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2021년 06월

17

습득 코너 고 이상의 추억 / 김기림

상(箱)은 필시 죽음에게 진 것은 아니리라. 상은 제 육체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라도 손수 길러서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상은 오늘과 같은 환경과 종족과 무지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상은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상의 시에는 언제든지 피가 임리(淋漓)한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그는 현대라는 커다란 파선(破船)에서 떨어져 표랑(漂浪)하던 너무나 처참한 선체(船體) 조각이었다. 다방 N, 등의자(藤椅子)에 기대앉아 흐릿한 담배 연기 저편에 반나마 취해서 몽롱한 상의 얼굴에서 나는 언제고 '현대의 비극'을 느끼고 소름 쳤다. 약간의 해학과 야유와 독설이 섞여서 더듬더듬 떨어져 나오는 그의 잡담 속에는 오늘의 문명의 깨어진 메커니즘이 엉켜 있었..

댓글 습득 코너 2021. 6. 17.

17 2021년 06월

17

수필 읽기 권태 / 이상

1 어서, 차라리 어두워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돼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십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흰둥이, 검둥이. 해는 백 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댓글 수필 읽기 2021. 6. 17.

17 2021년 06월

17

수필 읽기 아름다운 조선(朝鮮)말 / 이상

무관한 친구가 하나 있대서 걸핏하면 성천에를 가구가구 했습니다. 거기서 서도인 말이 얼마나 아름답다는 것을 깨쳤습니다. 들어 있는 여관 아이들이 손을 가리켜 '나가네'라고 그러는 소리를 듣고 '좋은 말이구나' 했습니다. 나같이 표표한 여객이야말로 '나가네'란 말에 딱 필적하는 것같이 회심의 음향이었습니다. 또 '눈깔사탕'을 '댕구알'이라고들 합니다. '눈깔사탕'의 깜찍스럽고 무미한 어감에 비하여 '댕구알'이 풍기는 해학적인 여운이 여간 구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서 어서 하고 재촉할 제 '엉야―' 하고 콧소리를 내어서 좀 길게 끌어 잡아댕기는 풍속이 있으니 그것이 젊은 여인네인 경우에 눈이 스르르 감길 듯이 매력적입니다. 그러고는 지용의 시 어느 구절엔가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하는 '푸렁' 소리가..

댓글 수필 읽기 2021. 6. 17.

17 2021년 06월

17

수필 읽기 행복 / 이상

달이 천심(天心)에 있으니 이만하면 족하다. 물은 아직 좀 덜 들어온 것 같다. 축은 모래와 마른 모래의 경계선이 월광 아래 멀리 아득하다. 찰락찰락―한 여남은 미터는 되나 보다. 단애(斷涯) 바위 위에 우리 둘은 걸터앉아 그 한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자 인제 일어나요" 마흔아홉 대 꽁초가 내 앞에 무슨 푸성귀 싹처럼 헤어져 있다. 나머지 담배가 한 대 탄다. 요것이 다 타는 동안에 내가 최후의 결심을 할 수 있어야 한단다. "자 어서 일어나요" 선(仙)이는 일어났고 인제는 정말 기다리던 그 순간이라는 것이 닥쳐왔나 보다. 나는 선이 머리를 걷어치켜주면서 "겁이 나나?" "아―뇨" "좀 춥지?" "어떤가요" 입술이 뜨겁다. 쉰 개째 담배가 다 탄 까닭이다. 인제는 아무리 하여도 피할 도리가 없다. "자..

댓글 수필 읽기 2021. 6. 17.

17 2021년 06월

17

수필 읽기 약수(藥水) / 이상

바른대로 말이지 나는 약수(藥水)보다도 약주(藥酒)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술 때문에 집을 망치고 몸을 망치고 해도 술 먹는 사람이면 후회하는 법이 없지만 병이 나으라고 약물을 먹었는데 낫지 않고 죽었다면 사람은 이 트집 저 트집 잡으려 듭니다. 우리 백부께서 몇 해 전에 뇌일혈로 작고하셨는데 평소에 퍽 건강하셔서 피를 어쨌든지 내 짐작으로 화인(火印) 한 되는 쏟았지만 일주일을 버티셨습니다. 마지막에 돈과 약을 물 쓰듯 해도 오히려 구(救)할 길이 없는지라 백부께서 나더러 약수를 길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때 친구 한 사람이 악발골 바로 넘어서 살았는데 그저 밥, 국, 김치, 숭늉 모두가 약 물로 뒤범벅이었건만 그의 가족들은 그리 튼튼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 먼저 해에는 그의 막내누이를 폐환으로 잃어버렸습..

댓글 수필 읽기 2021. 6. 17.

17 2021년 06월

17

시詩 느낌 이상 시인

소녀 / 이상 소녀는 확실히 누구의 사진인가 보다. 언제든지 잠자코 있다.// 소녀는 때때로 복통이 난다. 누가 연필로 장난을 한 까닭이다. 연필은 유독(有毒)하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탄환을 삼킨 사람처럼 창백하고는 한다.// 소녀는 또 때때로 각혈한다. 그것은 부상(負傷)한 나비가 와서 앉는 까닭이다. 그 거미줄 같은 나뭇가지는 나비의 체중에도 견디지 못한다. 나뭇가지는 부러지고 만다.// 소녀는 단정(短艇) 가운데 있었다——군중과 나비를 피하여. 냉각된 수압이——냉각된 유리의 기압이 소녀에게 시각만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허다한 독서가 시작된다. 덮은 책 속에 혹은 서재 어떤 틈에 곧잘 한 장의 '얇다란 것'이 되어버려서는 숨고 한다. 내 활자에 소녀의 살결내음새가 섞여있다. 내 제본에 소녀의 인두자..

댓글 시詩 느낌 2021.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