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론◎

두루미 2008. 3. 1. 07:57
수필과 생활

                                                                                                                           柳 炳 奭

 모든 문학이 생활의 반영 아닌 것이 없지만 특히 생활과 가장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장르는 수필이다. 시·소설·드라마도 생활의 반영이요 표현이다. 그러나 그 반영의 방식과 표현 양식에 있어서 이것들은 수필과 다르다.
 소설은 작가가 자기의 생활을 직접적으로 표현·전달하지 않는다. 허생원이라는 기구한 장돌뱅이의 생활을 나타낸 것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다. 우리 독자는 거기에서 허생원의 생활에 접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효석 자신의 생활은 아니다. 작자 이효석은 창조주처럼 작품의 뒤에 숨어 버리고 우리는 거기서 엉뚱한 허생원의 생활을 구경한다. 이효석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허생원을 조종할 뿐이다.
 드라마도 이 점에서 소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햄릿'에서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생활을 구경할 수가 없다. 죽느냐 사느냐 고민하는 것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그가 창조해 낸 '햄릿'이란 인물일 뿐이다. 우리 독자가 '햄릿'이란 드라마에 공감하고 감동하는 것은 '햄릿'이란 가공 인물의 기구한 운명 때문이다. 이미 부귀와 명성을 누리고 유유자적하는 셰익스피어 때문이 아니다.
시에는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작자의 생활이 직접 드러나지 않는 부류의 것과 시인 자신의 생활이 직접 드러나는 부류의 것이 있다.

 첫째 부류의 시는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시인 자신은 모습을 감추어버리고 등장인물로 하여금 판을 벌이게 조종하는 것이다. 한 편의 작은 드라마와 같은 시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라고 말하는 인물은 시인 김소월이 아니다. 작중 인물일 뿐이다.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는' 행위의 주체가 헌헌장부인 김소월일 수 없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하면서 떠나는 임을 맘 놓고 원망조차 할 수 없었던 가냘픈 여인이 수백 년 후에 환생한 것 같은 그러한 한 많은 아낙네임에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진달래꽃의 김소월은 이효석이나 셰익스피어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작중 인물을 조종하는 작가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작자 아닌 작중 인물(가공 인물)의 생활에 접할 따름인 것이다.

 둘째 부류의 시는 소설이나 드라마와 달리 직접적으로 시인의 생활이 드러나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 자신의 메시지를 직접 독자에게 전달하는 경향이 있다. 시인 자신의 생활이 직접 드러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약하며 살아가는 것은 윤동주 자신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던 나약한 식민지 지식인 윤동주를 목도한다. 윤동주가 창조해 낸 어떤 다른 작중 인물이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허구의 인물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독자는 바로 윤동주라는 자연인의 생활에 접하는 것이다.
 수필은 어떠한가? 수필은 수필가 자신의 생활을 직접 그려낸다. 둘째 부류의 시와 유사하다. 수필가가 그의 수필에 담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활이다. 작중 인물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 수필을 일컬어 작자의 나상(裸像)이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수필처럼 작자가 직접 드러나는 글이 어디에 또 있는가? 소설이나 드라마에도 작자의 성격이 드러나긴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체라든가 기법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흐릿하게 드러남에 그친다. 수필처럼 작자가 직접 자기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필은 작자가 직접 나서서 말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독자를 직접 상대해서 말한다. 이 점에서 수필이 소설, 드라마, 첫째 부류의 시와 다르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시 중에서 수필에 가까운 둘째 부류의 시, 고백체 시(잠정 용어임)도 작가가 직접 나선다는 점에서는 수필과 유사하지만 독자를 대하는 태도는 판이하다. 수필은 수필가와 독자의 직접 대화다. 화자와 청자가 대면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고백체 시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시인이 자신의 소회(所懷)를 피력하긴 한다. 그러나 누구보고 들으라고 특정 대상을 상정한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허공에 대고 자기의 소회를 피력할 뿐이고 독자는 이 때에 시인의 독백을 뒤에서 엿듣는 존재와 같다. 시인이 시를 쓸 때 그는 수필가처럼 독자를 상정하지 않는다. 혼자의 독백을 허공에 띄워 놓고 그만두는 것이다. 그것을 엿듣는 존재가 시의 독자다.


 이상에서 논술한 바를 요약하면, 수필은 수필가 자신의 생활을 자신의 육성으로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성격이 가장 뚜렷한 장르의 문학이다. 이 말은 곧 수필이 여타의 문학보다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장르라는 뜻이 된다. 실제로 우리의 경험이 이를 증명하고 남음이 있다. 김소운의 전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그의 몇 권의 수필집을 읽으면 충분하다. 그러나 수십 편의 소설을 죄다 읽어도 우리는 작자 염상섭의 생활을 알 수는 없다. 염상섭 연구자는 그가 써 놓은 회고록이나 교우록 등속에―이것이 수필이 아니고 무엇인가―의존한다.


 수필은 수필가의 생활이 곧 소재다. 수필가는 자기의 생활을 소재로 수필을 쓴다. 그러면 모든 생활이 다 수필이 되는가? 그럴 수는 없다. 아무거나 생활이면 다 수필이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생활이라는 것이 그지없이 사소하고 하찮은 것 투성이가 아닌가? 특별한 생활이면 수필의 소재가 된다. 그러나 특별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만이 수필을 쓸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찮은 생활의 더미 속에서 값진 것을 발견해 내는 밝은 눈이 있으면 된다. 금괴가 그대로 굴러 있는 노천 금광은 그리 흔하지 않다. 대부분의 금광은 땅속 깊은 곳에 있다. 깊은 땅속을 뚫고 들어가 바위에 싸라기처럼 박힌 금싸라기를 쪼아 내게 되어 있다. 이런 뜻에서 세계적인 에세이스트 임어당(林語堂)이 그의 에세이집에 <생활의 발견>이라 표제를 붙인 것은 아주 잘된 일이다.
생활의 발견만으로 좋은 수필이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발견된 생활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이 따라야 좋은 수필이 된다. 이것이 잡문과 수필을 구획하는 경계선이다. 일반론적으로 말하면 생활의 발견은 소재 선택이요 그것의 가치 부여가 주제 설정이다.


 소재 선택이 먼저 있고 주제 설정이 뒤에 따라오는가, 아니면 주제가 먼저 설정되어 거기에 걸맞는 소재가 나중에 선택되는가 하는 것은 그리 고심할 일이 아니다. 사실은 소재 선택과 주제 설정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이 흔하다. 잡다한 생활 속에서 소재가 선택될 때―생활이 발견될 때―이미 그 생활은 의미 부여가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하찮은 생활에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이 곧 생활이 발견되는 순간이요 수필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주제를 지팡이에, 소재를 막대기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팡이가 필요한 사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적당한 막대기를 찾아 드는 수도 있다. 그저 지나치기 아까운 막대기를 우연히 주웠기 때문에 그것을 지팡이로 요긴히 쓰는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흔한 일은 적당한 막대기를 만나는 순간, '아, 이걸 지팡이로 쓰면 안성맞춤이겠구나!' 하고 탄성을 지르는 경우일 것이다. 지팡이의 용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지팡이의 필요성이 없는 사람에게, 지팡이와 막대기의 상호 연관성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막대기는 그대로 막대기로 남은 채 굴러 있게 될 것이다. 기성 상품의 지팡이어야만 지팡이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수필가의 밝은 눈이다.


 생활인이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 수필이고 생활인이면 누구에게나 읽히는 글이 수필이다. 수필은 밝은 눈에 보이는 생활의 모습이요 생활인의 눈을 밝게 하는 글이다. 생활을 발견하고 거기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여 전달하면 수필이 된다.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까, 어떻게 기막히게 표현할까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며 그리 중요한 기본 문제도 아니다.

▲ 필자 소개

수필가(1936∼1995). 전 한양대 국어학과 교수. 수필집으로는 《왕빠깝빠》(유고집)가 있고, 저서로는 《염상섭 전반기 소설 연구》와 《20세기 한국문학의 이해》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