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두루미 2008. 9. 29. 11:17




농사꾼의 남편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박정순



무덥고 후텁지근한 날씨에 괭이로 땅을 파려니 엄청난 인내가 필요했다. 온 몸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땀으로 젖었는데도 내 몸에는 아직 배출할 수분이 남아 있는지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쉴 새 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머리카락도 머리를 감고 물기를 닦지 않았을 때처럼 땀에 젖었고, 손바닥에도 물기가 배어 괭이질하기도 쉽지 않았다. 땅을 파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탈수현상까지 나타났다. 수분을 보충하려고 연신 물을 마셨지만 그때뿐이고 오히려 갈증이 더 심했다.

일요일인 오늘 오후, 교회에서 돌아온 아내가 나에게 가벼운 반바지 차림으로 어디 함께 갈 데가 있다며 반 강제로 나를 차에 태웠다. 도착한 곳은 전주시가 조성해 놓은 택지 개발지였다. 넓게 조성된 택지는 이미 밭으로 변해 있었고, 거기에서는 여러 가지 농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길가에 차를 세운 아내가 곡식이 자라고 있는 밭을 가로질러 조금 들어가다가 어떤 밭 앞에 멈춰 서더니 이 밭이 자신이 만든 밭이라고 했다. 아내가 만들었다는 밭에는 상추와 배추가 자라고 있었고, 녹두와 팥도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풀밭에도 아내가 심었다는 오이와 고추 몇 포기가 자라고 있었는데, 오이와 고추를 심은 이유는 이곳을 밭으로 만들기 위해서 표시를 해둔 것이라고 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밭을 만들지 못했지만 풀이 자라면서 오이와 고추가 풀에 파묻혀 다른 사람들이 이곳을 밭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밭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내 따라 이곳에 와서 처음 느꼈던 생각은, 우리가 일궈 낸 밭에 농사를 지어 무공해 농작물을 식탁에 올리겠다는 아내의 소박한 꿈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풀이 무성한 땅을 파서 밭을 더 만들자고 재촉하는 것을 보니 아내는 작은 텃밭을 가꾸려는 게 아니라 아예 농사를 짓겠다는 욕심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소유하고 싶어 하는 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텃밭으로 가꾸고 싶어 하는 밭의 크기를 몇 배 초과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힘을 빌려 그 풀밭을 파고 밭을 만들 생각에 들떠 있는 아내에게 가게를 하는 사람이 언제부터 밭을 만들었고, 또한 지금이 녹두와 팥을 심을 시기인지를 어떻게 알아서 심었느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아내는 어느 일요일 오후 함께 교회에 다니는 권사님이 밭을 만들었다며 함께 가보자기에 구경삼아 따라왔다가 그날로 권사님 밭 옆에 있는 풀밭을 파서 밭을 만들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농작물을 심었다고 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이 정도의 밭을 가졌으면 우리에게 필요한 채소는 충분히 심을 수 있는데 왜 밭을 더 만들려고 하느냐고 짜증을 부렸다. 그러나 아내는 지금 밭을 만들어 놓아야 내년 봄에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서 밭 옆의 비닐을 들추고 괭이와 삽을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나에게 괭이를 들려주면서 자기가 표시해 둔 땅을 파서 밭을 만들자고 성화를 부렸다. 막무가내로 땅을 파야 한다는 아내에게, 내일이라도 이곳에 건물이 들어서게 되면 밭을 만들어도 헛고생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있는 밭이나 잘 관리하라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이곳에 당분간 건물이 들어서지 않는다는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밭을 만들었기 때문에 올해 농사를 짓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고 운이 좋으면 1-2년 더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서 괭이질을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를 모면하고 싶은 마음에 여러 가지 핑계를 늘어놓았지만, 한 번도 농사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아내가 서툰 솜씨로 괭이질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땅을 파지 않고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괭이질을 하면서도 전에 자신이 만든 밭은 토질이 좋아서 쉽게 밭을 만들 수 있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땅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밭을 만들 수 없다며 빨리 땅을 파라고 재촉했다.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날 정도로 무더운 날씨에 괭이질을 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 심란한 마음으로 서서 주변을 돌아보니 일찍 농작물을 심은 밭에서는 여러 가지 곡식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 농작물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늘이라도 밭을 만들어 제철에 맞는 작물을 심는다면 우리도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 기억을 되살려 이때쯤 심을 수 있는 곡식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일단 밭을 일군 다음 생각하기로 하고 아내에게서 괭이를 건네받았다. 그러나 내가 땅을 파는 주변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밭을 일구어 작물을 심고, 남은 자투리땅이었기 때문에 그 땅은 밭으로 일구기에는 모든 조건이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괭이 끝이 자주 돌에 부딪쳐 불꽃이 튀면서 돌 조각들이 날려 위험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허리에 통증까지 밀려와 괭이질을 하는 시간보다 서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고 손바닥에 물집까지 생겨 땅을 파기가 더욱 힘들었다. 아내는 온몸이 땀에 젖은 채 땅을 파고 있는 나에게 집에서 얼려 온 물을 따라 주면서 내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본인은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나마 조금 다행인 것은 처음 괭이질을 시작할 때는 땀이 나면서 꿉꿉했는데 온몸이 땀으로 젖으면서 오히려 개운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힘든 괭이질을 한 보람이 있어 해질녘이 되자 풀이 무성하고 돌이 많던 땅이 조금씩 밭의 모양을 갖추어 갔다. 아내는 내가 파 놓은 땅에서 돌과 풀을 골라내면서 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밭을 만들 수 있었지 자기 혼자 했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고 나를 추켜세우면서 다음 주 일요일 오후에 또 와서 밭을 만들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 가족이 먹을 채소를 심기에는 이 정도 밭이면 충분한데 무슨 욕심을 그렇게 부리느냐고 짜증을 냈지만 당분간 내가 땅 파는 머슴 신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 밭을 만드는 일을 도와주자 아내는 내가 자기의 동업자가 되었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에게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아내의 그런 성화가 아니라도 처음 밭에 왔을 때 심란하고 짜증스러웠던 내 마음이 밭을 일구고 나서 뿌듯함으로 바뀐 놀라운 변화가 앞으로도 나를 밭에 오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