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두루미 2009. 1. 29. 08:53

<중국기행>

고구려의 숨결(1)

-국내성에서 피던 꽃-

나 인 강

 

 

 

k형!

어젯밤은 밤 9시 40분에 이도백하역을 출발하여 백두산에 올랐던 감격을 되새기며 기차 속에서 보냈습니다. 새벽 6시 15분에 통화역에 도착해보니 밤에 비가 많이 내렸더군요. 이제 4시간정도면 고구려의 옛 땅 집안시에 도착한다니 마음이 설렙니다.

6월 5일 오후 2시 50분,

고구려 유물 11,000여점이 소장된 집안시 박물관(1958, 9, 15개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중국인이 안내를 맡고 서툰 우리말을 쓰는 조선족 아가씨가 시녀처럼 따라다녔습니다. 박물관 내부에 들어서자 광개토대왕 비문 탁본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내부 설명은 중국인여자가 했고 조선족 아가씨가 통역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k형!

비문의 조작설과 삭제설이 뒤엉킨데 대한 마음의 충동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왜일까요. 탁본 제4편의 망가진 부문에 대하여 묻자 그 안내인은 전혀 모른다고 잘라 말했고, 나는 다시 고구려 국경선의 설명을 요구하자 잘 모른다는 말로 얼버무렸습니다.

k형, 보는 것과 보이는 것 그리고 보여주는 것이 다르다는 말이 새삼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한 민족국가로서 고구려를 세웠고 통치하였을진대 그들을 중국의 일부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 설명하고 BC 37년경에 집안을 수도로 하고 AD 427년에는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진술에는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럼 평양이 있는 우리 한반도도 중국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억지(?)를 부릴 날도 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합니까. 이 정돈할 수 없는 감정 속을 서성이면서 나는 서서히 퇴영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K형, 국내성 남문이 있는 흑백 사진 앞에 섰을 때 어처구니없는 설명에 나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국내성 남문의 위치를 물었을 때 지금은 없다는 것입니다. 1920년대 일제 치하에서 없어진 것으로만 추측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나쳐 버렸습니다. 자기 조상의 유적이라면 그렇게 무관심했을까요? 동료를 잃은 한 마리의 철새도 뒤돌아보며 날갯짓을 한다는데, 조상의 찬란한 얼을 잃어버린 허탈감에 비애마저 느껴졌습니다. 나는 이 능청스런 설명에 서서히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나는 이 머언 조국의 끄트머리에서 조상이 살던 현장을 직접 확인하려 합니다.

호태왕비(好太王碑)!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웅장한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동방의 제일 비”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비석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고 고구려의 옛 들판을 그려봤습니다. 글자 1,775자의 음각 예서체, 집안시 동쪽 4㎞에 위치한 이 비석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 장수왕이 건립한 비인데 기원 391년에서 412년경까지의 업적을 정치, 경제, 군사, 통치구역 등으로 기술했습니다. 높이 6,39m 폭 1,34~2,0m 장방형 자연석이었습니다. 행간거리 12,5m~13,8m 한 글자의 길이 0,25m 4면의 비문은 44행.

그런데 k형! 1,590자만 육안으로 볼 수 있고 185자는 누가 삭제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진실을 어디서 찾아야 될까요?

k형!

진실을 위해 죽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진실을 위해 산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일진대…….

나는 이 허탈한 상황에서 서서히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서둘러 비문의 뒤쪽으로 돌아가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습니다. 안내원의 마지막 충고는 한 번 더 사진을 찍으면 필름을 빼앗겠다는 말이 몹시 불쾌했습니다. 사진을 못 찍게 하는 그들의 저의는 무엇일까요. 내 정신이 불구가 되었던 미약함을 스스로 저항이라도 하듯 반사적으로 나는 그녀를 쏘아 봤습니다. 감정은 시간이 해결하고 이성은 타협이 해결한다는 생각으로 이 무거운 짐을 풀기로 하고 서서히 발길을 돌렸습니다.

k형! 이 고구려 땅에서 간 사람과 온 사람의 차이는 시간의 차이 뿐이지 공간의 차이는 아니라는 말을 뒤로하고 조선족과 중국인들이 오가는 시가지를 빠져 나와 버스는 북쪽으로 달렸습니다.

그런데 k형! 이건 웬일입니까? 환도산성이 보이는 다리 근처에 버스를 세우더니 보수중이라 접근할 수 없다는 안내원의 말이 뒤통수를 치는 듯했습니다. 집안시 북쪽 2,5㎞ 해발 676m의 고구려 최초 최대의 성곽이었습니다. 길이 6,951m 전망대 높이 8m 성곽 안에는 남북 92m 동서 62m의 궁터가 있었던 환도산성-.

먼발치에서 사진만 몇 장 찍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밑에 있는고묘군(古墓群)만이라도 가보기로 했습니다. 안내원의 접근금지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박 선생님과 일행 4명이 돌무덤까지 갔습니다.

고구려 고묘군! 산더미같이 쌓인 동서16㎞ 남북 2~4㎞에 11,258개의 고구려 돌무덤들이었습니다.

1961년 3월, 중국정부에 의해 “전국 중점 문물”로 선포되었다지만 중국인들의 무관심 속에서 관리가 되지 않아 외로운 고구려의 혼백들만 떠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누구의 묘일까 마른 모래알처럼 갈증을 느꼈지만 우리민족이 군림할 수 없는 특수사회에서 나의 마음은 수치를 면치 못하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허물어진 성터 돌담장의 숨소리라도 듣고 싶었는데…….

k형!

한 번 사랑한 이는 언제나 내 님이라, 오랜 세월이 지나도 나는 그 고구려의 님을 기억하고 가슴에 묻고 살아가렵니다. 나는 지금 고구려의 님들을 가슴 구석구석에 편물하기 시작합니다. 또 나는 이 중국인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도 때에 따라서는 잔인한 사랑(?)이 될지 모른다는 말로 마무리 합니다.

k형!

6월 6일 오후 2시 30분, 이제 고구려 선구자들의 혼백과 헤어지는 연습과 작별하는 절차를 밟으며 고구려 길림성 집안시 집안역을 떠나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천년을 멍든 가슴으로

세월만 탓 하다가

열릴 듯 못 깬 새벽

國內城 서러운 恨을

눈 감고

바람 스치면

임의 숨결 들려라

-고구려 集安市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