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2022년 01월
20
결국 이게 올 줄이야. 돌이켜봐도 요번 일은 결정을 잘한 것 같다. 제사 때 결 고운 목 향로를 보고 아마 가족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을 거다. 조상께서도 “정말 잘했네.” 하시며 활짝 웃으시는 모습이 향을 타고 방안에 가득하리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봐도 옴팡진 갈색 나무가 반들반들한 게 대견스럽다. 누가 들으면 참 한심스럽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나대로 이리 흥분하는 이유가 있다. 얼마 전 상품권이 하나 생겼다. 만 오천 원권이다. 제품을 살 때 덤으로 끼워주는 것이다. 그걸로 인해 지난번 대형마트엘 한번 갔었는데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성과 없이 끝나 오늘이 두 번째 방문이다. 꼭 결판을 내겠노라고 다짐하고 집을 나섰다. 얼마 되지도 않는 금액인데 꼭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꽤 신경이 쓰인다. 나는 ..
20 2022년 01월
20
갈기갈기 찢겨 있다. 잎으로 바람을 견딘 것이리라. 찢긴 잎이 흔들리니 더 처연하다. 그런들 어떠냐고 오히려 맡긴다. 아직 청춘 같건만 떠날 준비를 하는 걸까. 잎이 바랜다. 모양새도 흩어진다. 메마르는가, 했더니 이내 버석거린다. 흙이 되려나 보다. 꽃봉오리의 자줏빛이 선연하다. 아물린 채 좀처럼 벙글지 않는다. 만개하지 않고서 지려는가. 고개 늘어뜨려 땅을 향했다. 할 일을 다 한 겸허함이다. 활짝 펴 보지도 않고 서두르는 연유는 무엇일까. 꽃 줄 위의 열매 고투리가 여리다. 파랗다. 총총하게 힘을 실어 당당하다. 꽃은 다 알고 있으리라. 자신의 소임을. 총총한 갈래의 열매에게 만개의 힘마저 보태야한다는 것을. 열매는 나무의 영화일까. 정점일까. 아니 소실점이다. 그로부터 점점 사그라져가는. 탐스럽다..
20 2022년 01월
20
“다 늦게 뭐 하는 거야?” 장 본 것들 정리를 마치고 안방에 들어서자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곧 아버지가 들어올 시각이었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냅다 퉁바리를 놨다. “이제 아버진 남자도 아니라며?” “….” 나는 다시 한번 퉁바리를 주었다. “정 없다며? 정 버린 지 오래라며?” 어머니는 아무런 대꾸 없이 립스틱 뚜껑을 닫았다. 어머니의 입술은 와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던 색깔이었다. “정 뗐다는 말 말짱 거짓말이네 뭘.” 어머니는 심통이 나 퉁퉁 불어 있는 내 얼굴을 흘끗 보더니 고관절 수술로 불편해진 몸을 어렵사리 일으키며 한마디 툭 던졌다. “정은 무슨…, 여자의 자존심이다.” 화가인 아버지는 자유분방하게 사..
20 2022년 01월
20
박복영 시인 1962년 전북 군산출생. 방송대 국문학과 졸업. 1997년 《월간문학》 시 등단. 2014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천강문학상 시조대상. 성호문학상 등, 시집 『낙타와 밥그릇』, 『햇살의 등뼈는 휘어지지 않는다』, 『거짓말처럼』, 『눈물의 멀미』와 시조집 『바깥의 마중』. 오늘의 시조회의와 전북작가회 회원 갈매새, 번지점프를 하다 / 박복영 아찔한 둥지난간에 올라 선 아직 어린 갈매새는 주저하지 않았다./ 굉음처럼 절벽에 부딪쳐 일어서는 파도의 울부짖음을/ 두어 번의 날갯짓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어미가 날아간 허공을 응시하며 뛰어내린 순간,/ 쏴아, 날갯짓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하강하던 몸이 떠올랐다.// 한 번도 바람의 땅을 걸어본 적 없으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