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두루미 2006. 3. 19. 16:20



홈드레스와 몸뻬바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유영희


피로연을 치를 때까지만 해도 결혼은 환상이었다. 생활을 책임져 보지 않는 나이에 결혼을 했으니 모든 게 그저 부푼 꿈일 뿐이었다. 결혼은 바야흐로 유토피아로 가는 문이었다. 내가 주체가 되는 가정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공간이고 우아한 삶이 되리라 기대했었다.

등산복차림에 배낭을 메고 신혼여행에 나섰다. 둘만의 추억을 위해 흔한 신혼여행코스보다 더 낭만적이고 의미 깊은 여행을 주장하는 남자는 둘도 없는 로맨티스트였다. 길을 걷다가 힘들면 새싹이 돋는 개울가에 앉아 라면을 끓여먹고 차 한 잔을 마시자는 이야기는 아름다운 시어[詩語]였다. 모든 것은 자신이 다 하겠으니 곁에 있어만 주면 된다는 조건은 대단히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솜사탕이었다.

고속버스가 휴게소에 진입하면서 환상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화장실에 들렀다 차에 오른 남자는 손에 두 개의 햄버거와 우유를 들고 있었다. "난 안 먹어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던 신부는 남자의 먹는 모습을 보며 비정한 현실에 치를 떨었다. 얼마나 허겁지겁 먹는지 햄버거 안에 든 소스가 입 주변을 도배하고 있었고, 미처 씹히지 않은 양배추 조각이 무릎위로 낙하를 했다. 벌컥벌컥 마시던 우유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상에나! 저 모습이 이 남자의 실체였단 말인가?' 백마를 탄 기사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각본대로라면 기사는 향이 좋은 커피를 우아한 몸짓으로 공주와 함께 마셔야 할 텐데…….

밥이며 설거지는 본인이 다 하겠다던 남자는 버너에 불만 붙여 주는 걸로 모든 임무를 접었다. 신혼여행길에서 식사 때가되면 물이 있는 곳에 주저앉아 쌀을 씻으며 무너져 내리는 환상에 분노해야 했으니……. 분노는 드디어 신혼여행길에서 폭발하여 싸움으로 이어졌다.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어먹던 남자에 대한 무너진 환상은 회복할 기회도 없이 숨가쁘게 달려와 어느새 중년의 고갯마루마저 넘어버렸다.

결혼에 대한 처녀시절의 내 환상은 요란한 치장이 달린 홈 드레스까지 준비하게 하였다. 주름이 많은 긴 드레스를 입고 아름답게 밥을 짓는 우아하고 고상한 여인! 두 벌이나 되는 홈 드레스를 펼쳐보며 그리던 상상의 날개였다.
시댁식구들과 함께 시작한 살림집에서 부엌을 나가던 첫날, 치렁치렁한 홈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새댁을 보며 다들 무던히 어이없는 표정들이었다. '당신들이 살아온 것처럼은 안 살 겁니다. 가장 고상한 삶의 모습을 보여 줄 겁니다.' 하지만 잠시 후 내가 입었던 옷이 낡은 한옥의 불편한 구조에서 얼마나 비현실적인 유리구두인지 곧 깨닫게 되었다.

수돗가에 주저앉아 쌀을 씻을 때, 주름이 많은 긴치마는 아무리 단속을 해도 물에 젖기 일쑤였다. 여차하면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스스로 치마 끝을 밟아 넘어지기도 하였다. 가장 지독한 일은 재래식 화장실 이용이었다. 앉았다 일어서면 치마 끝 어딘가에 꼭 화장실 바닥에 흘려진 것들이 묻어 있었다. 불편한 옷에 지친 새댁은 며칠 후 시장 골목에서 '몸뻬바지'를 사게 되었다. 홈 드레스라는 환상을 벗어 던지고 가장 현실적인 '몸뻬'를 입게된 것이다.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던 조건도 환상이었다. 서로를 곁에 두고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 현실은 너무나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희생을 요구하였다. 남편과 시집식구들은 본인들의 깨어진 환상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을 하지만 새댁은 그것마저도 안으로 삼켜야만 했다. '이건 아니야! 이건 내 삶이 아니야!' 아무리 도리질을 해봐도 깨어진 환상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뒤였다. 그나마 결혼 2년 만에 찾아 온 질병 앞에서 모든 환상은 흔적조차 사라지고, 오직 살아야 하는 처절한 현실만이 남게 되었다. 환상이 아예 사라진 지금은 평안이란 현실 속에서 무감각한 심장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결혼 전과 후의 배우자의 변신에 놀랐다는 지인[知人]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환상이 깨진 현실에는 온갖 사연들이 많기도 하다. 결혼이라는 인생의 대 반전 앞에서 환상을 품지 않았던 사람이 누가 있었으랴? 깨어지는 환상을 지켜보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현실에 적응하던 시절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환상을 잃어버린 무감각한 심장으로 살아가는 중년이, 혹 꿈마저 잃어버린 게 현실은 아닌지 되짚어 보고 싶을 따름이다.
(06. 3. 결혼 24주년을 맞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