기우는 날개가 다시 팽팽해졌다.// 태어나서 처음 바람을 거스르는 동안 갈매새는 바람의 부피를 다 가늠할 수 있을까./ 포물선의 꼭지점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슬아슬한 궤적이 허공에서 지워지고 바람줄을 따라가며/ 바람이 풀어놓는 행의 단서를 찾는 동안 가슴 가득 차오르는 생의 씨앗들.// 의문들이 빠져나올 때마다 날개가 책장처럼 펄럭였다./ 갈매새가 날개를 당기며 내려다 본 벼랑 끝엔/ 벗어둔 신발 같은 텅 빈 둥지 옆으로/ 누군가 방생한 키 작은 해국들이/ 코카콜라 병뚜껑 같은 머리에 노랗게 흰 뼈를 우려내고 있었다.//
*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파랑주의보 / 박복영
거센 바람이 불었고/ 우리는 여인숙 간판처럼 흔들렸다/ 깜박이는 불빛은 누군가의 눈빛을 훔치며 시치밀 뗐고/ 돌아가지 못하는 우리는 대합실에서/ 삼삼오오 웅크린 채 커져가는 바람만 뒤적였다/ 유리창이 덜컹거리며/ 먹구름의 발자국을 미행하는 동안/ 바람의 행방을 찾는 파도는 선착장에 부딪쳐 부서지며/ 돌아오지 않는 뱃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였다/ 야윈 낮달은 일월의 바다에 혹독한 그리움만 걸어둔 채/ 돌아가야 할 까닭을 물었고/ 세상은 정박할 수 없는 이들에게/ 돌아가라, 돌아가라 날선 바람을 던지며 밀어내곤 했다/ 우리는 하루의 계단 어디쯤 떨어뜨린/ 몇 개의 불빛을 찾아 서성거리며/ 선착장 모퉁이 지붕 낮은 여관방에서/ 심장에 켠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기압골의 능선을 줄여도 줄지 않는 바람처럼/ 우리네 삶의 분량은 주어졌을까/ 언젠가 돌아가지 못하는 바람 속 의문은/ 선착장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부서져 끝없이 밀려들 것이나/ 우리는 바람을 닮아가다 바람처럼 사라질 것이다/ 거센 바람이 불었고 그때 우리는/ 공중의 깃발처럼 나부꼈다//

누군가 거기 서성거릴 때 / 박복영
거미줄에 맺힌 빗방울을 건져냈다// 저 빗방울에 놓지 못한 내가 있다// 맑음과 탁함의 숫자만큼 붕대를 칭칭 감은 빗방울에서/ 햇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꾸만 환해지는 몸. 부딪치며 무릎은 자꾸만 부풀었다// 토닥토닥 툇마루의 목마름을 걷어낸 자리 몸부림치던/ 물빛이 스며 발바닥이 간질거렸다// 비린내를 썼다 지울 때마다 흰 발바닥에 설운 심경이/ 박혀 있었을까// 내 영혼은 눈물이 말라 따끔거리는데 차츰 무디어/ 가는데 몸 바깥에 내가 어둑하다// 빗방울 든 나는 그림자였다 누군가 거기 서성거릴 때//

소리의 걸음을 읽다 / 박복영
난장이악사가 아코디언을 켤 때 마다/ 제 몸보다 큰 아코디언을 안은 가슴이 쭈욱, 찢어지며/ 소리들이 쏟아졌다// 허공은 거대한 아가미였다/ 살아있는 소리들만 집어 삼켰다/ 떨어질 듯 날아오르는 소리들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는 저 햇살처럼// 난장이악사의 왼발과 오른발이 햇살과 그림자를 옮겨/ 가며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의 음계를 찾는 걸까/ 발목 저린 듯 손가락이 발자국을 따라 절뚝거리며 걷는/ 동안// 저 그늘진 소리들처럼/ 햇살의 명치를 밟고 날아가는 비둘기들// 온종일 난장이악사의 손가락이/ 가슴속에 쟁여두었던 소리를 뽑을 때마다/ 허공에 날아오른 소리들이 서글픈 춤을 추었다/ 역광의 짧은 햇살이/ 땅바닥에 그림자만 남기고 사라지는 광경을 보다가/ 나는 얼핏, 놀란 눈을 뜨기도 했으나// 소리는 어떤 몸짓으로 춤을 추는가/ 소리의 추고픈 춤 속에 악사의 하고픈 말이 있다// 잠시 머무른 바람마저 삼키는 허공/ 살아있었다//

대숲에서 / 박복영
벼이삭 패는 동안/ 새떼들은 술래가 되어/ 두리번거리거나 그늘 속을 빠져나오곤 했다/ 걱정처럼 길어진 그림자가 풍경이 되는 해질녘/ 귀가를 잊은 아이의 연실에 묶인 팽팽한 집중처럼/ 어둠에 뜬 별빛들은 아름다웠다/ 주파수를 찾는 라디오 잡음처럼 지지직거리는 댓잎들/ 길은 잃어본 자만이 길을 아는 법/ 제 무게를 놓고 길을 찾으려는 댓잎을 몰고/ 바람이 길을 틔우는 동안/ 새떼들의 날갯짓으로 깨어나는 공중의 길/ 대나무들이 마디를 묶고 저녁의 길을 적고 있다/ 달빛이 마침내 댓잎에 걸린다//

혼잣말 / 박복영
펴다 만 노인의 손바닥 주름에서 혼잣말을 듣는다// 몸 안의 말들을 모으는 구부린 손가락에서 그림자 진 주름/ 과 주름이 망설임 없이 만나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모르게 오랫동안 뒤척였을// 추억을 놓지 못한 노인의 쓸쓸한 한 때처럼 손 안에 남겨/ 진 말들은 이미 사랑을 잃어버린 얼굴이다// 오래전에 들어보고 싶었을 안부들// 생과 생이 만나듯 함부로 낭비하지 않은 환한 시간들이/ 주름과 주름의 두 손을 맞잡고 있다// 수런거리는 말들은 덧없이 흩어지는 초저녁 눈발 같은데/ 안타까운 주름이 주름을 안아주고 있다//

거처일기居處日記 / 박복영
유배지에 핀 동백꽃/ 뺨에 밴 볕살의 숨소리가 붉다/ 숨소리가 터질 때마다 나비가 물어물어 찾은 거처/ 그림자를 놓친다/ 먹구름이 꽃무늬처럼 번져오고/ 울컥, 가라앉은 것들이 속을 뒤집는 묵인된 소란/ 손거울에 금이 가는 동안/ 이파리를 비집는 흔들림 속/ 머문다는, 사랑한다는 말/ 잊는다//

먹줄처럼 / 박복영
한남자가 계단을 오르네/ 유난히 뒷굽 닳은 왼쪽 구두가 덜컹거리네/ 골목으로 뛰쳐나온 바람 서넛이 남자의 구겨진 재색 바지를/ 길쪽으로 잡아 당기네/ 기우뚱,/ 손잡이를 붙잡고 올라서는 무릎 근처/ 섧디섧은 흐느낌 소리 들리네/ 각진 계단 모서리에 가등빛 부서지네/ 새맨담에 등 댄 장미꽃이 그냥 웃네/ 남자는 몰랐네/ 슬픈 기억은 뒷굽부터 닳는다는 것을/ 불규칙한 걸음이 남자가 어깨에 멘 연장보다 무거웠을까/ 남자의 굽은 어깨가 말라붙은 밥알처럼 굳어 있네/ 남자가 어깨를 추스릴때마다/ 연장 가방 밖으로 튀어나온/ 목공 톱자루가 꿈틀거리며 쟉크를 여네/ 쟉크 갈피에 구겨진 작업복이 꾸물꾸물 고갤 드네/ 찬바람에 헝클어진 남자의 머리카락이/ 어둠속에서 허우적거리네/ 보이지 않는 골목 끄트머리/ 남자의 척추가 흔들거리며/ 조심스레 내려놓는 발자국마다/ 서서히 눈을 뜨는 고단한 삶의 언어들/ 거기 휘청거리는 세간일들/ 흔들릴수록, 튕겨놓은 먹줄처럼 바로 걸으려/ 뒷굽보다 질긴 어둠속을 걸었네/ 대문 앞에 섰을 때/ 조각난 백열등 빛 아래, 드러나는 순하디 순한 아내의 수화로/ 부서지는 마른 밥알 같은 외로움 두어 다발/ 어느 새 대문까지 따라온 어둠이/ 뒤척이는 계단 아래/ 가등 어깨에 얹히는 별 빛조차 잠들지 못하네//

휘어지다 휘어진다 / 박복영
비바람 불자 들풀의 몸이 휘어진다. 길 쪽으로 꺾여 부르르 떨다가 반대쪽으로 휘어진다./ 잠시 달려 나온 햇볕에 닿아 부풀대로 부풀다가 다시 바람에 밀려 휘어진다./ 들풀을 흔드는 바람에서 휘어진 길이 보였다./ 휘어진 길은 바람의 발바닥에 새겨진 주름 같은 것/ 주름은 그림자가 숨어든 몸짓. 바람이 햇볕의 맨발을 들어 흔든다./ 맨발에서 떨어지는 그림자가 길이라는 생각이 들자 들풀이 다시 일어선다. 흔들리며 휘어지는 들풀/ 들풀의 꿈은 신발을 신어보는 것이다.//

독살(獨殺) / 박복영
자두꽃의 사연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많아졌고/ 자두의 심장은 제 몸을 안고 단단해졌다/ 햇살이 부러진 자리마다/ 넘어져 쓰러진 그림자들을 안고/ 바람의 지느러미가 꿈틀거렸다/ 두리번거리던 새의 제자리걸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침묵은/ 푸르디푸른 열매들을 껴안느라 분주했다/ 거기, 그림자에 갇힌 채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내가 보였다/ 머지않아 나는/ 나를 잃고 봉인될 것이다//

객지에서 / 박복영
벚꽃 잎이 흩날렸다/ 떨어지는 궤적은 받아 적을 수 없었고/ 꽃잎이 걷는 보폭은 무작정이었으나/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는 저쪽의 풍경을/ 끌어당기다 잠이 들었고/ 먼 곳에 목소리가 있다고 잠꼬대를 하기도 했다/ 막막한 어둠을 건너는 동안/ 쉿, 처음을 기억했으면 해./ 속삭이듯 바람은 다시 몰려왔다/ 아직/ 꽃잎은 안부를 묻고 있을 것이나/ 꽃 진 자리는 견디는 중이다//

낙타와 밥그릇 / 박복영
늙은 남자가 지게를 지고 모퉁이를 돈다/ 남자가 끌고 오는 길은 밥그릇이다/ 걸어온 만큼 밥그릇에 밥이 찼어야 했다/ 공복의 밥그릇에 담긴 놀빛을 들고/ 남자가 두리번거린다/ 밥그릇은 남자의 어깨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어둠속에/ 지게를 내려놓으려/ 몸을 숙이자 숟가락 소리가 났다/ 숟가락은 이제 밥그릇을 믿지 않는다//

밥 / 박복영
저 유모차는 밥그릇이다/ 기역자로 꺾인 할멈의 허리가 미는 밥그릇에/ 삐뚤삐뚤 쌓인 종이박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출렁이는 생계/ 흔들리는 밥알이 흘러내릴까/ 느린 걸음은 조심스럽다/ 더딘 발자국을 따라 쏟아지는 햇살이/ 밥그릇에 담긴 채 출렁거린다/ 햇살에 말아놓은 종이밥이 차오르는 동안/ 환해지는 새벽이 아직 차가운 듯/ 밥그릇을 꽉, 쥔 닭발손마저 시럽다/ 찬바람이/ 굵은 주름뿐인 얼굴을 헹궈내며 안쓰러운 듯/ 고봉밥을 밀어준다/ 행여 흘릴까 밥그릇을 따라/ 검은 개가 그림자 속으로 숨어든다/ 한 끼가 멀어져간다//

아무도 없는 바깥 / 박복영
허물어지는 벽을 짚고 낡은 문짝이 가쁜 숨을 쉬고 있다/ 녹슨 경첩에 한쪽 어깨를 걸고/ 번개 맞은 대추나무처럼 기울고 있다/ 삐걱이는 문을 열면 누군가/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습니까? 말할 것만 같은데/ 두리번거리는 햇살에선/ 한 동안 그늘로 앓아온 묵언이 대답으로 쏟아지겠다/ 마당엔 목젖처럼 튀어 오른 돌멩이가/ 깊어지는 계절의 바닥을 물고 있으니/ 버틴 날들이 그려내는 빈집의 찢어진 흉터뿐이다/ 저 낡아 삐뚤어진 오랜 문형門刑/ 누군가 다시 부를 때까지 온몸은 야위어 갈 테지만/ 어쩌자고 문짝은 가슴을 열고 바깥을 내보이는지/ 내가 그 이름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아무르 강가에서 나는 울었다 / 박복영
가늘고 긴 실핏줄들이 꿈틀거리며 불끈, 일어서서 심장을 찾아가듯 얽히고설킨 아, 아무르강*/ 노모의 주름이 저런 것이다/ 야윈 주먹을 편다 수많은 잔금들이 잡고 있는 주름들로 손바닥은 팽팽해진다. 기울지 않고 단단히 균형을 잡고 있는 강줄기처럼, 쥘 때마다 터질 듯 튀어 오르는 힘줄처럼/ 견딘다는 것은 오래된 낯익음이 엉키는 것/ 주름들이 잡고 있는 저 쭈굴쭈글해진 야윈 몸이 강줄기를 당겨 단단히 나를 세우고 있었음을. 욱신거리는 통증을 견디며 물길을 내어주듯 흘러야 할 때 주름을 풀어 강물의 심장소리를 들려주고 있었음을/ 아무, 아무 일 없다는 듯 아랫목에 웅크린 노모의 굽은 몸 같은 아무르강, 서글프고 서글퍼서 또 서글프다/ 흘러야 할 강물이 흐르지 못하는 아, 아무르 강//
* 아무르 강은 총길이 2,824km로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을 따라 흐른다. 세계에서 8번째로 긴 강. 아무르라는 이름은 ‘큰 강’이란 뜻의 퉁구스어에서 왔다. 강물이 검은색을 띄기 때문에 중국어로는 헤이룽장(흑룡강)이라고 한다.

별은 죽은 자의 눈물이다 / 박복영
아주 먼데서 찾아와 검은 눈동자 가득 눈물 글썽해지는/ 밤. 방문을 열면 너는 한사코 따듯하다// 쓱, 눈물을 닦으면 지워질 것 같은데, 나는 벙어리 소녀/ 의 입천장에 피었다지는 별 닮은 촘촘한 안개꽃을 생각한다// 눈물이나 하늘을 보면 초롱초롱한 꽃들이 바깥에서 울고 있다/ 세상엔 저리 눈물이 많은 것이다// 꽃들이 손등을 쓰다듬는다. 흘린다는 것은 비우는 일이/ 어서 죽은 사람의 말라가는 눈물은 차다// 저 많은 기록을 다 읽을 수 없으므로 쓸쓸함은 나를 위로 하겠다// 슬몃, 환해지는 눈물은 기꺼이다//

당신의 손등을 스칠 때 / 박복영
귀뚜라미가 찌르샤찌르샤 어둠을 찌르는 동안 당신의/ 허물을 내가 입었다// 저물녘의 바람은 휘청휘청 어김없이 높이를 생각했지만/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는 물소리의 균열은 차갑고 서늘한/ 여백이 되었다// 달빛은 당신이 흰 머리카락으로 쓴 혼잣말이어서// 색깔을 잃어버린 계절에 두고 온 별들은 罪가 되었고/ 철새울음은 요모조모 말라가는 풀잎을 쓰다듬었다// 가장 붉은 칸나 꽃이 버텨주기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아// 하염없이 통증의 허기와 내통하였으나 허투루, 허투루/ 내민 발자국들은 모두 옹이가 되었다// 바람으로 터득한 몸짓은 주름살이 아니었다// 아무도 사연을 묻지 않았다//

허물없이 그늘 / 박복영
저 검은 옷은 누군가의 슬하다/ 둘레 안에서 채워지고 닮아가다 성숙되는 슬하/ 풀려나는 감금에 자물쇠가 없다/ 정착의 죄명을 찾지 못한 구름처럼/ 가끔은 궁금해질 것이나/ 어둔 목소리를 모아 서둘러 피었으니/ 누구도 퇴거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검정은 운명처럼 난청의 귀를 열고 기다리는 것/ 대답은 감쪽같이 분열되겠지만/ 둘레에 감금된 그늘은 어김없이 바닥에 빈집을 지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슬픈 징조여/ 둥글거나 꺾이거나 너와 나처럼 슬하다//

찔레꽃 / 박복영
그때 입을 열었소/ 오물, 거리는 안간힘을 꺼내 왼쪽을 비우고 있소// 나비 한 마리 다가가 귀 기울이자/ 궁핍했던 날들이 꽃잎처럼 쏟아졌고 나는 속절없어 바람을 모아야했소// 참참이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햇볕은 부드러운 숨결이었고/ 둘러앉은 구름들은 천둥의 심장이었소 목록같은 여름의 슬픔들을 모으는 수집가// 온통 공중을 채우느라 바람은 부풀어 올랐지만/ 그늘은 찬 바닥을 헤엄치는 정착할 수 없는 삶이어서// 불쑥, 나는 구름의 상처를 다 핥고 있을 거외다//

나는 오늘의 보폭이다 / 박복영
봄비 그치니 도착이 숨쉬기 시작한다/ 봉오리 튼 꽃이 뒤축 터진 신발같다// 반갑게 어깨를 세우는 햇빛// 저녁을 닫고 아침을 꺼내놓는다/ 익는 외로움처럼 오늘이 붉어지는 동안/ 뒤척이는 바람/ 흔들린 자리마다 빗방울은 스몄을 것이나/ 아직 지지 못한 꽃잎들은 숨결을 채집하며 돌아눕는다// 소신공양. 어제의 꽃들은 모두 졌다// 향기의 만찬도 봉숭아 빛의 입술도 돌아오지 않는다/ 왼쪽어깨는 조금 더 기울어졌고/ 잘게 쪼개진 개울물소리는 다시 견딜 만하다/ 하루는 걸어온 보폭만큼 무거워진다// 나는 오늘의 보폭이다//

옥탑방 / 박복영
알루미늄 샷시문에 어깨의 허기가 끼어있다/ 의혹처럼 문을 열면/ 끼익, 하고 허기의 내장이 빠질 것만 같다/ 닫힌 문틈에 낀 사내는 통증에 지쳐 빈방을 잊었을까/ 오래된 밀봉이 수상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반투명 유리에 반사되는 햇살은/ 갈증만으로 찾아가야 할 미행이다/ 집주인의 통화음처럼 늘어진 빨랫줄이/ 바람그네를 타는 양철지붕 아래/ 간략하게 통과되는 거미줄의 고요에 귀를 묻어본다/ 소리의 걸음이 지워지는 동안/ 점령군이 된 꽃잎들의 소문이 저녁 놀빛에 주파수를 맞춘다/ 얼마나 간절한 안부였을까/ 탯줄같은 골목길 침묵은 자를 필요 없겠다/ 사랑은 불빛이다//

무게는 설움이어서 / 박복영
철 계단 발소리는 목에 걸린 가시다/ 무게를 토해놓는 통증의 소리들/ 바닥을 치고 오르려는 끝장이 끼어있다// 세상의 허기는 발목에서 출생한다/ 발품을 팔고서야 오늘을 살았다/ 낮과 밤 쉬지 않고 달려와 발목이 또 저려왔다//

바람 불다 / 박복영
물 밖으로 뛰쳐나온 떡붕어마냥/ 검정 비닐 봉투를 끌고 가는 저 흙바람./ 바람아, 푸른 주검을 딛고 선 너의 맨발에/ 영혼이 있구나/ 겨울 빛마저 뚝, 뚝 떨어져 삐거덕거리고/ 몸 안에 갇힌 내 영혼은 볼 수 없는데/ 깊은 어둠 뒤에 되살아나는 영혼들이/ 길을 떠나는 구나/ 아아, 바람 따라 상처 입은 기억이/ 길을 떠나는 구나//

햇살의 등뼈는 휘어지지 않는다 / 박복영
산 아래 바람들이 올라와 잡풀처럼 덜컹거린다. 어디선가 넝쿨처럼 가슴에 금이 가고 바람이 길을 낸 틈을 따라 우, 우 거미줄이 솟아난다. 관청리에도 긴 여름이 왔다 햇살은 파란 기왓장을 쪼며 연신 파고든다. 누군가 이글거리는 땡볕에 뚜벅뚜벅 땀방울을 찍으며 약수터를 오른다. 저 발자국을 따라가면 빈집 같은 내 가슴에도 藥水 같은 휴식이 찾아올까. 젊은 生의 꽃길 같은 기억들 남아 있을까. 돌아보면 아직, 청보리들이 푸른 물결로 출렁이고 있을까. 지상 가득 찾아오는 햇살들. 가만히 귀 기울이면 햇살의 얼굴마다 숨은, 무수한 상처들이 박혀 있다. 햇살이 直立으로 걸어오는 길 위에 나의 문장은 서 있다.//

가을날 / 박복영
패랭이꽃 익어가는 산비탈에/ 앉은뱅이 바람이 혀로 핥아놓은 고요는 붉다// 장끼가 살금살금 숨어들다 고요를 쫀다/ 깨어지는 고요의 안쪽이 따뜻하다// 고요를 삼킨 장끼의 몸이 따뜻해지는 동안/ 깃털에 스며 번지는 붉은 빛// 울지 마라, 패랭이꽃//

해질 무렵 / 박복영
찰랑, 육교 앞에 엎드린 늙은 사내의 손바닥에 은전이 떨어진다./ 밥그릇에 고이는 허기/ 내가 놓아버린 생각이 떨어져 부딪히는 순간, 늙은 사내가 기다려온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손바닥을 쓸고 가는 닳은 바람이 떨어뜨린 햇살의 무늬였을까/ 꼬막껍질 같은 손톱에 소리 없이 스며드는 어둠과 말라버린 눈꺼풀을 열면 아직, 고여 있을 눈물의 방을 끌어안은 늙은 사내가 쟁여두었던 지친 생을 밥풀처럼 떼어먹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환해지는 불빛들이 집으로 가는 길을 밝히는데//

누구와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 박복영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를 꺼내 앉았다// 내가 두리번거리면 저쪽의 손님도 두리번거렸다// 무심코 집어든 숟가락이/ 당신의 여름은 잘 있습니까?// 묻는 듯 먹구름처럼 달려 나온 물컵 옆에 나란히 앉았다// 물수건이 손바닥 주름을 깨우는 사이// 저녁이 울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어떻게든 밥그릇은 비워야겠고 젓가락은 자꾸만 떨어졌다// 내가 두리번거리면 누군가 두리번거렸다// 세상은 혼자 살고 있고// 나는 누구와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슬리퍼 / 박복영
고무바닥에서 발가락 자국이 흘러 나왔어요// 걸을 때마다 탁,탁 뒤꿈치를 치는 소리가 딸꾹질 같아/ 슬퍼 보였어요// 그 어떤 울음도 몸 밖으로 새나오지 않았으므로// 왼발을 짚고 오른발을, 오른발을 세우고 왼발을 털 때/ 햇빛이 쪼개져 떨어졌어요// 그때, 바람과 겹쳤다 펄럭이는 그림자// 제 몸을 흉내 내며,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어요// 시계바늘에서 빠져나온 맨발이// 오늘은 뭐 하세요? 하루치 궤적을 잃고 슬리퍼가 불빛을/ 의심치 않는 시간// 또 봄여름가을이 익숙한 듯 지나쳐 갔어요// 슬리퍼의 안부를 물으며 꽃들은 피고 지는데// 햇빛을 다 소비한 발바닥은 살고 슬리퍼는 죽었을까요// 만차된 주차장처럼 제자리만 돌고 있네요//

물수제비 / 박복영
돌을 던졌을 때 수면에 뜬 흔적은 생략된 돌의 말들// 건져 올려 듣고 싶다/ 물결에 씻겨 지워진 돌의 말// 단단한 돌이 물속에 가라앉기 전 유언처럼 내뱉은 말들// 말을 많이 던진 사람의 감정을 생각하다가/ 문득, 놓친 돌의 말// 하고픈 말을 안으로, 안으로 새겨 돌이 된 돌의 말// 건져 올려 듣고 싶다/ 부수고 깨뜨리기만 한 저 돌, 돌의 말// 누구든지 던져버리거나 숨겨버리고 싶었을// 오래도록 물결에 씻으면 지워질까// 당신의 가슴속 돌이 된 그 말들//

9 / 박복영
무릎으로 가는 릭샤*처럼 흔들려 기울어 걸어간다/ 굽어 휘어진 채/ 봄여름가을겨울 기우는 각 안에 흔들린 흔적이 있다// 바닥에 누운 그림자의 몸짓이/ 흩어졌다 모여 뭉칠수록 조금 더 선명해진다// 구겨진 마른 이파리가 구른 궤적처럼//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어깨를 짚고 술 냄새를 풍기며 걸었을 뒷골목에/ 흔들려 기울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흔들리는 것들의 몸에서 추락하지 않으려는 듯 소리들이/ 쏟아진다 구구./ 어쩌면 내 몸 안의 소리 같아서 나는/ 휘어진 몸을 내려본다// 기울어지는 것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것이어서/ 기우는 것은 빨리 가기위한 것이 아니라 멀리 가려는 뜻/ 이어서 나는// 기우는 각 안에 나를 넣어둔다// 이제 흔들리는 것들로 저녁은 따뜻하겠다/ 각 안에 내가 단단해진다//
* 릭샤 : 인도. 인력거

 

흙의 기억은 형이상학이다 / 박복영
청진기속을 흐르는 심장소리처럼/ 빗방울로 해방되는 바닥의 감옥에서/ 발바닥에 새겨지는 족보의 이름이 호명될 때까지/ 생활은 빗방울의 생산을 다 기록할 수 없다/ 빗방울의 견고한 도착으로/ 공중, 그 어디를 찾아가는/ 이파리들의 목차는 어디에 있을까/ 향기도 외면해버린 기억이어서/ 빗방울의 부딪침으로/ 흔들림의 분주가 내보이는 새순의 내부는/ 하염없는 어떤 결별이니/ 빗소리의 귀가는 너무 익어 붉었다/ 햇빛의 파르티잔이여//

저물녘의 폐광 / 박복영
죽은 자의 함몰된 눈에 어둠이 고인다/ 소리도 불빛도 모두 묻혀 촛불을 들고 들어서면/ 번쩍, 눈 뜬 눈동자가 될 것 같은// 발설이 목젖에 걸린 거미의 방// 어둠은 무덤으로 가는 길이어서/ 서늘한 바람에 거미줄이 튼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까맣게 쌓이는 어둠에/ 나는 누구를 찾아가는 것일까// 어쩔 수 없이 긍휼矜恤을 삼켜/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박쥐떼를 쏟아낸다// 부욱, 뜯어진 고요를 핧는 달빛에/ 망자의 시선이 한결 홀가분해진다// 나는 조문처럼 주춤거리는 발걸음을 어쩌지 못한다//

아무 말 없는 저녁 / 박복영
눈 뜬 유리창은 여전히 방관하지만 바람은 고양이 울음/ 처럼 뾰죽해졌다// 일몰의 붉은 구름이 봉합하던 서쪽하늘// 벼락 맞은 대추나무처럼 한 쪽으로 기우는 바닥에 저녁이/ 고인다// 세상의 어떤 표정도 나의 것이 아니었으니// 나비를 좇던 햇살을 따라가면 먹구름이 소나기를 대필할/ 것만 같아 별빛은 어김없이 박음질을 하고 있다// 투두둑, 아직 익지 않은 달빛은 후박나무 잎에 열리고// 닳는 촛불에 부끄러움이란 없어 방문은 두꺼워진 어둠을/ 돌려보내며 환해질 것이다// 그때, 아무 말 없는 당신은/ 기울은 바닥에 몇 모금의 무릎을 나누어 주었다//

적막(寂寞) / 박복영
치자꽃 와락, 하얘졌다/ 보잘 것 없는 설익은 탱자가 어쩌자고/ 땡볕을 불러들여 그림자를 채우는지/ 바람은 느긋하고 탱자나무 가시는 완강하였다/ 마당에 가을을 닮아가는 그늘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숨어드는 동안/ 쓸쓸함은 노랗게 익어가겠다/ 먹구름이 부르튼 입술을 적시는 저물녘/ 식어가는 아랫목이 안타까웠다//

천원/ 박복영
소래 어시장 초입. 천원에 막걸리 한 잔, 돼지껍데기 두 점 집어 오물거리자 온 몸에 확, 전해지는 이 따스함. 연탄화덕 앞도 아닌데, 봄 햇살의 나른함도 아닌데 온 몸에 신경 줄이 붉어진다. 어디에서 왔을까. 좌판의 할매가 내미는 붉은 마른 새우가 눈에 들어 화끈한 것도 아닌데, 뜻밖에 천원이 내어준 기분 좋은 짜투리 시간. 돌아서려는데, 어시장 바닥을 꿈틀거리며 훑어오는 늙은 상어. 천원에 수세미 두 개를 받아들자// 하, 온 몸이 화끈거리는 이 따뜻함//

 

시   조


백묘白描 / 박복영
마당에 노숙인 양 흩어날아 숨어든다/ 나붓나붓 흘러와/ 사라지는 소문처럼/ 지천에 수런거린 시간은 바람의 기척이다// 한때는 솜털이 보송한 별 이었다// 결박 푼 순간부터 유배인 소멸의 삶// 스스로 무소유 찾아 울음마저 삼키었다// 독백처럼 흩어져 적막안고 잠들어도/ 햇살에 마음 트는/ 눈물로 견뎠으니/ 아마도 봄비 내리면 소문처럼 떠나리라//

탁발托鉢 / 박복영
기운 볕이 지하도를 들여 보는 해질녘/ 새우처럼 몸을 말아 무릎접어 손 편 사내/ 지나는 발자국 소리가 허기진 귀를 찌를 무렵// 배고픔이 부풀수록 무릎 더욱 시려와/ 뒤척이는 볕살모아 허공을 뎁힌다/ 두 손이 기다린 시간만큼 저려오는 두 발바닥// 가장 낮게 엎드린 저 순간은 한 끼다// 직립을 포기한 등 위로 야윈 불빛이/ 빈 수저 달그락 거리며 맨발로 서 있다//

연꽃, 피다 / 박복영
녹물만 똑똑 떨구던 양철대문 찢어졌다/ 컹컹, 개 짖는 소리에 놀란 듯 뚝, 떨어진/ 검붉게 녹슨 자리에 곤두서는 저 불길/ 들녘의 의문인 양 번져나간 햇살처럼/ 강물위에 꿈틀대는 시린 바람 가득하다/ 아찔한 현기증으로 쥐어뜯는 가슴앓이/ 찢어진 비구름이 쏟아낸 각혈처럼/ 후다닥, 떨어진 가여운 목숨들이/ 진창에 붉게 피워낸 선홍빛 연꽃이다//

갸웃 / 박복영
앙가슴 푼 배꽃속살 뽀얗게 부푼 오후// 안부도 묻기도 전 젖살 내음 후끈하여/ 찾아든 배추흰나비 갸웃한 추임새다// 갸웃이란 허공에 이승의 삶 묻는 일// 봄볕이 풀어놓은 꽃 향을 호명하니/ 모른 체 돌아설 수 없어 서성이다 길 잃을까// 젖몸살 씻어내듯 터져버린 보슬비에/ 해맑은 눈으로 몸 낮추는 꽃잎들// 삶이란 젖어 흔들려도 끝끝내 사는 거다//

비의 추렴 / 박복영
간간이 수런대던 귀엣말 스쳐가듯/ 몸 낮추며 떠나가는 그 누구의 영혼처럼/ 소슬한 이팝나무에 흰 꽃이 젖고 있다/ 그렁한 아픈 시선 오래도록 닦아줄/ 시퍼런 이파리가 무릎을 펴는 동안/ 지긋이 꽃 진 자리에 소쩍새 울음 괸다/ 얼마를 더 놓아야 인연의 끈 풀어질까/ 못다 한 사연처럼 맺힌 방울 툭, 질 때/ 찢어진 바람 자락에 꽃잎마저 울컥한다//

풀꽃을 말하다 / 박복영
햇볕이 제 몸 꺾어 담벼락을 올라간 곳/ 담장 밑에 땅을 짚고 깨어난 풀꽃 하나/ 시간의 경계 밖으로 내몰린 듯 애처롭다// 뿌리박고 살아있어 고마울 따름인데/ 손때 묻은 구절들이 꽃잎으로 흔들린다/ 흔하디흔한 꽃으로 피어있는 이름처럼// 살면서 부딪치며 견뎌온 시간들이/ 따가운 햇볕에 파르르 떨고 있다/ 켜켜이 자란 잎들이 꽃 향을 우려내고// 풀꽃, 하고 부르면 네, 하고 대답할 듯/ 감아쥐고 올린 꽃은 또 흔들리고 흔들려도/ 중심을 잡고 일어선 꽃 대궁이 절창이다//
* 2014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저녁의 안쪽 / 박복영
어둠의 기척으로 등불은 내걸린다/ 응집된 소리들과 분할된 소리들이/ 나직히 속살거리며 무게를 더는 시간// 시선은 바깥으로 마중을 나간다/ 바람의 발자국을 경청하는 들녘에/ 나른한 젖은 노동을 끌고 오는 맨발들// 더불어 걸어야할 시간들을 보았을까/ 어둠이 짙을수록 바람으로 흔들려도/ 서로를 다독거리며 지친 몸을 세운다//

허공을 읽다 / 박복영
얼마를 더 걸어야 할까/ 갈증으로 우려낸 삶/ 낯익은 목록처럼 줄줄이 세워놓고/ 예까지 너덜겅 길을 건너온 이력이여// 그 무슨 사연 있어 매듭안고 깊어졌나/ 닿지 못한 뼛속까지 자늑자늑 흔들리며/ 곰삭은 침묵 끌어안고 까무룩 저물 무렵// 잃어야만 찾는다는 경전의 말씀일까/ 징거맸던 별빛들을 하나, 둘 풀어놓고/ 누군가 어둠에 흘린 하현의 신발 하나// 맨발로 다리 위를/ 절뚝절뚝 걸어갔을/ 허기진 꿈들을 기꺼이 끌어안는/ 저 허공, 껍질을 벗고 새벽으로 일어선다//

빨래터* / 박복영
청명한 냇가에서 긴 머리 풀어 감고/ 머리카락 갈래지어 단단하게 매듭질 때/ 젖가슴 더듬어 찾는 어린아이 달래가며// 가난한 과부의 생 꿋꿋하게 건너는데/ 서러운 시간인 듯 두드리는 방망이는/ 빨래 속 더러움들을 벼리고 벼리다가// 탁탁, 튕겨나는 소리마다 비루**(飛陋)풀어도/ 춘복 짓고 하복지어 빨래하기 어렵더라***/ 힘겨운 시집살이를 서로에게 위로하니// 슬픔도 눈물인 양 모짝모짝 말라가리/ 첩첩이 쌓인 일들 직수굿 풀다보면/ 비로소 서러운 매듭 속절없이 풀어지리//
*빨래터 : 김홍도 풍속화첩 중 하나
**비루(飛陋) : 더러움을 날아가게 한다는 뜻. 직물이나 얼굴 씻을 때 팥, 녹두등을 갈아 씀
***조선시대 내방가사 중 여자 탄식가

모월모일某月某日 / 박복영
어둠비늘 벗기는 새벽빛 기척 속에/ 홀로 핀 해당화는 허공에 태胎를 묻고/ 비워도 차오르는 빛/ 애틋하게 뒤척인다/ 속세의 설화인 양 풀어지는 강물따라/ 갈대들의 마른 꿈들 서걱이며 흔들리고/ 바람의 발자국마다/ 인연의 끈 묶어지니/ 이윽고 순응하며 살아온 격정의 날들/ 서슬 퍼런 시름 딛고 일어서서 수런대며/ 힘겨운 세상 징검돌/ 가뿐하게 넘고 있다//

고드름 / 박복영
뾰족한 송곳처럼 고즈넉이 내미는 촉燭/ 나는, 그 맑은 몸짓을 순純이라 부르겠다/ 깨어난 계곡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 잔설의 여린 마음을 햇볕으로 짚어가며/ 아슬한 경계에서 새살처럼 돋았으니/ 살면서 상처 하나 없다면 그것은 어리석겠다// 마디마디 울퉁불퉁 사춘기로 자라는 때/ 눈물의 무거움을 깨우친 이후로는/ 오르는 마음 알 수 없어 아래로 향 하였겠다// 아파보지 않으면 설 수 없는 그 자리/ 흔들림은 장식인 양 툭툭, 털어버리고/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송곳처럼 일어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