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2021년 08월

03

수필 읽기 촉촉한 선물 / 배재욱

만년필 펜촉 사이로 흘러나오는 잉크색이 짙푸르다. 검푸른 그 빛깔 속에 스며있는 이야기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어제인 양 생생히 떠오른다. 오래전 검사와 피의자로 만난 이가 전해준 만년필이다. 어느 날 교통사고를 일으킨 사람이 검찰로 송치되어 내게 배당되었다. 도로 중앙에서 달려오는 버스를 피하여 돌아선 사람을 치어 중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버스가 시야를 가려 사람을 보지 못하고 달리다 그만 사고를 낸 것이다. 조사를 끝낸 후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 사람은 12살에 고아가 된 후 넝마주이, 구두닦이, 만년필 행상 등 닥치는 대로 해오다가 프로 권투선수로 데뷔했다. 테크닉을 높이 평가받아 한국페더급 랭킹에도 올랐다. 그런데 가난한 형편이라 제대로 먹을 수 없..

댓글 수필 읽기 2021. 8. 3.

02 2021년 08월

02

수필 읽기 습관일까, 착각일까? / 임영주

끝 간 데 없는 코로나 사태로 강화된 집합금지 명령이 가족 간의 돈독한 정을 갈라놓았다. 올해는 고향집에서 쓸쓸한 설 명절을 보냈다. 아무리 핵가족 시대라고 하지만 명절에는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이번 설에는 직계 가족도 5인 이상 만남을 자제하라는 권고로 시골마을은 적막강산이었다. 마을회관은 문이 닫혔고 양지바른 곳곳에는 노인들이 맥을 놓고 앉아 있다. 아랫마을에 사는 친구가 명절도 자났으니 식사나 하자면서 전화가 왔다. 공무원으로 퇴직하고 귀향하여 살면서 주변 일에 앞장서는 친구다. 나 역시 시골에서 허전하게 명절을 보내고 마음이 울적했는데 친구의 연락이 무척 반가웠다. 정해진 시간에 약속 장소에 갔더니 다른 친구 두 명이 함께 나와 있었다. 둘 다 도회지에서 생활하다가 은퇴하고 고향에 ..

댓글 수필 읽기 2021. 8. 2.

02 2021년 08월

02

수필 읽기 두척산 쑥부쟁이 / 임영주

산에 오르다 입동 立冬이 눈앞이다. 한더위가 엊그제 같은데 찬 기운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점심 후 간편한 등산복을 입고 두척산으로 향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매일같이 보는 산인데도 정상 등산은 1년에 고작 서너 번 한다. 서원골 입구에 주차를 했다. 건너편 노랗게 단풍 든 은행나무가 장엄하게 서 있다. 조선 중기 대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이 심었다고 전하는 수령 500여 년이 된 나무다. 이곳은 정구 선생과 그의 제자 미수 허목을 배향한 회원서원 터로 지금은 부속건물이었던 관해정만 오도카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차장 앞에 마산씨름체육관이 보인다. 1970•80년대 한국 씨름을 주름잡았던 김성률, 이승삼, 이만기, 강호동 장사 등이 활약한 기념으로 건립한 씨름장으로 알려져 있다. 잘 정돈된 진입로를 따라..

댓글 수필 읽기 2021. 8. 2.

30 2021년 07월

30

수필 읽기 물같이 살았으면 / 석인수

모처럼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오후, 호숫가에 섰다. 하늬바람이 일었는지 엷게 이는 물결이 조용히 파장을 만들고 물새가 일렁이며 한가롭게 유영을 한다. 호수는 커다란 거울이 되어 또 하나의 하늘을 담고 있다. 하늘에 뭉게구름 가면 물속에도 똑같이 구름 가고 나도 구름 따라 한없이 떠간다. 잿빛 하늘처럼 내 마음이 허허로워진다. 얼마 안 있으면 추수가 끝난 들녘도 그럴 것이다. 마음도 들판도 공(空)이 된다. 공은 비었지만, 또 뭔가를 담고 채울 수 있는 여유가 있어 좋다. 생물은 물 없이 살 수 없다. 물은 영양소이자 생명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달을 정복하고 화성을 탐사할 때도 제일 먼저 찾는 것이 물이다. 물이 있다는 것은 생물이 있다고 미루어 볼 수 있고 사람의 생존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어서다. 인체..

댓글 수필 읽기 2021. 7. 30.

29 2021년 07월

29

수필 읽기 천국은 하늘에 없다 / 석인수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고 인정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하여 천연하고 태연한 듯하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일로 여기려 한다. 다분히 의도적이라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죽음이 두려워서 그럴 것이다. 인간에게서 죽음만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는 없다. 누구나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유신론자나 무신론자 할 것 없이, 믿는 종교의 유무를 떠나서 한번쯤은 내세(來世)에 대한 생각을 했음직하다. 종교는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저마다 다른 정의와 다양한 관념을 가진다. 그러나 종교는 달라도 인간의 내세문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궁극적으로 같은 맥락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영과 육이 삶의 끝이라면 어떻게 ..

댓글 수필 읽기 2021. 7. 29.

29 2021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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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매화는 지고 / 석인수

가끔 평소 알고 지내는 지인들을 만나면 “요즈음 어떻게 지내? 뭘 하면서 소일 하는가?” 라고 묻는다. 퇴직 후에 뚜렷한 직장에 재취업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서너 군데에서 손짓도 했지만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내고 싶어서 몸이 묶일 정도의 소속은 두지 않고 지낸다. “대학 강의 나가고, 글 쓰고, 운동도 하면서 지냅니다. 백수가 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됐어, 하여간 바쁘면 좋아.” 대다수 사람들이 바쁜 건 좋다고 말한다. 날마다 하는 일이 특별히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정말로 하루가 짧다. 어찌나 시간이 잘 가는지 번쩍하면 일주일이고 한 달이 번개다. 일상을 벗어나 교외로 나가는 일도 어렵다. 공직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그 때는..

댓글 수필 읽기 2021. 7. 29.

28 2021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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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작은 행복의 발견 / 김순경

- 정진권의 「비닐우산」을 읽고 - 전혀 낯설지가 않다. 정진권의 「비닐우산」은 읽는 내내 온기가 전해진다.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생활을 통해 서민들의 소소한 행복을 나타냈다. 난해하거나 현학적이지 않아 쉽게 읽힌다. 그렇다고 글이 가볍거나 헤픈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경험하고 보아왔던 일상적인 소재에서 출발하지만 갈수록 몰입하게 한다.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된 글이 점차 삶에 투영되면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다. 「비닐우산」을 읽다 보면 지나친 욕심이나 허세를 부리지 않고 오직 현실에 충실한 소시민의 모습이 떠오른다. 주제가 무겁거나 어렵지 않아 별도의 설명 없이도 오래도록 뒷맛이 남는다. 정진권(1935∼2019)은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와 명지대학교 대학원..

댓글 수필 읽기 2021. 7. 28.

27 2021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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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살아있는 몸의 샘, 땀 / 김명인

언덕 아래로 마주 보이는 아파트 공장에서 인부 여남은 명이 열심히 철근을 자르거나 나르고 있다. 그 옆으로 거푸집을 조립하고 있는 서너 사람의 일꾼이 더 눈에 띈다. 커다란 쇠손으로 쉴새 없이 흙을 파내어, 줄지어 늘어선 덤프트럭의 짐칸을 금새 채워 버리는 굴삭기도 한 대 아련한 굉음을 내면서 시야에 들어선다. 지금은, 그늘에 서 있어도 하릴없이 땀샘이 솟구치는 뜨거운 여름 한 낮, 저들은 그야말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 온 몸을 드러낸 채 저렇게 무아지경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들 굳이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비로소 연명하는 자들의 저 수고로운 삶을 최상의 인생살이라고 감히 주장할 것인가. 그럼에도 내게는 땀 흘리며 살아가는 저들의 일상이 신선하고 삽상(颯爽)하게 느껴진다. 땀방울의 무채색..

댓글 수필 읽기 2021. 7.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