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두루미 2013. 6. 7. 17:53

 원로수필가 인터뷰

-원로수필가 김학 선생님을 찾아서

 

 

-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선생님과 진즉 대담을 했어야 했는데 좀 늦은 것 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 바쁘게 삽니다. 매주 7강좌를 맡아서 하노라니 한가할 때가 없습니다. KBS에 다닐 때보다 더 바쁘네요.

- 먼저 대담을 하기 전에 선생님께 사과드릴 게 있습니다. 선생님은 전북수필문학회를 창립하신 산 증인입니다. 그리고 전북지역에 수필문학의 씨앗을 뿌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본지 74호부터 신설된 ‘원로수필가 대담 기획’ 첫 번째로 당연 선생님부터 인터뷰를 했어야 했는데 본의 아니게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이점 양해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그래요? 이유가 있겠지요. 아니면 등단 순이 아니라 나이순으로 한 것이겠지요. 상관없습니다.

- 선생님의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고 계시고, 좋아 하는 운동은 무엇이며, 여가 시간은 무엇으로 소일하고 계시는지요?

▲ 옛날에는 탁구도 치고 헬스클럽에도 나갔는데 시간이 없어서 지금은 그만두었습니다. 새벽 4시쯤 눈을 뜨면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풉니다. 7시쯤엔 30분 정도 반신욕을 하고, 발목 펌프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거실에 설치한 자전거를 탑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서너 번은 인후공원이나 아중천변 산책로를 걷습니다. 걷다보면 많은 상념이 떠올라 마음을 다독일 수도 있고, 좋은 글감을 찾아 낼 수도 있어서 참 유익하더군요. 그리고 틈만 나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문하생들이 메일로 보내준 수필을 읽고 첨삭지도를 합니다. 그게 주요 일과입니다.

- 선생님의 수필을 읽어보면 가족에 관한 내용이 많습니다. 가정과 가족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인 것 같습니다. 작품 중에는 아들과 손자에 관한 내용도 눈에 띄는데 잠깐 소개해 주실까요?

▲ 가족은 가장 가까운 나의 단골손님들입니다. 그 단골손님들의 외면을 받아서야 장사가 되겠습니까? 나는 2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 결혼하여 분가했으니 지금 나는 아내랑 둘이서만 삽니다. 서울에 사는 큰아들 정수는 LGU+ 차장인데 동현, 민서 등 1남1녀를 낳았고, 둘째아들 창수는 미국의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 IT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센디에이고에 있는 퀄컴사라는 미국회사의 시니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동윤, 윤서 등 1남1녀를 낳았습니다. 또 고명딸 선경이는 서울광운초등학교 교사인데 안병현, 병훈 등 아들만 형제를 두었습니다. 손자손녀가 여섯 명이나 됩니다. 가정은 행복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아이들이 이따금 수필소재를 제공해 주곤하지요. 그들은 언제라도 내 수필에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 선생님의 유년시절은 어떠했으며, 소년 김학은 어떤 성격이었는지요?

▲ 나는 박사고을 출신입니다. 임실군 삼계면 삼계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니 여느 시골소년처럼 순박하고 착하게 살았지요.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어요. 나는 지금까지 치고받고 싸워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격은 내성적이었고 수동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 공격적이고 진취적이지 못했습니다.

- 사모님과는 언제 만났으며, 어디가 맘에 들어 평생 반려가 되었는지요?

▲ 그 무렵에는 하루에 두 번이나 선을 보기도 하던 때였습니다. 1973년 12월 하순이었을 겁니다. 중매쟁이의 소개로 전주 오거리 어느 다방에서 만났는데 첫 인상이 순박해 보였어요. 완주군 봉서초등학교 교사인 아내는 이야기를 나눠보니 착하고 마음이 고와 보였습니다. 또 전주사범병설중, 전주여고, 전주교육대학교를 졸업했으니 머리도 괜찮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듬해 1월 19일 신혼예식장에서 진기풍 선생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40년 가까이 살다보니 그때의 내 선택은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 지금까지 사모님과 살아오면서 부부싸움 같은 것은 안하셨는지요?

▲ 어찌 부부간에 티격태격하지 않고 살겠습니까? 부부싸움을 해도 금세 풀려서 어려움은 없었어요. 한 번은 부부싸움을 하고 출근하여 육필로 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여 아내가 근무하던 학교로 보냈지요. 그 효과가 아주 좋더군요. 요즘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소재가 없어 아쉽습니다.

- 선생님은 역사학을 전공하신 걸로 압니다. 그래서 한 때 중고등학교에서 역사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역사 선생이 왜 방송국 PD로 전직을 하셨습니까?

▲ 나는 1968년 6월말에 육군중위로 제대한 뒤 방송국 PD가 되려고 국어, 영어, 상식, 논문 등을 공부했습니다. 1968년 말쯤 대학동창 두 명과 함께 서울MBC PD시험에 응시했어요. 1차 필기시험에서 다른 과목은 잘 치렀는데 상식이 무척 어려웠어요. 그래서 포기하고 1치시험 발표장에도 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발표장에 다녀온 친구들이 내가 합격했다지 뭐예요? 그래서 함께 MBC에 가보니 합격자 명단에 내 번호가 들어 있었어요. 그래서 면접시험장으로 가보니 오전에 PD면접을 끝났다지 않아요? 그런 일이 있고나서 전주에 내려와 대학시절 은사님을 찾아가 말씀 드렸더니 추천을 해 주셔서 해성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군산서해방송 개국방송요원 모집시험이 있더라고요. 8월에 군산초등학교에서 필기시험을 치렀는데 내가 전체수석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8월 한 달 동안 고민을 했어요. 해성고등학교에서는 월급을 2만8천 원씩 받았는데 서해방송에 가면 수습사원이라 그 절반인 만4천 원을 준다는 겁니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동생 학비도 대주어야 하는 큰아들인 나로서는 선뜻 방송국으로 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교사로 추천해 주신 교수님을 찾아가 말씀드렸더니 방송국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눈 딱 감고 방송국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나의 은사이자 내당숙인 김영곤 선생이 서울에서 방송드라마 작가로 크게 이름을 떨치고 계셨습니다. 나는 군대시절 휴가를 올 때마다 그 집에 드나들며 방송국 PD가 좋다는 정보는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 교직에 계실 때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기억나는 제자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한 학기밖에 없었는데 학교에서는 아버지 같은 연로하신 선생님들도 ‘김학 선생님!’이라고 존댓말을 쓰셨는데 방송국에 가니 30대의 상사가 ‘어이, 미스터 김!’이라고 부르니 처음엔 귀가 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송진우, 오경일, 방진태, 윤철 등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 문학에 뜻을 가지게 된 동기는 무엇이며, 언제부터 문학을 하게 됐습니까?

▲ 고등학교 진학하여 전주로 오니 내종형이 최승범 교수님 댁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 교수와 내종형은 사촌이었지요. 그러니 거의 날마다 내종형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최 교수님 댁에 드나들다 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고, 나도 최 교수님처럼 책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평소 좌우명이나 생활신조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 나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을 아주 좋아합니다. 미치지 않으면 어느 경지에 오를 수 없다는 뜻이지요. 어느 한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누구나 그 분야에 미쳐야 할 줄 압니다. 그래서 나도 수필에 미친 것입니다. 그리고 해불양수(海不讓水)란 말을 좋아합니다. 바다는 구정물 맑은 물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뜻이지요. 얼마나 가슴이 넓습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학창시절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 1962년 전북대 사학과에 들어가서 애주가인 강철종 교수를 만났습니다. 초대 문화부장관 이어령 선생의 손위 처남이시지요. 그해 5월엔가 우리 사학과 신입생들이 그 강 교수님을 모시고 계룡산에 갔는데 그 중턱에서 술자리를 폈지요. 술을 마시다 그 자리에서 酒자 돌림으로 별명을 하나씩 지었습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점잖은 사람은 酒聖,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酒聲, 여자를 밝히는 사람은 酒色, 춤을 잘 추는 사람은 酒狂, 말이 없는 사람은 酒黙, 가장 어린 사람은 酒童이라고 지었다. 반백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잊히지 않습니다. 사학과 학생들은 해마다 고적답사를 가는데 그 행사를 우리는 주적답사(酒跡踏査)라 표현하기도 했었지요.

- 제가 알기로 선생님께선 남을 비방하거나 흉을 보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덮어주고 잘한 일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그런 성품인가요?

▲ 내가 시골출신이지 않습니까? 어려서부터 남의 말을 잘 하지 않았어요. 내가 2001년 9월부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수필창작반을 개설했는데 어느새 10년이 넘었지요? 나는 꼭 숙제 한 가지를 냅니다. 1주일 만에 나오면서 꼭 칭찬거리 한 가지를 가지고 와서 발표하라고 해요. 그런데 어려서부터 칭찬보다는 꾸중을 들으며 자라서 그런지 칭찬에 인색해요. 지금은 오래 되어서 비교적 잘하는데 아직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칭찬거리를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요. 칭찬을 할 줄 몰라요. 가정이나 직장, 학교에서도 꾸중보다 칭찬을 잘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칭찬거리 찾기는 긍정적인 좋은 수필거리 찾기 연습이거든요.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왕따 문제도 이 칭찬운둥으로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짝꿍 칭찬하기’부터 ‘분단원 칭찬하기’ 그리고 ‘반원 칭찬하기’를 생활화 하면 ‘교실 분위기’가 훨씬 밝고 명랑해질 것입니다. 그런 뒤 학교에서는 연말쯤에 ‘친구 칭찬하기 경연대회’를 열고 잘하는 학생을 뽑아 시상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칭찬은 인간관계를 좋게 만드는 마법을 갖고 있답니다. 활용해 볼 만하지 않아요?

- 이제 화제를 문학으로 돌려볼까 합니다. 전자에서 잠깐 들먹였습니다만 선생님은 전북수필문학회를 창립하셨습니다. 수필 불모지인 전북에 수필문학의 씨앗을 뿌려 지금은 전북에 수필의 꽃을 활짝 피우고 계십니다. 전북수필문학회 창립과정과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 전북수필문학회를 이야기 하려면 서해방송의 ‘밤의 여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어요. 서해방송 PD인 나는 1972년 10월부터 1975년 3월까지 2년 반 동안 ‘밤의 여로’를 맡아서 날마다 수필 한 편씩을 써서 감미로운 음악 3곡과 함께 방송을 했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라디오 전성시대여서 청취율이 높았지요. 그러다 1975년 4월부터는 전북의 문인 7명씩을 선정하여 석 달씩 원고를 청탁하여 방송을 했었지요. 또 그 뒤에는 청주의 이재인, 대전의 김영배, 오승영(완영) 그리고 대구의 정재호 씨 등을 필진으로 참여시켰습니다. 1978년 12월 밤의 여로 필진들이 망년회를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전북에도 수필문학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뜻 앞장 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산과 대구에서는 수필동인지가 나온 지 10년이 지났고, 이웃 전남(광주 포함)에서도 한 해 전 전남수필문학회가 창립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1978년 가을 영광상회라는 단골 가맥집에서 정덕룡, 정주환, 김학 세 사람이 만나 발기인을 선정하고 정주환 씨가 엽서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발기인으로는 정덕룡, 정주환, 김학, 김동필, 김희선, 박양훈, 한대석, 송영상, 전영래 등을 선정하고 연락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박양훈은 빠졌지만 그해 가을 신혼예식장 옆 고려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회칙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출했습니다. 회장은 정덕룡, 부회장은 김동필, 주간은 정주환이 뽑혔던 것입니다. 마침 정덕룡 회장이 마한문화사라는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어서 동인지『전북수필』을 출간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창간호에는 26명의 회원들이 두 편씩 원고를 발표했었지요. 정덕룡 회장이 세 번의 임기 6년을 마치고 그 뒤를 이어 내가 회장을 맡았습니다. 나는 회장으로서 전북수필문학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두 사람의 회원들에게 상패와 상금을 주었습니다. 상금을 지원해 주신 양상렬 변호사님의 고마운 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또 나는 전북수필문학회 동인지『全北隨筆』을 신아출판사에서 인쇄했습니다. 그 출판사에 드나들면서 서정환 사장에게 수필을 쓰도록 권유하고 회원으로 영입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서정환 사장은 수필전문지『월간 수필과 비평』,『계간 문예연구』,『계간 문예』,『계간 좋은 수필』,『계간 인간과 문학』,『월간 소년문학』, 『반년간 표현』등의 각종 문예지를 발간하는 미디어 그룹의 총수가 되었습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 전북수필문학 창립멤버 중 작고하신 분이 계십니다. 누가 돌아가셨는지, 그분들의 문학 담론을 말씀해 주십시오.

▲ 아는 대로 말씀드릴까요? 창립 회장이며 수필을 사랑하셨던 애주가 정덕룡 선생, 송천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전북수필 회장을 지냈으며 서울까지 수필공부를 하러 다니셨던 박성옥 선생, 부산의 한영자 선생과 함께 영호남수필문학회를 창립하고 전북수필 회장을 역임하신 한대석 선생, 원광대 교수였고 고고학 분야의 권위자로서 바른 소리를 잘 하셨던 전영래 선생, 여류 수필가 최중자, 송칠성, 정순자 선생 등이 떠오릅니다.

- 선생님께서는 수불석권(手不釋卷) 즉,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책을 많이 보신다는 얘기인데 남의 글이나 수필집은 어느 정도 읽는지요?

▲ 요즘에는 짬이 나지 않아 체계적인 독서는 못하고 있어요. 『환단고기(桓檀古記)』란 책을 산 지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완독하지 못했어요. 문하생이 150여 명쯤 되는데 그들이 수필을 써서 메일로 보내주면 읽고 첨삭지도를 해야 하니 시간이 나지 않아요.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그밖에도 두 가지 월간 문예지 수필월평까지 쓰다 보니 수필은 많이 읽게 되지요. 또 수필집이 거의 날마다 배달되지 않아요? 그 수필집을 다 읽지 못하고 머리말, 발문 그리고 몇 편의 작품을 읽고 축하 메일을 보내기도 바쁩니다.

- 창작의 모티브나 영감은 어디서 얻습니까?

▲ 그건 때와 곳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예기치 않게 찾아오곤 하니까요. 산책하다가, 버스나 승용차 속에서, 술자리에서도 글감을 만납니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다가,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받은 메일을 읽다가도 글감을 만나지요. 항상 글감을 찾을 수 있도록 내 오감(五感)의 안테나를 늘 열어놓고 있다고나 할까요?

- 작품은 주로 어느 때 쓰십니까?

▲ 요즘엔 내 컴퓨터에서 글을 씁니다. 주로 깊은 밤이나 새벽에 쓰지만 낮에 쓰는 경우도 많아요. 지금은 아내랑 둘이서만 사니까 분위기가 조용해서 마음만 내키면 언제라도 쓸 수 있어요.

- 최근에 써놓은 작품이 있습니까?

▲열두 번째 수필집을 낸 뒤 지금까지 29편이 모였더군요. 열세 권째 수필집을 내려면 부지런히 써야지요. 나는 ‘나를 따르라’ 주의자입니다. 내가 앞장서서 열심히 수필을 써야 수강생들이 따라 올 게 아닙니까?

- 선생님께서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 고등학교 때 읽었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들고 싶어요. 그 주인공들의 사랑이 얼마나 애절해요? 독서는 감수성이 예민할 때 읽어야 좋더군요.

- 선생님께서는 어떤 작품을 선호하십니까? 예를 들면 수필의 종류에서 서정(抒情) 수필, 사경(寫景)수필, 서사(敍事)수필이 있는데 선생님의 취향은 어느 쪽인지요.

▲ 나는 서사수필을 즐겨 쓰지요. 서정수필이나 서경수필은 그냥 팥죽 같고 서사수필은 새알시미가 들어있는 동지팥죽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 선생님께서는 열두 권의 수필집과 두 권의 수필평론집을 내셨습니다. 그중 마음에 드는 수필집은 무엇인지요?

▲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지 않아요? 다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으니 꼬집어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 앞으로 쓰고 싶은 작품주제는 무엇인지요?

▲ 수필은 인간학이라고 하지 않아요? 수필은 언제 어느 때나 인간탐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70억 인구 중 하나인 나를 찾는 일에 몰두해야지요.

- 선생님께서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을 비롯하여 곳에서도 수필창작을 지도하고 계십니다. 선생님께서 지도하고 계시는 곳이 몇 군데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을 비롯하여 안골노인복지관과 꽃밭정이노인복지관 그리고 전북여성장애인연대 등 네 군데입니다. 며칠 전 군산 어느 복지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시간이 없어서 문하생 한 분을 추천해드렸습니다.

- 수필이란 무엇이고, 어떤 사람이 수필가가 될 수 있는지, 수필가의 자질과 능력을 말씀해 주십시오.

▲ 나는 수필이란 꽃꽂이 같다고 생각해요. 색깔과 생김새가 다른 아름다운 꽃들을 조화롭게 묶어서 꽃꽂이란 예술작품을 만들어 내지 않아요? 수필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조화롭게 모아서 아름다운 문자로 엮어놓으면 문학수필이 되니까요. 수필가는 모든 일을 허투루 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육안(肉眼)으로만 보면 평면적인 글이 되지만 심안(心眼)으로 보면 입체적인 글이 되지 않던가요?

- 선생님은 30년 이상을 KBS방송국에 근무하셨습니다. 이 기회에 방송이란 무엇이며, 방송이 국민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 방송의 위력을 원자탄에 비유하는 이가 있어요. 방송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지요. 방송은 시청자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방송은 현대인들에게 정보, 교양, 오락, 스포츠. 드라마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주는 종합 비타민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옛날엔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식, 정보, 지혜, 교양, 즐거움, 등 현대인들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다 주지 않습니까? 교육방송은 대학에 가려는 수험생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입니까? 햇볕 못지않게 필요한 게 방송이라고 생각합니다.

- 오늘날 수필을 쓰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물론 늘어나는 건 시인도 마찬가지지입니다. 또 쓴다고 다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대로 가다가는 대한민국 성인남녀가 다 작가라는 평을 들을만합니다. 이에 대한 문제점이 무엇인지 장단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 모든 국민이 다 문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되겠군요. 문예지들이 마구 등단을 시키니 그런 현상이 빚어지지요. 그런데 내 경험으로 보니까 능력이 모자라면 스스로 자기 분수를 알고 조용히 문단에서 떠나더라고요. 좋은 글을 쓸 능력이 없으면 알아서 포기하더란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은 적자생존의 정글이 아닙니까? 힘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그러니 우리 수필문단에 얼굴을 내민 신인들에게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칭찬과 격려로 용기를 심어 주는 선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공감합니다. 물론, 작가라고 해서 다 수작을 쓸 수는 없습니다. 쓰다 보면 작품의 질이 다소 떨어진 내용도 나올 수 있지요. 그런데 어떤 글은 문장구성은 그만두고라도 문장 단락, 맞춤법, 띄어쓰기, 심지어 원고지 사용법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런 글을 좀 손을 보면 자기 글 고쳤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어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때론 난감할 때도 있어요.

▲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분간을 못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독자로부터 욕먹지 않도록 도와주었으니 오히려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지요. 그렇다면 앞으로 원고를 돌려보내면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다른 원고를 보내달라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선생님은 초장기에 전북수필문학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회장을 맡으시면서 어려운 일도 겪었겠지만 한편으론 보람 있는 일도 있었지요?

▲ 전북수필문학상을 제정했던 일이 자랑스럽습니다. 처음에도 상금이 1인당 100만 원이었는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상금은 그대로지요? 그게 아쉬운 일이지만, 그나마 맥이 이어져 오는 것만도 자랑이죠. 초창기에는 중앙문단에 등단한 수필가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 8월에 내가 월간문학에서 신인상을 받으면서 중앙문단에 처음으로 등단하니 그 뒤부터 줄지어 전북에서 등단자가 나왔지요. 지금은 등단절차를 밟지 않은 회원이 없으니 얼마나 크게 발전한 것입니까?

- 그동안 전북수필문학이 침체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다 신아출판사 서정환 사장님이 회장으로 취임한 뒤 활력을 찾은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전북수필문학회가 소통부재에 놓여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원들의 참여의식을 높일 방법을 찾아야 할 겁니다. 회원들의 중지를 모아 활성화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회원들을 구경꾼이 되게 해서는 안 되고 참여자가 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옛날에는 전북수필문학회 하나뿐이어서 전북수필문학회 회원이 되는 걸 영광으로 알았지만 지금은 여러 개의 수필 동인지 중 하나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서정환 회장께서 열심히 잘 하시니까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 전북수필문학상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각에서는 수상자를 한 해 한 명씩 선정하고, 대신 상금을 높이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 상금을 높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냥 지금대로 두는 게 좋을 것입니다. 전통을 이어가는 게 중요하니까요. 상금이 많으면 좋겠지만 상이란 권위가 있어야 서로 받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 전북수필이 그간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가 이제 어느 정도 활로를 되찾고 있습니다. 서정환 회장이 전북수필문학회를 중흥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도 사무국장으로서 전북수필의 질량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제74호부터는 편집방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습니다. 그러나 미흡한 점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발전방향을 짚어주시기 바랍니다.

▲ 전북수필은 2호부터 창간호에 실린 작품평을 게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앙문예지에서도 수필평을 싣지 않을 때였습니다. 나는 동인지도 기획만 잘 하면 수필전문지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호마다 시리즈로 한 명씩의 작고문인 특집을 게재하면 좋겠고, 또 매호 한 명의 회원을 선정하여 회원작품 3,4편, 회원의 인간과 문학. 회원연보 등을 게재하여 『전북수필』회원 한 사람씩을 부각시켰으면 좋겠습니다. 또 외국(영어권, 불어권, 독어권, 중국어권, 일본어권 등)의 신작수필(新作隨筆)을 번역하여 시리즈로 소개했으면 합니다,

- 긴 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 많이 쓰시고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뷰 : 전북수필 주간 겸 사무국장 신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