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두루미 2019. 5. 6. 06:46

어머니의 유언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한석철


 


 


 


 


 


 


 국립서울현충원 입구에 들어서니, 거대한 충성분수대가 꿈틀거렸다. 승천하고자 애쓰는 용을 받침으로 전쟁의 주역인 군경과 평화의 상징인 여인상들이 제각각의 애처로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 역동의 분수대에서 격정을 느끼기도 전에 애처롭게 탄식하는 삼촌을 향해 뛰었다. 16묘역까지 달려가 보니, 삼촌의 비석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삼촌이 계시는 곳을 모르겠다. 이럴 수가? 수십여 차례 왔는데…, 내가 귀신이라도 홀린 것인가?


 숨은 차오르고, 사방을 둘러보니, 모두 순백인 수많은 비석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둘러보니 큰아들과 나뿐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만남의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나 혼자만 이렇게 달려온 것인가?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앞장서서 달려가기에, 큰아들도 따라왔다는 것이다. 저 아래를 바라보니 아내를 비롯하여 돌도 지나지 않은 상온이는 작은아들이 안고, 큰며느리, 작은며느리, 초등학생인 상민이, 주연이, 두 살짜리 상윤이가 피난 행렬처럼 힘겹게 올라오고 있었다.


  차분히 기억을 되새겨보니 비석 번호만 기억났다. 안내소에 문의하니 비석도 그대로 있고 묘역도 21번 그대로란다. “휴!” 긴 한숨이 나왔다. 작은아들 가족이 작년에 다녀왔기에, 작은아들이 그곳이 아니라고 고함을 질러도 내가 무작정 달려가기에 그냥 따라왔단다. 참 어이가 없었다.


 눈앞에 서 있는 무한의 비석들을 바라보니 수많은 영령의 피투성이 된 모습과 총알의 파편과 탱크의 굉음과 함께 아비규환의 목소리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마음이 쓰라리고 가슴이 미어졌다. 그 지옥도 이제는 흐르는 세월에 삭혀 고요함뿐이었다. 그 고요함의 사막을 지나 삼촌을 찾아가니, 삼촌이 빙그레 웃고 계시는 것만 같았다. 준비해간 음식들을 차려놓고 가족 열 명이 삼촌께 명복을 빌며 절을 올렸다. 삼촌이 무척 반가워하시며, “어린 조카가 자라서 이제는 네 명의 손자 손녀를 둔 할아버지가 되어서 찾아 왔구나!” 하시는 것 같았다. 비석에 새겨진 삼촌의 이름 석 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삼촌이 더 더욱 그리워졌다. 지금 삼촌이 계시는 서울현충원 21묘역은 6.25 전쟁, 베트남 전쟁 등에서 전사하신 분들을 모시기 위해 조성된 묘역으로 총 1,587위가 계신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곳 현충원만 174천여 분이 계신다니…, 현충원은 단순한 묘지가 아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계시는 모든 영령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난 가족들에게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삼촌이 백마부대로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사하신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1968910 전사하셨다. 삼촌이 1942년생이니 그때 나이가 스물여섯 살이었다. 키도 무척이나 크고 멋지고 정이 많은 삼촌이었다. 그때 내가 고등학생이었는데, 삼촌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마지막 편지가 오던 날이 생각난다. 2주 뒤면 귀국한다는 편지가 전사 통지서와 함께 배달되었다. 이럴 수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애처로운 삼촌이다.


 


 삼촌은 우리 아버지 6남매 중 막내다. 할머니가 삼촌을 낳자마자 마흔셋에 돌아가셨기에 같은 해에 태어난 누님과 삼촌은 어머니 젖을 나누어 먹으며 자랐다. 삼촌이라고는 하지만 형 같은 사이다. 한 방에서 자라며 삼촌이 퍽 우리를 아끼고 사랑해 주셨다. 삼촌은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살았다. 그 뒤 대전에서 학교에 다니며 살았지만, 자주 집에 다녀가곤 했었다. 집에 오면 형수인 우리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처럼 얼굴을 비비고 껴안고 잠을 자곤 했다. 그런 삼촌이 군에 입대하여 복무하던 중 월남에 간다니, 어머니의 상심이 얼마나 크셨을까? 어머니가 병이나 식음을 전폐하시고 떠나기 전에 꼭 삼촌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하여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 훈련소까지 다녀오신 일도 있었다.

 그 뒤 월남 파병 중에도 삼촌은 많은 편지를 보내 주었다. 그 내용을 보면 영락없는 아들과 어머니였다. 파병으로 간 지 일 년이 다 되어 갈 무렵 어머니는 삼촌의 귀국 날짜를 우리가 어린 시절 설날을 기다리듯이 하루하루 세고 계셨다. 그런 삼촌이 귀국한다는 편지와 함께 전사 통지서를 받았으니…, 얼마나 어머니의 슬픔이 크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까? 나는 어머니가 정말 그렇게 슬피 우시는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 한동안 어머니는 삼촌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몇 날 며칠이었는지 모른다.

 부모님께서는 해마다 삼촌이 전사한 날이면 빠지지 않고 현충원을 찾아가셨다. 우리 형제들도 가능하면 다 데리고 가려고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는 변함없이 40년을 다니시더니, 2008년 추석 때 우리 형제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앞으로는 삼촌 묘역을 가지 못할 것 같다. 너희들 생전이라도 삼촌 전사한 날을 꼭 잊지 말고 찾아뵈어라.

그렇게 당부하시고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나셨다. 돌이켜보니 그 말씀이 우리 형제들에게는 어머니의 유언이었다. 얼마나 기른 정이 가슴속에 깊게 맺혀 있기에 이런 부탁을 하셨을까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삼촌이 지금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젊은 스물여섯 나이에 머나먼 타국, 월남 땅에서 평화를 위해 싸우다 전사했으니…, 고향에 계신 형수님 생각이 나서 눈이나 제대로 감고 가셨는지 모르겠다. 삼촌을 생각하면 매번 올 때마다 가슴이 저린다. 우리 형제들은 이곳에 자주 와 보는데, 한 번에 모여서 가는 게 아니라, 형제들이 넷이라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뉘어 간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삼촌이 외롭지 않을 것 같아서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 대까지는 삼촌한테 다니라고 하셨지만, 우리 형제들은 자식 대까지 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데리고 다닌다. 지금까지는 형제들의 뜻대로 자식들도 잘 따라 주고 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렇게 대대로 이어진다면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시며 삼촌 또한 외롭지 않으리라.

 삼촌 이야기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세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자식들과 헤어질 시간이 되어 더 머물지 못하고 삼촌이 잠들어 계시는 비석 앞에서 가족 기념촬영을 했다. 삼촌도 무척 흐뭇해하시며 우리 가족과 함께하니 참 기분이 좋다고 하시는 것만 같았다.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 가족 모두가 참여하여 삼촌의 전사 50주년을 기념하고 삼촌에 대한 추억도 되새겨보고 어머니 유언도 실천했다. 또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174천여 분을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돌아오는 내내 마음은 청명한 가을 하늘이었다.

                                                         (201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