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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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2. 1. 21.

김평엽 시인
전북 전주 출생, 전주고등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 박사수료.

1997년 《시대문학》 신인문학상, 2003년 《애지》 등단,

임화문학상(2007), 교원문학상(2009) 수상.

시집으로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있네』, 『노을 속에 집을 짓다』.

한국문예창작학회 회원. 〈현대시문학〉 편집장.

 



꽃은 바람의 각도를 알고 있다 / 김평엽
바람을 안고 발돋움하는/ 모든 건 꽃이다/ 세일러복 소녀가 하늘로 오른다/ 오르막 끝에서 분홍을 풀고/ 살구꽃이 된다/ 살아야 하는 집착은 출처가 없다/ 기억의 렌즈를 조이면 선명해지는 과거/ 봉숭아는 가슴에 묻어야 산다/ 어머니도 누이도 화단 마루에서 핀다/ 어디로 갔을까 내 스텐레스 시계/ 어느 계절에서 멈추었을까/ 버림받은 것은 날개부터 자란다/ 햇빛 끝에서 사산된/ 꽃잎은 비행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유사한 각도로 글썽이는 별/ 한때 사랑이란 이름으로 머물렀던 것들/ 기차는 해바라기 뒤로 사라진다/ 망각 위에 펼쳐진 노을을 본 사람 있을까/ 바람의 각도에 날개를 맞추는 건/ 슬픈 마법이다/ 우편함에 꽂힌 전단지의 눈높이에서/ 나비는 태어난다/ 바람 아니어도/ 낡은 창 두드리는 게 그대일진데/ 애절한 높이에서 피는 건 모두 꽃이다/ 머뭇머뭇 검은 건반 딛는 사람/ 그대도 꽃이었을 것//

태양의 지문 / 김평엽
나는 한때 요셉이었다가/ 요한이었다가/ 십자가의 나무였다가/ 노랑을 삼킨 장미였다가/ 잠자리였다가/ 끌려간 목수였다가/ 선녀를 감금한 사냥꾼이었다가/ 슬리퍼로 온 동네 돌고 온/ 구름이었다가/ 아나키스트였다가/ 푸른 포구였다가/ 암호였다가/ 가을 묻은 햇살이었다가/ 절벽 끝 중력이었다가/ 생각을 절개한/ 알타미라의 짐승이었다//

기억을 수선하다 / 김평엽
새벽이다 눈을 뜨면 어둠도 꽃이 된다/ 창을 열어 풍경의 길을 터준다/ 책갈피를 제치고 나온 박쥐가 어둠을 수정한다/ 사과를 베어 먹는다/ 드레스를 끌며 장미가 들어온다/ 스토브를 옮겨 불을 켜준다/ 불길 속에서 가슴을 덥힌다/ 까만 씨방이 열리고/ 그립던 유성우가 사방으로 터진다/ 단단한 벽에 실금이 간다/ 염소들이 산을 밀어 옮기는 시간/ 비가 내린다, 스며드는 애틋함/ 누군가의 새벽을 훔쳐야만/ 기억 몇 점 얻는,//

강박 / 김평엽
잠을 자는 데 뭔가 잘못되었다/ 지금이라도 잠든 방을 나가야 할 것 같다/ 장롱에 넣어둔 낚시 가방을 꺼냈다/ 그리고 양복을 입었다/ 깊은 밤, 문간방 여자가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30촉 전등을 지나 바깥으로 나갔다/ 잠시 후 이모가 죽었다 한다/ 나이대로 죽는 것이련만 제비처럼 울었다/ 나는 방 안의 불을 껐다/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한참을 가면/ 새벽 저수지가 나올 것이다/ 황토 편편한 자리에 낚시를 펴고/ 기억을 회수해야겠다/ 전생, 연두빛은 그곳에 놔두자/ 밀봉된 시간을 흔들었다/ 물 밑 허공을 걸었다 진작 죽은/ 나 그리고 어머니와 솜이불/ 밤이면 낚시가방을 꺼내고 또 양복을 입는다//

헐거운 저녁 / 김평엽
가야한다 불분명하지만 서둘러야 한다/ 나룻배를 탔다 불어난 물에 가라앉았다/ 구조헬기를 탔던 기억 그러나 지금은/ 가야한다 차를 주차한 기억이 없다/ 자전거를 끌고 학교 앞 정류장에 왔다/ 학생들이 저녁 등교를 한다 경례를/ 하고 건물로 들어간다/ 여학생도 자취방을 나선다/ 세렝게티 톰슨가젤이 골목을 뛰어넘는다/ 비가 와 집으로 갔다 어머니가/ 어디를 쏘다니느냐며 나무란다/ 비 오는데 딸을 데려 오라한다/ 회색 양복이 비에 젖어 얼룩진다/ 비를 맞으며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오르막을 올라 흙탕길을 갔다/ 보건소 가는 쪽 냇물이 불었다/ 택시를 기다렸다 다행히 택시가 멈추고/ 기사가 자전거를 트렁크에 실어줬다/ 나는 시내까지 가자 했다/ 요금이 꽤 나올 것이지만 가야했다/ 어둠이 먼저 선착해 있었고 술집 뒷문으로/ 여학생이 팔짱끼며 좋아했다/ 가끔 왔던 기억/ 자고 있던 주인이 나왔다/ 속옷 차림 여자는 문틈에 누워 있다/ 신발이 없다 어디에 두고 왔더라/ 택시를 탈 때 길에 두고 왔다/ 비오는 자전거를 다시 탔다 회색구두는/ 사람 오가는 그 자리에 있었다/ 정신 차릴 수 없는, 문간방에/ 분명 누군가 살고 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피임약 먹으며/ 빗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나도 이제 자야겠다 구두를 말리며//

자동기술법 / 김평엽
새벽녘 어머니가 나를 다시 불렀다/ 너 내 말 잊지 않았지/ 예 아침 일찍 가신다면서요 알아요/ 무슨 일인지 어머니는 머물던 집을 떠나겠다 한다/ 터미널까지 태워달라는 얘기다/ 단칸방이 문제였나 나는 대충 옷을 걸치고/ 차를 찾았다/ 차는 더디게 발견되었다 버스 출발시간이/ 늦어질 것 같았다 터미널 가야하는 동네 사람들이 내 차를/ 타고 싶다길래 그러라고 했다/ 룸미러를 보니 정작 어머니는 타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을 밀치고 어머니를 앉혔다/ 미용실 아주머니도 수다스럽게 탔다/ 그녀는 월간지를 읽고 키득거렸다/ 술 마신 사내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 그는 끌어냈다 자기가 누군 줄 아느냐길래/ 얼굴을 쳤다 그는 나중에 보자며 떴다/ 나는 터미널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직접/ 가겠다 했다/ 승객들은 그러건 말건 떠들었다/ 중도에 휴게실 식당에 들러 국밥을 먹었다/ 게걸스럽게 먹는 옆 사람들이 있었다/ 뱀탕은 껍질부터 구역질이 난다/ 이제 월간지는 미용실 보조가 보고있었다/ 치마를 만지작거리며 깔깔웃었다/ 어머니가 나를 불러 말했다/ 오늘은 꿈자리가 사납다 조심해/ 갑자기 비가 오고 있었다/ 뒷좌석에선 미친 것들이/ 지느러미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여기가 좋다는 듯//

정물화 보는 법 / 김평엽
주변과 바깥의 경계/ 그대가 죽어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자세히 보면 살아있다/ 골목에 새겨진 낙서도/ 성당 벽에 박힌 대못도/ 느린 속도로 살아 움직인다/ 멍든 부위가 번지듯/ 살아있는 건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한다/ 벽에 박힌 탄환도/ 흙속에 묻힌 뼈들도 하얀 꽃씨 날린다/ 별은 나뭇가지 사이를 빠져나가고/ 뒤척이는 오브제들/ 시든 장미가 움직일 때까지/ 절반쯤 눈 감으면/ 기다려온 만큼 우주가 보인다//

텅 빈 중심 / 김평엽
서로가 중심이다/ 머물러 있는 모든 것/ 장닭이나 어린 강아지도 중심이다/ 한때 사랑했던 그대도/ 떠나간 그대의 만년필도/ 새벽이면 복도를 내려가는 소리/ 모두가 주인공이다/ 돌담에 박힌 까만 돌멩이와/ 자라는 이끼도/ 스스로 중심을 만든다/ 이별을 막 끝낸 여인과/ 그녀의 라면 그릇/ 외곽에서 알을 품는 알락할미새조차/ 명백한 중심이다/ 서로는 주인공이며 중심이 된다//

장롱 위 파인애플 / 김평엽

무슨 짐을 이리도 꾸렸는지 배낭에/ 보조 가방, 카메라 가방까지/ 몸의 중심 종잡을 수 없다/ 그러나 흔연히 완주하겠다는 약속/ 지켜야 한다/ 빙벽을 오른다 이미 두 사람이 나를 앞질렀다/ 내 뒤로 세 사람이 오른다/ 거의 다 올랐는데 틈이 좁다/ 추락하면 뒷 사람이 위험하다/ 앞서 올라간 사람이 도와줄까 고민한다/ 안간힘으로 고비를 지난다/ 펼쳐진 설원, 무릎으로 걷는다 차라리 낫다/ 카메라 가방을 정리한다/ 필름이 몇 통 있는데 사용한 것인지 모르겠다/ 줌렌즈도 점검한다/ 무엇을 찍겠다고 이러는지/ 결혼을 앞둔 여성 대원에게 말했다/ 코타키나발루 같은 곳을 가라고,/ 언젠가는 안타까운 풍경을/ 담을 때가 있겠지/ 샤워실 어둠 속에서 스님이 몸을 씻고 있다/ 나도 몸을 씻는다/ 개운한 발걸음으로 밤길 걷는데/ 스님이 앞서 간다 무어라 주억거리지만/ 산스크리트어를 알 수 없다/ 내 삶은 주관적이고/ 파인애플은 아직 장롱 위에 있다//

오래된 처방전 / 김평엽
사람들은 말한다 맨 정신으로, 말 하라고/ 약을 두 배로 먹었는데도/ 딴전 피우고 의자 깊숙한 곳/ TV를 본다/ 굵은 전선을 손에 쥔다는 것/ 그렇게 멀찌감치 왔을텐데/ 정신을 차리면/ 어머니의 과거이다/ 엄연한 물푸레나무처럼/ 어머니는 날 못 보고 나만/ 어머니를 본다/ 기억의 동굴, 활자를 추적하는 길이/ 몇 걸음 째 피 걸음이다//

캐리비안 재즈 / 김평엽
캐리비안 블루를 펼치다/ 얇은 빵에 푸른 쨈을 바르고 바다에 앉는다/ 주황색 열선에서 그리움이 구워지는 동안/ 떠밀린 해초를 말려 G현을 만들고/ 콘트라베이스에 건다/ 쉘브루 우산이 펼쳐진/ 바다를 연주한다/ 맞은 편에서 뫼르소가 걸어온다/ 태양은 가득히 몰려와/ 지루한 시간을 퇴적하고/ 하얀 소라 껍질 소리로 울던 소녀는/ 콘트라베이스에서 잠이 든다/ 바다를 향한 하얀 풍향계/ 한 줄로 그어진 수평선/ 그리움은 늘 단답형이다//

수수빵 / 김평엽
기숙사 생활하며 전교 일등하는/ 아이의 꿈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란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사람 만나/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닌/ 퍼주며 사는 것이라니,/ 지역신문사에서 취재를 나왔다/ 기자는 내게 질문한다/ 나는 의례적인 말을 못하고/ 그저 반성한다 했다/ 선생들은 키득거리며 잡담했다/ 쉬는 시간에 아이를 불렀다/ 눈매가 초롱했다/ 나는 너의 꿈을 지지한다 했다/ 갸륵하고 진지한 꿈/ 교무실로 돌아오니/ 선생들은 또 귓등으로 쑥덕댄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 노릇한 빵을 배급받던 기억이 났다/ 엄마처럼 향긋한 빵,/ 세상엔 빵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다//

 

청심환 / 김평엽
땅속의 배추 뿌리가 하얗게 자랐다/ 마지막 8교시, 교무실에서 술 냄새가 났다/ 선생들이 맥주병을 치우고 있었다/ 문짝을 쾅 닫고 교육청으로 갔다/ 뒤따라 온 교감이 장학사와 희희낙락 악수를 했다/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과 수업을 했다/ 문학을 설명하다 박정희 때/ 죽은 이들을 나열했다/ 학생들은 열거법으로 깔깔댔다/ 창문 안으로 바람이 들어와 향기가/ 가슴을 부볐다 복도에선/ 사복 입은 사내가 서성댔다/ 세상에 믿을 놈 없는/ 문학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말/ 아직 살아있다면/ 게바라 평전부터 펼칠 일이다//

안개 새우깡 / 김평엽
연밥을 까먹으며 길을 간다/ 어둑한 먹자골목 사거리에선 어린 남녀 애들이/ 소개팅 중이다/ 몇 걸음 앞엔 휴업 중인 구식 오락실과 문만 열어놓은 서점이/ 있다 서점 주인은 어린 아들과 난로를 쬐고 있다/ 나는 주인에게 애 공부 좀 시키라 했다/ 공부는 애가 알아서 하는 것이라 응수한다/ 주인의 난로를 걷어찼다/ 책에 불이 번졌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토꼈다/ 네온이 팔락이는 곳엔 짧은 치마들이 호들갑 떨고 있다/ 가난한 모습이다/ 치마들에게도 공부 좀 하라고 했다/육교를 올라가며/ 집히는 동전을 공중에 뿌렸다/ 주워가는 사람이 없다/ 잠시 후 길 가던 누군가가 내 등짝에서/ 쪽지를 떼어준다/ 아저씨 짱!//

시간의 안개 / 김평엽
춥고 배고팠다/ 어머니는 미음을 먹고 싶어했다/ 누나들은 공장으로 출근하기 바빴고,/ 학교 갈 준비를 하는데/ 누나들이 다투었다/ 아침밥 먹기는 틀린 것 같았다/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어/ 가게에서 감자가루와 전구를 샀다/ 어머니가 기뻐할 것이었으므로/ 꽃이 피면 나을텐데 당장은 추웠다/ 어머니는 자리에 누웠다/ 차가운 장판을 들추자/ 개구리밥 깔린 미나리꽝이 나왔다/ 방이 점점 어두워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 결혼했는지 아내가 옆방에서/ 자고 있었다 어둠 속에/ 또 다른 어둠이 겹치고 있었다/ 괜시리 딱지를 떼었나/ 지독한, 어둠을 쫓아야 했다//

 

시간의 주파수 / 김평엽
이미 난 땅 끝에 도착했다/ 소로에 깔린 바다 내음이 밟힌다/ 섬과 바다 사이에서 나는 궁핍하다/ 창고엔 수선을 기다리는 언어가/ 바셀린 바른 채 있다/ 굴뚝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녹는 눈송이/ 어둠에 안개 섞인 날은 별을 일찍 불러들여야 한다/ 에티오피아 산/ 여인들이 커피 딸 때의 아찔한 순간을/ 로스팅한다/ 생의 면적을 내 준 식탁에 뒤늦게 감사한다/ 카메라를 챙긴다 배터리는 내면을 비우는 속도가 빨라졌다/ 해안도로는 육지에서 달려온 것들의/ 우선멈춤 선이다/ 갈대는 길이 없는 곳이라야 산다/ 탈피한 나비가 체액을 덜어내듯/ 생의 질량을 줄여야 한다/ 재즈에 색을 입힌다면 검은색 바탕에/ 올리브 색이 좋겠다/ 석회암 바닥을 깔아놓은 골목을 걷는다/ 돌아가는 길엔 세탁소에 들러/ 맡겼던 어제의 시간을 찾는다/ 바다와 결별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누군가 내 시간을 엎질렀다 / 김평엽
시간의 풍경이 또 바뀌었다/ 무슨 잔치인지 독한 홍주가 나오고/ 술병이 자빠진 후/ 몇몇이 화투를 돌렸다/ 내 앞에도 화투가 두 장 떨어졌다/ 패를 까보니 삼팔광땡!/ 전율하는 십여만원을 손아귀에 쥐었다/ 장땡을 잡은 후배가 내게 반말을 했다/ 화투판은 난장판, 나는 후배를 때렸다/ 후배는 서운하다 했다/ 어둑한 구석에서 사람들이 헤어지고 있었다/ 저명한 의원이 지역 당원들과 술에 취해/ 인사를 섞고 있었다/ 나는 사라지려는 어둠을 향해/ 의원님 하고 인사를 했다/ 그는 모르는 명함을 주었다/ 쓸모없는 바닷가로 갔다/ 허기진 동물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부터 그림을 그려야겠다/ 화투 밑장 빼는 법도 잘 해야겠다/ 살짝만 기울여도/ 주르르 흘러내리는 시간!//

 

재즈를 듣는 시간 / 김평엽
그의 악보 속으로 들어간다/ 스스로를 가두듯/ 이탈리안 노래를 부르다가 포기한다/ 어렵다 아코디언을 모르겠다/ 피를 찍어 쓰려던 시도/ 커핏물에 대신 찍는다/ 갑자기 너스레가 많아진다/ 낙서들이 사라진다/ 웅성거리던 귀엣말도 증발한다/ 닭장에 넣어둔 책/ 책장에 넣어둔 닭, 다 버리고/ 기억을 옻칠한다/ 튼튼한 뼈를 위하여/ 눈썹부터 동공, 망막까지/ 바다에 뭉개야한다//

시간 샌드위치 / 김평엽
학부가 개강하여 복도마다 시끌하다/ 나는 강의실을 찾다 포기하였다/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의 숫자 배열이 바뀌어 있다/ 몇 번 눌러도 에러가 떴다/ 지루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산꼭대기로 밀려간 눈은 절경이었다/ 숨을 멈추니 질량이 사라져/ 몸이 공중으로 올랐다/ 땅에 내려오자 다시 그리움이 생겼다/ 가까운 성당을 갔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여태 달려있었다/ 층계에 있던 마귀가 킬킬 지나갔다/ 아무래도 음산했다/ 기도를 했다/ 몸이 가볍게 기울자 하늘이 휘어졌다/ 처음 보는 별자리가 보였다/ 중심을 가로질러 유성이 지나갔다/ 어머니가 구석에 모신 탱자나무를 꺾었다/ 흔들리는 모양이다/ 겨우내 쇠약해진 몸뚱이들,/ 역학이나 공부해야겠다//

시간 밖 교실문 / 김평엽
교직원 회의가 끝나고 복도를 지나는데/ 아이들이 분분하다/ 이 많은 생명들이 다 어디서 왔나/ 혼잣말 하는데/ 하얀 가운 입은 선생이/ 우주에서 왔죠 한다/ 하기야 엄마 뱃속이 우주가 아니고 무엇이랴/ 태어나고 죽고, 다시 사는 게/ 우주생명학 뿐이랴/ 깔깔대며 오가는 햇빛에 정신이 혼미했다/ 현관 밖으로 나왔다/ 화단에 어깨를 맞대고 서있는 벚나무/ 수많은 망울들이 부화하면서/ 교정이 온통 분홍 우주다/ 나는 작은 나비 한 마리를 손끝에 올렸다/ 순간을 멈추게 하려했으나/ 주문이 생각나질 않는다/ 아이들은 꽃 속을 휘집고 다니며/ 나비로 날았다 음악 선생도 창문을 열다/ 하늘로 날아올랐다/ 차마 못 견뎌 몸을 푸는 우주!/ 연분홍 파장으로 깨어난 것들이/ 시간을 농락하고 있다//

시간의 이면 / 김평엽
동창 모임에 코빼기도 안 비치던 내가/ 나갔다/ 기업 대표를 하는 녀석도 있었고/ 행정고시로 요직에 앉은 녀석/ 그리고 의사, 변호사, 편집장 등이 있었다/ 선생 하는 놈은 나밖에 없었다/ 호텔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웠다/ 여기서 담배 피우면 안 된다고/ 의사가 핀잔했다 웃을 만한 위치에 있는/ 녀석이었다 나는 한 대 더 피웠다/ 홀을 통째 빌려 고기를 굽고/ 술잔을 돌리고 가관이었다/ 한 녀석이 다가와 모임에 자주 나오라고/ 충고했다 고등학교 때/ 내 눈치를 보던 녀석이었다/ 이튿날은 패러글라이딩을 했다/ 놈들은 산꼭대기에서/ 활강하였고 나머지는 착륙장 근처/ 식당에서 술을 깠다/ 나는 거기서도 담배를 피웠다/ 팁을 받은 종업원은 홀을/ 들락거리며 좋아했다/ 편집장 녀석이 최근에 시집 냈다며/ 책을 줬다 바늘에 꿰인 언어들이/ 널려있었다/ 놈이 내 등을 토닥거리며 가자/ 시답지 않은 것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담배를 피우며/ 배배꼬인 시간 속으로 숨었다//

 

도대체의 시간 / 김평엽
이 날을 기다렸다/ 심지어 아낙들은 자갈밭에서 잠을 잤다/ 그 옆으로 그물과 낫을 두었다/ 글은 몰라도 용케 이 날은 몸으로 알았다/ 동네 개들도 떼를 지어 기다렸고 산에선/ 족제비가 내려왔다/ 물길마다 애 어른 없이 마른침으로/ 허기를 견디며 숨죽인 새벽/ 온다 온다 장대 내리치는 소리/ 느닷없이 물길이 들이닥치고/ 검은 줄기들이 수만 갈래로 뻗쳐왔다/ 일순, 사람들이 물개처럼 뛰어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물속에 손을 넣고 나꿔챈다/ 일년에 한 번 오는 장어 떼/ 애 어른 할 것 없이 목 지느러미를 움켜쥐고 밖으로/ 내던졌다 자갈밭은 펄떡이는 장어들/ 애들은 낫이나 갈고리로 장어를 긁었다/ 개들도 대가리부터 씹었다/ 거적 위에 장어가 모아지고/ 사람들의 얼굴에 윤기가 반지르했다/ 건기 철 찾아온 우기처럼/ 마을은 들썩이고 뱀춤을 추었다/ 혼인색이 꿈틀거리며 내 몸을 파고 들었다/ 문자를 욕심내지 않던 시절/ 눈빛으로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농약치는 시간 / 김평엽
아로니아 밭에 농약을 쳤다/ 고압 분무기가 고장이 나 끽끽댔다/ 사는 게 힘겨운 듯/ 선녀벌레 새끼들이 허옇게 붙어있었다/ 고추도 땡볕에 길게 늘어졌다/ 갈증을 참고 산다는 것/ 농약을 비처럼 뿌렸다/ 자두나무에서 자두를 먹어 본 적이 없다/ 장화 속이 질척거린다/ 해가 지면 출몰하는 모기떼/ 나는 욕실에서 뼈마디를 세척하고/ 변기에 앉는다/ 벌레와 벌레같은 유착/ 김모씨가 비대위원장을 한단다//

시간의 굴곡 / 김평엽
아내가 수녀원에 가겠다 한다/ 여태 단호히 살았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심각하다/ 나는 알았다 했다/ 그 어느 것도 중요치 않다/ 죄다 쓸모없다/ 아내의 마지막 잠/ 나는 강아지 사료를 사러갔다//

풍경과 시간의 감옥 / 김평엽
무기고가 개방되면서 내게 자동화기가 지급되었다/ 해병대의 특수훈련이 실시되었다/ 위장복을 입고 소대별로 집합했다/ 해안가에 침투하는 적을 소탕하는 작전이었다/ 대대장은 나를 눈여겨봤는지 해병대에 몸담을/ 생각이 없느냐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오는 길에 동료와 신학교를 들렀다/ 강의가 시작된 빈자리에 앉아/ 우두커니 청강을 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신학생들은 영성신학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공부하고 싶어졌다/ 누님네 집에 주교님이 오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단다/ 소식을 들은 주변 인척들이 모였다/ 안방으로 주교님을 모시고/ 나머지는 틈새를 비집고 앉았다/ 안방 벽 머리에 오래된 아버지와 어머니/ 혼례 사진이 있었다/ 인척들은 아버지는 죽었지만 어머니는/ 천수를 누린다고 덕담했다/ 어머니는 빈 웃음을 지었다/ 주교님은 좁은 방에 모인 이들에게/ 강복을 했다/ 나는 마루에 밀려 있었으므로 누락되었다/ 주교님이 나가려다 누님의 요청으로/ 다행히 안수를 받았다/ 사람들도 북적이며 헤어졌다/ 기억나지 않는 큰어머니가 만원 몇 장을/ 주었다 용돈 쓰라고/ 새로 발행된 신권이었다/ 형님은 교인이 아니어서 머쓱하게 멀뚱거렸다/ 나는 형의 가슴에 손을 대고/ 축복의 기도를 했다/ 형의 등 뒤로 태양이 내려와 있었다/ 주교도 친척도 형도 사라져 아무도 없었다/ 기록적인 무더위는 오늘부터란다//

바다가 띄운 엽서 / 김평엽
예진이는 1970년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시험을 쳤다/ 윤리에 관한 문제였는데/ 여학생 대부분이 맞혔고/ 남자애 대부분은 틀렸다/ 시험지가 널린 교실에서 나는 왜 고독한지/ 추석날 이야길 들려주었다/ 노상 소주 마시는 형에게/ 그렇게 살려면 집구석에 들어오지 마/ 술병을 차버린 뒤/ 깨어진 세월 15년 지났다고/ 엄마는 명절이면 형 없는 시간을 기다린다고/ 더이상 뒷 얘길 못하고/ 운동장 지나 뻘밭을 걷는데/ 예진이가 단짝이랑 따라왔다/ 예진이가 말했다/ 선생님 방금 해주신 얘기 거짓말이죠?/ 눈치 빠른 아이였다/ 단짝이 말했다/ 선생님 예진이가 선생님 좋아한대요/ 선생님도 좋아해 주세요/ 수줍어하는 볼에 봉숭아가 물들었다/ 하얀 등대에 앉은 갈매기/ 풀밭 선명한 달맞이꽃처럼/ 책갈피에서 예진이가 보였다/ 세월이 훌쩍훌쩍 그처럼 지났다//

 

퇴적층에 대한 기억 / 김평엽
옥상에 설치한 가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합선인지 굵은 전선이 녹아내리고/ 철판도 열을 견디지 못하고 휘어졌다/ 화재는 학교 뒷산으로 옮아갔다/ 눈부신 화염이 시계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몇 대의 소방 헬기가 물을 뿌렸지만/ 진로를 차단하진 못했다/ 사람들은 질턱거리는 땅을 밟으며/ 헬기가 추락할 때를 구경했다/ 잠깐사이 고스톱을 쳤다가 이만원을 잃었다/ 인사발령지는 ‘환티’였다/ 공사가 중단되어 난간이 보이는 학교/ 그래도 애들은 염소처럼 날뛰었다/ 순간 여자애가 덥석 안겼다/ 철근 고소공포가 돋았다/ 선생 하나가 내 손을 잡았다/ 하늘 귀퉁이가 튿어져 있었다/ 고흐가 귀를 자르기 전 보았던,/ 제라늄빛 하늘이 타고 있었다//

익모초 / 김평엽
낯선 협곡을 지나자 저녁이 되었다/ 알 수 없는 것들이 나를 지나갔다/ 알몸인 것 같아 몸을 가렸다/ 누추한 집 몇 채가 보였고/ 개들이 짖었다/ 낡은 집 문을 밀치자/ 굶주린 여자와 아이가 누워 있었다/ 벽은 불길에 그을려 있었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자꾸 지나갔다/ 양동이를 휘둘렀지만/ 허기를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우물부터 퍼 올려야 했다/ 가여운 것들 모였으므로/ 달이라도 건져 삶아야 했다/ 살을 맞대지 않으면 죽을,//

기억 멀리 / 김평엽
단칸방에 아내와 아들 그리고 어머니/ 잠이 들었는데 잠이 오질 않는다/ 뒤척이는 아내를 재워놓고/ 낡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방을 지나/ 아기를 곁에 두고 잠든 여인의 방/ 어쩌다 그 방에 머물게 되었는지,/ 역시 잠이 오질 않았다/ 그녀는 이혼한 유치원 선생이라는데/ 이유를 분간할 순 없으나/ 말띠였다/ 그녀는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이고 결혼식이 열렸다/ 대책이 없었다/ 모기 문 곳도 가렵고/ 전립선 약도 먹어야 하는데/ 잔디밭에서 유치원 아이들이 떠들고 있었다/ 뻐꾸기가 울지 않는다며/ 시계를 두드린다/ 순간, 놀란 새가 푸드덕 달아났다//

부합하지 않는 / 김평엽
어머니가 방을 걸레질하고 있다/ 잡동사니를 치우라 하신다/ 옷장에서 오래된 가방을 발견했다/ 낡은 신문과 수첩이 들어있다/ 볼펜 자국이 얼룩한 페이지에 이름 없는 전화번호가/ 있다 누구를 적은 걸까/ 국번도 없는 번호/ 전류가 몸속 미로를 타고 흐른다/ 명치끝이 아리다/ 약속을 잊은 게 분명하다/ 불안한 형은 이 방 저 방을 오간다/ 잠 자면 좋을텐데 이승을 떠돌고 있다/ 어두운 밤, 버려진 절간 다락이 열린다/ 묵은 패물이 서랍장에 그득하다/ 도장과 통장 땅문서도 있다/ 어느 부정한 자가 숨긴 보화일까/ 패물과 통장을 내가 감춘다/ 가난은 이제 복될 것이다/ 물침대를 타고 홍해도 건널 것이다/ 핏줄 속 숫자가 혈관 끝에서/ 머리카락처럼 막힌다/ 단단하게 뭉친 번호를 준 사람이 누굴까/ 아직 과거에 감금되어 있는가/ 아니면 카페에서 침묵을 새기는가/ 금성 라디오와 고장난 카메라/ 옷장을 열면 가난한 110볼트가 켜지고/ 자취방 그대가 저녁을 짓는다//

어둠의 풍경 / 김평엽
왜 있잖아 낡은 부엌의 돌쩌귀가 삭으면/ 암실에 갇힌 가마솥이 드러나고/ 풀무와 부서진 소쿠리, 사기그릇이/ 비로소 인화되는,/ 중국 연변의 어둠이 질척이는 야시장/ 듬성한 반찬 가게들/ 나는 가족에게 송금하러 나간다/ 물컹한 어둠을 밟으며/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데 잡동사니와/ 꼬깃꼬깃한 지폐/ 셈을 못하는 나에게 환전상이/ 계산하고 영수증을 써준다/ 너저분한 잔돈을 쑤셔 넣고/ 돌아가는 길, 토목공사로 채굴된 어둠이/ 성가싫다 바스러진 어둠을 넘으면/ 또다시 어둠, 돌아가야 할 집 없이/ 한 계집아이가 어묵을 먹고 있다/ 채소를 넣어 만든 거라고 한 점 권한다/ 맛있다, 살아서 죽은 이들이 먹는 것도/ 이와 같을까/ 모르겠다 어쩌다 어둠의 틀에 갇혔는지 아직은/ 호주머니에 잔돈이 있다는 것/ 한 떼의 나귀가 자박자박 지나간다/ 차마 익숙한 저것들//

간장독을 열다 / 김평엽
간장독 속에 어머니 들어가 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을 달인 말씀 그득 채우고/ 물빛 고요히 누워있다/ 세상에서 다지고 다진 슬픔들/ 덩어리째 끌안고 사뭇 숯물 되었다/ 손길 닿지 않은 깊이에서/ 덜 익은 상처 꾹꾹 눌러 매운 숨결 풀고 있다 씻고 있다/ 대바람 소리 밀물치는 뒤란/ 다소곳 가을 풍경 삭이는 어머니/ 세월 솔기마다 튿어낸 한숨, 그 위에/ 별빛 곱게 감침질 하고 있다/ 칠십 년 우려낸 세월/ 욱신거리는 것 한 바가지 퍼내고/ 생의 보푸라기 갈앉히고 있다/ 구름 조용히 베고 누운, 다 저문 저녁/ 이제야 정수리의 부젓가락 뽑아내고/ 응달 되어버린, 어머니/ 세상에 단풍서리 저리 곱게 물드는데/ 검게 삭은 애간장, 그 맑은 수면 건너는/ 내 울음 찬송가 보다 싱겁다 가볍다//

은갈치의 의미구조에 대하여 / 김평엽
수산시장 한 쪽 백열등 빼곡한 제 3구역에서/ 건장한 사내, 바다에서 갓 잡아온 은빛 문장을/ 흔들고 있다/ 한 옥타브 높은 떨림으로 값을 외치자/ 지나던 여자 고개를 끄덕이고,/ 사내가 싱싱한 구조에 대해 설명을 한다/ 먼저 칼끝으로 지느러미에 밑줄 그어/ 필수 성분과 부속 성분을 나눈 다음/ 각각의 성분에 대한 맛깔스러움을 일러준다/ 놓칠세라 여자 그 의미에 방점 찍어 암기한다/ 무를 넣고 졸이면 더욱 함축적일 거라는/ 사내의 말, 꿀꺽, 목젖으로 넘긴다/ 급기야 내려치는 사내의 칼날에 바다가 토막 나고/ 비명도 토막 나고/ 퍼렇게 질린 파도를 막 쓸어 담으려는데/ 도마 끝에 있던 대가리 툭/ 떨어져 큼직한 마침표 찍는다/ 잠시 후, 봉투를 건네받은 여자/ 퇴화된 지느러미 흔들며 떠난다 갈치는/ 알고 있을까 인간도/ 맛대가리 없는 몇 토막에 불과하다는 걸,/ 쓸쓸한 냄새 질질 끌며 그녀 가고 있다//

붉은 염전 / 김평엽
내게도 인생의 도면이 있었다/ 갱지 같은 마누라와 방구석에 누워/ 씨감자 심듯 꿈을 심고 간도 맞추며 살고 싶었다/ 바닥에 엎디어 넙치처럼 뒹굴며/ 아들 딸 낳고 싶었는데/ 돌아다보면 염전 하나 일구었을 뿐/ 성혼선언문 없이 산 게 문제다/ 선녀처럼 그녀를 믿은 게 문제다/ 정화수에 담긴 모든 꿈은 증발하고/ 외상의 눈금만 술잔에 칼집을 내고 있었다/ 알았다, 인생이란 차용증서 한 장이라는 것/ 가슴뼈 한 개 분지르며 마지막 가서야 알았다/ 소금보다 짠 게 계집의 입술임을/ 염전에서 바닥 긁는 사내들이여 아는가/ 슬픔까지 인출해 버린 밑바닥에서/ 누구의 눈물도 담보할 수 없다는 것/ 계집 등짝 같은 해안에 자욱이 되새 떼 내려/ 노랗게 우울증 도지는 현실/ 염전만이 소금을 만드는 게 아니다/ 우리 가슴을 후벼도, 아홉 번 씩 태운/ 소금 서 말 쯤 너끈히 나온다는 것//

개펄, 알몸으로의 그리움 / 김평엽
사릿날이다 나는/ 가장 촉촉한 몸이다 점성(粘性)만 남아/ 차진 어둠이다 속살이다/ 밑으로부터 선뜩선뜩 올라오는/ 되직한 욕망이다/ 한때 네 손마디와 놀아난 질그릇이다/ 눈물을 상감(象嵌)하고 돌아누운 파편이다/ 나직한 떨림이다/ 해진 살갗마다 물이끼 올라/ 길들여진 몸부림이다/ 다소곳 일렁이는 음란함이다/ 언제부턴가 네 낮은 음계에 대한 추억/ 입술과 손톱의 각도를 기억하는/ 상처다 아픔이다/ 그리움을 덧대 툭하면 풀어지는 붕대다//

그래요, 산다는 게 / 김평엽
그래요./ 산다는 게 다 그래요./ 당신을 내 전부로 생각했을 땐 몰랐지만/ 아, 그러나 허무해요./ 삶이 무료한 것인 줄 이젠 알겠어요./ 언젠가 추억처럼/ 당신이 말했지요./ 사는 게 다 그렇다고요./ 그래요./ 사는 게 다 그런 거예요./ 그저 망연히 앉아 부스러져 가는 시간을 바라볼 뿐./ 속삭임도 피곤해요./ 입맞춤도 귀찮아요./ 뜨락 위로 햇볕이 쌓이고/ 그 곁에서 우리가 졸아요./ 우리는 흔들리는 시간 속에서/ 이렇게 나른하게 졸다 가는걸요./ 그래요,/ 사는 게 다 그래요./ 주머니에 손 찌르고 떠나던 당신 마음도/ 다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