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정낙원 2009. 3. 1. 01:20

11강. 애굽을 떠나게 하는 믿음 (히 11:22)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

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온 세계가 경제 불황으로 인하여 난리입니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걷는 것 같다고들 불안해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과도 같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검은 말이 뛰니 기근과 흉년이 든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검은 말이 뛴 가 봅니다.

하나님이 검은 말 엉덩짝을 후려치니 온 세계에 기근이 닥친 겁니다.

기근과 흉년이란? 다름 아닌 경제난입니다.

 

그러니 온 세계가 경제난으로 휘청거리는 것입니다.

경제 불황으로 세상이 술렁거리는 것은 모두가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인 먹고 살아가는 것 때문입니다.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 입장에선 그 어떤 종교나 아무리 좋은 사상도 먹고 살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면 몽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럴싸한 종교 교리가 좋다고 하여도, 또한 아무리 좋은 나라의 경제 정책도 먹고 살게 해 주지 않으면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인류사가 뱉어낸 만고불변의 진리는 인심은 곡간에서 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사에선 뭐니 뭐니 해도 배부름을 가져다주는 인심 이외에 더 큰 인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인간의 인심은 떡에서 납니다.

 

네게 떡을 주면 좋은 사람이고,

내 떡을 빼앗아 가는 사람은 악당입니다.

탈세를 하고 오너가 비리를 저질러서 사회적으로 부도덕하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회사라 하여도 그 회사가 내 가족과 내 가정을 지탱해 주는 밥줄이라면 좋은 직장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고 출세를 하려는 것도 다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하는 것도 모두가 남보다 잘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자식들을 대 기업에 입사를 시키고자 합니까?

대 기업이 든든한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누구 하나라도 출세를 하면 그 출세한 자식 덕을 수많은 형제들이 보게 됩니다.

인간이란? 혈통중심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본능적으로 피 붙이를 챙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큰 회사의 회장이라고 하면 사돈에 팔촌까지 다 먹고 살도록 해 주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한 집안에 누구라도 잘돼서 부모형제들을 먹고 살게 해 주는 것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기 피붙이를 챙기는 것을 악하다고 하지 않고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고 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런 생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박지성이라는 축구선수를 보세요.

그 가족들은 박지성 선수가 축구선수로 성공하기 전 까지만 해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박지성 선수가 성공을 하니 그 부모와 가족들이 팔자를 고쳤습니다.

 

가난에 찌들려 살던 사람이 이젠 좋은 집에 좋은 음식에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면서 대통령 부럽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젠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들 하나 성공한 덕을 온 가족들이 톡톡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요셉의 이야기도 그러합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은 참으로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태어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반전을 거듭하면서 예측 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려서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집에서 버림당하여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아무런 잘못도 없이 감옥에 갇혀서 생고생을 하다가 꿈 하나 해몽 잘 하는 바람에 졸지에 애굽에 총리대신으로 고속 출세를 합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의 계시로 온 세상에 임할 기근을 알고 미리 준비하여서 온 세상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 내는 메시야가 되어서 온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위치가 되어버립니다.

 

급기야 자기를 버렸던 원수 같은 형제들과 온 가족들을 애굽으로 이주를 시켜서 잘 먹고 잘 살도록 해 줍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고센이라는 한 동네를 통째로 주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요셉 덕에 기근으로부터 살아 날 수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요셉이라는 아들 하나 잘 둔 덕에 그 흉흉한 기근 속에서도 배곯지 않고 누구보다도 유복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야곱의 일생사를 보면 요셉의 덕으로 애굽에 정착하기 전 까지만 해도 어디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은 하셨지만 그 곳엔 이미 장대한 족속들이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지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빌붙어서 더부살이를 했습니다.

 

창세기 26장을 보면 이삭이 조금 살만 하니까 동네 토호(土豪)들이 시비를 겁니다.

이삭의 우물을 막아 바리고 빼앗곤 합니다.

우물을 막고 빼앗는다는 것은 회사 문 닫으라는 뜻입니다.

끝내는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서 종용히 동네를 떠나라고 합니다.

결국 일궜던 터전을 버리고 이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 한군데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사를 해 보아서 알겠지만 이사 다니는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은 내 집 하나 갖는 것입니다.

다시 이사 다니지 않도록 집 장만 하는 것입니다.

저도 이사를 참 많아 다녔습니다.

아이가 셋이다 보니 방 얻기도 참 어려웠습니다.

단칸방 하나 얻으려면 주인이 필히 묻는게 식구가 몇이냐 입니다.

아이가 많으면 안 준다고 하기에 세 놈이 버젓이 있는데도 한 놈은 여기서 안 살고 시골에서 산다고 거짓말을 시키고 이사한 적도 잇습니다.

 

야곱도 아버지 이삭을 따라서 이곳저곳 이사를 다니면서 느꼈을 것입니다.

힘이 있어야 정착 할 수 있다고,,,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벌어서 끝내는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세상에 얍복강에서 하나님이 기다릴 줄이야!

“축 환영 야곱의 금의환향을 축하합니다!” 가 아니라 “넌 죽어야 해!” 라고 기다립니다.

목숨은 부지 하였지만 병신이 되고 재산도 에서에게 상납하고 가까스로 가나안 땅 세겜에 정착을 합니다.

 

아! 이제 살게 되었나 보다! 라고 헸는데 외동딸 디나가 세겜의 추장에게 겁탈을 당합니다.

세겜의 추장이 야곱에게 찾아와 사위가 될 테이니 이곳에서 오순도순 살자고 제안을 하자 너무도 힘든 세월을 살아온 터라 야곱은 그러려고 했는데 그만 혈기 방자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을 죽이는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야곱은 철렁한 가슴을 쓸어안고 고민하는데, 때 마침 하나님이 세겜에 더 머물지 말고 벧엘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다시 또 온 가족이 터를 잡아 놓은 세겜을 떠나 벧엘로 이사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살라고 했으니 이젠 여기서 뼈를 묻을 수 있겠구나 했는데,,,,

갑자기 온 세상에 기근이 들이 닥쳤습니다.

이젠 양식이 없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애굽에 젊은 총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장차 엄청난 기근이 들 것을 미리 알고 양식을 넉넉하게 준비 해 두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렇다고 이 많은 식솔들을 다 데리고 애굽으로 갈 순 없으니 아들들에게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 오라고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갔다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요셉이 살아서 애굽에 총리대신으로 있는 걸 알고 경악을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아! 이젠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밉다고 동생을 팔아 버렸는데 그 동생이 애굽에 총리가 되어 있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러니 형제들은 지난 날의 잘못을 생각하고 언제 죽을 줄 모르고 전전긍긍하는데 죽이지 않고 도리어 살길을 마련해 줍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자기가 타는 전용 비행기(수레)를 보내서 애굽으로 이사를 하게 합니다.

이 때도 어김없이 하나님이 야곱에게 애굽으로 이사를 가라고 하십니다.

아들도 오라고 하고 하나님도 가라고 하니 운이 척척 맞아 떨어집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계시가 떨어지자 70명이라는 식솔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이사를 갑니다.

이사를 하는데 객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당당하게 총리대신의 아비로서 이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에 식구들은 애굽에 정착하여 삶에 터전을 마련한 것입니다.

요셉은 든든한 후견자가 되어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성공적으로 정착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젠 누가 시비 거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들이 총리인데 그 누가 객이라고 시비를 걸겠습니까?

도리어 총리대신의 가족이라고 최고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젠 더 이상 지방의 호족들에게 쫓겨 다닐 이유도 없습니다.

 

이젠 야곱의 식구가 바로 애굽에 호족(豪族)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총리로서 커다란 방패막이가 버티고 있어서 이젠 누가 보아도 애굽에 토착 세력이 되었습니다.

애굽에 총리라는 자리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고의 무소불위의 권력입니다.

그 넓은 땅뙈기 하나 떼어 준다고 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시 요셉은 기근을 해결한 공로로 실제적으로 왕 노릇을 위임 받아서 행사를 하였습니다.

왕조 시대에 왕은 곧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왕의 말은 곧 법입니다.

지금 요셉이 그런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니 요셉의 가족은 애굽의 비주류가 아니고 주류입니다.

객이 아니고 주인이란 말입니다.

이젠 요셉의 나라가 곧 야곱의 나라입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이젠 애굽이 자기나라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요셉이 마음만 먹으면 자자손손 호가호위하면서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형제들을 나라의 모든 요직에 앉혀서 권력을 행사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권력은 권력을 낳는 것이 세상의 순리인데 그러면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에 주류가 되어서 떵떵거리고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요셉의 형제들은 그렇게 생각하였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셉이 형제들을 궁궐로 초대를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총리의 형제라는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고무도 당당하게 바로의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궁중에 신하들을 총리대신의 형제들이 왔다고 영접하기에 분주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형이나 동생이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청와대에 들어오라는 초청장이 왔습니다.

비서가 대통령 전용 헬기를 가지고 모시러 왔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요셉의 형제들이 궁궐로 부름을 받고 갈 때 까지만 해도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종처럼 쫓겨 다니던 시절이 엊그제였는데 세상에 이런 대접을 어디서 받아 보겠습니까?

아마 식사를 하면서 와인을 들고 “이대로 영원히” 라고 건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입에서 청천병력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내가 죽으면 내 해골을 메고 애굽을 떠나라고 합니다.

가나안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니 이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일궈온 터전인데!

 

그토록 죽을 고비를 넘겨 오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쌓아온 가문의 영광인데!

여기서 문을 닫으라고요?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사람이란 간사하여서 늘 가난하게 살았으면 가난한 생활을 불편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자로 살다가 가난하게 살라고 하면 못삽니다.

좁게 살다가 넓은 곳으로 가면 살아도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다가 좁은 평수로 이사 가면 못삽니다.

에쿠스 타다가 티코 타라고 하면 못 탑니다.

몸이 편한 것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으로 이주하고 난 후로는 끼니때마다 온갖 산해진미(山海珍味)로 호의호식하며 살았습니다.

총리대신의 형제들이라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누가 이런 삶을 포기 하겠습니까?

자자손손 영원토록 살고 싶어하지!

 

그런데 이제 그만 살고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가나안으로 가라고 합니다.

형제들 입장에서 얼마나 충격적인 말이겠습니까?

이제 좀 살만 하니 가라니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당시 상황을 알기 위해 창세기를 봅시다.

 

창 50:24-26=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일백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사람이 죽는 것이야 인력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요셉은 죽기 전에 형제들을 살게 해주고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상식은 죽기 전에 자식이나 형제들에게 살아갈 궁리를 해 주고 죽어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산을 상속해 주지는 못줄망정 터전을 떠나라고 합니다.

유산 한 푼 남겨 두지 않고 현재 살고 있는 집 마져 비우라고 합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떠나라니요!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권고하셔서” 그런 답니다.

아니 무슨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 다 있습니까?

왜? 잘 사는 사람을 고생 길로 내 몹니까?

하나님이 권고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을 사랑해서 애굽에서 떠나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슨 놈에 사랑이 사지(死地)로 내 모는 사랑이 있습니까?

너희들이 전에 살았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한답니다.

아니 거기서 쫓겨 오다시피 왔는데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말이 됩니까?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합니다.

이건 바라던 바가 아닙니다.

 

애당초 가라고 할려면 터를 잡기 전에 가라고 하든가?

겨우 터를 잡고 행복하게 잘 살아보려고 하니 떠나라니 이게 무슨 개 같은 조화입니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누가 애굽으로 이사 오고 싶어서 왔습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라고 해서 온 것 아닙니까?

 

돌아가게 할 것 같으면 왜 오라고 했느냐? 이 말입니다.

차라리 애굽으로 오라고 하지나 말지!

오라고 했으면 잘 살게나 해 주든지,,

이제 살만 하니 내 쫓는 것은 무슨 경우냐? 이 말입니다.

애굽으로 안 오고 가나안에 터를 잡았으면 지금쯤은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기반이라도 마련하였을 터인데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하나님 나오라고 해야 합니다.

한 번 따져 보자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답습니다.

 

무슨 하나님이 사람을 이렇게 달달 볶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이스라엘이 틈만 나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으로 바꾸려고 시도한 겁니다.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은 신을 바꾸겠다는 뜻입니다.

아니 살만하면 깽판치고 살만 하면 깽판치는 이런 하나님을 어찌 믿고 섬긴단 말입니까?

 

신앙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야곱의 집안(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 내력을 한번 살펴보세요.

한마디로 나그네 집안으로서 답답합니다.

시셋말로 깝깝합니다.

 

하나님이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해서 나그네 인생을 살기 시작하더니만, 야곱도 하란에서 거부가 되어 돌아오다가 하나님께 병신이 되고 맙니다.

피 땀 흘려 일궈온 재산도 형 에서에게 뇌물로 바치고 그나마 있던 재산도 기근으로 인하여 다 허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젠 애굽에서 잘 사는가 싶은데 심술보 하나님이 또 떠나라고 합니다.

 

참으로 고약한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이건 너무합니다.

어찌 집안 대대로 괴롭히느냐 이 말입니다.

깊이 따져 볼 것도 없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지금 요셉에게 간섭하는 하나님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서 일하는 하나님으로만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을 욕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끝까지 붙잡고 간다는 겁니다.

아마도 따라다니면서 끝까지 괴롭히겠다는 심사인가 봅니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들과 안 맞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너무도 다릅니다.

너무도 낯설고 이상한 하나님입니다.

 

왜?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낯설까요?

인간들이 낯설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의 뜻대로 안 움직여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뜻대로 움직여 준다면 전혀 낯설지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뜻대로 안 따라 주니 이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낯설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 하나님입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변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변하면 하나님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변한 것임이 드러납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 마음대로 인간을 움직여도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니까요.

창조주가 피조물을 이리 저리 끌고 다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애완견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죄가 인간을 장악하자 하나님께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인간을 좌지우지 하느냐! 입니다.

하나님 자기가 뭔데 인간을 갖고 노느냐! 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장난감이냐! 라고 반발을 합니다.

상상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만 겁니다.

 

한마디로 죄가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겁대가리 없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죄가 하나님과 맞짱뜨라고 해 놓은 것입니다.

죄 짓기 전에는 하나님이 말하시면 그져 예! 예! 만 하였는데,,,

죄를 짓고 난 후엔 하나님이 뭐라 하면 왜? 그러는데요? 뭐요? 라고 따집니다.

 

여러분 죄가 뭔 줄 아시겠습니까?

어떤 식으로 죄가 나타나는지 아시겠습니까?

뱀의 말대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이 곧 자아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자아(自我)란? 주인입니다.

 

피조물에겐 자아(自我)가 있으면 안 됩니다.

피조물이 자아가 생기면 창조주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자기 눈으로 바로 봅니다.

피조물의 눈과 하나님 눈은 달라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피조물을 다스리지만, 피조물은 자기중심으로 피조물을 판단합니다.

 

죄가 뭡니까?

자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죄인이 피조물을 바라보는 눈은 기껏 하여야 자기중심으로 보는 눈일 뿐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눈입니다.

 

그러니 사사건건 하나님께 반항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왜? 여기는 이렇게 하고, 저기는 저렇게 합니까?

내 생각엔 이게 좋은데? 라는 식으로 하나님께 반발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자식 키우는 것과 같아요.

자식이 어렸을 땐 부모 시키는 대로 해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머리가 굵어지면서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자아가 발달 하면서 부모로부터 벗어나 독립적 인간이 되고자 합니다.

부모의 말에 토를 달기 시작합니다.

자기 행동을 제약하거나 하면 부모면 답니까? 라고 하는 지경으로 발전합니다.

 

나중에 커 보세요.

부모를 넘어서려고 합니다.

급기야 자기 뜻대로 살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가를 생각해 보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을 다스린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간섭하셨듯이 우리도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당한 일들을 우리도 당할 수가 잇기 때문입니다.

 

야곱에 가족을 간섭하는 것과 같이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런 하나님을 과연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하나님께선 초지일관하게 다스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님 생각이고 야곱의 아들들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입장에선 하나님은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조금 살만 하면 이리 가라고 하고 조금 살만 하면 저리 가라고 하는데 어찌 믿겠습니까?

이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그 사람은 아마도 정신 이상자일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하나님과는 하루라도 빨리 결별하는게 유익입니다.

맨 날 고생만 시키고 살만 하면 방해하고 초만 치는 이런 하나님을 어찌 믿겠습니까?

 

요셉의 형제들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으로 볼 때 이 시대 교회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말이 얼마나 엉터리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성경을 열면 자기 백성들을 들들 볶아대는데 어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닫으면 좋으신 하나님인데 성경을 열면 심술쟁이 하나님이 나옵니다.

 

그래서 거짓 목사들이 성경을 덮고 상식적인 하나님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하나님을 말하지 않고 인간 중심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거짓 목사들이 가르쳐준 그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 열심과 충성으로 섬겨서 복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펴서 전혀 낯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니 이럴 수가!

 

이런 낯선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고 택한 백성들에게나 주어지는 행운입니다.

죄인에게 있어서 낯선 하나님이 찾아 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아는 하나님은 가까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 참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 이상 가장 큰 축복이 없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그랬지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있다고 했지요.

그럼 여러분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믿고 싶습니까?

아니면 참 예수, 참 복음, 참 성령을 받고 싶습니까?

당연히 참 예수, 참 복음, 참 성령을 받고 싶겠지요.

성도라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 목사가 바른 복음을 증거하면 기뻐해야 합니까?

싫어해야 합니까?

당연히 기뻐해야 하겠지요.

반대로 거짓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쫓아내야 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현실은 정 반대로 나타납니다.

가짜 하나님을 말해주면 좋아라하고 참 하나님을 말해주면 신경질을 냅니다.

 

참 복음 전하면 쫓아내고 가짜 복음 전하면 환영해요.

가짜 하나님을 전하는 목사는 시절을 쫓아가면서 상다리 부러지도록 대접을 하는데, 진짜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욕을 바가지로 들어붓고 있어요.

누가?

교인들이 그래요.

 

아니 성도가 교회 와서 참 예수를 만나야 하는데, 참 예수를 전하면 싫어해요.

가짜 예수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자기 소원 들어주는 예수를 말하라는 겁니다.

잘 살고 있는데 불쑥 찾아와서 애굽을 떠나라고 하는 그런 하나님은 싫다는 겁니다.

이게 지금 한국교회 실상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제가 가짜 하나님을 설교하기를 바랍니까?

진짜 하나님을 설교하기를 바랍니까?

진짜 하나님 설교하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이건 마음뿐이고 실제로는 반대로 나타나요.

 

성도라고 한다면 진짜 하나님을 만나서 춤을 추어야 해요.

진짜 하나님 만난 것을 일생일대의 최고의 축복인줄 알아야 해요.

진짜 하나님은 아무나 만나 주지 않고 오직 창세로부터 구원주기로 작정 된 사람에게만 나타나잖아요.

이 얼마나 큰 행운이고 축복입니까?

 

바울이 다메섹에서 이 진짜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다메섹에서 땡 잡은 겁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엄청난 행운이 덮쳐서 낯선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솔직히 신앙적으로는 분명히 땡 잡았는데 실상은 영 아니올시다 이지요.

여러분 바울이 만난 예수를 만나고 싶지요.

그래요 우리 모두 바울이 만난 예수를 만나고 싶어요.

그런데 바울과 같이 살라고 하면 살겠습니까?

 

아니지요.

바울이 만난 하나님은 탐나는데 바울처럼 살기는 싫지요

맞아요.

그게 우리 본심이예요.

그러니 우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다 알아요.

여러분 자식들이 엄마 아빠 사랑해 한다고 해도 안 믿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 그래 안다! 라고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이지 부모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부모가 간섭해 보세요.

대번에 화를 내잖아요.

간섭하지 말고 돈만 달라는 겁니다.

 

결국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소유한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 가치관으로 본다면 부모가 돈 없어 보세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 갖다 버립니다.

오죽하면 늙어서 효도 관광 가라는 것은 현대판 고려장시키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혼자 실기도 힘든 세상에 어찌 돈 없는 부모를 섬긴단 말입니까?

 

그러니 자식에게 돈 물려 줄 생각하지 마시고 늙어서 살 궁리를 하세요.

자식에게 돈 주고 나면 그 순간부터 귀찮은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게 냉엄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내 자식은 안 그럴 꺼야 하지 마세요.

그건 여러분 생각이고 자식 생각은 그렇지가 않아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암튼 요셉의 형제들에게 진짜 하나님이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터 잡고 잘 살아가는 애굽을 떠나라고 합니다.

인간이 듣기엔 편하게 살지 말고 고생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적금통장에 돈 부어 놓았는데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이걸 복이라고 해야 하나요?

재수 없다고 해야 하나요?

성경의 증거로는 분명히 복이고 행운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에겐 복으로 들리지가 않습니다.

우리 역시도 복으로 들리지 않는 것은 요셉의 형제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이 너희들을 사랑해서 그랬다고 하고, 히브리서 기자의 말로는 요셉이 이렇게 한 것은 다 믿음이 그랬다고 합니다.

 

믿음이 요셉에게 형제들을 애굽에서 떠나라고 했다고 합니다.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무슨 믿음이 사람을 고생길로 내 모는 믿음도 다 있습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히 고생길로 믿음이 고생길로 내 몰았다고 합니다.

 

정황상으로 보면 요셉도 이런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이는 믿음이 요셉을 간섭해서 형제들을 애굽에서 떠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을 떠나라고 한 것은 요셉도 몰랐다는 겁니다.

자기도 미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이 장차 가나안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일찍이 가나안에다 집도 장만하고 목장도 사 놓고 농사지을 땅도 사 놓았을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면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도록 전원주택도 지어 놓고 별장도 지어놓고 관리인을 두어서 지키도록 해 놓았을 것입니다.

 

장차 올 기근을 미리 알고 예비한 요셉이 그 정도 준비를 하지 못하겠습니까?

애굽에 총리로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닥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준비하지 못한 겁니다.

이는 요셉도 미처 몰랐다는 반증입니다.

 

평상시에 요셉이 가나안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살았다면 구태여 믿음이 요셉에게 떠나라 말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요셉 스스로 알아서 준비해 놓고 떠나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요셉이나 그 형제들은 애굽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이 간섭한 것입니다.

창세기 식으로는 하나님이 권고하신 것입니다.

만약 믿음이 요셉과 그 형제들을 간섭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애굽에 정착하였을 것입니다.

요셉의 뼈도 애굽에 묻혀 있을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믿음이 왜? 애굽에서 잘 사는 요셉과 그 형제들에게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를 추적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알다시피 야곱에 가정은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는 가정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이 담겨져 있는 족속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짊어지고 다니는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약속이 아브라함을 이리 끌고 저리 끌고 다닌 겁니다.

심지어 자식하나 낳는 것까지 세세하게 간섭하십니다.

모두가 약속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은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창 15:13-16=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때는 아직 아브람에게 자식도 없는 때입니다.

어찌 보면 허무맹랑한 약속일 수도 있습니다.

약속을 하려면 자식을 주고서 하시던가!

자식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 앞으로 사백년 후에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당대에 일어날 일도 아니고,

자기가 죽은 몇 대 후의 일을 지금 약속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을 잘 음미해 보세요.

엄밀히 말하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 아니고 그 후손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그러니 넌 죽어서 편안히 쉬라고 합니다.

내가 다 알아서 네 후손들을 간섭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내가 지금 빚진 것을 4백년 후에 태어날 네 후손에게 받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이나 그 형제들은 자기들과 상관없이 사백년 전 할아버지가 한 약속 때문에 이런 쌩 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나 그 형제들 입장에선 왜? 우리가 사백 년 전 할아버지가 한 약속 때문이 이렇게 휘둘리며 살아야 합니까? 라고 항의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자기 인생은 뭡니까?

뭐긴 뭡니까?

자기 인생이 없다는 말이지요.

요셉이나 그 형제들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백년 전 할아버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아니 사백년 전에 할아버지와 한 약속이 복을 받고 잘 사는 것이라면 할아버지 덕에 잘 사는 것이니까 조상의 덕을 톡톡히 보는 행운을 잡은 것이 되겠지만 이건 정 반대입니다.

한창 배부르게 잘 살고 있는데 느닷없이 빚쟁이가 들이닥쳐서 사백년 전에 조상들의 빚을 갚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재수 없는 팔자입니까?

 

이렇게 되면 사람 팔자는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조상이 결정한 것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죄인 된 것도 조상이 죄를 지어서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죄라고 한다면 조상 하나 잘못 둔 죄입니다.

한마디로 더러운 집안에서 태어난게 죄라면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이야기를 하지 않고 조상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네 조상이 누구냐? 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네 조상이 뱀이냐? 여자냐?

다른 말로 아담이냐? 예수냐? 입니다.

아담의 후손이면 아담의 팔자가 따라다니고, 예수의 후손이면 예수의 팔자가 따라다닙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약속이 따라다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둘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여자의 후손들에겐 여자의 후손이 가야할 길이 정해져 있고, 뱀의 후손들에겐 뱀의 후손이 가야할 길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걸 세상말로 운명이니 팔자라고 합니다.

 

성도는 여자의 후손입니다.

예수님의 후손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해를 하면 아브라함에게 지워진 운명의 사슬이 그 후손들에게 그대로 지워진 채로 그들을 끌고 다녔듯이, 성도의 운명 또한 예수님의 운명이 지워진 채로 성도를 끌고 다니십니다.

이걸 약속이라고 하고 또 멍에라고 합니다.

 

성도의 운명은 성도 손에서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창세전에 예수님에게서 결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지워진 그 약속 때문에 성도는 예수님처럼 시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우리의 팔자는 결정이 낫습니다.

 

그래서 우리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우리 운명을 누군가가 이미 결정지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우리 인생을 결정해 버렸습니다.

우린 그 결정된 운명으로 살아질 뿐입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천국가기로 정해졌고, 에서는 지옥가기로 정해졌듯이 우리도 천국가기로 정해진 것입니다.

조상이 정해 놓은 팔자 때문에 우린 꼼짝없이 천국에 가게 생겼습니다.

 

아! 이 더러운 팔자야!

난 지옥 가고 싶은데 천국에 가야 하다니!

왜? 더러운 팔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바로 요셉의 형제들처럼 천국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평생토록 나그네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얼마나 재수 없는 팔자입니까?

여러분 인간적으로 말해서 바울의 팔자를 부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팔자나 12 제자의 팔자가 부럽다고 여겨지십니까?

바울이나 12제자들이 고난 받고 싶어서 고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어느 인간이 고난 받기를 바라겠어요.

예수님의 팔자를 뒤집어쓰다가 보니 자연히 고난이 따라 다니는 겁니다.

복음 전하면 고난이 따라와요.

가라고 그래도 안가고 죽을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그래서 12 제자들이 다 개죽음 당하듯이 죽은 겁니다.

 

이처럼 복음은 역설적으로 주어집니다.

천국으로 주어지지 않고 지옥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 역설적으로 주어지는가 하면 육에 속한 사람은 절대로 알아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성도는 이 역설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눈이 있어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그럼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를 구원이야기로 풀어봅시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떠나라고 한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살펴봅시다.

 

성경은 애굽을 일컬어 죄악 된 세상이라고 하고, 가나안을 일컬어 젓과 꿀이 흐르는 천국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 입장에선 애굽은 천국과 같고 가나안은 지옥과 같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천국과 지옥을 역설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애굽은 물이 철철 넘쳐서 농사도 잘되는 땅인데 가나안은 산악지대로 하늘에서 비를 주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땅입니다.

애굽은 인간의 방법으로 농사를 지을수 있는 땅인 반면에 가나안은 인간의 방법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가나안에선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아야 해요.

꼼짝없이 하나님께서 해 주는 것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목숨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는 겁니다.

마치 들에 핀 풀과 같아요.

하나님이 때를 따라서 비를 주어서 살게 해 주면 살고 안 주면 말라 죽어야 해요.

 

아브라함과 롯의 비유를 보면 롯은 요단 들판을 바라보았는데 에덴동산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롯이 주저함 없이 그곳을 택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의 불 심판이 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롯이 불구덩이인줄 모르고 겉만 보고 따라간 겁니다.

이 세상도 그래요.

겉보기엔 화려하고 보기 좋아도 불 구덩이인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지금 요셉의 형제들이 살고 있는 애굽은 장차 불벼락을 맞을 자리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에덴동산처럼 보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에게 어디 살 것인가 결정하라고 하면 백이면 백 애굽을 택하지 가나안을 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요셉의 형제들은 롯처럼 애굽이라는 불구덩이에 자리를 틀고 앉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떠나라고 간섭하시는 겁니다.

롯이 소동 고모라가 유황불 심판을 받을 것이라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걸 알았다면 아브라함과 같이 가나안에 살았지요.

 

그러니 지금 믿음이 요셉으로 하여금 형제들을 애굽에서 떠나라고 간섭하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이냐 이 말입니다.

이것도 우리는 지금 그 결말을 성경을 통해서 다 보고 있으니 그렇게 말하지 우리가 만약 요셉의 형제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지 않고 미움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주겠다고 한 것은 천국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네 후손들을 천국으로 넣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후손들이 지옥에 터를 잡고 천 년 만 년 살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야할 놈들이 지옥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어요.

자식 놈이 뱀 아가리에 머리를 디 밀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한 약속을 기억하시고 애굽을 떠나라고 간섭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반드시 천국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조상에게 한 약속이 수백 년을 지나와도 변하지 않고 유효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서 아는 일이지만 요셉이 애굽에 총리로 있을 당시엔 장차 야곱에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요셉이나 그 형제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하루라도 빨리 애굽을 떠날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엔 요셉이 애굽에 실권자이니 자신들이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요셉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는 소리가 그렇게 섭섭하고 인정머리 없는 말로 들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 끝난 게임을 비디오로 다시보기 하듯이 성경을 보고 있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지, 당시 요셉의 형제들 입장에선 실시간 경기를 하는 것이므로 불안하고 원망스럽고 화가 나는 일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해도 욕을 먹을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 멀쩡히 잘 사는 사람들을 쫓아내느냐고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데모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천국에 가 있는 모세나 바울이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장차 이 세상이 불바다가 될 것을 알고 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희희낙락하고 살고 있습니다.

잠시 잠간 후면 핵폭탄이 터지고 난리가 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사(복음 전하는 종들)를 보내서 떠나라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롯에게 빨리 떠나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떠나라는 소리가 좋게 들리지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여기에 자신들이 평생 모아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버릴 수가 없어요.

어떻게 모은 재물이고 어떻게 일구어온 성공인데 떠납니까?

요셉처럼 부귀영화를 버리고 떠나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저주스럽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세상이 망한다! 종말이다! 죽는다! 라는 말을 하면 너는 어째 그렇게 부정적이고 심사가 뒤 틀려 있느냐! 라고 욕을 합니다.

세상을 좋게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세요.

단 한 사람도 긍정적으로 말한 사람이 없어요.

다 망한다는 소리 하다가 재수 없는 놈이라고 죽임 당하였어요.

모두가 성령이 그들을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 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저주스러운 소리로 들리는 이유가 땅에 것을 버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터를 잘 닦아둔 애굽에서 잘 사세요! 라고 하면 좋을 텐데!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고 하니 싫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설교가 왜? 싫습니까?

맨 날 죄인이라고 하고 우리 공로를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 아닙니까?

우린 칭찬 받고 싶고 잘 살고 싶은데 칭찬은커녕 매일같이 죄를 고발하고 넌 죄인이라고 무가치하게 몰아붙이니 기분이 나쁜 겁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잘 살다가 천국에 가세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복음은 여러분은 이미 천국 백성이니 세상에서 복음과 함께 지옥생활 좀 하세요! 라고 하니 싫은 겁니다.

고난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저 자신도 고난 받기 싫어합니다.

이 땅에서도 천국생활 하다가 죽어서도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고난당한 팔자가 뒤집어 씌워져서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 다닙니다.

성도의 조상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에 구 후손인 성도들도 나그네로 살도록 간섭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욕을 들어 먹고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후손들처럼 모처럼 고생 끝! 행복 시작! 하려고 하는데 믿음이 간섭하여서 정처 없는 나그네 길로 몰아내치고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납니까?

아마도 요셉의 형제들이 아브라함을 욕을 엄청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애굽을 떠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요셉의 형제들 눈에는 애굽이 천국이고 가나안이 지옥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지옥으로 가라고 하니 누가 좋아 하겠습니까?

그래서 조상 탓을 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 그 영감탱이는 무슨 심보로 그런 약속을 해 가지고 우리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느냐? 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께 따졌을 겁니다.

우린 그 약속 모릅니다.

우린 그런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억울하니 취소해 주세요! 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에 잠시 후에 닥칠 엄청난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면 조상에게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했을 겁니다.

망해서 죽게 되었는데 조상이 약속 때문에 살 길이 생겼다고 한다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요즈음 국가에서 조상 땅 찾아주기 운동을 합니다.

 

요즈음 같이 살기 어려운 때에 만약 조상님이 땅을 사 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횡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이 죽고 난 후 얼마 후에 요셉의 형제들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꼼짝없이 바로의 종노릇하면서 살아가야 할 팔자가 조상의 약속 때문에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는 하루라도 빨리 조상과 한 약속을 실천하라고 하나님께 난리를 칩니다.

 

실제 출애굽 때 보면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출 2:23-25=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보세요.

애굽에 종살이 할 때는 조상과 한 약속을 지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요.

이 때는 아! 우리 조상님의 선견지명이 대단하셔!

우리가 조상 하나는 잘 두었어! 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애굽에 종살이 하는 것이 아니고 고관대작으로 살고 있어요.

이럴 땐 조상이 한 약속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인간들의 생각입니까?

가히 죄인답지요.

자기 육신 따라서 약속도 손바닥 뒤집듯 하는게 인간입니다.

무조건 자기 편한 쪽으로 끌어 당기는게 죄인의 주특기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뭡니까?

하나님의 약속이잖아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는 거잖아요.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 사이에 약속한 것 때문에 성도가 천국 가는 거잖아요.

우리가 천국 갈만해서 가는게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무조건 천국에 가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다거나 해서 취소 될 수 없는 것이 약속입니다.

 

천국 가는 약속은 우리 행위로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행위로 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선 예만 된다고 했어요.

예만 된다는 것은 취소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어떻게 살아도 천국가게 되어 있어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기쁘지 않으세요.

기쁘잖아요.

 

여러분 사람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만큼 행복한 소리는 없어요.

이건 마치 어린아이 같아요.

어린아이는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어요.

경제가 어려워도 전쟁이 터져도 근심 걱정이 없어요.

 

어린아이가 근심 걱정 하는 것 봤습니까?

근심 걱정은 사는 것에 대한 인식이 생기면서 오는 것입니다.

즉 자아가 눈을 뜨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산다는게 뭔지!

세상이 뭔지!

알아지면서부터 근심과 걱정이 생깁니다.

어린아이 때는 자기 마음대로 안 해주면 짜증은 내지만 근심 걱정은 하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지요.

어린아이 같다는 말이 자기 인생이 없다는 말입니다.

전적으로 부모에게 맡기는 것이 어린아이입니다.

성도는 자기 인생이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이 덮쳐와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책임질 것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공중의 새를 보고 들에 풀을 보고 배우라고 한 것은 이들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배우라고 한 것입니다.

저런 풀 한 포기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먹이고 입히는데 하물며 자기 백성들을 안 먹이고 안 입히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뭘 걱정할게 있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겠다는데!

뭐가 불만이냐!

이 말입니다.

말은 맞는데! 이상하게 기분 나쁘고 불만이 되지요.

 

너희가 근심하고 걱정한다는 것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인생을 안 맡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린아이라면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 알아서 하세요! 라고 할 텐데!

어른이다 보니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근심 걱정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는 죽었다고 했어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살아서 펄펄 뛰고 다녔어요.

자기가 살아 있으니 누가 잘못하면 가만있지를 못하는 겁니다.

자기 뜻에 안 맞으면 속상하고 기분 나쁘고 했어요.

 

자기를 속상하게 하고 기분 나쁘게 하는 자들은 응징을 해야 속이 풀려요.

그러니 자기 뜻에 반하는 인간들은 지구 끝까지 좇아가서라도 박살을 내고자 한 겁니다.

누가 다메섹에 예수쟁이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시속 200km로 전력 질주를 했어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예수쟁이들을 다 잡아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은 예수님을 못 이긴다고 알려 주었어요.

너희가 죽인 그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다고 알려 주셨어요.

예수님 대적하다가 너희들만 다친다고 경고 했어요.

그런데도 지금 바울이 고집을 피우고 달려드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바울 앞에 단단한 콘크리트 벽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겁니다.

바울의 눈에는 예수가 안보여요.

그래서 전 속력으로 달려 가다가 냅다 박아 버렸어요.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바울의 몸에서 나와 삼층 천을 떠돌고 다니는 겁니다.

눈 뜨고 보니 자기는 죽은 겁니다.

죽고 나니 자기라는 존재는 없는 거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젠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자기 안에 사는 것을 보았어요.

이제부터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욕을 먹어도 희죽거리고,

매를 맞아도 희죽거리고,

굶어도 감사,

안 굶어도 감사,

우겨싸도 감사,

넘어져도 감사가 되는 겁니다.

누가 이단이라고 하면 그래 이단하지 뭐!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하나님이 하라고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모두가 하나님께서 보내서 만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짜증날 일이 없어요.

누가 이단이라고 욕하면 아! 하나님이 그러라고 시키신가 보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때리면 하나님께서 때리라고 해서 때리겠지 그랬어요.

바울은 저기 인생을 하나님이 장기판에 졸처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야! 너 로마에 가서 이 복음 전해야 되겠다고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곤 정든 교회에 작별을 고합니다.

그러자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죽는다고 가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가야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예약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아가보의 예언대로 붙잡힙니다.

그리곤 죄수의 몸으로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배타고 로마로 끌려갑니다.

가다가 태풍을 만나서 다 죽게 생겼습니다.

이 때 바울이 그럽니다.

야들아! 하나님이 나에게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해야 된다고 했거든!

난 로마에 가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어!

 

그러면서 자기를 압송하는 군사들과 선주와 선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뭐! 이런 인간이 있습니까?

맞아요.

이런 인간이 바로 성도예요.

 

이건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 고물을 베고 주무시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자기 인생이 없었어요.

이 세상에 올 때부터 이미 자기 인생을 포기한 겁니다.

오로지 아버지 인생을 사는 겁니다.

아버지가 살라고 하면 살고 죽으라고 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풍랑이 일어도 무사태평인 겁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아버지가 알아서 하이소!

죽이면 아버지께 가면 되는 것이고 살려두면 사는 것이고!

뭐 이런 똥배짱이 있습니까?

 

구약 시대 요나가 그랬지요.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서 복음 전하라고 했어요.

싫다고 다시스로 가다가 태풍을 만납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예수님처럼 쿨쿨 잠자고 있어요.

하나님이 니느웨에 가서 복음 전하라고 했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안 겁니다.

이게 자기 인생이 없는 자라는 겁니다.

이런 인생을 한마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모두가 믿음이 아 사람들을 끌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한 것이 아니고 믿음이 한 것입니다.

믿음이, 애굽을 떠나라고 하면 예! 하고 떠나고,

믿음이, 방주 지으라고 하면 예! 하고 지으면 되고,

믿음이, 아들을 바치라고 하면 예! 하고 바치면 되고,

믿음이, 장자와 차자를 바꿔서 축복하라고 하면 예! 하고 하면 됩니다.

 

말은 되게 쉽지요.

그럼 우리도 그렇게 살면 안 됩니까?

그런데 그게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내가 버젓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인생에 주인이니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에 주인이니 난 살아야 돼!

난! 성공해야 돼!

난! 행복해야 돼!

난!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돼!

 

오로지 나! 나! 나! 입니다.

예수는 들러리고 내가 나를 완전히 장악을 하고 있으니 예수님이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없어요.

예수님은 지금도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어서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으니 믿음으로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태클을 걸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문 안 열어주니까 예수님이 문을 부숴버리고 들이닥치는 것입니다.

이러면 꽃피는 봄날은 가고 엄동설한이 몰아칩니다.

 

이름하여 징계입니다.

가장에 우환질고가 닥치고,

사고가 닥치고,

경제난이 닥칩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야곱의 아들들에게 야! 애굽을 떠나! 라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뭔가 풀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깽판 치고 계신다고 보면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사에 태클이 걸리거든 하나님께서 걸었다고 보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의지하는 것들이 깨어지거나 부서지면 하나님이 그런 겁니다.

마치 믿음이 잘 살고 있는 요셉의 형제들에게 애굽에서 떠나라고 간섭하셨듯이 말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잇습니다.

 

호 2:6-7=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갈찌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위 내용은 타락한 이스라엘을 간음하는 여자로 묘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을 타락한 이스라엘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멜이 틈만 나면 서방질을 하려고 외간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겁니다.

잡아 오면 또 나가고 또 잡아 오면 또 나가고 반복되는 겁니다.

서방질 하는 것도 먹고 살만하니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서방질을 못하도록 쫄딱 망하게 해 버립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가시와 담으로 막았다고 합니다.

 

이걸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면 성도가 엉뚱한 짓을 하니 망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망한다는 것은 병들게 하거나,

실직 당하게 하거나,

가장에 우환이 들게 하거나 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우리 뜻대로 안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 뜻대로 안 되게 하셨을까요?

그 연애 하는 자를 따라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애인이 누구입니까?

 

야고보가 세상과 간음한다고 하면서 세상이 애인이라고 말해 줬어요.

세상 적으로 잘 풀리면 하나님을 잊고 세상에 푹 빠져서 살기 때문에 망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간음하는 것을 가만히 두면 마귀 밥이 되어서 지옥으로 골인하기 때문에 막는 겁니다.

바울처럼 가만히 두면 지옥으로 골인하기 때문에 단단한 콘크리트 옹벽으로 버티고 서서 자폭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 놓고선 본 남편에게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하시지요.

본 남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지요.

신약에선 예수님입니다.

 

저에게 적용하면 예수님 십자가만 붙잡으라고 내 뜻대로 교회가 부흥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전 처음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교회 건축을 하고자 했습니다.

개척 일 이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약 3-40명 정도 나왔어요.

지하 교회가 좁았어요.

 

그러자 어떤 집사님이 우리도 교회 건축 합시다! 라고 했어요.

당시엔 마음만 먹으면 큰 돈 없이도 교회를 지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사흘 금식기도 하러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가면서 아내에게 새벽기도 설교를 하라고 하니 성질을 내면서 못하겠다고 합디다.

그래서 집사님을 돌아가면서 하루씩 맡겼어요.

 

그런데 그 집사님끼리 앙숙이었습니다.

서로 예배 인도하는 날엔 안 나왔어요.

그래서 설교를 하지 않고 상대방 허물만 들먹였어요.

 

그래가지고 싸움이 나서 교회를 다 떠나 버렸습니다.

서로 서로가 자기 형제들끼리 나온 터라 언니가 나가니 동생도 따라 나간 겁니다.

졸지에 몇 명만 남게 되었어요.

교회 건축은 물 건너 간 거지요.

 

물론 그 땐 제가 복음을 몰랐을 때입니다.

그러니 그 때 만약 내 뜻대로 교회를 건축 하였으면 지금쯤은 복음과 상관없는 목회를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요셉과 그 형제들이 사백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 덮쳐와서 등 따습고 배부른 애굽 땅에서 잘살려고 하는데 강제로 밀쳐 냈듯이, 저에게도 창세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맺은 약속이 밀고 들어 와서 등 따습고 배 불리려고 하고 있는데,,,,

내 뜻을 산산이 깨 버리고 지금은 요 모양 요 꼴로 망가뜨려 놓은 겁니다.

 

그런데 꿈이 깨어지고 보니 그 자리에 하늘에 소망이 보인 것입니다.

꿈이 깨어진 것을 아골 골짜기라고 합니다.

 

호 2:14-16=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아골 골짜기란? 지옥이란 뜻입니다.

지옥 같은 환경으로 몰아넣고선 하늘에 산 소망의 문을 열어 준 것입니다.

하늘에 소망의 문이 열리고 나니 옛날에 추구하던 신앙이 허상이라는 것이 보여 지고 과거에 알았던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이제 진짜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인생을 우리가 책임지도록 가만 두지 않고 깨트려 버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른으로 두지 않고 어린아이로 만들어서 내가 책임질 인생이 없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 아내가 발람 선지자를 태우고 가는 당나귀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제 길을 막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런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교회는 부흥하였을지 몰라도 부흥이라는 사슬에 매여서 교인들 눈치나 살피는 무당이나 점쟁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나서 호세아의 이 말씀이 어찌나 은혜가 되던지!

아! 하나님께서 이미 수천 년 전에 내가 당할 일을 미리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서 말씀해 주셨구나! 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일을 하십니다.

 

죄는 육신을 볼모로 하여서 항상 달콤한 것을 주겠다고 미혹을 합니다.

광야의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주겠다고 하였듯이 지금도 이러한 것들로 유혹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가난해서야 쓰나!

그래서 어떻게 전도가 되느냐 라며 아주 인간적으로 지극히 상식적으로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마치 미끼로 고기를 잡고자 하듯이!

그래서 세상에 안주 하도록 합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의 눈을 생명과를 보지 못하게 하려고 화려한 선악과로 붙잡아 매듯이 요셉의 형제들에겐 에덴동산과 같은 애굽에 붙잡아 매게 하고 우리들에겐 세상의 영광에 붙잡아 매고자 합니다.

 

하와의 눈이 생명과를 보지 않고 선악과를 보는 순간 이미 게임을 끝났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을 보고서야 어찌 가만있겠습니까?

눈만 감으면 어른거리는데!

마치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워 있으면 천정에 바둑판이 그러지듯이 그려집니다.

 

그럼 하나님께선 눈에 안약을 집어넣어서 멀게 하는 일을 벌리십니다.

복잡한 일들을 발생시키고 문젯거리를 발생시켜서 길을 막아 버리는 일을 시도합니다.

성도에게만 이런 일들이 나타납니다.

제가 깨달은 것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 있는 성도에겐 반드시 인간의 계획과 뜻대로 안되도록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걸 히브리서 12장에선 징계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제 개인적으로는 다른 족보에 올라간 사람이라고 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세상과 간음하고 있는데도 가만히 두는 겁니다.

 

남의 여자가 바람을 피우면 화가 나지 않아도 내 마누라가 바람을 피우면 질투가 납니다.

호세아의 말씀대로 가시와 담으로 바람피우지 못하게 합니다.

너 죽고 나 죽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 이러라고 내 아들을 십자가에 죽였는줄 아느냐! 라고 가만 두지 않습니다.

 

가만두지 않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 사랑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말대로 하나님이 권고하셔서 너희를 애굽에서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역설적이게도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식으로 다가 옵니다.

그리곤 난 널 엄청 사랑한다고 합니다.

 

마치 고슴도치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꽉 껴안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식은 가시에 찔려 죽겠다고 하는데도 엄마는 너를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면 아픕니다.

그것도 많이 아픕니다.

난 죽겠다고 소리치는데 하나님은 좋다고 하십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청룡열차를 태워 놓고선 우리는 죽겠다고 아우성치는데 하나님은 깔깔 거리며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린 육신의 소욕을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복음을 안다고 해서 세상 것이 포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기 때문에 세상 것이 필요하고 시키지 않아도 자연히 세상 것 붙잡고자 기웃거립니다.

모래성을 쌓듯이 또 세상 것을 움켜잡으려고 달려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원치 않는 파도를 일으켜서 쌓은 모래성을 쓸어버립니다.

우린 일평생 이런 모래성 쌓는 일 하다가 주님 앞에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 뭐하다 왔노! 라고 묻습니다.

유규무언입니다.

 

맨 날 하나님과 대적하다가 왔습니다! 라고 밖에 할 말이 없어요.

그럼에도 천당에 떡하니 한 자리 차지 한 것은 모두가 조상을 잘 둔 덕분입니다.

예수라는 조상이 하나님과 약속한 것 때문에 천국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면류관을 어린양에게 던지며 세세토록 그 어린양만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그림을 그려 보세요.

정든 애굽 땅을 뒤로 한 채 개나리 보짐을 이고 지고 아이들 걸리고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을 떠나는 요셉의 형제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떠나는 그들이 발걸음이 가볍겠습니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 걸음 두 걸음 옮기는 그 심정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겠습니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겠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고 욕을 하겠습니까?

욕을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렇게 욕을 하고 원망하던 자들이 천국에 가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 믿으시겠습니까?

믿으세요.

이런 자들을 천국에 넣어 줘야 영원토록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할 것 아닙니까?

천국엔 누가 가느냐 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아주 이상하지요.

 

하나님을 찬양했던 바리새인은 단 한 사람도 천국에 없어요.

이런 놈을 천국에 넣어 놓으면 당연히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린양에게 찬양하지 않아요.

자기 어깨 힘주고 다니지!

그래서 하나님은 욕하고 원망하던 놈들을 천국에 집어넣고 놀라도록 만드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사는 겁니다.

이상하지요.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은 그 일이 하나님께서 간섭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러는 것이라고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세상 사람들은 뭔가 잘못 되면 재수 옴 붙어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사기 당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운이 나쁘고 재수 없어서 사기 당했다고 해요.

하나님이 사기 당하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성도가 사기 당하면 하나님이 사기꾼 보내서 사기 당했다고 합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하나님을 욕한다는 말은 욕을 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뜻대로 살아지지 않게 하여서 고난당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고난당하면서 좋아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욕을 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괜히 말씀을 듣는 귀가 없어서 진짜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욕하지 마세요.

 

성도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사하는 자입니다.

야곱의 후손들을 애굽에 정착하지 못하도록 애굽에서 밀어내시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하나님을 바로 안다고 할 수가 있어집니다.

 

내 인생에 태클을 거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비로서 참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강건한 자가 되라는 말은 이런 역설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식을 낳고 키워 보아야 부모님의 사랑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왜? 우리 부모님이 내 뜻대로 살지 못하게 간섭하셨는지 알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철이 들 즈음엔 부모님은 이미 저승으로 떠난 다음입니다.

 

그래서 술 한 잔 쳐 먹으면 부모님의 은혜는 갚을 길이 없다고 하면서 불효자는 웁니다 라고 하면서 울며 노래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그 역설적 사랑을 자기 자식에게 베풀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여러분이 그 시절에 부모님에게 한 것같이 엄마 아빠 미워하면서 울겠지요.

그래서 인간은 영원한 불효자인 것입니다.

괜히 감상으로 빠지게 되었는데!

 

복음이란?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고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런 감동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시려고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그 깊디 깊은 사랑을 조금이나마 잠시 동안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런 측량 못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많이 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눈에선 눈물이 줄줄줄...........입에선 웃음이 하하하.......목사님 왜 이러십니까? 엄청스리 은혜받고 위로받고 깨닫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희노애락을 주어 세상에서 광대 놀이하게 하는 능력이랍니다.
참으로 희한 한 능력이랍니다.
아멘! 제 인생 역시 그렇게 떠밀려 왔습니다
같은 시기에 하나님을 만났던 제 또래 친구들은 하나님을 깊이 만난 후 다들 신학대학을 갔습니다
당연히 그 당시엔 '왜 나는 하나님이 만나 주시지 않을까" 했었지요

그리고 지금 나는 미국땅에 있는데, 그것 역시 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등을 떠밀으셨기 때문이었음을...
여기서 진정한 복음을 알았고 복음 때문에 나그네가 되었기에 말입니다.
모든 것이 창세 이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 손 안에 있었음을 진실하게 깨달은 순간부터
인생이라는 폭풍우에 담담한 어린아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가 독수리 날개에 엎혀서 온거랍니다.
물론 가친 광야길이지만 말입니다.
은혜가 덮쳐 오고 보니 내가 걸어온 것이 아니고 독수리 날게로 업고 오셨음을 알게 되더군요.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날까지 독수리 날개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살아 갑시다.
살만하면 깽판치시는 하나님<img src="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exticon54.gif" value="!" /><img src="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exticon54.gif" value="!" />
정말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자리 잡아 살만하면 이리저리 떠나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하시니
이제야 제 정신을 차린것 같습니다. <img src="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0724/texticon_81.gif" value="굽신" />
성도의 보금자리는 하늘에 있기에 땅에 보금자리를 자꾸만 흔드는 겁니다.
우리 욕신은 땅에 코를 박고 살고자 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뱀에 후손은 땅 기운으로 살기 때문에 땅에 정착을 허락하지만
여자의 후손은 하늘에 기운으로 살아야 하므로 땅에 정착 할 수 없도록 지진을 일으켜서 미련을 버리게 한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지나게 되면 알게 됩니다.
물론 성령께서 간섭하시면 찰나이지만,,,
하지만 깨닫게 되면 감사하게 된답니다.
이런 찰나가 오래도록 자주 자주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아! 내 인생 왜 이럴까?
돌아서면 버리고 싶은 인생이었습니다.
버려야만 산다구요?
버릴것은 과감히 버리게 하시고, 취할것은 끈덕지게 잡게 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인생은 하나님 것!
내 인생 저도 책임 못지니 아버지께서 알아서 해 주세요~
쌓일만 하면 흔들고,
정들만 하면 흩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줄 나 이제야 알았다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아픕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 아픔이 하늘에 소망을 바라보게 한답니다.
아! 나는 언제쯤 육신의 장막을 벗고 안식 할까!
나그네 길은 언제쯤 끝이 날까!
성도의 죽음은 침상에서 쉬는 것이라 하였는데 난 언제쯤 침상에 뉘일까 사모하게 한답니다.
믿음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시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베푸실 은혜를 생각하면 두렵고 떨리지만 감사함으로 받겠습니다. 부디 긍휼히 여겨주소서.
우리는 결국 여기까지 인도하신 발걸음 발걸음 마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흔적들이라고 고백 할 수 밖에 없도록 간섭하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여야겠지요.
고난이 제게는 은혜 였음을 말씀으로 확증하시네요. 제가 참 말 안듣는 이스라엘 백성 이었습니다. 고난중에 십자가 은혜를 알게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아직도 그 고난은 끝나지 않았지만 이제 힘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늘 옳으십니다,
귀한 은혜입니다.
성경 속에서 내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그것도 죄인으로서 말입니다.
아직 요나처럼 배 밑창으로 내려가서 쿨쿨 잠들만큼 배짱은 없는것 같슴니다.
"마음대로 하시소. 죽이든지 살리든지" -이게 어렵네요.
늘 근심,걱정이 따라 다니고~ 내 힘으로 해결해보려고 용을 쓰고 있습니다.
속히 무장해제 당함이 일어나기를 기도로 함께 합니다.
오늘도 믿음이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 가게 하는 기쁨이...
목사님 감사 합니다.
잘 깨달아 주셔서 제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