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를 넘기는 여자 / 김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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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23.

쌍꺼풀 없는 작은 눈, 야무지게 꼭 다문 입 그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흐트러짐 하나 없는 다소곳한 자세와 수수한 옷차림, 숨은 쉬고 있는 것일까? 내내 한 가지 톤을 유지하고 있는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서는 마치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다.

지인의 소개로 가게 된 첼로 독주회에서 나는 정작 첼리스트에게는 관심이 없고, 공연이 시작되면서부터 피아노 반주자 옆에서 악보 넘기는 일을 하고 있는 여자에게만 시선이 머문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놓칠세라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페이지 터너(page turner). 그녀가 하는 일의 정식 명칭이다.

악보를 넘긴다고 해서 넘순이, 넘돌이라고 쉽게 부르기도 한다. 독주곡의 경우에는 독주자가 악보를 완전히 외우기 때문에 악보 넘기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지만, 반주의 경우에는 곡을 외우기보다는 화성이 잘 어우러져야 하는데 신경을 써야 하므로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녀는 조명을 비껴 앉아 첼리스트를 제외하고는 반주자조차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겸손하게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한 악장이 끝나기 조금 전, 그녀가 조용히 일어나 반주자의 시야를 가리지 않게 악보 위쪽으로 왼손을 뻗는다. 악보의 오른쪽 윗 모서리를 살짝 꺾어서 다음 장을 약간 보여주고는 곡이 다음 장으로 진행되자 페이지를 넘긴다.

이럴 때 반주자는 악보 넘어가는 부분의 몇 마디를 미리 외워 놓는다. 뜻하지 않은 실수에 대비하기 위해서. 페이지 터너가 악보 넘길 타이밍을 놓치거나 잘못해서 두 장이 넘어가거나, 반주자가 박자를 놓치거나 하는 일은 언제고 일어날 수 있으니까, 누구나 긴장하면 실수를 하게 마련이지만, 그럴 때 당황하지 않고 둘 중 하나는 그 실수와 긴장을 잘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페이지 터너와 반주자와의 호흡은 그래서 그만큼 중요하다.

가끔 삐거덕거려도 서로의 마음을 잘 다독일 줄 알아야 하는 부부관계처럼 말이다. 세상에는 그녀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언젠가 영화배우 황정민은 남우주연상 수상소감을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라고 말하여 화제가 되었다. 함께 일하며 땀 흘리는 스태프들을 두고 한 말이다. 애정을 가지고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어디 이들뿐이랴, 오늘도 어딘가에서 가난과 타협하면서 한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기에 살맛나는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인은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들에게서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흐를 줄 아는 열정을 본다. 주인공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는 그들이 결코 시시해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산은 정상을 보고 오르면 오르지 못한다. 바로 한 계단을 보고 올라야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주연 아닌 조연으로서 바로 앞을 보며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그네들도 언젠가는 산의 정상에 설 수 있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온 내 눈앞에는 아직도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피아노 치는 여자와 하나가 된 그녀를 떠올리며 어설프게나마 그녀를 크로키해 본다. 자신의 일에 긍지를 느끼는 평온한 모습이 나를 밤늦도록 놓아주지 않을 것 같다.

지금 나를 이끌어주는 페이지 터너는 누구일까. 혹은 나는 누군가에게 페이지 터너 같은 존재이고 있는가? 화성을 무시하고 독주하려 들지는 않는가? 자꾸 되묻고 반성하고 싶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