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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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하필이면 하필오고 / 김상립

내 전자우편(E-mail) 주소를 만들어야 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내 이름의 영문 약자를 쓸까, 회사명이나 관련 산업을 활용할까, 아니면 내게 의미 있는 숫자를 배열시킬까 하고 며칠을 두고 생각했었다. 드디어 찾은 이름이 바로 ‘hapilo’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자주 이사를 다녔다. 내 뜻과는 달리 순전히 직장 때문에 옮겨 다닌 것이었지만, 가족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이리 저리 끌고 다녔다. 살았던 도시만 봐도 서울과 인천, 광주(光州)와 대전, 지금은 대구에서 산다. 같은 시내에서 주소지를 옮겼던 것까지 모두 합하면 주민등록증 주소란이 한참은 모자랄 것이다. 더구나 내 주소가 바뀔 때 마다 00아파트 00동 0000호라는 암호 같은 숫자로 불려지게 된 세월이 아득하니, 주소지란 게 마치..

댓글 수필 읽기 2021. 6. 1.

01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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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감자꽃 / 허영자

'저게 뭘까?' 베란다에 있는 상자 위로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연필에 달린 지우개보다 작은 게 연한 자줏빛이다, 그것의 정체를 알기 위해 뚜껑을 열었더니 쪼글쪼글한 감자가 가녀린 싹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지난 해 친정에서 감자를 가져와 상자 째 놓고 먹다가 몇 개 남은 걸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의 에너지를 한군데 쏟아 꽃망울까지 맺느라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감자가 나는 신기하기만 했다. 감자에 난 싹은 많이 봤지만 흙이 없는 곳에서 꽃을 피우는 건 처음 보기 때문이다. 친정집은 내가 어릴 때부터 감자 농사를 지었다. 봄이 되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양지쪽에 앉아 감자 눈이 있는 곳을 도려내 밭에 심었다, 도려낸 씨감자는 스스로를 썩혀 꽃을 피우고 땅속 가득 새로운 ..

댓글 수필 읽기 2021. 6. 1.

01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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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선생님의 밥그릇 / 이청준

37년 전의 반 담임 선생님을 모신 저녁 회식 자리는 이 날의 주빈이신 노진 선생님의 옛 기벽에 대한 추억으로 처음엔 그 분위기가 그저 유쾌하기만 하였다. 노진 선생님은 그러니까 50년대 초중반 전란의 혼란과 궁핍 속에 어렵사리 중학생모를 쓰게 된 우리 중학교의 1학년 3반 담임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중학교 초년 시절 그 남녘 도시의 노진 선생님은, 새 교풍과 학과목, 근엄한 표정의 선생님들 앞에 어딘지 기가 조금씩 움츠러든 반 아이들, 특히 이곳저곳 벽지 시골에서 올라와 낯선 도회살이를 갓 시작한 심약한 지방 출신 아이들을 또래 친구처럼 즐겁게 잘 보살펴 주신 분이었다. 한 예로, 방과 후에 뒤에 남아 빈 교실을 정리해야 하는 청소 당번을 몹시 싫어한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그날그날 종례시간에 갑작스런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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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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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밥 먹었느냐 / 정태헌

끼니때 밥 먹는 일보다 절실한 게 또 있을까. 마음 편한 사람과 밥상머리에 마주 앉아 하는 식사는 행복하다. 뿐인가, 좋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담소하며 먹는 밥은 소찬일지라도 즐겁다. 예수도 제자들과 둘러 앉아 담소하며 밥 먹는 일을 즐겼다. 그래서 당시의 말 좋아하는 무리는 예수가 비천한 이들과 먹는 일에만 열이 났다고 비난했다. 그래도 예수는 잡혀가기 전날 밤까지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즐겼다. 이처럼 기꺼운 사람들과 정담을 나누며 밥 먹는 일보다 더 값지고 성스러운 게 세상에 또 있으랴. 밥은 목구멍으로 넘어가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값진 목숨을 이어준다. 터미널에서 막냇자식을 기다리는 중이다. 외지에서 공부한답시고 석 달 만에 집에 오는 터라 마중 나와 있다. 버스 도착 시각이 좀 일러 대기실에 놓인 ..

댓글 수필 읽기 2021. 6. 1.

01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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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골동품 / 이정연

결혼하고 처음 남편과 크게 다툰 것은 함지박 때문이었다. 가로 팔십 센티, 세로 오십 센티쯤 되는 큰 것이다. 시골집에서 대를 물려 쓰던 재래식 다리미, 도자기 찻주전자, 바디, 베 맬 때 쓰는 커다란 솔, 호롱, 어머니의 비녀, 반지, 화롯불쏘시개, 놋국자 등의 물건을 이 함지박 속에 넣고 두꺼운 유리를 덮어 탁자가 없어 허전하고 불편하던 소파 앞에 놓았다. 이제야 무엇인가 자리가 잡히고 그 곳에 작은 화분까지 하나 넣었더니, 차를 놓아도 좋을 만큼 근사한 탁자가 되었다. 남편이 돌아오면 예쁜 커피 잔에 차를 한 잔 하면 좋을 것 같아 빈 잔을 이리저리 놓아보고 설레며 기다렸다. 그 함지박을 보고 ‘당신 참 좋은 취미를 가졌군!’하며 좋아할 줄 알았던 남편의 표정이 싸늘해지면서 이젠 더는 못 참는다며 ..

댓글 수필 읽기 2021. 6. 1.

01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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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구상 시인

한가위 / 구상 어머니/ 마지막 하직할 때/ 당신의 연세보다도/ 이제 불초 제가 나이를 더 먹고/ 아버지 돌아가실 무렵보다도/ 머리와 수염이 더 세었답니다.// 어머니/ 신부(神父)형*이 공산당에게 납치된 뒤는/ 대녀(代女)* 요안나 집에 의탁하고 계시다/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관(棺)에나 모셨는지, 무덤이나 지었는지/ 산소도 헤아릴 길 없으매/ 더더욱 애절탑니다.// 어머니/ 오늘은 중추 한가위,/ 성묘를 간다고 백 만 시민이/ 서울을 비우고 떠났다는데/ 일본서 중공서 성묘단이 왔다는데/ 저는 아침에 연미사(煉彌撒)*만을 드리곤/ 이렇듯 서재 창가에 멍하니 앉아서/ 북으로 흘러가는 구름만 쳐다봅니다.// 어머니/ 어머니// * 신부(神父)형: 나의 친형 구대준(具大浚)은 가톨릭 신부였음. * 대녀(代女..

댓글 시詩 느낌 2021. 6. 1.

01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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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울진 구산리 절터 -바람이 흔들면 못 이긴 척 따라 나섰다 / 박시윤

물길에도 오지가 있다. 한반도의 남쪽 울진에는 물길 오지라 불리는 왕피천이 흐른다.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울진군 온정면에 걸쳐진 금장산 골짜기와 만나, 이산 저산 이 골짝 저 골짝으로 숨어들어 몸을 불리며 왕피천이 된다. 세차게 흐르는 여울 아래 소용돌이치는 소沼가 여럿 있고, 소를 지난 물은 더 굳세게 아래로 휘몰아친다. 수달, 까막딱다구리, 딱새, 황어, 은어 등 이름마저도 맑고 깨끗한 생명이 목숨 붙이고 살아간다. 왕피천엔 어떠한 세상 소리도 없는, 오직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만 들린다. 사람 발자국 소리는 민망하기까지 하다. 낙동정맥 굽이굽이 돌고 돌아, 한껏 몸집이 커진 왕피천은 적막강산 고독과 사색을 품고 동해로 흘러간다. 늦가을이면 왕피천엔 연어가 돌아온다. 모천회귀 본..

댓글 수필 읽기 2021.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