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두루미 2008. 9. 30. 09:24


“컴퓨터 시대에 웬 책?”


                                                     민 병 욱(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도서벽지 어린이들에겐 학교공부 외에 TV보기가 문화생활의 거의 전부다. 바로 그런 어린이들을 위해 ‘책 잔치’를 벌이다 난감한 일을 겪었다. 아이들에게 한 권씩 책 선물을 주는 걸 보고 젊은 공무원이 정색하며 “(종이)책 대신 CD로 구워 주면 돈도 적게 들고 훨씬 효율적”이라고 한마디 한 것이다. ‘어쩌면 이 한 권이 벽지 아이들에겐 생애 처음 가져보는 자기 책일 수 있다’고 하자 그는 “요즘은 컴퓨터 세상입니다”며 말을 막았다. 지금은 자리를 옮겼지만 명색이 국민독서와 출판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이의 그런 인식이 마음에 걸렸다.

주당 독서시간, 2005년 30개 조사대상국 중 꼴찌

우리 국민 독서율이 세계 최하위권이고 성인 10명 중 2-3명은 1년에 한권도 책을 안 본다는 지적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2005년 다국적 여론조사기관 NOP월드가 세계 30개국 3만 여명을 심층 면접한 결과 우리국민이 책과 잡지 등 활자매체를 읽는데 쓴 시간은 주당 3.1시간, 조사대상국 중 꼴찌였다. 당시 30개국 평균은 6.5시간이었으니 그 절반에도 못 미친 것이다. 1년으로 환산하면 우리는 1인당 170시간, 4천만 국민으로는 68억 시간을 ‘세계인들보다 깜깜히’ 활자와 담 쌓고 지낸 셈이다. 책으로 얻어지는 지적능력과 창의력, 감성이 그만큼 떨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어려서부터 읽기 습관을 들여 주자는 운동은 그래서 펼쳐졌다. 책은 재미있고 유익한 평생 친구라는 생각에다 책과 관련한 아름다운 추억도 심어주고자 북 쇼우 등 잔치를 벌이고 ‘책 기차여행’도 했다. 교과서 밖에 책이라곤 못 보던 산골, 낙도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책 한 권의 따스함을 전달하면 언제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빛내며 화답해왔다. 보물처럼 책을 안고 기뻐하는 아이들에게서 미래의 ‘책상양반(冊床兩班)’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책 한 권이 이렇게 우리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줄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데 공무원께선 “컴퓨터 시대에 웬 책이냐”니….

정부의 책과 독서에 대한 인식이 문제다. 독서문화를 진작시키기 위한 제대로 된 법조차 없다가 겨우 독립법이 제정 시행된 게 작년 4월이다. 그전에는 ‘도서관 및 독서진흥법’의 한 장에 독서조항이 뭉뚱그려져 있었다. 도서관법과 떨어져 ‘독서문화 진흥법’이란 독립법이 생겼다고 정부의 활동과 지원이 좋아진 것도 아니다. 국민 독서문화 진흥을 위한 년 예산이 20억 원대에 불과하다. 예산당국은 그것마저 깎아보려고 문화부를 닦달한다. 그뿐인가. 새 법에 따라 작년 12월 발족했던 ‘독서진흥위원회’는 지난 5월 정부의 위원회 통폐합 방침에 따라 자동 소멸해버렸다. 회의라곤 상견례 포함 2번 밖에 열리지 않았으니 실적이란 게 있을 리도 없다. 한 위원은 “만나자 이별이라더니 정부가 이렇게 책과 이별하자는 건가”고 불만을 터뜨렸다.

5개월 반짝 있다 사라진 독서진흥위원회

독서진흥 실상이 이러니 출판계에도 찬바람이 쌩쌩 인다. 등록 출판사는 3만개에 이르지만 한 달에 한 종이라도 책을 내는 곳은 4,5백 곳에 불과하다. 개점휴업 출판사는 갈수록 늘고 있다. 웬만한 책은 발행부수가 백 단위로 내려앉았다. 간판이라도 걸고 있겠다며 사람을 자르는 출판사 괴담도 흉흉하다. 어느 출판사 사장은 직원 인건비라도 벌려고 야간 대리운전에 나섰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9월22일자 매일경제). 출판사 불경기는 자연 서점과 인쇄소 제본소의 불황으로 번져 총 문화산업의 36%(매출액)~47%(종사자수·2005년 추산)에 이르는 책 산업의 추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9,10월 독서의 계절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 책 축제가 열리고 있다. 지식을 사랑하는 이들의 맑고 밝은 표정이 그곳엔 있다. 책을 즐기고 나누고 토론하고 아끼는 사람들은 그러나 축제장, 그 화려한 분위기에서도 일말의 불안을 감추지 못한다. “컴퓨터 세상이라니, 앞으로 얼마 안 가 ‘책 축제’도 사이버 장에서 열리는 것 아냐?”… 도서 벽지 어린이들에게 책 한 권을 전하는 따스한 마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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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민병욱
·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 경원대 초빙교수
· 전(前) 동아일보 정치부장 논설위원 출판국장
· 저서: <들꽃길 달빛에 젖어>(나남출판, 2003)
 
       

공감하며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