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두루미 2006. 3. 22. 18:05

깊은 속정을 털어놓고 가신 아버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황 점 숙


 아버지에게 진짓상 대신 제사상을 몇 년째 올리고 있다. 남매들이 고향집에 모여서 아버지 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예년에 비해 올해는 제일 쓸쓸한 제사를 모시고 있다. 든든한 버팀목이던 장손이 군대에 입대하는 바람에 참석을 못하고, 제삿날이 평일이라 중·고등학생인 어린 손자들 역시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수준비를 마치고 한가해지자 오빠가 지방을 쓰려고 붓과 한지를 찾았다. 나는 오빠를 돕느라 안방 문갑을 열었다.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 서랍 안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생전에 빈틈없으셨던 아버지 모습을 보는 듯했다. 벼루와 붓 그리고 곱게 접은 한지까지, 특히 스무 권 정도 묶여 있는 빛 바랜 책력을 보니 금방이라도 아버지께서 책장을 넘기시며 "올해 못자리는 언제쯤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실 것 같았다.

 아침 밥상을 물리자마자 삽을 어깨에 둘러메고 들로 향하셨던 아버지는 정직한 농부였다. 들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시면 책력을 뒤적이면서 논농사에 맞는 절기를 점치시고 쪽지에 뭔가를 옮겨 적으시던 모습이 마치 글공부를 하는 선비 같았다. 그 모습은 한없이 존경스러웠고 내 삶의 표본이 되었다.
 음력 정초가 되면 새해 책력을 사다 한 해 한 해 묶어두셨으니 20년 넘은 세월을 한 곳에 모아두고 가신 셈이다. 완고하신 성품 탓에 이웃사람들과 농담을 섞어가며 담소하시는 분은 아니었다. 곧은 성품으로 몸에 밴 예의범절을 생명처럼 여기시고 어린 자식들까지 올곧게 지도하실 줄 아는 분이셨다.

  70년대는 우리 집 살림이 넉넉지 않아 끼니마저 걱정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큰딸은 살림 밑천으로 여기고 상급학교에 진학을 시키는 것보다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서울공장에 취직을 시켰던 이웃집 부모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나를 중학교에 보내주셨다.
 "아들이건 딸이건 공부 잘하는 놈을 가르친다는 게 나의 철칙이여, 소신껏 공부해 봐!"
 부모님의 속내를 알지 못했던 나는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가겠다는 일념으로 공부를 했었다. 여고생이 되어 큰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다 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머물고 있을 때 우연히 안방에서 큰어머니와 어머니께서 말씀을 나누시는 걸 듣게 되었다. 아버지 눈이 수술을 해야 할 만큼 안 좋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터라, 다음날 아침밥을 먹으면서  슬쩍슬쩍 아버지 눈을 살폈다. 딸내미의 밥 먹는 태도가 눈에 거슬렸던지 나를 쳐다보신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왼쪽 눈동자에 콩알만한 반점이 있는 걸 확인했다. 백내장을 앓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 눈동자를 확인한 순간 곧 사회인이 될 나이였던 난 돈을 벌면 아버지 눈 수술부터 해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집안 형편을 알게 되면서 꿈꾸던 대학진학을 포기했던 시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오빠는 군대에 갔고 남동생은 고등학생이 되었으며, 여동생은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거듭되는 학비부담 때문에 이 집 저 집에 빚이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하였다. 내가 취직을 한 다음 첫 봉급부터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당부를 받았다. 난 결심을 실행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봉급을 고스란히 부모님께 가져다 드려야 했다. 동생 학비는 맡길 수 있겠다며 내 봉급의 사용처를 정해주셨기 때문에 아버지 눈 수술을 해 드리려던 갸륵한 내 뜻은 접어야 했다. 초등학생이던 두 동생까지 줄줄이 이어지는 우리 남매들의 학비부담 때문에, 아버지는 눈 수술을 권하시던 어머니를 물정 모르는 시골 아낙네로 치부하셨다. 아버지 눈에 콩알만한 반점이 밤알만 해질 때까지 병원 진찰 한 번 받지 못하셨고 출타를 삼가시는 건 물론 불가피하게 외출을 하실 때면 안경을 써서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셨다. 철부지 큰딸인 나는 끝내 아버지의 고통을 외면한 채 결혼의 문턱을 넘어서고 말았다.

 큰아이를 낳고 부모님 돌아볼 겨를도 없이 내 생활에 찌들어 살던 어느 날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다.
 "오빠와 남동생이 지금까지는 우애하며 지내고 있다만 새 식구들이(며느리) 들어왔으니 행여 우애가 상하는 일이 있을 때 네가 중간에서 역할을 잘 해주기 바란다."
 두 분만 계신 집에 외손자를 데리고 온 큰딸의 저녁밥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시더니, 마당에 피운 모깃불이 사그라질 무렵 마음속 깊이 담아둔 말씀을 시작하셨다. 고된 농사일을 마치고 나면 허기를 달랠 만한 변변한 먹을거리가 없어서 안주 없는 막걸리로 타는 목을 축이며 허기를 달랬던 것이 원인이었을까?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평소 늘 달고 사셨던 담배까지 부담이 되었는지 폐가 나빠지고 급속히 기력이 약해지신 것이다. 아버지는 출가외인이니 친정 출입을 삼가라던 평소 당부를 어기고 딸을 부르셨다. 그때 나는 아버지께서 아들 딸 편애 없이 큰딸인 나를 믿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식들 앞날의 밑거름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던 아버지는 당신의 아내에게는 유난히 무뚝뚝하셨다. 밥이 조금만 질게 되어도 수저를 놓아버리셨고, 집안 일을 하느라 들에 좀 늦게 나가시면 호령을 하면서 어머니 심기를 불편하게 하셨다. 그런 모습이 얄미워 사춘기 시절에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일기를 썼던 기억도 있다. 두 분은 어리석은 내가 짐작한 대로 애정 없는 부부가 아니었던 걸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아버지께서 농사일마저 못하게 되자, 어머니의 짐이 너무 무거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몇 마지기 되지 않는 전답을 팔고 도시로 이사를 가자고 했다. 그때 어머니는 아픈 사람 두고 이사는 말도 꺼내지 말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증세가 악화된 뒤에야 병원을 찾았다. 행여 병세가 나아질까 기대했지만 의료진마저 포기해버려서 며칠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퇴원해야 했다. 예전처럼 고향집을 지키며 누워 계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날 밤을 못 넘기실 것 같다는 어머니의 기별을 받고 고향으로 달려갔다.
 자꾸 발음이 흐려지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면서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발을 닦아드렸다. 그때 아버지가 느닷없이 어머니를 찾으셨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내게 하시라 권했건만 막무가내였다.
 "네 엄마가 젤 예쁜 개 그러지. 오늘 저녁에 내 옆에서 자라고 해라."
 예상치 못한 말씀에 깜짝 놀라서 어머니를 모셔왔고, 아버지 곁에서 주무시겠다는 어머니의 약속을 받으셨다.
 "이젠 힘든 농사일 하지말고 살아!"하시며 고통스러워하던 표정을 지우고 안면 가득 미소를 짓는 모습을 뵈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 마지막 소원조차 이루지 못한 채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평소 아내에 대한 사랑 표현을 하지 않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어머니에 대한 깊은 정을 한꺼번에 쏟아 내셨던 것이다.
 끝내 치료를 받지 못한 눈 때문에 하늘나라에서도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아버지 제사상 앞에서 큰절을 올리면서 아직도 고향집을 지키고 계신 어머니의 꿈속에라도 자주 찾아오셔서 정담을 나누시라고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