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202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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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모니터를 새것으로 교체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바꾸고 나니 진료실이 달라 보였다. 큼지막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TV밖에 모르던 놈이 대형스크린 앞에 선 것만큼이나 마음이 들뜨기까지 하곤 했다. 물론 오래 가지 않을 얄팍한 감정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교체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엔 그랬다. 환자나 환자의 가족들도 만족해하는 눈치는 마찬가지였다. 번거로이 고개를 쭉 빼고 얼굴을 앞으로 들이밀지 않고도 앉은 자리에서 쉬이 병변을 볼 수 있는 것이기에. 잠깐이긴 하더라도, 새로운 것을 보면 뭔가 내 쪽에서도 변화를 줘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압박감 같은 것이 피어오르곤 한다. 해서 나는 묵은땅을 갈아엎는 봄날 농부마냥 모니터의 배경화면부터 갈아치우기로 마음먹었..
25 202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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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장이 서는 날, 집을 나선다. 고무줄 바지에 스웨터 하나 걸치고 나서면 흙마당에 이는 바람처럼 푸석거리던 마음도 진득하게 가라앉는다. 말 그대로 닷새만에 한번 서는 오일장은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여유와 인정이 있다. 자본의 힘이 시장구조를 장악한 도시의 시장에 비해 아직도 원시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게 시골의 오일장이다. 나즉한 장터로 들어서면 텃밭에서 키운 푸성귀 몇 단으로 전을 벌려 조무래기들의 과자 값이라도 마련하려는 할머니들이 부스스한 머리를 이고 나물단처럼 모여 앉아 봄볕을 쬐고 있다. 눈물겨운 가난도 봄볕이 될 수 있는 게 시골의 오일장이다. 나이 든 농부 한 사람이 꼬깃꼬깃 접은 천원짜리 지폐를 침을 발라가며 세고 있는 철물점 앞을 지난다.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몇 버인가를 셈하..
25 202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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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유월에 매실을 담가 두고 잊은 듯이 지냈다. 항아리 밑에 거무스름한 것이 고여 있어 손가락으로 찍어 보니 조청처럼 찐득하다. 항아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실금이 나 있다. 아쉬움에 뚜껑을 열자 열여덟 아가씨처럼 탱글했던 매실은 수분이 빠져서 쪼글쪼글하다 못해 초라하기 그지없다. 볕이 좋아 베란다 한쪽에 둔 항아리 뚜껑을 열어 놓는다. 바람도 볕도 제한되어 있어, 마치 시골에서 평생을 지내다 기력이 쇠하여 어쩔 수 없이 도회지 자식들에게 얹혀사는 뒷방노인처럼 애잔하다. 창문을 연다. 가을볕은 성품 좋은 사람처럼 온화해서 좋다던 당신. 가을이면 으레 곱고 청명한 볕을 갈무리하고 싶어 했던 당신이시다. 긴 줄에 매달린 빨래가 만국기 되어 새물내를 휘날리는 날이면, 고추 쪄 널고, 고구마 줄거리 삶아 볕에 펼..
25 202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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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영 시인 △전북 군산 출생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2009년 《정신과표현》 등단(2009) △시집 『침향』,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 침향(沈香) / 이화영 하롱베이를 다녀온 그가 팔찌를 내민다/ 촘촘히 몸 맞대고 있는 흑갈색 나무 구슬이 눈에 들어온다/ 상처의 진액으로 제 아픔을 동여매는 나무// 농라를 쓰고 하노이 저자거리를 지나다가/ 한여름에도 차디찬 내 손끝을 생각한 마음이 애틋하다/ 희귀한 것들은 때로 모질다/ 집을 나설 때마다 휑한 손목에 팔찌를 끼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무가 나를 휘감는다/ 섬뜩하다/ 고즈넉하게 누워있는 검은 윤기가/ 이따금씩 눈빛도 낯익다/ 수천 년 전 혹 나는 침향나무가 아니었을까/ 내 앞에 한줌 구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