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고침 / 김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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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2. 2. 26.

어제 나는 죽었다. 전원이 꺼져있었다. 오로지 하루만 기능하며 설치되고 삭제된다. 매일 화면에 떴다가 사라지곤 한다. 내 인격은 날마다 모양을 바꾼다. 그날 만난 사람들과 장소에 어울리는 코드를 택하여 조합되고 개발되며, 고쳐져 삶을 주무른다. 종일 가면일 때도 있고, 베일일 때도 있으며, 민낯일 때도 있다. 다름은 외형을 바꾸어 드러나지만,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장치들은 계속 에러 신호를 보낸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이기적인 삶은 누구나 살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편리함에 쉽게 현혹되지 못하고 불편함을 뒤척인다. 끝없이 편리한 자유에 경계를 그어가는 이타적 삶을 택한다. 그 버팀은, 자기 최면이다. 그것은 어쩌면 간단하다. 자기를 감추고 숨는 것이다. 비공개 설정이다. 내면의 텍스트는 변질되기도 하고, 아름답거나 추하게, 급하거나 느긋하게 자리를 바꿔가며 자신을 훈련하고 명령한다. 다중인격이다.

오프라인으로 공개된 것들은 남들이 볼 수 있는 부분이지만, 하드웨어 안쪽에 숨겨진 벽은 보이지 않는 영역이어서 자신조차도 열고 들어갈 수 없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나 경험에 이름을 붙이고 나름대로 평가한 기준으로 제멋대로 다가오기도 한다. 내 인간성은 잘 바뀐다. 하루는 원래의 모습에서 떨어져 나간 살점들이 많아 보기에 낡아 보일 수도 있고, 다른 날은 통통하게 살이 붙어 늘어나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때로는 복잡한 여러 색을 섞어 두텁게 화장을 한다. 가까운 곳이 아니면 서로 너무 멀어서 자세히 보지 못할 수도 있고, 어떤 모습은 그날만 유독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각자의 기준으로 판독된 어떤 지점에서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평가한다. 진짜나 가짜의 모습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겠지만, 어느 찰나에 고정시키거나 함부로 이름 붙일 수는 없다.

가끔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다. 소란하게 정신을 소모한 하루를 보냈거나 유난히 몸이 피곤할 때도 잠을 못 잔다. 일찍 나갈 일이 있어서 잠깐 눈을 붙여야 할 때는 더구나 긴장으로 그 짧은 잠을 놓치고 피곤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몸이 감당하는 육신의 언어는 그대로 기분이 되어, 잠을 제대로 못 잔 날은 새로 맞는 하루의 기쁨을 못 누리고 길고 지루한 어제를 지속하는 느낌이 된다. 정서의 내면에 그림자로 나타나는 자아는,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에 훨훨 날아다닐 때도 있고, 오해와 그늘 속에 고통스럽게 기어 다닐 때도 있고, 눈치를 보며 지옥에 엎드려 있기도 하고, 어떤 갑질에 깜짝 놀라 급하게 도망가기도 한다. 무슨 자만이나 자신감으로 여유롭게 팔짱을 끼거나 천천히 뒷짐을 지고 걷을 때도 있다. 만족스럽던 뒷모습은 때로 거만하게 뒤로 젖혀졌다가도 수시로 주눅 들어 돌돌 말려들기도 한다. 인격은 사방에 헝클어져 있거나 조각 난 토막으로 혹은 단단한 덩어리로 뭉치다 금이 가고 깨지기도 한다. 기분 좋을 때 혈관을 달리는 뜨거운 혈액은 신나게 끓어오르다가 하루가 저물기도 전에 싸늘하게 굳어 식기도 한다.

내일 나는 쓰임이나 용도에 맞게 요리되거나 날 것 그대로 주문한 세상에 놓일 것이다. 인격의 접시 크기로 내 모습은 결정될 것이다. 장소와 사람 사이의 신뢰와 긴장의 퍼센트에 따라 아마 다른 언어와 억양을 고를 것이다. 만나는 사람들의 온도에 따라 적당히 익힐 것인지 볶을 것인지 튀길 것인지 끓일 것인지 냉장될 것인지 냉동될 것인지 비위를 맞출지도 모른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때로는 내 의지가 아니게 전원이 뽑혀 오래 어느 구석에 처박혀지고, 크고 화려한 테이블 위에 꽃 장식을 곁들여 사람 많은 곳에 나를 틀어놓고 피로하게 종일 전시된 적도 있다.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거나 때로 방관되고 급하게 폐기되거나 쉽게 매장되기도 하지만, 내가 누군지 설명하거나 변명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살아간다. 눈치 없이 말이 많던 내 미련함은 나이 들수록 눈치만 늘어간다. 나이는 삶의 길이에 비례하여 탄탄하지도 질기지도 못하고, 싼값에 산 진주 목걸이처럼 자주 끊어진다. 순수한 열정들과 욕심은 알알이 흩어져 어느 바닥 좁은 틈으로 굴러 도망가고 없다. 가구 들어내듯 통째로 옮겨야만 바닥 저만치에 또르르 숨어 있다가 들켜버린 구슬처럼, 상실된 자아는 내게 다시 붙잡혀 올 수 있을까.

해지기 전에 도서관에서 원본 저자가 같고 역자가 다른 책 몇 권을 빌렸다. 제목을 조금씩 다르게 붙여놓았다. 한 사람이 쓴 글을 다른 이들이 자기 단어로 해석하는 일과 다른 언어로 된 느낌을 읽는 일은 특별하다. 내 이름을 아는 이들이 나를 번역하는 일도 사람마다 달라서 나는 여럿이다. 하나의 피사체로 드러나지만 날씨에 따라 혹은 마주친 시간과 앉은 거리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테니 그렇다. 무언가를 해석하는 언어는 자유롭다. 나는 내용을 읽기 전에 제목이 끌리는 책을 먼저 고르는 편인데, 내가 쓰는 인생에 삼고 싶은 제목은 무엇인지 마음에 드는 제목을 고르느라 시간의 페이지를 수없이 고쳐가며 늙어보는 중이다. 빌린 책을 안고 오는 사이 가슴에 책 냄새가 묻었다. 누가 만진 손자국과 커피를 흘린 페이지도 있어 책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 냄새를 맡는다. 누군가 수없이 빌려 갔다 돌아온 오래된 종이 냄새다. 책 주름이 낡아있다. 만든지 얼마 되지 않은 책에서는 덜 마른 잉크 냄새가 나지만, 낡은 책에서는 바람과 햇빛과 세상 먼지가 부패된 종이의 시체 냄새가 난다. 흔적이다.

언젠가 새 노트북 자판에 방금 끓여온 뜨거운 커피를 홀랑 쏟은 적이 있다. 구석구석 흘러들어간 커피를 닦아내고 말려 서비스를 받았지만 결국 못쓰게 되었다. 내가 스스로 쏟아 놓은 뜨거운 혈기들로 상한 내면도 가끔 비틀거리다가 시름시름 죽어 못쓰게 될 때가 있다. 누군가 내게 뜨거운 커피를 끼얹을 때도 있다. 그대로 데어 흉터가 생긴다. 나는 어김없이 고장 난다. 자주 변형된 자아는, 과열된 신경의 열선들과 저장된 말의 재료가 엉키거나 끊어져 도대체 알아볼 수 없을 때도 있다. 자신을 포장하는 방법도 날마다 달라서 만나는 사람에 따라 포장을 여러 겹 하거나 포장을 깔끔하게 뜯어내기도 한다. 수많은 얼굴 표정으로 말투와 자세로 모양을 고치고 헐어 새 존재가 된다. 그렇게 나는 하나의 제품으로 작동하며 기계적인 생명을 연장하고 진화한다. 그 진화는 점점 닳아빠진 틀에 부품만 갈아 끼워 겉만 멀쩡하다. 비용을 많이 들여 고쳐보지만 수명을 다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파일을 저장하지 못하고 심각한 에러가 생긴 노트북이 켜지지도 꺼지지도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작동이 멈춘 것이다. 나도 그럴 때가 있다.

나는 가끔 부재한다. 존재를 닫는다. 분명 있던 자리에 문득 사라지고 없는 것이 있다. 아무리 검색해도 페이지를 못 찾아 허탈할 때가 있다.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꼭 찾고 싶은 주소가 있다. 이백이십 볼트의 플러그를 꽂는다. 전원이 켜지면 아침을 로그인했다가 저녁을 로그아웃한다. 하루를 끄기 전에 열어본 페이지를 찾아 모두 삭제하고 새로고침 단추를 누른다. 새로고침은 흔적을 지우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내일은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으면 좋겠다.

'페이지를 새로 고치시겠습니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