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두루미 2012. 11. 3. 05:49

은하철도 999

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이승환

때는 몇 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 어느 10월 초순 어느 날, 인문계고등학교 3학년 교실이다. 이반 학생들은 몇 주 전부터 대학진학 이야기로 교실이 훅훅 달아올랐다. 누구는 S대, 누구는 Y대, 또 누구는 K대를 간다느니, 가는 곳마다 모이는 곳마다 대학진학 이야기였다. 설사 원서를 쓸 입장이 못 되는 학생들도 겉으로는 기죽지 않으려고 서울로 진학을 한다며 자존심을 세우던 때다. 그러나 지금은 선생님을 만나 상담하고 원서를 쓰고 있으니 이젠 허풍도, 허세도 통할 리가 없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긴박한 순간이라 멈칫멈칫할 시간이 없었다. 그때였다. H가 가만히 내게 다가와,

“승환이, 난 대학입학원서를 쓸 형편이 못 되는데 어떻게 하지?”

그 표정과 목소리가 얼마나 진지했던지 내 가슴이 아팠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나보다 가정형편이 훨씬 나은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네. 우리 서로 힘내세. 걱정하지 마!”

나는 왜 이렇게 진솔하지 못했을까? 그 순간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해 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지금도 그 때를 후회하고 있다.

동병상련(同病常鱗)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랄까. 우리 둘은 아픈 가슴을 안고 전주교육대학에 진학을 했고, 그는 서울로 나는 순창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그 몇 년 뒤, 그는 도전에 도전을 계속하더니 국립대학교 교수로 3단 뛰기를 했고, 나는 중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또 세월은 흘러 그도 나도 정년퇴임을 했다. 그 동안 그가 자녀를 결혼시킬 때 대전과 서울로 축하를 하러 갔었고, 그도 나의 애경사가 있을 때면 찾아 주곤 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학창시절의 우정만은 지켜 온 셈이다.

그런 그가 새로운 삶에 도전할 계획을 세우더니,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 백석마을에 산과 밭 천여 평을 구입했다. 터를 다듬고 축대를 쌓아 목수와 전문가의 도움으로 현대적인 목조 전원주택을 지어 농군처럼 살고 있다. 채소나 과일나무에 살충제를 쓰지 않으며, 병아리와 닭은 조사료를 먹이고, 낮에는 산과 밭에 놓아기르니 녀석들이 새처럼 훨훨 날아다닌다고 한다. 나를 만날 때 마다 꼭 놀러오라고 하였다. 지난 10월 26일 친구부부와 넷이 그를 방문했다. 산골의 가을경치, 맑은 공기가 우리를 황홀케 했다. 빨갛게 익은 감나무, 달리아, 홍초, 맨드라미 등 아름다운 꽃들, 수 십 마리의 토종 닭 , 새소리, 물소리 은은한 산 빛과 둥근 목조건물이며, 작업장, 화단, 쉼터, 텃밭의 채소들이 자연의 향내를 물씬 풍겼다.

우리는 집안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저기 돌아보면서 통나무로 지은 정자, 황토 벽돌을 쌓아 지은 찜질방, 언덕을 파서 만든 저장고가 마음에 들었다. 찜질방은 나무로 불을 때 온돌을 데우는데, 한 번 불을 때면 2,3일 동안은 따뜻하고 그곳에서 잠을 자면, 잠도 잘 오고, 몸도 가볍고 기분도 상쾌하다고 한다. 저장고는 1년 네 계절 상온(常溫)으로 유지되어 된장, 고추장은 물론 온갖 효소를 단지에 담아 숙성시킨다고 한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40평 정도의 넓이에 침실, 서실, 다실을 만들었고, 넓은 거실 동쪽과 남쪽으로는 큰 창을 냈다. 밝은 햇살이 비치고 건너편 산과 집들이 한 눈에 들어와 시원스럽고, 하루에 두어 번 다니는 버스도 보여 한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집안의 목재는 모두 캐나다 산, 벽과 단열재는 미국산을 썼다고 한다. 붙박이장 문으로 들어가는 옥탑방도 두 칸이나 있어 구상과 아이디아가 좋았다. 실내의 우람한 대들보와 석가래, 원목들이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점심은 토종닭 3마리를 잡아, 엄나무, 밤, 대추를 넣고 오래오래 쪄낸 진짜 삼계탕을 맛있게 먹으면서 몇 십 년 전 우리가 한벽루 아래 전주천에서 팬티만 걸치고 삼계탕을 끓여먹으면서 찍었던 사진이야기도 했다. 나는 지난 날이 생각날 때면,

“과거를 역력히 회상할 수 있는 이는 참으로 장수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이 아름답고 화려했다면 그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유복한 사람이다.”

고 한 말을 믿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삶이 화려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고여 있는 물은 썩는다. 새로운 물로 다시 갈아 채우고 싶지만, 지나간 세월의 샘은 너무 깊어 다시 채울 것 같지 않아 이를 아쉬워할 뿐이다.

그런데도 옛 친구를 만나면 조각나고, 찢어진 과거의 아픔들을 마치 동굴 속에 감추어 둔 보물처럼 살며시 끄집어낸다. 이리 보고 저리 살피며, 두 손으로 매만지고 다독거리게 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지금껏 나의 삶이 기쁨보다 슬픔이 나를 더 야멸치게 몰아쳤고, 감색보다 더 진하게 나를 물들게 했기 때문인가 보다. 나는 깨어지고 부스러진 그 조각들을 내 몸 밖으로 던져 버릴 수도, 소중히 간직할 수도 없는 모순 속에 살고 있다.

나는 친구가 항상 무엇을 이루겠다고 도전했고, 또 성공한 것을 존경한다고 칭찬했다. 그랬더니 친구부부는, 성당에 다니는 우리 부부가 순박하고 아름다워 보인다며 되레 나를 칭찬해 주니 쑥스러웠다.

친구부인이 약혼으로 만든 차와 복분자차를 마시고, 마당의 감나무에서 딴 홍시를 맛있게 먹고, 친구가 얼려 직접 만들어 내놓은 홍시슬러시는 난생 먹어보는 토종 아이스크림이서 우리를 감탄케 했다. 식사 후 길도 없는 산길을 한 시간 쯤 걸었다. 친구가 따주는 감 가지를 승용차에 실으며, 성공도 했고 퇴직 후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는 그 친구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학창시절의 그와 주름진 지금의 모습이 교차되었다. 우리는 마치 은하철도 999를 타고 어둠을 헤치며 먼 우주를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2.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