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주일

공 상희 2007. 5. 23. 13:59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자 (고전 16:15-18)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무엇일까요? 가정의 회복입니다. 가정의 회복이란 무엇입니까? 공동체의 하나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됨을 확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정화하고, 사회를 가정화하고 전 인류를 가정화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되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이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이해하는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가슴과 가슴을 연 대화가 되고, 기쁨과 슬픔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위로의 영이고, 지혜의 영이고, 하나되기를 힘쓰게 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면 거룩한 의사소통을 이루어, 마음과 마음이 통하게 됩니다. 자기 언어만 고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리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다른 언어가 들려도 내 가슴에 그 언어가 주는 감동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이번에 미국 뉴욕을 방문했을 때 팬암 호텔에서 묵었는데 주일 아침에 잠깐 TV를 틀어보았습니다. 스페인어 복음 방송이 나왔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그 감동은 그대로 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국 땅 호텔에서 주일 아침에 마음과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의사소통이 막힌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의사소통이 막혔습니까? 성경은 사람이 바벨탑을 쌓아 그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교만의 바벨탑을 쌓으면 가정과 교회에서조차 의사사통이 막히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 충만의 첫 열매는 의사소통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그때 방언이 터졌고, 각 나라에서 온 무리들의 귀가 열려 그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언어는 달랐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룩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 그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정에도 그것이 필요합니다. 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격려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성령 충만하면 서로 격려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은 위로의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남을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지혜의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남을 이해할 줄 압니다. 성령 충만하면 부자간에 이해하려고 합니다. 부부간에 이해하려고 합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따로 필요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대화가 회복됩니다. 그처럼 성령 충만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면 가정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집니다.

성령 충만은 사람 사이에 있는 어떤 장벽도 거뜬하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계층의 장벽도 무너뜨릴 수 있고, 지역의 장벽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민족의 경계도 넘을 수 있고, 나라의 경계도 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결코 남을 경시하고 남을 차별하며 무시하지 않습니다.


지금 러시아와 중국과 몽고 사람들이 코리아드림을 가지고 많이 한국으로 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들을 차별합니다. 조금 못 산다고 그들을 우습게 압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 우리 나라에 적대감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조금 더 잘 산다고 그렇게 하니 이 얼마나 교양 없고 인격이 모자란 모습입니까? 마음이 돌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아픔을 직접 겪지 않았어도 이해하고 그들을 품으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최대한 존중하십시오

이제 우리는 막힌 부분을 뚫고 의사소통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아픔도 같이 느끼고, 슬픔도 같이 느낄 줄 아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 믿음의 인격체가 되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장벽을 넘을 수 있는 아름다운 신앙인의 향기가 나타나야 합니다. 작


년에 우리는 이런 안타까운 이야기를 신문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불교학교인 동국대에 있는 불상에 빨간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려 놓은 사건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그 앞에는 '오직 예수'라고 썼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자기 감정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셨을까요? 기뻐하지 않습니다. 말로만 "오직 예수!"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보도를 보고 수만 명이 실족하고, 믿음을 외면하니 얼마나 큰 죄입니까?


너무 지혜롭지 못합니다. 너무 무식합니다. 성령은 지혜의 영인데 그럴 수 없습니다. 그처럼 말로만 "성령! 성령!" 하면서 행동은 거칠고, 무질서하고, 자기 멋대로 하고, 부모를 우습게 알고, 윗사람을 우습게 안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가 아닙니다. 살면서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이 옳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이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고 해야 합니다. 최대한 존중하며 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모가 잘못해도 부모 앞에서 눈을 치켜 뜨고 "부모 노릇 똑바로 하십시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올바른 자식이 아닙니다. 기본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그가 옳은 주장을 해도 옳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자기는 지킬 것 지키지 않고 남만 지키라고 합니다. 남에게는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주고, 자기는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말을 하면서 남의 이름을 빌려 하다가 나중에는 성령까지 둘러댑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예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은 "김집사님이 그래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면 김집사님 말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을 김집사에게 먼저 해서 반응을 유도한 후, 김집사를 내세워 자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보면 목사님도 김집사님을 오해하고, 김집사님도 목사님을 오해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그런 습성이 있지만 그런 태도가 상습적인 사람은 정말 위험합니다. 상습적인 분들은 항상 그런 식의 말이 입에 붙어서 "누가 그러던데..."라고 합니다. 사람을 이해하게 만들어도 부족한데 오해하게 만드니 그렇게 행동하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남의 이름을 빌려서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태도는 나중에 어디까지 갑니까?


정말 심각한 지경까지 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까지 빌려서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무서운 태도입니다. 뚜렷하게 잘못된 증거도 없이, 아무런 논리적 설명도 없이, 대화를 통한 진의파악도 없이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 무조건 "성령께서 근심할텐데."라고 하며 엄청나게 자기를 높이며 전체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말로 사람들을 덩달아 근심하게 만듭니다. 그게 얼마나 성령과 반대되는 말이며, 경우에 어긋나는 말인지도 모르니까 정말 문제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생명책 이름까지 빌려가면서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며칠 전 한 자매님이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나이 삼십이 넘어 한 남자와 교제하는데 다른 면은 다 맘에 들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직 결혼을 약속하지 않고 그 남자와 계속 교제하면서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믿지는 않지만 옛날보다는 그 남자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님은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앞날을 하나님 뜻에 맡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선배 언니가 기도하는데 환상 중에 이런 환상을 봤다고 합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의 생명책을 보았는데 너는 거기에 성(姓)밖에 기록되지 않았어! 그 이유는 네가 믿지 않는 사람과 교제하기 때문이야. 빨리 헤어져야 돼! 그래야 네 이름이 세 글자가 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을 거야."


그런 말을 듣고 이 자매님이 겁이 나고 마음에 두려움이 생겨서 전화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구원에 관한 기독교의 기초 원리까지 흔들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약한 마음을 파고들어 기독교의 무속화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령님의 이름은 망령되이 일컬어져서는 안됩니다. 성령님의 이름을 빌려 불평과 원망을 전파하고, 두려움과 오해를 심으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감정만 생각하지 말고 성령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속에 잘못된 영을 받고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니 정말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지구 가정화의 초석이 되십시오

성령을 받으면 다른 사람이 나와 크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고통 당하는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마치 나와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여러분!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보면 나와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의 일부분을 떼어서 남을 도울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령 받은 사람은 피조물의 신음소리에 예민한 귀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지금 피조물은 성령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성령을 받아 전 지구의 가정화를 꾀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피조물의 아픈 소리를 듣고 자기 아픔으로 느낄 줄 알고 보호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듣고 아파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을 너무 착취합니다. 같은 동반자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피조물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의 과시적인 소비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처럼 피조물과 우리 사이에 있는 적대관계, 착취관계가 해결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전 지구의 가정화 사역이 확대되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우리 가정들이 가정화 사역의 전초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그런 가정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용서와 이해와 사랑을 전하는 가정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오늘 본문에는 그런 가정이 나옵니다. 바로 15절에 나오는 '스데바나의 집'입니다. 스데바나의 집은 성령충만한 가정으로 주위를 시원하게 해주는 가정이었습니다. 우리도 스데바나의 집 식구처럼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첫 열매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15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아가야는 고린도라는 항구 도시가 속해 있는 지역입니다.

스데바나의 집은 고린도뿐만 아니라 아가야 도 전체에서 처음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이 가정이 바울의 사역에 얼마나 큰 도움과 격려가 되었는지를 느껴보십시오.

목회를 하다 보면 이런 첫 열매가 목회에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첫 열매가 아름답게 맺는 것을 보면 모든 피로와 시름이 다 가시는 것을 느낍니다. 첫 열매는 초창기의 열매란 말도 됩니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개척에는 고난과 희생과 심지어는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공동체에 가든지 첫 열매와 초창기의 열매를 존중해야 합니다. 물론 초창기의 열매라고 해서 스스로 교만하면 안되겠지만 우리는 존중해야 합니다. 뒤따르는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초창기의 열매를 최대한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뒷물결은 앞물결을 존중하며 넘어서려고 해야지 무시하며 넘어서려고 하면 안됩니다. 성령 충만한 가정 공동체를 진정 만들고자 하면 그런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첫 열매는 뒤따라오는 열매의 본이 됩니다. 그래서 첫 열매가 정말 중요합니다. 첫 열매가 화평을 추구하면 뒤따라오는 열매도 화평을 배우고 추구하게 됩니다. 첫 열매가 열심히 전도하면 뒤따라오는 열매도 전도를 배우고 전도하게 됩니다. 첫 열매가 사랑이 넘치면 뒤따라오는 열매도 사랑을 배우고 사랑하게 됩니다. 항상 소중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첫 열매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 그랬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까지 소중하게 자란 것은 첫 열매들이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첫 열매들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가끔 저는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첫 열매인 우리가 너무 부족하다"는 소리입니다. 그런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많이 있습니다. 그 부족함이 교회에 큰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조금 부족한 것이 낫습니다. 그처럼 부족한 줄 알고 겸손하게 지냈기에 이렇게 교회가 평안한 줄 알아야 합니다. 부족하면 어떻습니까? 오히려 부족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제까지 완벽해서 성공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소중한 것이고, 그래서 서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부족한 것이 보이거든 그것을 헐뜯지 마시고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해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2. 섬김을 작정해야 합니다.

15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의 첫 열매일 뿐만 아니라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했습니다.

성도를 섬긴다는 말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않습니까?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은 쉽습니다. 인간의 본성상 저절로 됩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섬기는 것을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작정을 해야 합니다. "나는 꼭 섬기면서 살겠다"고 말입니다.

성도 섬기기로 작정하는 것! 얼마나 멋있는 작정입니까?

자기 본능을 따라 "나는 꼭 성공해야지."라고 작정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성도들을 무조건 섬겨야지."라고 작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옳은 일을 작정하고 그대로 실천하면 얼마나 힘이 되고 마음이 편합니까? 살면서 우리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변덕입니다. 오늘 좋다고 했다가 내일 싫다고 하면 하나님이 그 삶을 축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섬기기로 작정했으면 꾸준하게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틀림없는 분인데."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변덕은 순수한 편입니다. 연약한 인간인지라 변덕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면서 정말 추하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변질입니다. 변화는 그렇게도 느리게 일어나는데, 변질은 왜 그렇게도 빨리 일어나는지요. 여러분! 변화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그러나 변질의 주인공은 되지 마십시오. 그것을 위해서 인내하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 섬기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몇 가지 소중한 작정을 해보십시오.

"나는 주일성수 하리라! 꾸준히 기도하리라! 나는 책임적인 교인이 되리라!

결코 사랑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으리라! 겸손히 교회와 성도를 섬기리라!"

그렇게 겸손히 섬기면 내가 낮아집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십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들도 높여줍니다. 성도들이 진심으로 복종하고 따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에서 사도 바울도 그런 자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또한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을 알아주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를 섬기는 자는 반드시 섬김을 받게 되고 높임을 받게 됩니다.


3. 부족한 것을 채우는 협력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고린도 교회는 분쟁이 심하고,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나깨나 고린도 교회를 생각하며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달려가 모든 것을 수습하고 싶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다립니다. 조금 더 기다리면서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교회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평안할 때에 가서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다리는데 얼마나 마음이 답답했겠습니까? 그리고 간접적으로 사도 바울을 비난하는 소리도 많이 들려왔습니다. 그런 중에 세 사람이 고린도교회로부터 왔습니다. 그들이 바로 17절에 나오는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입니다. 스데바나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세례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고전 1:16). 브드나도는 이름의 뜻은 행운인데, 아마 종의 신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가이고는 아가야 사람이라는 뜻인데 역시 노예의 신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온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왜 기뻤습니까? 17절을 보면 그들에게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협력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쁨을 줍니까? 혼자 자기에게 영광이 되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보다 전체를 생각하고, 형제를 생각하면서 협력하며 일하는 사람이 기쁨을 줍니다. 앞에서 열심히 일하면서도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또한 뒤에서 조용히 협력하는 사람을 봐도 마음이 얼마나 시원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협력 중에서 최고의 협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이 세 사람을 만나 좋은 소식을 전해들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 교회가 희망적입니다." 그 말을 듣고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시원해졌을까요?


그처럼 우리는 항상 좋은 소식과 사랑의 말을 전하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런 말을 하십시오. "여보! 괜찮아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얘들아! 염려하지 마! 넉넉한 마음으로 노력해봐! 반드시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에 이런 소리들이 넘쳐난다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이야기를 하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은 대개 넉넉함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사람은 항상 큰일난 것처럼 흥분하며 말하는 사람입니다.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듣는 사람이 다 불안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좋은 말로 마음을 시원하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잠언 15장 30절 말씀에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고 했습니다(잠 16:24).

성도들이 좋은 일을 하고, 그 칭찬을 우연히 외부로부터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마음이 뿌듯하고, 모든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 듭니다. 반면에 우연히 다른 사람을 통해서 부정적인 말을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아프고, 답답해지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듭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입니까? 시원하게 하는 사람입니까, 답답하게 하는 사람입니까? 항상 막힌 담을 뚫어 주는 시원스럽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