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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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2. 5. 24.

권현형 시인
1966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강릉대 영문과 졸업.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박사 과정 수료.

1995년 《시와시학》 통해 등단. 시집 『중독성 슬픔』, 『밥이나 먹자, 꽃아』, 『포옹의 방식』이 있다. 2006년 한국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09년 제2회 미네르바 작품상,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수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숙명여대 등에 출강.

 



싸이나 / 권현형
눈망울 선한 남자가 앉아 있습니다/ 내 기억의 사진관/ 어둑어둑한 암실 의자 위,/ 막 열린 입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조카 아이 하나를 달고 온/ 분홍 스웨터 속 시리도록/ 흰 목을 훔쳐 봅니다/ 목조 계단을 급히 오르느라/ 숨 가쁜 처녀의 발그란 뺨을 따라/ 몰래 얼굴 붉히며/ 애타는 청춘처럼 새까만 커피에/ 말없이 설탕만 자꾸 타 넣습니다// 기다릴 수 없어 여자는/ 마음이 돌아섭니다/ 목덜미를 더듬은 손에/ 몸이 기우는 곳에 마음이 기웁니다/ 수줍음 많은 눈 큰 남자가 불쑥 찾아와/ 마당을 데굴데굴 구릅니다/ 꿩 잡을 때 쓰는 독극물/ 싸이나를 들고 와 먹고 죽겠노라고/ 사랑이 미쳐 날뜁니다 온 식구가/ 온 동네가 사랑을 함께 앓습니다//

바닥에 관한 성찰 / 권현형
저녁이 깊이 헤아려야 할 말씀처럼/ 두텁게 내려앉는 11월// 뱀은 껍질을 발자국처럼 남기고/ 숲으로 사라진다/ 얼굴은 들고 허물은 벗어놓고// 온몸의 발자국 같은/ 발자국의 온몸 같은 너의 껍질을/ 목간(木簡)처럼 받아 들고 나는 깨닫는다// 얼굴을 꼿꼿이 들고 낡은 몸을 버리고 숲속으로 사라진/ 너의 내성이 인류를 구하리라/ 바닥에 납작 엎드려 너는 자존심을 감추고 살아 있다// 관능의 화신으로 악마의 화신으로/ 돌팔매질당해온 너의 깊은 슬픔/ 바닥을 쳐본 너의 고통이 세계를 구원하리라// 짐승에서 인간으로, 짐승에서 인간까지//

일주일에 8일은 뒤로 걸었다 / 권현형
무엇을 그리워하느냐고 물었더니/ 명상중이라고 했다// 유리창에 얼룩진 그림자의 얼굴이 궁금했으나/ 계속 천천히 뒤로 걸었다 초봄의 해안에서/ 어느 우주 여행자의 그림자를 만났다// 뒤에서부터 한 소절 한 소절/ 당신을 지우며 걸었다/ 술래잡기하듯 내 눈을 시간의 붕대로/ 흰 면 수건으로 가리지는 않았다/ 이미 말의 체온이 식었다고 생각했으나// 다 걸었을 때 당신이 등 뒤에 있었다/ 뒤로 걸었기 때문이다/ 당신을 뚫고 내 등뼈를 뚫고 뒤로 더 지나갔다/ 체온이 식은 다음에도 고열은 후유증이 남는다// 고분 속의 어둠을 쓰다듬듯/ 오래전의 어둠을 쓰다듬어 본다// 눈 코 입이 제 자리에 있는지/ 숨어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국경을 넘어 세기를 넘어// 울고 있는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일주일에 8일을 뒤로 걷겠습니다/ 일주일에 8일을 사랑해드리겠습니다*//
* 비틀즈

어느 창문 애호가의 방 / 권현형
무화과나무의 가장 높은 곳은/ 특별한 허공/ 그곳에서 숨을 쉬어본 후 나무에/ 올라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창밖을 끝없이 내다보다가/ 모르는 목소리에게 야단을 맞았다/ “일하지 않고 뭐하니”/ 말보다 공기가 무거웠다// 또 하나의 단편은 세밀화로 그린/ 작은 상자 속에서 살았던 꿈/ 누가 부엌을 눈동자처럼 파 넣었을까/ 부엌이 없는 지하 단칸방을 구했는데/ 나중에 다시 가보니/ 없는 길처럼 없는 부엌을 그려 넣었다// 작은 상자 속 작은 상자 속 작은 상자/ 선이 살아 있는 부엌이 고맙고 좋았다/ 동굴 속 불빛 같은/ 부엌과 책상을 믿지 못해 계속 뒤돌아보았다// 분명 내가 거기에 있었나/ 창문 없는 심연처럼 거기에 있었나/ 피가 고여 있는 작은 상자를 길게 빠져나왔다//

누구냐고 물어보신다면 / 권현형
오늘 만난 숫자는 24, 26, 33// 숫자마다 뼈에 그늘이 고여 있다./ 누구냐고 물어보신다면/ 다른 이유로 심장이 두근거릴 것이다.// 수 시간 날아가 맞이한 저녁의 호치민은/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속도의 미로에서 릴라와디를 만났다./ 나무보다 멀리 있는 나무/ 길이 그득한 손금을 움켜쥐고 있는 나무.// 영화 속 가상의 사람들이 살아 있다./ 현실 속 가상의 사람들이 살아 있다./ 영화와 현실은 어쩌면 그리 잘들 살아남았는지.// 돌아오고 싶어 하는 사람과/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 돌아오지도 떠나지도 않은 사람.// 마지막으로 증명되는 B열은/ 결국 자기애다/ 자기애가 B열이라니// 33은 숫자라기보다 하얀색 그리움/ 맹세해도 된다면/ 아름다움이 늘 전복적이기를.//

젖은 생각 / 권현형
마른 빨래에서 덜 휘발된 사람의 온기,/ 달큰한 비린내를 맡으며 통증처럼/ 누군가 욱신욱신 그립다/ 삼월의 창문을 열어놓고 설거지통 그릇들을/ 소리 나게 닦으며 시들어가는 화초에 물을 주며/ 나는 자꾸 기린처럼 목이 길어진다/ 온 집안을 빙글빙글 바람개비 돌리며/ 바람이 좋아 바람이 너무 좋아 고백하는 내게/ 어머니는 봄바람엔 뭐든 잘 마르지 하신다/ 초봄 바람이 너무 좋아 어머니는/ 무엇이든 말릴 생각을 하시고/ 나는 무엇이든 젖은 생각을 한다//

최초의 사람 / 권현형
챙이 커다란 청모자를 쓴 아이가/ 제 동화책 속에서 걸어나와/ 검정 에나멜 구두로 땅을 두드린다/ 최초의 사람인 듯 최초의 걸음인 듯/ 갸우뚱 갸우뚱 질문을 던지며 걸어다니다/ 집을 나와서는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 봄의 부랑자들,/ 길바닥에 떨어져 누운 꽃점들을 두고/ 차마 지나치지 못하여 한참을 서 있다가/ 바르비종 마을의 여인처럼 가만 무릎을 꿇는다/ 이삭 줍듯 경건하게 주워올려 본래의 둥지/ 나무 가까이에 도로 놓아준다 방생하듯/ 봄날의 바다에 꽃의 흰 꼬리를 풀어 놓아준다./ 꽃 줍는 아가야, 환한 백낮에 길 잃은/ 한 점 한 점을 무슨 수로 네가 다 거둘 것이냐/ 몸져 누운 세상의 아픈 뼈들을 무슨 수로/ 일으켜 세울 것이냐 한번 떨어져 나온 자리로는/ 다시 돌아갈 길 없다/ 네가 옮긴 첫발자국이 그토록 무겁고 서러운/ 질문이었음을 기억하거라//

어떤 콤플렉스 / 권현형
벌리지도! 오므리지도 못하고!/ 카메라 앞에 서면/ 또 주눅이 든다 묘하게/ 일그러진 입, 입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내 상한 영혼의 늑골/ 마디마디 속속들이/ 드러낼지도 몰라 그럴지도 몰라/ 위 옆 어딘가 징그럽게/ 매달려 있을 슬픔의 덩어리/ 찬찬이 또렷이 찍어낼지도 몰라// 그럴지도! 몰라! 삼류 극장의 어둠 속에/ 몰래 버리고 오고 싶은/ 욕망의 심줄 창살처럼 드러낼지도 몰라/ 섬뜩하게//

분홍 문장 / 권현형
당신 눈이 깊어 레바논 우물 같다/ 꽃뼈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손가락을 뻗는다// 다른 이의 무릎을 함부로 베고 누울 순 없다// 밤새 격렬하게 비바람이 불었고/ 아침나절 강물의 얼굴이 궁금하다/ 조약돌 위에 이름 모를 짐승의 내장이/ 생의 군더더기 없는 형해 形骸처럼 남아// 꽃을 자루째 털린 산벚나무가 하루 사이/ 폭삭 늙어 있다 다른 길이 없다// 꽃은 인간을 닮아 있고/ 인간은 남의 가슴을 파고든다/ 간밤 어디론가 사라진/ 분홍 몸피의 다급한 문장이 궁금하다// 어쩌라구 어쩌라구, 그런 말이었을까/ 끝에서라도 끝에서라도, 그런 말이었을까//

실용적인 독서 / 권현형
책을 읽겠다고 매일 타던 자전거를/ 고삐처럼 매어놓고 내려왔다/ 책은 무슨 책, 바닷가 여관/ 비릿한 아랫목/ 똬리를 틀고 한 사나흘 앉았으니/ 남의 살 생각이 간절하다/ 시집 위에 냄비째 올려놓고/ 라면 먹을 때도 계란 생각/ 장자 위에 밥솥째 올려놓고/ 맨밥 먹을 때도 고기 몇 점 생각/ 창틀에 턱 올려놓고/ 밤새 바라보는 파도가/ 젖은 아랫도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읽히기도 한다/ 생각은 생각을 낳는다/ 두꺼운 책일수록 실용적이다/ 책을 읽겠다고 매일 타던/ 소를 잡아 먹는다//

서점의 F칸 / 권현형
무엇보다도 슈만의 저녁의 노래가/ 듣고 싶었다/ 서점의 F칸에서 고전 철학자의/ 강의록을 집어든 순간// 고조곤히 웅크리고 앉아있던/ 사람의 둥이 기억났다/ 많은 말을 갖고 있던 뒷모습이 그리운 저녁// 그곳에 목소리를 두고 왔다/ 모래를 헤아리는 손가락을 두고 왔다/ 맞은편 열린 창문으로/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딨니? 어딨어?// 내가 흘린 목소리 같았다// 사람이 사람을 그토록 오래 기다릴 수 있을까?/ 흘러내리지 않고 녹아 없어지지 않고/ 기다리라는 말의 환각, 무게, 향기, 먼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고아가 된다/ 알코올 때문이라기보다 수전증을 앓고 있

는 것처럼/ 추운 얼굴로 떨고 있던 손, 사로잡힌 순간/ 어떤 풍경은 눈에 넣고 있어도 아프지 않다// 정치적 이슈가 깃발과 함께 일상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일요일 오후/ 도시의 한복판에서 사랑을 선언하는 이가 있다// 기다리겠다는 말의 환각, 무게, 향기, 먼지/ "따뜻한 불빛처럼 쬐고 있을게요”/ 신념보다는 선물처럼 건너온 문장에 평생을 사로잡혀 살게 된다//

유마힐의 ‘안녕’ / 권현형
우연히 서점 구석의 구석에서 발견한 좋은 책처럼/ 먼지와 함께 밤마다 지구를 반 바퀴만 걸어보고 싶다/ 나머지 날들은 어쩌면 좋을까/ 찔끔 더 용기를 내보고 싶다// 구약을 넘어 낚시용품 전문점까지/ 달려오고야 마는 파란 말의 발바닥에는 잔금이 많다/ 잔금이 많은 발바닥은 가고 싶은 길이 여럿이라/ 부서지기 쉬운 운명, 떠돌이 행성의 운// 개미가 새까맣게 뒤덮인 쉰내 나는 밥덩이를/ 물에 말아 꾸역꾸역 입으로 가져가던 손을 기억 속에 숨겼다/ 어째서 엄마가 골라 사주는 과자는 언제나 맛이 없었을까/ 싫다고 맛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심지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모든 사랑에서는 그을음 냄새가 난다// 사랑의 가운데 있을 때는/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해님도 자신이 해바라기 꽃의/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자신의 손목과 발목에 쇠사슬을 매달고/ 누군가 심해로 가라앉으며 세상의 안녕을 빌었다/ 좀 더 용기를 가졌던 유마힐처럼/ 한 홉 두 홉 너무 작은 그릇으로만 사랑을 측량하지 않겠다//


타자(他者) / 권현형
새로운 연애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면,/ 예감 때문이라면, 밖이 너무 사납다/ 어둠의 수위가 너무 높다// 낮에 지인이 울음을 타전해 왔다/ 격렬한 사월의 비바람이 보낸 문자, 내가 싫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젊은 날은 엉망이었다/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눈으로 봐선 안 될 것 같아 금기같아/ 커튼을 닫고 창을 닫고 귀로만 듣는다// 뼈가 다 드러난 울음의 앙상한 등을 쓰다듬고 있는/ 앙상한 손가락은 자기 자신의 것이리라// 아무래도 바람이 입을 갖고 있는 듯하다/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자/ 밤마다 짖던 개도 새도 왕벌도 다 조용하다// 꽃을 깎고 나무를 깎고 돌을 깎는 울음을 듣고만 있다//

궁금했다, 너는 아름다운 생각만 하니? / 권현형
벽에 가닿는 오후 햇살이 소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던 너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 지나온 여러 생을 위해 기도할지// 화를 잘 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지/ 궁금했다, 네 눈처럼 너는 아름다운 생각만 할까// 세상에서 제일 작은 사원에/ 촛불 두 개만 켜놓고 소원을 빌 거다/ 듣는 귀가 멀리 느껴진다면/ 사원의 벽에 바로 속삭이면 되겠지/ 벽이 알아들으면 다 이루어질 거다// 벽 쪽을 향해 벌서듯 오래 함께 서 있자/ 석양이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질 때까지/ 모든 길을 다 걸어, 모든 길을 다 잃어/ 하고 싶은 일은 아름다운 찻잔으로 차를 마시는 일// 야크의 젖으로 만든 버터와 소금을 넣어 끓인/ 수유차를 너와 함께 마시는 일/ 찻주전자가 아름다운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 그늘이라고는 한 점도 섞이지 않아/ 지독하게 파란 페인트를 낡은 나무 대문에/ 절반만 칠하고 게으르게 살고 싶다/ 색감이 밝은 옷감처럼 웃음의 뼈까지/ 명랑한 웃음소리를 갖고 싶다 오늘처럼 인생이 초라한 날은//

첫눈을 소포로 받아 들고 / 권현형
흰 소금이다/ 지나치게 달콤한 독약이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의 한 구절이다// 첫눈을 받아들고/ 소주 한 방울에 라면 국물만으로도/ 행복, 행복, 행복해서 서글프다/ 나만으로 행복했으므로 내게 항복할 수밖에// 눈이 오길 기다렸다가 운 날, 웃은 날/ 눈 내리는 숲을 받아들고서 비로소/ 마음속이 뜨거운 고요로 얼어붙었다//

내일 오후까지는 사랑에 빠져 있을 거야 / 권현형
생을 껴안은 손이 우기에도 싱싱하게 살아 있기를/ 조각이 식물로 살아 있기를/ 어쩌면 내일 오후까지는 사랑에 빠져 있을 거야/ 내면이 강한 사람의 턱선을 일기 예보처럼 믿기로 했다// 꿈같은 날이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포옹하는 손목의 주름이 너무 생생해/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를 믿었다// 장화를 신고 외출한 덕분에 하루 종일/ 빗방울 속에 갇혀 있다가/ 두터운 음악사를 읽는 사람의 흰 와이셔츠와/ 사랑에 빠질 뻔했다/ 흰 건반 위 빗방울을 따라갈 뻔했다// 매운 소스가 잔뜩 들어간 음식을 먹은 다음의/ 일 분 일 초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얼얼했다/ 여름의 한가운데가 이토록 얼얼하다니/ 멀리 보이는 교각의 역사까지 교훈으로 삼을 때가 있다// 기록으로 다 남기지 못했으나/ 지독하게 사랑한 기억을 갖고 있다면/ 치열하게 참전한 기억을 갖고 있다면/ 오늘은 고색창연한 하루/ 집으로 가는 길과 반대 방향의 전철을 타고 가는 길//

이브레아까지는 너무 멀다* / 권현형
너는 창백하지 않아 소나무 유령아/ 가파름을 넘는 힘은 어디서 오나/ 금관에서 흘러오는 목소리를 멀리서 들으면/ 아득해진다 야간 기차를 탄 기분으로// 밤의 공기가 달착지근해진다/ 창문 가까이 트럼펫 가까이 하숙하며 지내던 그때/ 햇볕이 사라진 골목에 자주 사로잡혔다// 빛과 어둠 사이 은밀한 시샘으로/ 반대편의 취향과 언어로 끝없이 구애한 적 있다/ 피아노를 치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던 손가락을/ 편지 쓰는 일에만 바친 적 있다// 한 자루에 다 담을 수 없는 솔방울 향기를/ 탐닉한 사냥꾼은 시간에 빠진 사랑이었을 것이다/ 발바닥 가운데까지 심장이 박혀 있던 나이// 터키 원석 세공사나 색감 좋은 원단의 이름을 부르듯/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던 저녁과 함께/ 너와 함께 전력으로 걸어왔다, 창백한 소나무 유령아/ 온종일 낙숫물을 받았던 네 손바닥에서 녹내가 난다// 너는 언젠가 날아다닌 적이 있을 거야/ 증표처럼 남아 있는 수많은 잔 날개들/ 수많은 초록 바늘들, 가파름을 넘는 힘은 어디서 오나/ 눈이 내리면 밖을 내다보는 것을 좋아하던 우리들의 습관//
* W. G. 제발트

존경하는 나의 애플민트 / 권현형
내 식물도 대성당 크기의 빙하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애플민트와 여름 한 철 동거한 적 있다/ 귀한 새를 머리에 이고 다니듯 애착했더니/ 줄기가 부러졌다/ 잎은 있으나 뿌리는 없는 줄기와/ 뿌리는 있으나 상흔을 머리에 이고 있는 줄기를/ 유리병에 함께 꽂아 두고 날마다 물을 갈아 주었다// 간절한 발은 기어코 걷는다/ 맨몸에서 뿌리가 생긴다/ 부러진 자국을 감출 길 없었던 줄기에서/ 잎사귀가 조그맣게 돋아나더니 며칠 만에 넓적해져/ 제 잎사귀로 상처를 가릴 수 있게 되었다// 선으로만 이루어진 식물의 몸이/ 어떻게 분열했고 복원되었는지/ 정신분석 하기 어렵다, 몸이 갈라지면서/ 이명을 앓았을지도 모른다// 알프스 산악 지대의 대규모 빙하가/ 녹아내릴 수 있다는 소식을 새벽에 듣는다/ 21세기 뉴스는 이토록 잠언적이다/ 식물의 트라우마는 이토록 잠언적이다// 짧은 여름, 전력을 다해 살아 있는 식물을 존경한다//

장미의 생활 / 권현형
심장이 얼얼하도록 사랑했던 사람을 위해/ 꽃 대신 파를 한 아름 산다/ 시나몬 비스킷에서 분필 냄새가 나는 정오/ 고공으로 흩어져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말의 심사를 이해하게 된다// 읽히지 않는 눈빛/ 본 적 없는 얼굴에 사로잡혀 있다/ 유의어라는 것에 관해 이제 조금 알겠다/ 어떤 성인은 아름다운 얼굴을 잊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맨몸으로/ 장미 가시덩굴 위를 뒹굴었다고 한다// 희생이라고도 하고 사랑이라고도 하는 행위를/ 굴곡이 많은 장미는 철학적이다/ 꽃잎 가장자리마다 에둘러 피어나는/ 신성과 세속의 이중생활// 지난 계절의 폭우까지 기억난다/ 지난 계절의 가시까지 기억난다/ 미농지 두께로 손톱이 얇아져서/ 나는 나를 할퀴고 있다// 내면에 고통이 쌓이면 바깥의 높이가 무의미하다//

그 햇볕같이 예쁜 주홍 꽃을 어디 심었더라 / 권현형
맑은 귀를 가진 여름비에 대한/ 하나의 해석으로 보였다/ 통증은 좀 어떤지 걱정하던 너의 눈빛은// 깊이를 재듯 가만가만 비가 왔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비가 오는 날은 아픈 곳이 더/ 반짝인다, 턱뼈가 명징하게 아프다/ 조상의 조상부터 앓아온 통증이/ 진화를 위한 필연이라면 뭐// 지나치게 무겁게 앓지 않을 것이다/ 고질이 사람을 우아하게 만들기는 어렵지만/ 격언풍이 아니라면 검정도 빛이 있다/ 사랑은 여전히 진화중인 동물의 시원// 일찍 집에서 걸어 나온 일은 잘한 일이다/ 달아났더니 집이 좋아졌다/ 여섯 살부터 가출해 해안선을 따라 걸었더니 이곳// 길이 조금 늙어가거나 낡아갈지라도/ 여름비는 얼굴을 지우지 못 한다/ 뜨거운 이마를 식히지 못 한다/ 고질적인 따뜻함으로 여름비 오는 날// 너는 밤새 차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오는 날의 선물/ 그 햇볕같이 예쁜 주홍 꽃을 어디 심었더라(?)//

꽃피는 만덕 고물상 / 권현형
살구나무가 시시각각 살구꽃을/ 맛있는 농담처럼 몸피 밖으로 쬐끔씩/ 밀어 내보낼 무렵 꽃필 무렵/ 살구나무가 건너다보고 있는/ 주문진 시내버스 정류장 앞/ 만덕 고물상에는/ 꽃 냄새가 고물로 마당 그득 쌓이는 중/ 사월 초순인데 어린 사내아이는 벌써/ 풋살구알이 매달린 아랫도리를/ 드러내놓고 마당의 고물 사이로/ 우그러진 세 발 자전거를/ 몰고 다닌다 그보다 굵은/ 두 알 세 알의 아이들이/ 시큼텁텁한 살구 냄새를 풍기며/ 뛰어 다닌다/ 젖이 크고 엉덩이가 둥근 여자가/ 쓸만한 물건처럼/ 폐물 어딘가에 숨어 있다/ 쪽문으로 걸어 나와 마당이 출렁이도록/ 분주하게 제 새끼들을 거둬 모아/ 숨은 보석처럼 다시 사라질 때까지/ 살구나무와 젖 큰 여자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낮마다 밤마다 눈마중해서/ 낳은 아이들이 꽃피우는/ 만덕씨네 고물상회//

튜울립처럼 단순한 것 / 권현형
비 온 다음날/ 튜울립 화분 두 개를 사다 놓았다/ 처음엔 시골서 전학 온 아이처럼/ 입 꼭 다물고 서 있더니/ 베란다 한켠에 맨숭맨숭 말똥말똥 서 있더니만/ 햇살이 목덜미라도 간지럽히는지/ 바람이 이마에 알밤이라도 한 대 먹이고 지나가는지/ 제법 이마를 서로 맞부딪쳐보기도 하고/ 입을 쩍쩍 벌리기도 하고/ 저희들끼리 장난질이 늘어간다/ 유년 시절 나의 화첩에 유일하게 그려 놓았던/ 꽃,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서 그리기 좋았던/ 튜울립 두 녀석 우리집에 한 일주일 다녀갔다/ 아이들처럼 집안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는//

밥이나 먹자, 꽃아 / 권현행
나무가 자궁을 여는 순간/ 뜨거운 핏덩이가 뭉클 쏟아지듯/ 희고 붉은 꽃떨기들이/ 허공을 찢으며 흘러나온다// 봄 뜨락에 서서 나무와 함께/ 어질머리를 앓고 있는데 꽃잎 하나가/ 어깨를 툭 치며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만개한 꽃 속에서 듣는다// 오래전 자본론을 함께 읽던/ 모임의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그 큰 키가 어떻게 베어졌을까// 촘촘히 매달려 있던 꽃술들이 갑자기/ 물기 없는 밥알처럼 푸석푸석해 보인다/ 입안이 깔깔하다/ 한번도 밥을 함께 먹은 적 없이/ 혼자 정신을 앓던 사람아 꽃아// 모를 일이다 누가 아픈지/ 어느 나무가 뿌리를 앓고 있는지/ 꽃아, 일없이 밥이나 먹자/ 밥이나 한 끼 먹자//

복숭앗빛 한숨이 입안 가득 고였다 / 권현형
눈 뭉치를 입에 넣었던 기억처럼/ 복숭앗빛 한숨이 입안 가득 고였다/ 비문으로 가득했던 순간들// 새벽까지 공복에 춤을 추었다/ 마당의 별을 끄기 아까워/ 오래 밝은 어둠 속을 서성였다/ 지구의 별지기가 된 천문대의 하루// 별 숭어리를 입에 넣었다/ 눈썹이 짙은 어둠의 냄새가 났다/ 선으로 분간할 수 없는 덩어리들은/ 보는 순간 울컥 연민이 생긴다// 춤이라기보다 느릿하게 조금씩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는 나 도한 하나의 덩어리로 보였을 것/ 분명 어둠 속에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여름의 숲/ 여름 나무를 흉내 내보았다// 상심의 순간에도 살아 움직이는 점, 선, 면/ 울며 뛰쳐나가는 뒷모습의 속도를 생각해 보았다/ 너 없이 안 된다고 말하지 못한 말의 시차// 결핍이 만개한 여름 하루를/ 만난 적 업 t는 인연까지 그리워하며 보냈다//

참선 / 권현형
봄나물 다듬듯 빨래를 갠다/ 볕 잘 드는 창가에 나가 앉아/ 속옷은 속옷대로 양말은 양말대로/ 씀씀이대로 정리한다 가지런히// 보기 흉하게 제 성깔대로 마구 접힌/ 주름은 찬찬히 펴 준다/ 간혹 우울처럼 집요하게 달라붙는/ 보푸라기들은 단호하게 뜯어낸다, 털어버린다// 세제로 찌든 때를 씻어 내고/ 햇볕에 널어 말린/ 빨래의 새 살은 참 말갛다// 봄나물 다듬듯 빨래를 갠다/ 볕 잘드는 창가에 앉아/ 내 안의 어둠을 솎아 내며//

눈에 관한 음반을 눈 오는 날 듣는 사람 / 권현형
종종 담배와 커피잔 귀를 동시에 손가락에/ 끼운 채 유능하게 책을 읽고 싶기도 해/ 10원짜리 사탕, 10원짜리 죄의식/ 나의 오렌지색 기억은// 다 저녁때 문득 크레인도 없이 고공75cm/ 굴뚝 다락방까지 맨몸으로 기어 올라간다// 타자기 속 글씨체는 지금보다 동그랬던 것 같아/ 할머니 한복천 자투리까지 잉여는 드물던 무렵/ 가난의 꽃무늬 자투리 천으로/ 긴 머리를 묶고 다니기도 했다// 봉지 쌀 심부름을 했지만 빨강 구두를 신고 다녔다/ 어디서 얻어 신었다기보다 그때그때 가진 돈의/ 전부로 사 신었다고 거짓말하고 싶었다// 친구네 구멍가게 장판 바닥에서 우연히 발굴한/ 10원짜리 동전으로 무얼 사 먹었더라/ 10원짜리 동그란 죄의식을 사 먹었다/ 죄의식은 설탕에 절여져 뼈를 약하게 만들었다// 눈사람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았다/ 눈에 관한 음반을 사두었다가/ 참고 기다렸다가 눈 오는 날 듣는다고 했다// 비에 관한 음반을 사두었다가/ 비 오는 날 듣는다고 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당신에게서 더 들을 말이,/ 더 들은 다른 말이 기억나지 않았다// 당신이 그린 눈사람처럼 나도 그런 제목을 가진 사람/ 뼈가 약하거나 철골이 필요한 사람// 그러나 종종 담배와 커피잔 귀를 동시에 손가락에/ 끼운 채 유능하게 책을 읽고 싶기도 해/ 나도 사실은 눈에 관한 음반을 참고 기다렸다가/ 눈 오는 날 듣는 사람// 비에 관한 음반을 참고 기다렸다가/ 비 오는 날 듣는 사람/ 아름답다는 말의 허기로 뱃속을 채웠다네//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을 음악을 함께 듣는 건 어떻습니까 / 권현형
그냥 하루에 한 스푼씩 함께 걷고 싶습니다 오래된 서점이 있는 구시가지로 걸어 내려가 한 손에 쥘 수 있는 병맥주를 함께 홀짝이며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을 음악을 듣는 건 어떻습니까 요절한 가수의 음반을 골라 듣는 건 어떻습니까 철부지처럼 절기가 잘 표시되어 있는 달력을 동그랗게 말아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눈을 가두고 손을 가두고 동그라미 속에서 소용돌이 속에서 당신의 눈이 뜨거운 고요를 감추느라 복잡해지는 걸 놓치지 않고 볼 것입니다 모른 척 나는 당신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태풍의 눈 속에 갇힐 것입니다 꽃사과 향기가 휘발될 때까지, 탁자에 마시던 물 컵을 반쯤 남겨두고// 당신을 반쯤 남겨두고 그늘에서 벗어나듯 택시를 타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들으면 마음이 아파지는 음악을 함께 시대의 소란 속에서 들을 것입니다//

금요일 저녁의 위로 / 권현형
버마 망명 시인이 유리잔에 소주를/ 따르고 스스로 마신다/ 술잔의 각도를 꺾지 않고 직선으로// 견디는 이방의 한 방식을 지켜보다가/ 그의 심장에 페이소스가 들어 있는 듯하다고/ 나는 비문으로 위로했다/ 예스, 깜박이는 큰 눈이 젖어 있다// 어쩌다 이국의 망명자와 마주한 탁자/ 이분의 일의 가능성을 숙고하듯/ 政府대신 情婦를/ 망명 중인 사랑을 생각한다// 당신을 보면 심장이 아픕니다/ 아프리카어로 구애를 받은 적 있다/ 그에게서 풀냄새가 났었다// 누구나 망명의 시간을 갖는다/ 온몸을 풀로 베인 사람처럼/ 모든 것을 눈으로 말해야 할 때/ 붕대를 감은 금요일 저녁이 천천히 지나갔다//

봄밤, 냄비에 돌을 끓여 먹었다 ㅡ돌과 라일락과 관제엽서 / 권현형
꽃을 보면 신을 믿게 된다/ 아름답고 아슬아슬한 저 미궁을/ 누가 무슨 수로 발명할 수 있을까// 라일락을 만나면 숨을 멈추고 꼭 들여다본다/ 몸 어딘가 욱신거리는데도 한 발짝 다가가/ 연보라 커튼 안쪽 과거를 기어코 들춰보게 된다/ 세 들어 살던 그 집 마당에 두 그루 라일락이 서 있다// 내 것이 아니었던 흰색과 보라색/ 공기의 향연은 가난한 봄의 절정이자 파국이었음을,/ 비가 오면 짙은 향기 때문에 더 허기가 졌다// 꽃은 엽서였고/ 벼랑이었고 자존심이었다/ 나대신 끝없이 말을 걸어주었다// 여즉, 봄밤마다 날개도 없이 시베리아에서 아프리카까지/ 따뜻한 돌을 찾아 날아간다/ 냄비에 차가운 돌을 넣고 끓여 먹는다//

봄 꽃나무 아래 서면 / 권현형
여자가 남자의 머리를/ 가슴 깊숙이 끌어 안았을 때/ 내는 따뜻한 구음 쉬이잇! 쉬이잇!// 한 몫으로 남자 몫까지/ 두 몫의 아픔을 혼자 견뎌낼 때 내는// 바람소리 바람의 울음 같은/ 물소리 물의 울음 같은// 흰 라일락 꽃피는/ 흰 라일락 꽃지는// 가만 가만 누군가를/ 한없이 달래는 소리//

봄이 올 때까지 내가 싫었다 / 권현형
양쪽 눈에 다래끼가 나 있었고/ 겨우내 채도가 낮은 색감의 모자를 뜨개질하여/ 두통을 앓았다 봄이 올 때까지 내가 싫었다// 설거지통 가득 스민 어둠/ 벽에 스민 어둠/ 냉장고에 스민 어둠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어둠에 잡아먹히면 약도 없다/ 어둠에 잡아먹히면 물도 없다// 시내버스의 쇠 손잡이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창 너머 바다에서는 쇳내가 올라왔다/ 한꺼번에 날아오른 기분으로/ 한꺼번에 주저앉은 기분으로// 아我를 버리고 부피를 줄인 갈매기들은/ 재생지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며/ 아침과 저녁이 다른 바다의 지도를 고쳐 그렸다// 이따금 선술집 문간에서 맥주를 마시며 웃고 떠드는/ 남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갈매기 무리 속에는 술꾼도 있고 어린애도 있다// 아침 기분과 저녁 기분이 다른 300번 버스는/ 살고 싶다거나 살고 싶지 않다거나/ 감정의 기복을 싣고 해안선을 빙빙 돌아다녔다//

옆모습 / 권현형
옆얼굴은 전생이 스쳐지나가는 길// 옆에 앉아 네 고통을 읽었다/ 눈 밑에 상처가 나 있었다/ 벼랑 끝에서 돌아왔다고/ 돌아오느라 자신과 조금 싸웠다고 했다// 전생과 자욱을 생각하는 동안/ 오후 세 시의 햇볕은 예각을 눕혀/ 사물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있다// 옛 격전지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성 밖 진흙 해자에 엎드린 유골엔/ 뇌수가 차 있었다는데 뒤통수에/ 화살이 지나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는데// 치열한 싸움의 흔적, 상처의 뇌수는 관계가/ 정교할수록 깊이 파고들수록 오래 남는다/ 수백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머리 위 여름 솔의 열매가 싱그럽다/ 푸른 살을 이로 깨물면 아프다고 하겠지/ 살아 있을까 소나무 그늘 사이로 멀어지는// 너의 뒷목이 가늘고 말갛다 가랑비(雨) 발목 같다/ 혹 너의 전생은 비였을까/ 전생을 생각하다 너를 놓쳤다/ 그렇게 오래 자욱이 남을 줄 모르고//

짜오프라야 도서관 / 권현형
도서관 창밖으로 눈발이 민들레 갓털처럼 흩날린다/ 몇 년 동안 쓸까말까 망설이던 편지를 쓴다/ 봄마다 담배를 끊는 당신께/ 의자에 앉기 전 인사부터 하는 당신께/ 소한小寒에 이삿짐을 싸는 당신께// 경계성 자폐를 앓고 있는 짙은 당신 때문인가/ 도서관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서러워진다/ 두렵다 언어가, 입 밖으로 내보낸 적 없는 어둠/ 도서관에 앉아 종신형의 사랑을 생각한다// 새해에 뽑은 타로 카드 속 주인공은/ 어둠 속에서 혼자 등불을 들고 가고 있었다/ 가슴 가득 책을 껴안은 여자/ 거처를 묻는다면 대답할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책 속에서 자는 게 편해요 나는 책 갈피갈피마다 살아있어요// 도대체 책은 어디에 있을까 공기와 빈 상자가 서고 가득 쌓여 있는/ 짜오프라야 도서관은 짜오프라야 강가에 있다/ 책을 펼칠 때마다 활자 대신 모래가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나는 모래 위에 앉아 편지를 마저 쓴다 엉킨, 비밀의, 눈물 고인,/ 캐스터네츠, 어쿠스틱 기타, 경계를 앓고 있는 당신께//

달콤한 인생 / 권현형
이마 흰 사내가 신발을 털고 들어서듯/ 눈발이 마루까지 들이치는/ 어슴푸른 저녁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마루에 나앉아/ 밤깊도록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설탕을 타 마신 막걸리는 달콤 씁쓰레한 것이/ 아주 깊은 슬픔의 맛이었습니다/ 자꾸자꾸 손목에 내려 앉아/ 마음을 어지럽히는 흰 눈막걸리에 취해/ 이제사 찾아온 이제껏 기다려 온/ 먼 옛날의 연인을 바라보듯이/ 어머니는 젖은 눈으로/ 흰 눈, 흰눈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초저녁 아버지의 제삿상을 물린 끝에/ 맞이한 열다섯 겨울/ 첫눈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며/ 나는 다가올 첫사랑을 기다리며/ 첫눈 내리는 날이면/ 댓잎처럼 푸들거리는 눈발 속에서/ 늘 눈막걸리 냄새가 납니다//

연인을 앞에 두고 연인을 생각하는 버릇 / 권현형
집에 들어가기 싫어/ 지구를 배회하며 자전하는 어른처럼/ 그림자는 목이 길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버릇일까/ 시간을 앞에 두고 시간을 상상하는 버릇/ 연인을 앞에 두고 연인을 상상하는 버릇// 슬픔이 건들거리는 걸 보니 가을인가보다/ 연인과 시간에게 미안해하며/ 나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건축물의 진입로와 골목,/ 관계의 각을 빠져나왔을 때/ 비로소 생이 실감난다/ 모든 사랑이 과거였음이 실감난다// 양자역학이나 AI, 우주의 수많은 행성들/ 파노라마처럼 번지는 빛과 파멸을 이해하느라/ 두통이 찾아왔으므로 전생에 대한 상념에 빠지지 않았다/ 결국 숫자 0을 발견한 수학자가 옳았음을// 긴 세월에 걸쳐 내게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연인을 앞에 두고 연인을 그리워하는 버릇 때문에//

중독성 슬픔 / 권현형
어느새 심부름 길은 저물어/ 할머니도/ 끝없이 뇌신을 채워 넣던 서랍도/ 그 길 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할머니? 어쩌자고/ 이젠 …뇌신이 …제게 뇌신이 …필요해요/ 어릴 때부터 닦아놓은 길/ 악마 같은/ 슬픔에 중독되어 버렸거든요//

두터운 요리책을 네게 선물하고 싶다 / 권현형
곧 사라질 가녀린 그리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네게 주고 싶다/ 두터운 요리책을 네게 선물하고 싶다// 삶은 감자가 조금 비리고 아렸다/ 구운 고등어 탓이기도 하겠으나/ 읽기만 해도 상처가 되는 문장을 간밤에 읽었다// 유리 구슬을 한 사발 담아 온/ 겨울의 정원, 물끄러미/ 음악을 듣다가 체할 뻔했다/ 물끄러미는 지느러미, 안녕 나의 흰 지느러미// 흰 빛은 모든 파장을 담고 있는 색/ 먼지와 먼지 사이에 있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의 눈을 잠시 예의를 갖춰 들여다보았다/ 잠시 우산을 들고/ 잠시 꽃을 들고 잠시 모자를 들고/ 수백 년 된 창문들이 말을 거는 곳// 맑은 말에도 돌을 할퀴는 예리함이 있다/ 겨울의 정원에 입문하며/ 고독이 인간을 타락시키지 않는다는 믿음을 버렸다//

시켜 먹는 밥 ㅡ시켜 먹는 밥은 외로운 공연과도 같다 / 권현형
주워 온 가리비 잔으로 고량주를 먹던 날/ 유랑의 밤이 우리 모두에게 찾아왔다/ 유령은 비밀이 되기로 한 자들// 난로를 껴안고 사는 사람의 내부 온도는 비밀/ 하루에 백 살이 된다는 날/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날/ 여럿이 밥을 시켜먹었다// 시켜먹는 밥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무장 해제한다/ 2차 세계대전이 전 지구적 해프닝이라고/ 연대기를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과 밥을 먹었다/ 아버지의 포도나무에서 아버지의 포도나무로// 기원이 줄을 타고 올라가/ 남의 우연끼리 닮을 때도 있음을/ 막내들은 빨리 고아가 된다거나/ 순수 혈통이 나중에 고통의 이유가 된다거나// 왜 이모들은 기념일에 시계를 선물할까/ 내가 받은 대부분의 시계는 이모들이 사주거나 물려준 것/ 시간은 부계가 아니라 모계로 흘러가는 것// 생각지도 못한 고백을 듣게 될 때가 있다/ 아무도 없어 내겐, 그런 말은 듣기만 해도/ 고독이 그늘처럼 옮겨 앉는다/ 모든 일은 시켜 먹는 밥이 시킨 일// 시켜 먹는 밥은 외로운 공연과도 같다/ 공연의 제목은 <매 순간 영원히 함께, 노트랑>//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저녁 / 권현형
식구 중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듣는다/ 집집마다 열어 젖혀놓은/ 유리창의 목젖을 타고 여름 저녁/ 소리의 여울이 내게로 흘러온다/ 살아서는 다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던 얼굴마저/ 짙은 나무 그늘에 숨어/ 얼굴이 지워진 채 목소리로만/ 살아서 나를 찾아오는 시간// 내 아가는 어미 품에 안겨서도/ 제 엄지손가락을 찾아 문다/ 손가락 빠는 일에 몰입 중이다 건넌방의/ 어머니는 선잠이 들어 헛소리를 하신다/ 부엌에 물이 들어왔다고/ 부뚜막에 소가 올라앉아 있다고 그러신다/ 초여름 저녁 선잠 끝에 내뱉은 잠꼬대가/ 선승의 무슨 선문답같기도 한데/ 어머니의 수행이 무른 탓인지/ 군말은 점점 흐느낌처럼 잦아든다// 이 저녁이 하도 아득해져 가슴지느러미로/ 새끼의 부화를 돕는 얼룩동사리처럼/ 난 저녁 내내 손부채질로/ 그들의 결락을 달래고 있다//

비리고 아린 / 권현형
막, 바다에서 캐낸/ 물미역으로 써늘한/ 끼니를 잇고 있다/ 얼음밥 덩어리를/ 몸으로 뚫고 있다/ 모래 수렁 속/ 젖은 발가락/ 겨울 바닷새 무리// 아침연기처럼 십이월 해안에/ 피어오른 하얀 깃털 바라보다가/ 눈이 시려온다/ 그토록 가녀리고, 차갑고,/ 젖은 날발로/ 먼 바다까지/ 받아 안고 나르게 될/ 비리고 아린 목숨 때문에//

깎은 손톱의 안쪽 / 권현형
약간 어두운 실내에서/ 너는 창문처럼 나를 들여다보며/ 천천히 다가왔어/ 아가미로 쉼 쉬듯// 스틸 사진처럼 남아 있는 영원한 한 컷은/ 몸이 아니라 눈빛이지// 빛을 뒤로한 네 눈 속에/ 아픔이 숨어 있었어/ 그 눈이 충분이 어두웠으므로/ 숨어 있기 좋았지//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게 중요해 정점에서/ 가슴을 안을 것인가/ 등을 안을 것인가// 빛을 보고 걸어갈 때와 빛을 등지고 걸어갈 때/ 어느 때가 더 슬픈지 궁금해//

어제보다 비밀이 많아졌다 / 권현형
오늘 구름은 뼈가 있다/ 구름의 늑골 사이에서 달이 달그락거리고 나도/ 주머니 속 당신의 운율감 넘치는 손가락뼈를 만져본다// 지나가다 만난 돌이 모자를 벗고 이마를 수그리고/ 저를 낳은 저녁에게 예의를 다하고 있는 순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긴 시간을 봉헌하고 있는 순간// 날개의 질료가 백 퍼센트 구름인지도 모를/ 붕새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갔다/ 하루에 구만 리를 날아서 그가 닿고 싶은 세계가 어딘지/ 그 자신도 모르는 것 같아 불러 세워 질문하지 않았다// 아침과 저녁의 기분이 다른 숲은 좀 은밀해 보였고/ 이윽고 많은 말들이 서로 혀를 조심하며 바스락거렸다// 숲속에서 자명종 소리가 났다 단순한 음악 같기도 했다/ 몸 안에 금관을 갖고 있는 풀벌레의 생애가// 끝없이 깊어진 노년기 보르헤스의 눈을 닮았을/ 저녁의 동공 때문인지 현기증이 났다 구름 대신// 먼지가 낀 아득한 처소의 창턱으로 되돌아와서도/ 산책길에 본 저녁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구만 리를 걸어가서 어디에 닿고 싶은 거니,/ 나 자신에게도 질문하지 않았다// 어제보다 비밀이 많아졌다//

연애의 경전 / 권현형
속눈썹을 치켜세울 때는/ 구도자 같은 모습으로/ 생의 깊은 비밀을/ 그 위에 올려놓고 있는 듯/ 마술을 거는 것처럼/ 경건하게 숨소리조차/ 그렇게 대문을 나서는/ 마스카라의 검은 마녀/ 그녀를 실은 나팔바지는/ 바람둥이 집시처럼/ 넓다란 입에 바람을/ 가득 채워 휙휙 휘파람을 불어대고// 한밤에도 빵을 잔뜩 쪄와/ 식구들을 먹이곤 하던/ 젊은 날의 그녀/ 막내 이모 곁엔/ 남자가 붐볐다 늘/ 생기로 부풀어 오른// 이스트 같던 그녀/ 그녀의 부푼 젖가슴//

하염없는 산책 / 권현형
전 세계를 느리게 산책하는 동안/ 모든 인연들은 과거가 된다// 동그란 태양 안에 있는 것은/ 월계수 잎의 걸음 하나, 둘, 셋// 수레바퀴가 되었다가/ 산맥이 되었다가/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부서지는 햇볕의 파편이 되었다가// 상처의 기하학적 문양에 대한 이해로/ 고대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천연 염료에는 그리는 사람의 묵언이 섞여 있다// 얼굴 가까이 손등만 갖다 대도 체온 때문에/ 맑은 눈물이 흘러내릴까 염려되는 당신의 눈// 모빌의 허망한 반복을 바라보고 있다/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닮거나 흔들리는 약속을 닮은 그것/ 하염없이 모빌에 바쳐진 기도의 내용이 궁금하다// 어둠을 요약해서 말할 수는 없으므로/ 액자나 퀼트로 가려진 울창한 아름다움은 당신에게로//

나는 당신이 아프다 / 권현형
눈을 어쩌다 깊이 들여다 본 후/ 네가 좋아진다/ 바람이 뒤집어 놓은 머리카락과는 달리/ 깍지 낀 가지런히 손가락이 좋아졌다/ 어둠 속에서도 네 눈을 알아볼 수 있다/ 폐허를 아는 눈, 패배를 아는 눈/ 검고 따뜻하고 축축하게 살아 있는 눈/ 흰 와이셔츠의 네 단추에 질투가 났다/ 극지처럼 면 아름다운 너의 얼굴이/ 내 얼굴 속으로 파고들어왔을 때 수천 개의/ 바늘에 꽂힌 아픔이 몰려 왔다/ 여름 눈송이들이 몰려왔다 안무는 춤이 몰려왔다/ 너를 두고 돌아서 온 후 마시려던 물컵을 커피를/ 나를 다 엎질러버렸다/ 물기를 닦을 생각은 않고 대걸레로 내 뼈를 닦고 있었다/ 내 심장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싶었다/ 원효의 해골바가지로 물을 담아 마신들, 으스러지지 않는/ 세계가 있다 닿을 수 없는, 닿아서는 안 되는 세계가 있다//

포옹의 방식 / 권현형
이윽고 뜨거움이 재가 될 때까지/ 그들 머리 위 자귀나무는 바람 불지 않는/ 저녁의 골목을 흔들 것이다/ 골목 주택가의 닫힌 철문 앞에서/ 닫힌 시간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껴안고 서 있다// 사이를 떼어놓을 수 없는 부동의 석고상처럼 보이지만/ 여자의 등 뒤에 두르고 있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물려 있다/ 연인과 무관하게/ 철학자처럼 건달처럼 사색하며 거닐며 타오르며// 그가 포옹에 몰입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뇌관이 터질 지경으로 달리는/ 팽창하는 여자의 등, 순정한 척추의 비탈이 보인다/ 매끈한 생머리의 가닥을 묶은 노랑 고무줄 때문인지// 여자는 단거리 마라토너로도 보인다/ 남자의 분열된 손가락을 담배를 볼 수 없는/ 그녀의 뒷모습은 옮길 수 없는 섬 같다// 가령 사랑을 나눌 때 티브이를 켜놓은 적 있다면,/ 껌을 씹은 적 있다면, 당신의 패(牌)는 경멸이다//

살청, 푸른빛을 얻다 / 권현형
푸른 기운을 죽여야 한다는 말이/ 놀라웠다, 살청/ 무쇠솥에 찻잎을 덖어서 맛보는 자의/ 사지가 부드러워지고 혀의 독이 빠지는 순간// 들끓는 생각이 묽어지는 그런 때/ 껍질 안에서 이미 딱딱해져 있거나/ 아직 몸이 촉촉한 강낭콩의/ 푸른 빛을 벗기고 앉아 있을 때/ 모처럼 둥근 고요가 양푼 가득 찾아 오듯이// 대청 아래 묶인, 흰 개의 눈을 들여다본다/ 짐승의 시간을 지나는 것이라면/ 부칠 수 없었던 내 뜨거운 문장들도 부디 살청이었길// 어두워져가는 악양의/ 무쇠 빛 산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저녁 해가 손바닥만큼 남은 빛으로/ 지리산 골짜기의 광활한 비애를 거두고 있다, 살청이다//

주머니에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넣어 두었다 / 권현행
언제였더라, 어제의 일이 가까스로 떠오를 때/ 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던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흘러나왔다// 부서진 상자를 오래 안고 서 있게 될 줄 몰랐다/ 가까이 지낸 적 없는 사람이/ 멀리 가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후/ 귀를 내려놓지 못하고 오래 서 있다// 살아 있는 나무와 유령 사이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느리게 걷는다/ 낮달이 오후 3시의 하늘에 투명 스티커처럼 붙어 있다// 단정하고도 다정한 사람이 반달 모양으로 썬 무를/ 붙여 놓았을 거야, 짐작해보며 아득해진다/ 김소월의 ‘고아’를 기억한다는 그를 나도 기억한다// 누군가 바짝 쫓아오며 헛기침 소리를 냈다/ 한 뼘 뒤, 바로 한 뼘 뒤에서 폭설이 내리고/ 노랑나비가 날아다니고 삼나무가 울고 있었다// 내 그림자가 잘 쫓아오는지 다시 뒤돌아본다/ 헛기침 같은 것, 햇볕의 잔상 같은 것/ 소나기의 랩 같은 것, 그런 순간이 동시에 일렁거린다//

나의 기타 바가바드 / 권현형
미역 줄기를 오래된 필름처럼 햇빛에 비춰본다/ 그만 길을 버리자/ 버리려고 할수록 길은/ 손바닥에 발바닥에 달라붙는다// 초봄의 바다는 누군가 걸어온 길처럼 어둡다/ 과거 가운데 어두운 과거/ 코발트블루 앞에서 무릎 꿇고 싶다/ 첫 맥락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물의 근심이 그 속에 담겨 있다// 마당의 응달이 햇볕에 녹고 있었고 깊이 감춰둔/ 초경의 빨래를 외조모께서/ 욕지거리를 하며 찬물에 헹구고 계셨다// 바다의 어두운 심층을 방언처럼 읽는다/ 초경(初經)의 어느 날을 다시/ 꺼내 읽는다 부모 없는 태초의 바다// 바가바드 기타, 역설적으로 푸른 역사가 펼쳐지리라//

자벌레는 세계의 그늘을 잰다 / 권현형
원곡동, 스패니시 할렘, 명왕성/ 힙합 가수는 자신을 탕진했노라고 랩으로 고백하고// 자벌레는 몸으로 느릿느릿 세계의 그늘을 잰다/ 검은 그림 속에 연두 그림/ 연두 그림 속에 분홍 그림/ 분홍 그림 속에 자꾸 멀리 가는 사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흐느낌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모두를 위한 것,/ 깍두기를 먹다가도 너무 모질다고 말하던 사람// 나중에 다시 볼 사람/ 나중에 다시 들을 음악// 나중에, 나중에, 라고 말하는 대신/ 저 산 위에 배를 띄우겠다/ 비탈진 곳에 구름과 비가 섞여 있다// 검은 그림 속에 연두 그림/ 연두 그림 속에 분홍 그림/ 분홍 그림 속에 검은 기억은 그림자까지 모질게 살아 있다//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거야 / 권현형
길 위에서도 잠이 쏟아질 때가 있다// 완전히 안을 수 없지만/ 절반쯤 가졌다고 생각했을 때/ 안개 짙은 머릿 속에서 무적(霧笛)이 울렸다// 당신과 나 사이에 불이 켜졌다/ 절반 쯤 갖는 게 가능한가/ 전부이거나 아무것도 아닌 당신// 하루 종일 무적 소리 때문에/ 잠이 쏟아진다, 점등의 순간/ 다급할 때 쏟아지는 잠을 설명하기 어렵다// 아사 직전 동사 직전 크레바스에서/ 달콤한 잠이 쏟아지는 이유/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거야*// 아무것도 갖지 않으려 할 때부터/ 등대는 무엇을 비추고 있나/ 고물거리는 바다의 발가락// 파란 빨랫줄처럼 가느다란 선/ 그 줄에 물고기의 파랗고 단순한 슬픔이 걸려 있다//
* 비탈리 카네프스키 감독의 영화.

진부면 노동리 / 권현형

어린 가축들처럼/ 얼룩배기 나리꽃 무더기/ 앞마당 그득 풀어놓은 집/ 불도 켜지 않고 어스름 속에서/ 눈시울 그렁한 세 노파가/ 둥근 저녁 밥상을 마주하고 있다/ 할머니 한 분과 할아버지 둘/ 할아버지 중 한 분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일는지 모른다/ 배추김치와 오이지/ 감자가 절반인 보리밥/ 눈 큰 소 세 마리가/ 땡볕 소나기 속에서/ 진종일 밭을 맨 후/ 기름기라고는 없는 밥상을/ 서로 공손하게 받들고 앉아 있다//

사보타주 / 권현형
가끔 내가 작은 엉겅퀴꽃으로 /작은 짐승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발끝까지 외로운 사물이 되어보곤 하는데/ 진짜로 갇혀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어린 날의 얼음 땡 놀이 같은 것 말이다/ 초여름 입구에 서면 치명적으로/ 살아 있고 싶을 정도로 풀 냄새가 달큰하다// 파티에 가고 싶지 않은 날/ 가면을 쓰고 싶지 않은 날/ 걸음이 저절로 도달한 동네 미술관 뒤뜰에서/ 미묘한 보라를 발견하고 기뻤다/ 이름도 얼굴도 색감도 윤곽이 뚜렷한 엉겅퀴꽃의 실존은/ 말할 수 없이 회화적이다// 미술관 외곽에 그려진 거대한 얼굴이 AI를 연상시킨다/ 인공 눈동자가 물기까지 감정까지 복제할 수 있을까/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갈피를 잃은 눈동자가/ 말할 수 없이 회화적이다/ 가령, 가령, 가령, 가령, 가령, 숨표 하나의 감정까지/ 인간을 복제할 수 있다면 AI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초대받은 시집 출판 기념회에 가지 않았다/ 혼자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 먹고/ 요리하다 남은 청주 한 방울을 털어 마시고/ 보내온 시집을 외따로 읽는 시간이 달큰했다/ 기념일보다 사보타주를 선택한 엉겅퀴꽃의 오후//

저녁이 와서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 권현형
종소리는 잘 빠져들게 되는 음악/ 받지 못한 편지의 안타까운 말줄임표// 저녁과 저녁 사이/ 성북구의 성당 앞을 지나가다가/ 운 좋게 종소리를 들었다/ 요사이 쌓인 죄가 녹아 없어지는 순간// 흰 눈가루를 타고 어깨에 내려앉는 종소리와 함께/ 가까이 있는 심장과 함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의 죄를 내가 용서해도 된다면/ 지금 생각나는 사람을 맘껏 생각할 것이다// 아직 쫓기는 꿈을 꾸는 것은/ 수렵의 본능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따뜻함을 믿는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셔도 어머니 역할을 해주신다는/ 믿음을 가엾은 인류는 여전히 갖고 있다// 백오십 년 된 식물 채집 표본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오늘의 할 일은 다 했다/ 머나먼 베를린의 벼룩시장에서 구한 식물 채집 표본은/ 색감이 엷어져 있다// 빛을 파묻고 시간에서 마른 장미 냄새가 나다니/ 다행이다. 언젠가 내게서 마른 장미 냄새가 날 수 있다니/ 부드러운 후각의 저녁이 와서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