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생각

정철카피 2009. 12. 26. 08:31

 

오늘 자 매경 칼럼입니다.

 

 

[세상사는 이야기] 누나의 엽서

홀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한 애청자가 보낸 엽서 사연이 소개되고 있었다. 누나의 엽서가 떠올랐다. 30년이 훨씬 넘은.

당시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나는 서울로 전학을 왔다. 단짝 친구가 서울로 훌쩍 날아가 버리자 앞뒤 생각 없이 엄마, 아빠를 졸라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은 것이다. 그러나 친구 따라 간 강남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제 발로 고아가 된 나는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엄마가 보고 싶어 울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외로움이라는 놈하고 맞부딪히자 한 방에 나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방학까지는 세월이 남아 있었고, 주말에 쉽게 내려갈 수도 없는 남해 끝자락이 내 고향이었으니 외로움과 친해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마루 끝에 놓인 한 장의 엽서를 만났다. 누나가 보낸 엽서였다. 고3 수험생이었던 누나가 동생의 외로움을 달래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는 그 엽서 한 장을 몇 번씩 다시 읽고 교복 안주머니에 깊이 찔러 넣었다. 그것은 내게 힘을 주는 따뜻한 부적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마루 끝에는 어제와 똑같은 엽서가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누나였다. 그렇게 시작된 엽서는 누나가 대학에 합격해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다. 누나는 보충수업이 끝나는 밤 10시쯤에 늘 엽서를 썼고, 학교 앞 우체통이 끼니를 거르면 큰일이라는 듯이 열심히 밥을 먹였다. 시험공부에 전념해야 할 누나를 서울에 있는 동생이 1년 내내 방해한 꼴이었지만, 나는 누나의 엽서를 쌓아가며 외로움을 조금씩 이겨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엽서엔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닌 한 마디가 적혀 있었다. 상대는 엽서를 매일 옮겨주시는 우체부 아저씨였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오늘도 부탁드립니다` `날이 춥네요. 따뜻하게 입으세요` 같은 고마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표현들이 엽서의 주소란 옆에 정중히 놓여 있었다. 내게 엽서를 전해주는 우체부 아저씨 손이 따뜻했던 이유도 바로 누나의 한 마디 때문이었으리라. 지금도 엽서에 실려 온 누나의 마음은 내 유년의 기억 가장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문제였다. 처음 한두 번 답장을 했을 뿐 나는 누나만큼 가슴이 따뜻하지 못했다. 누나는 늘 보내는 사람, 나는 늘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서 마음을 받으면 내 마음을 예쁘게 포장해 되돌려줘야 하는데, 나는 그것은 내 일이 아니라고 믿어버린 괘씸한 동생이었던 것이다.

그때 `반갑습니다, 고객님. 2000원 받았습니다. 300원 내드리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 목소리 주인공은 한 사람에게 이렇게 네 마디씩, 하루에도 수백 명에게 똑같은 말을 건네겠지. 쉽지 않은 일일 거야. 물론 목소리 주인공이 수백 명을 다 반가워할 리도 없고, 좋은 하루가 되기를 기도하지도 않겠지. 그렇다고 네 마디를 받아먹고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는다면, 목소리 주인공이 너무 쑥스럽지 않을까. 나는 잔돈을 받으며 황급히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되돌려드렸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쩌면 그 한마디는 누나에게 보내는 30년 지각한 답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이런 따뜻한 메아리가 가득한 세상을 그려본다. 그곳에서는 괘씸한 동생도 열심히 메아리를 만들고 있지 않을까.

그때 그 수험생 누나는 지금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치고 있다. 글 잘 쓰는 법보다 따뜻하게 쓰는 법을 먼저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정철 카피라이터]


[ⓒ 매일경제]

올만에 왔는데.. 역쉬 따뜻한 글들로 빼곡하네여..
고맙습니다.^^
음...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치고있는 제 아내 칼집에게 혹시 살아오면서 동생에게 엽서 한 번 써본적 있는지 물어봐야 겠습니다..
ㅎㅎ 적을 만드는군..
정 선생님의 좋은 글들, 감동이 있는 글들 가끔 보고 가면 청량제가 됩니다. 연전에 싸인 받은 책 [내 머리 사용법] 머리 맡에 두고 이로 틈으로 잘 읽고 있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가까이 두고 읽는다니 반갑네요. 제가 바라던 바가...^^

그런 살갑고 훌륭한 누님으로부터
엽서글을 통해 논술과외를 하신 덕을
지금 톡톡히 보고 계시네요.
글이 참 차지고 온기 가득합니다.
코끝이 찡한 일요일 아침입니다.
감동글..."고맙습니다" ^^
엽서가 논술과외였군요.^^
톨게이트에 들어설 때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봅시다.
위의 글에서 서울로 전학온 것을 "친구 따라 강남 갔다"고 했습니다.
고산자가 바로 그 친구입니다.
저는 늘 그래왔습니다....ㅎㅎㅎ
가끔 무심코 하는 답례에도 .... 마음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래서 다시 한번 뒤돌아보고....
연휴동안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못보았던 글자들을 찾았습니다...
다음엔 또 다른 글자가 보일까요? ㅎ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님이 "고산자"님이셨군요? 역시~!
만만치 않은 고산자님 글많이 기대하고, 또한 즐겼습니다. 친구는 통하네요.^^
ㅎㅎ 고산자는 악플의 천재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