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2022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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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찌그러진 반지의 기억 / 김혜정

제9회 동서문학상 은상 중국 교환학생 자격으로 유학길에 오르기를 이틀 전이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따라 나오라고 하더니 길가에 있는 커다란 금은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아버지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주인에게 금반지를 보여 달라고 하셨다, 아기 돌 반지를 보여줄 거냐고 묻는 금은방 주인에게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면서 자랑스럽다는 듯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딸내미가 유학을 가는데 반지 하나 해주려고요.” 나는 둥그레진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머리 굵어진 이후로 아버지와 쇼핑을 해본적이 없었던 나는 내게 선물을 주려는 아버지의 행동에 놀랐고, 그 선물이 금반지라는 것에 또 놀랐던 것이다. 이런 황당한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주인아저씨는 어디로 유학을 가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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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22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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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서랍속의 기다림 / 김정미

제9회 동서문학상 은상 크고 작은 서랍 속은 우리들의 내밀한 이야기들이 술렁거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서랍 속엔 꽁꽁 입구를 봉해놓은 삶의 씨앗봉투, 미처 볶지 못한 연한베이지색의 커피, 세상을 향해 쏘아 올리지 못한 작은 공, 다리가 부러진 안경, 고장 난 손목시계가 차곡차곡 넣어졌다. 때론 보는 것이 보이는 것의 전부였고 만지는 것이 만져지는 것의 전부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입방체의 그 수많은 서랍이란 공간 속에 정작 내가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자리를 잃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장롱 속엔 몇 번 입지 않은 또한 앞으로도 입을 것 같지 않은 내의와 철 지난 옷가지들로 가득 찼다. 이토록 잘 짜여진 수납 공간 속엔 크고 작은 물건들이 용도에 상관없이 뒤 섞여 있을 뿐이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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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22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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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영호 시인

김영호 시인 충북 청원 출생. 한국외국어대학 영어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졸업(비교문학 박사). 1 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당신의 초상』, 『잎사귀가 큰 사람』, 『무심천의 미루나무』, 『순복』, 『머킬티오도서관의 사계』.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수상. 숭실대 영문과 명예교수, 미국 하와이 주립대 초빙교수, 워싱턴 주립대 교환교수, 미국 시애틀 형제교회 실버대학(HJI) 시창작 교수. 터널의 빛 / 김영호 끼를 굶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비가 내리면 물이 새는 방에서/ 잠을 자야 하는 사람들의 집을 수선하고/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몸이 아픈 환자들을 치료해주고/ 외롭고 불안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우리 한인 선교사들/ 그 거룩한 사역자들을 위한/ ..

댓글 시詩 느낌 2022. 2. 28.

28 2022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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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홍어 / 이종임

제9회 동서문학상 동상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주먹만한 눈송이가 함성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린 나는 쪽창에 얼굴을 대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더는 참지 못하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차게 굳은 마루에도 습자지처럼 눈송이가 덮였다. 한 발 디디자 마당을 향한 작고 선명한 자국이 생겼다. 양말을 털고 새로 산 털신을 신었다. 성근 측백나무 울타리에 몰아치던 눈바람은 나뭇가지마다 눈꽃을 피우고 넓은 마당에는 두터운 솜이불을 깔아놓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로 발을 디뎠다. 뚜렷한 지그재그 문양이 고대문자처럼 떠올랐다. 강아지처럼 깡충깡충 뛰어 눈그림을 그렸다. 눈송이는 발자국 아래서 아프게 눌리고 쉽게 뜯어지지 않을 흰 판자처럼 다져졌다. 긴 발자국을 내며 대문간으로 나갔다. 대문간에 서서 마을을 바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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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22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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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파티 / 조명희

제9회 동서문학상 동상 비단이 곱게 깔린 돌상이 차려졌다. 굵은 붓글씨로 ‘첫돌’이라고 쓰인 휘장이 천장에서 바닥으로 길게 내려졌다. 그 앞에 색동 한복과 전통식 호건까지 갖춘 한 살배기를 앉혀 놓으니 모든 것이 한가지인 것처럼 잘 어울렸다. 한 살배기가 활짝 웃었다. 사랑스런 모습에 여기저기서 가족과 친지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 직업은 파티 플래너이다. 나는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파티 플래너가 되었다. 고객이 의뢰한 파티를 기획하고 연출하는 일을 총괄하는 파티 플래너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 최소한 서른아홉 살까지는 그랬다. 나는 이렇듯 우연한 기회에 파티 플래너가 되었다. 파티 플래너로 일 해온 지 이제 일 년 남짓 되었다. 나는 우리 고유의 전통 비단과 예스러운 장식을 이용한 파티..

댓글 수필 읽기 2022. 2. 28.

28 2022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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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초상화를 그려주는 세탁소 / 임인숙

제9회 동서문학상 동상 초상화를 그려주는 세탁소 오늘도 그 세탁소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벌써 보름째다. 며칠 전에 문 앞에 써 붙인 옷 찾아가실 분 연락주세요 000-000-0000 라는 흰 종이만이 찢긴 채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나와 이 세탁소의 인연은 5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입주를 하고 남편의 옷을 맡길 세탁소를 찾던 중 외진 골목이지만 그럭저럭 집과 가까운 곳이기에 선택한 것이다. 남편의 양복바지 두어 벌을 들고 처음 그 집에 들어섰을 때 주인아주머니는 커튼으로 드리워진 내실에서 이제 막 낮잠에서 깨어난 듯 부스스한 얼굴로 내게 다가 왔다. "네. 어서 오세요. 옷 맡기시려고요? 드라이요?" 마땅한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 아주머니는 내 손에 들 바지를..

댓글 수필 읽기 2022. 2. 28.

26 2022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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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새로고침 / 김희정

어제 나는 죽었다. 전원이 꺼져있었다. 오로지 하루만 기능하며 설치되고 삭제된다. 매일 화면에 떴다가 사라지곤 한다. 내 인격은 날마다 모양을 바꾼다. 그날 만난 사람들과 장소에 어울리는 코드를 택하여 조합되고 개발되며, 고쳐져 삶을 주무른다. 종일 가면일 때도 있고, 베일일 때도 있으며, 민낯일 때도 있다. 다름은 외형을 바꾸어 드러나지만,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장치들은 계속 에러 신호를 보낸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이기적인 삶은 누구나 살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편리함에 쉽게 현혹되지 못하고 불편함을 뒤척인다. 끝없이 편리한 자유에 경계를 그어가는 이타적 삶을 택한다. 그 버팀은, 자기 최면이다. 그것은 어쩌면 간단하다. 자기를 감추고 숨는 것이다. 비공개 설정이다. 내면의 텍스트는 변질되기도 하고,..

댓글 수필 읽기 2022.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