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생각

정철카피 2010. 5. 14. 17:18

매경 칼럼입니다.

 

[세상사는 이야기] 학교 밖의 선생님

원고지에 세로로 내려 쓴 굵은 만년필 글씨. 원고지 칸은 왜 만들어 놓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게 탈선을 하며 휘갈긴 글씨.

80년대에 연합광고라는 광고회사에 몸담았던 광고쟁이라면 한번쯤 이렇게 생긴 헤드라인을 구경한 적이 있을 것이다. 글씨만 보고도 누가 쓴 카피인 줄 금방 알 수 있는 헤드라인. 지금은 고인이 된 카피라이터 이낙운 선생님의 육필 헤드라인이다.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낙운 선생님은 우리나라 카피라이터의 대부로 불린다. 만약 선생님이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이 전문직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면 아직도 사람들은 카피라이터를 복사쟁이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지 모른다(실제로 `정철카피`라고 붙은 내 사무실에 서류 한 뭉치를 들고 복사하러 온 사람도 있었다). `흔들어주세요!`라는 카피 한 줄로 유명했던 그 이낙운 선생님을 신입사원이었던 내가 모실 수 있었다는 건 너무도 큰 행운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무늬만 선생님이었다. 내게 카피는 이렇게 써야 한다는 식의 소위 교육이란 걸 해주신 적이 없었다. 그냥 "정철 씨, 이거 한번 생각해보소. 나 먼저 갑니다" 하며 때가 덕지덕지 눌어붙은 고물 가방을 들고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한 이불 광고로 기억한다. 여자대학 신문에 실릴 이 광고를 숙제로 받아든 나는 제품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따뜻하다, 오래 쓸 수 있다, 디자인이 세련됐다…, 그저 제품자랑을 하고 싶어 안달했고, 헤드라인 몇 개도 그렇게 준비했다. 다음날 회의. 선생님은 예의 그 육필 헤드라인 한 줄을 툭 던지셨다. `딸자식 마지막 효도는 시집가주는 겁니다.` 선생님은 제품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는 이 헤드라인 한 줄은 이불 살 사람을 확실히 붙잡고 있었으며, 그들의 제1 관심사에 닿아 있었다. 또한 `시집가주는`이라는 표현에서 이 노(老) 카피라이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나를 가르치신 것이다. 아니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해주신 것이다.

어쩌면 가르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가르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딱 그만큼만 넌 따라오면 돼. 그러니 내가 주는 대로 받아먹어. 이런 가르침에 대해 일찍이 서태지는 이렇게 말했다. 됐어! 선생님은 배우는 사람에게 당신을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선생님에게서 광고는 사람 이야기라는 것을 배웠다. 사람에게 말을 거는 법을 배웠다. 카피는 기술이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가르쳐주시지 않았지만 배웠다.

내가 배운 것은 광고나 카피뿐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참 못살았다. 선생님의 집은 서울 변두리 동네 산 몇 번지였고, 겉옷 한두 벌 가지고 1년을 버티셨다. 그런데 그런 선생님의 경제력은 엉뚱한 데서 힘을 발휘했다. 그것은 만년필과 카메라였다. 유난히 굵은 글씨를 내뿜는 몽블랑 만년필과 비싼 만큼 제 값을 한다는 일제 카메라. 선생님은 만년필과 카메라엔 재벌처럼 아낌없이 돈을 쓰셨다. 그리고 새로 산 만년필과 카메라가 있으면 하루 종일 내게 자랑하셨다. 그것들을 들고 자랑하는 선생님의 표정은 소년이었다.

더 높은 자리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또 그런 작업을 할 줄도 몰랐던 대한민국 카피라이터의 대부. 당신에겐 만년필과 카메라가 집이나 차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 새로 산 만년필에 잉크를 넣으며 행복해 하는 선생님의 표정은 선생님의 카피 한 줄처럼 내 인생을 흔들어주셨다. 사람 냄새 나는 카피를 쓰는 법은 사람 냄새 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해주셨다.

스승의 날. 학교에서 만난 많은 선생님들보다 먼저 떠오른 선생님은 학교 밖의 선생님이다. 가르치지 않고 가르쳐주신 선생님이다.

[정철 카피라이터]

[ⓒ 매일경제]
 

에고...들어와 보니 1착을 ... ㅡㅡ;


"스승의 날. 먼저 떠오른 선생님은 학교 밖의 선생님이다. 가르치지 않고 가르쳐주신 선생님이다."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는 말.


좀 아시는군요.^^

가르치지 않고 가르쳐주신 이낙운 선생님
가르치지 않은 가르침을 받은 정철님

멋지고 행복한 분들입니다.
가르치지 않아도 댓글을 다는 소현애비...^^
정철 카피님! 불법사전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카피가 안풀려서 끙끙댈때면 가끔 내머리사용법을 펼쳐보고 읽어보는 버릇이 생겼을정도입니다. 불법사전도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디자인회사에서 카피를 쓰면서 사람냄새나는 카피를 쓰려니 아직 경험도, 뚫고 지나갈 용기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직 딱딱한 카피를 버리지 못했습니다..ㅠㅠ.. 더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불법사전 대!박! 나시길 바라겠습니다! -광연 카피 54기 /내머리사용법 영수증에 싸인받은 독특한 카피 최주혁 올림
ㅋ 기억납니다. 그억나라고 그렇게 사인을 받으셨군요, 고맙습니다.^^*
쌤도...
누군가에겐...
가르치지 않고 가르쳐주신 큰 쌤. ^^

(스승의 날...생각만 열심히 하고...인사 못드려서...죄송해요...ㅠㅠ)
ㅎㅎ 고맙소.
이 글을 읽으니 학교 안의 선생님도 기억에 가물가물~~
아무리 생각해도 콧웃음이 날 뿐 그다지 기억 속에 남은 선생님이 없군요.
있다면 노통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참 많은 것을 주고 가셨네요...제게요.

그쵸? 참 큰 선생님이셨지요. 지금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