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202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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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신은 고달프겠다 / 최민자

친구 집에 갔다가 플라스틱 함지에 심은 상추모종을 받아왔다. 무엇이든 손에 들려 보내려고 두리번거리던 친구가 베란다에 놓인 두 개의 함지박 중 하나를 덥석 들고 나온 것이다. 쉼표만한 씨앗을 싹 틔워 이만큼 자라게 하기까지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세수 대야만한 고무함지가 텃밭 한 뙈기보다 더 커 보였다. “조금 지나면 포기가 벌 테니 실한 놈 몇 포기만 남기고 다 솎아주어야 해.” 서툰 대리모에게 입양 보내는 어린것들이 맘에 걸리는지 문밖까지 따라 나온 친구가 말했다. 천 원어치만 사도 차고 넘칠 상추보다는 생명을 가꾸는 기쁨을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비좁은 베란다 한줌 햇살만으로 상추는 우북수북 잘 자랐다. 청치마 홍치마를 나붓이 펼치고 앉은 매무시가 제법 과년한 처녀티를 냈다. 햇살 좋은 날에는 서..

댓글 수필 읽기 2021. 5. 31.

31 202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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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삶의 광택 / 이어령

나는 후회한다. 너에게 포마이커 책상을 사 준 것을 지금 후회하고 있다. 그냥 나무 책상을 사 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어렸을 적에 내가 쓰던 책상은 참나무로 만든 거친 것이었다. 심심할 때, 어려운 숙제가 풀리지 않을 때, 그리고 바깥에서 비가 내리고 있을 때, 나는 그 참나무 책상을 길들이기 위해서 마른 걸레질을 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문지른다. 그렇게 해서 길들여져 반질반질해진 그 책상의 광택 위에는 상기된 내 얼굴이 어른거린다. 너의 매끄러운 포마이커 책상은 처음부터 번쩍거리는 광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길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물걸레로 닦아 내는 수고만 하면 된다. 그러나 결코 너의 포마이커 책상은 옛날의 그 참나무 책상이 지니고 있던 심오한 광택, 나무의 목질 그 밑바닥으..

댓글 수필 읽기 2021. 5. 31.

31 202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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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홍윤숙 시인

“시는 일찍이 내 생을 관통해 간 한 발의 탄환이었고/ 나는 그로 하여 일생을 앓으며/ 만신창이로 여기 서 있다/ 진실로 내 생을 관통한 한 발의 탄환/ 그 고통과 기쁨의 황홀한 상처.” -서시 '위난한 시대의 시인의 변(辯)' 중에서- 당신의 얼굴 / 홍윤숙 어머니/ 흰 종이에/ 수묵 풀어/ 당신의 얼굴/ 그려 보아도/ 꽃 같은 미소/ 간데 없고/ 하얗게 바랜 모습/ 줄줄이 주름진 세월/ 하늘 같은 희생들/ 그릴 바 없어/ 내 손 부끄러이/ 더듬거립니다/ 어ㆍ머ㆍ니// 미지의 땅 / 홍윤숙 그 집에선 늘/ 육모초 달이는 냄새가 났다/ 삽작문 밖 가시 울타리는/ 내 키를 넘고/ 바다는 어디만큼 열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뒷산 밤나무숲은 사철을 울창하여 침울했고/ 바람이 미로에 빠진 듯 헤매다녔다// 그 시..

댓글 시詩 느낌 2021. 5. 31.

31 202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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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까치 / 김선화

스산한 날씨 탓인가. 까각 까각 까까…. 산본역 앞 단풍나무 가지에 올라앉은 까치 한 마리가 고독해 보인다. 힘차게 우짖지 않고 한 차례씩 까~까~ 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며칠 전 마음 맞는 지인과 맞닥뜨린 한적한 풍경 속의 까치 한 쌍은 푸드득 날아오르는 모습이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이 낟가리에서 저 낟가리로, 혹은 지붕에서 지붕으로…. 한 마리가 날면 다른 한 마리는 더 활기차게 공중에 원을 그렸다. 한데 반지르르한 털을 고르며 홀로 앉은 저 까치는 바쁜 내 발길을 붙잡고 쉬 놓아주질 않는다. 한 차례의 허공을 향하는 눈길마저 서름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갈 길도 잊은 채 나무 아래서 서성인다. 까치의 눈길 따라 그윽한 상념에 젖는다. 그러다가 불현 듯, 이것이 암..

댓글 수필 읽기 2021. 5. 31.

31 202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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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구상 시인의 모자 / 구활

구상 시인에게는 항상 가을 냄새가 난다. 가을에 처음 뵈었기 때문이리라. 시인에게서 가을 외에는 다른 계절의 이미지는 느낄 수가 없다. 가을 남자. 그래. 뭔가 조금은 쓸쓸하고 만남 보다는 떠남이 좀 더 어울리는 그런 남자가 구상 시인이다. 시인을 처음 뵌 것은 삼십 여 년 전인 칠십 년대 초, 플라타너스의 잎들이 돌가루 포대 색깔을 하고 도로를 질주하는, 가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다. 시인은 옅은 갈색 코트에 걸 맞는 중절모를 쓰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풀 것처럼 약간은 어눌한 말투를 앞세우고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나셨다. “활(活)이라 그랬지.” “예” “그래 사회부 기자라며.” “예” 시인은 내가 근무하던 신문사의 편집부국장이자 집안 조카..

댓글 수필 읽기 2021. 5. 31.

30 202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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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용철 시인

떠나가는 배 / 박용철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이도 못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화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 싸늘한 이마 / 박용철 큰 어둠 가운데 홀로 밝은 불 켜고 앉아 있으면 모두 빼앗기는 듯한 외로움/ 한 포기 산꽃이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위로이랴// 모두 빼앗기는 듯 눈덮개 고이 나리면 환한 온몸은 새파란 불 붙어 있는 인광/ 까만 귀또리 하나라..

댓글 시詩 느낌 2021. 5. 30.

30 202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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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3번과 4번 / 강호형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는 옛 시조 가락은 인간의 능력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잠꼬대였다. 우거진 잡초 덤불 속에 철새가 깃들거나 모래 먼지만 흩날리던 황무지-. 강남이 사천 년 긴 잠에서 깨어나 바야흐로 ‘8학군’의 위용을 갖춰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산천도 인걸도 의구한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변해 버린 그 신도시의 어느 유치원 아이들이 내 친구의 도자기 공방으로 실습 겸 소풍을 나온 일이 있었다. 병아리 떼 같은 아이들과 어미닭 같은 선생님들이 어울려 흙반죽을 주물러가며 ‘실습’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귀엽고 신통해서, 아직은 그럴 나이가 아닌데도 손자손녀를 둔 할아버지들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아이들이란 하는 짓마다 천방지축이어서 늘 어른들을 긴장시킨다. 도자기 공방에는 크게 위험한 ..

댓글 수필 읽기 2021. 5. 30.

30 202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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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비야 청산 가자 / 강호형

오늘이 경칩이다. 때맞춰 비까지 내렸다. 봄이 왔다는 신호다. ‘나비 앞장 세우고 봄이 봄이 와요.’ 이런 동요대로라면 나비도 나왔으련만 아직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가슴속에서는 벌써 작은 설렘 같은 것이 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봄이 희망의 계절, 약동의 계절, 환희의 계절이라면 응당 기쁨이어야 할 터이지만 선뜻 기쁘다고 말할 수 없고, 그래서 슬픔인가도 싶지만 왜 슬픈지를 꼭 집어 설명할 근거도 없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그렇다. 봄을 맞는 마음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새 풀 옷 입고, 꽃다발 안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봄처녀가 나의 신부라면..

댓글 수필 읽기 2021.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