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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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눈 쌓인 벌판에 혼자서 서라 / 김용옥

눈 쌓인 벌판에, 백지와 대면하듯이 혼자서 서라. 막막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아무 말도 못하다 보니 할말도 없는, 백지가 되라. 천지간에 어스름이 고양이 발걸음같이 깔리더니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적막하게 소복소복 쌓이는 것도 아니고 싸락눈이 싸르락싸르락 소곤대는 것도 아니다. 구물구물 밤벌레 같은 눈이 시름없이 기어 내려온다. 강풍이 시샘하지 않으니 아장아장 하강한다. 하염없이 내린다. 백설아,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마음의 갈피에 꽂아 둔 누구인가, 그 사람에게 말 걸고 싶다. 설원의 새끼짐승처럼 겅중겅중 눈 속을 헤매고 싶다. 눈밭에 개 뛰듯 뛰고 싶다. 아뿔싸.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서서 뭣, 뭣, 뭣을 하고 싶다고? ‘하고 싶다’는 일종의 허영. 삶의 포장지에 불과하다. 포장지를 찢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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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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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이테를 보면서 / 이정희

나무토막을 들여다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나이테가 없다. 닳고 닳아 찍히지 않는 지문이 있다면 그런 것일까 싶었는데 한옆으로 옹이가 툭 불거져 있다. 여남은 개 바퀴 모양의 자취가 희미하게 보일 뿐이지만 나이테가 다 지워진 토막에 옹이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나이테는 이미 지워졌어도 그 연륜에 옹이의 뚝심이 들어갔을 테니 얼마나 단단할지 상상이 간다. 우리 집 주방에도 옹이가 빠져나간 자리가 있다. 나무로서는 오래된 상처가 빠져나갔으니 시원할 것 같은데도 뻥 뚫린 자리는 당혹스럽다. 처음 지을 때부터 툭 불거진 게 유난히 눈에 띄기는 했으나, 우리도 옹이가 있다면 그런 식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살 동안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도 빠져나가면 시원하겠지만 주방의 벽처럼 허전할 수 있다.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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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장승 / 김재희

2006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여행을 하다보면 장승촌에 들리는 때가 있다. 수많은 장승들의 이름과 표정이 참으로 기이하고 익살스럽다. 갖가지 이름만큼이나 서로 다른 특징이 들어 있는 장승들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한 곳에서 전부 보는 느낌이 든다. 조금은 숙연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올려다 보이는 장승에서부터 아이들 장난 같은 웃음을 짓게 만드는 장승들. 현 시대에 발 맞추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괴이한 장승이 있는가 하면 살짝 눈을 돌리며 배시시 웃음을 깔게 만드는 짓궂은 장승이 있고 밤길에서 뒷덜미를 잡아 챌 것 같은 으스스한 장승도 있다. 어떤 모습일지라도 그것들은 우리들의 끈끈한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형상들이다. 그것들의 모습은 결코 매끄럽거나 곱지가 않다. 어딘가에 별 쓸모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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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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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띠풀 / 김재희

평소 자주 다니던 산책로가 엉망이다. 도로 공사를 하기 위해 막아버려 다른 길로 돌아다녀야 한다. 늘 다니던 길이 그렇게 되어 버리니 아쉽다. 어느 땐 나도 모르게 그 길로 들어섰다가 되돌아 나오곤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니 자연히 그 길과 멀어졌다. 이제 새로운 코스가 당연한 길이 되어 버렸지만 옛길이 그리워 그 근처를 서성거려보기도 한다. 그러다 달라진 길 모습이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사람들의 발자국 따라 다져졌던 길은 어느새 풀들이 수북해서 선뜻 발 들여놓기가 망설여졌다.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없어지니 순간에 이렇게 되어 버리는구나 싶다. 문득 맹자의 말씀이 생각난다. ‘孟子謂高子曰(맹자위고자왈)/ 山經之蹊間(산경지혜간)/ 介然用之而成路(개연용지이성로)/ 爲間不用(위간불용)/ 則茅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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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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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느 벽화 이야기 / 김재희

분명 잘못된 그림이었다. 어느 산사에서 절 안팎을 둘러보며 벽화를 감상하고 있는데 좀 잘못 그려진 부분이 있었다. 왜 저렇게 그렸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다른 그림이었다. 『빈두설경(賓頭設經)』에 「우물 안의 나그네」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미쳐서 날뛰는 코끼리를 만나 도망치다가 우물 속으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마침 우물터에 있는 등나무 줄기를 타고 들어가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물 밑을 내려다보니 무서운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는 성난 코끼리요, 안에는 독을 품은 독사니 진퇴양난이다. 간신히 등나무 줄기에 생명을 걸고 버티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쥐들이 그 줄을 갉아 먹고 있지 않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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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천상병 시인

귀천(歸天)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귀천' 소프라노 조정선 가곡 * '귀천' 테너 조창후, 바리톤 박정섭 가곡 새 / 천상병 저것 앞에서는/ 눈이란 다만 무력할 따름/ 가을 하늘가에 길게 뻗친 가지 끝에,/ 점찍힌 저 절대 정지를 보겠다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미묘하기 그지없는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橋)는 무슨 상형(象形)인가,// 저것은/ 무너진 시계(視界)위에 깃을 펴고/ 핏빛깔의 햇살을 쪼으며/ 불현듯이..

댓글 시詩 느낌 2021. 6.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