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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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걸레 / 배종팔

제16회 시흥문학상 우수상 시월의 가을볕이 베란다 창틈으로 날아들어 건조대에 닿는다. 빨래 건조대엔 제 할 일을 다 끝내고 한가하게 햇빛의 따사로움을 만끽하는 옷들이 서거나 누워 있다. 한동안 늦가을의 쌀쌀함을 막고 몸의 온기를 데워주고 반듯하게 맵시도 나게 해 주었으니 이제 맘껏 가을볕의 휴식을 즐길 수 있지 않느냐며 뽐내는 듯하다. 건조대 한쪽 귀퉁이에 널린 천 조각에 무심히 시선이 닿는다. 아내의 베이지색 면바지를 자르고 덧대어 테두리따라 촘촘히 꿰맨 걸레다. 근 오륙 년을 아내의 다리와 동고동락하다 옷의 수명을 다해 박복하게도 걸레가 되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누빈 세월에 닳아 올이 성기고 때깔마저 잃어 주위 옷들의 눈을 피해 제 스스로 한데로 나와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걸레에 별스런 애착이 간..

댓글 수필 읽기 2021. 6. 10.

10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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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떤 표정 / 배종팔

스산한 가을날 오후, 짙은 가을빛에 이끌려 비탈진 돌계단을 오른다. 아내와 보름 만에 나선 산행길이다. 돌계단 양옆 단풍나무 잎사귀에 가을 햇살이 뛰논다. 산의 형상이 물고기라면 눈의 자리에 암자가 있다. 암자를 지나 몇 발짝 오르면 화강암으로 된 돌부처가 토굴 속에 광배를 끼고 앉아 있다. 가슴 한켠에 불심이 자리한 건 아닌데도 그의 엄숙하고 숙연한 분위기에 매번 발목이 잡혀 아내와 나란히 서서 합장하며 숨을 고른다. 오늘도 두려움 반, 경건함 반으로 그를 쳐다본다. 삶의 행적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눈매가 서늘하여 매번 그의 앞에서 옷깃을 여민다. 이제 무뎌질 만도 한데 표정이 깊고 무거워 도무지 심중을 헤아릴 수 없다. 보름 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손톱달처럼 눈을 내려뜨고 나를 꾸짖는 듯 근..

댓글 수필 읽기 2021. 6. 10.

10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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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칼 / 장미숙

칼을 들었다. 차가운 심장을 가진 칼이 번쩍, 뜨거운 빛을 뿜는다. 날카로운 날을 쓱, 한번 행주로 닦아준다. 다섯 손가락에 힘을 골고루 실어 칼자루를 잡는다. 칼자루가 손에 착 달라붙는다. 체온을 나눈 지 오래되었다는 뜻일 거다. 믿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친숙함에서 우러나는 편안함이기도 하다. 이젠 칼날을 허공에 놓을 시간이다. 수평으로 허공에 꽂힌 칼날, 냉정하다. 뭔가를 잘라야 할 때의 그 냉철함이 손끝에 전해진다. 칼의 본분은 자르는 것, 남겨야 할 것과 잘라내야 할 것의 차이를 분명히 아는 갈은 이지적이다. 가차 없이 잘라내 버리는 일에 익숙한 칼은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지상으로부터 오 센티미터 허공에 걸린 긴 칼이 표적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다. 자신이 꽂힐 자리를 가늠하는 듯 섬세..

댓글 수필 읽기 2021. 6. 10.

10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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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고추밭 연가(戀歌) / 장미숙

어머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푸른빛이 곰비임비 몰려오더니 어머니의 꽃무늬 모자를 안고 가버렸다. 어머니를 숨겨준 푸른빛이 내 주위에도 낭창낭창 흐른다. 어머니가 사라짐과 동시에 수런대던 바람소리도 잦아들었다. 어머니를 품은 자연은 어머니를 잠시 쉬게 하려는가 보다. 갑자기 찾아든 적요(寂寥)는 오히려 날 흔들어 놓는다. 몸을 낮추고 가만 귀를 기울인다. 자연의 온갖 숨소리가 칸타빌레(cantabile)로 들려온다. 어느덧 나는 술래가 된다. 온 마음을 모아 어머니와의 교감을 시도한다. “어머니! 어디쯤 계세요?” 부르면 어머니가 금방이라도 여기저기서 나타날 것 같다. 모든 푸른색의 중심인 어머니는 보이지 않아도 보이고, 보여도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의 몸속에 흐르는 푸른색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아야 한..

댓글 수필 읽기 2021. 6. 10.

10 202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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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기림 시인

길 / 김기림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

댓글 시詩 느낌 2021.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