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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의'촛불을 생각한다''호혜를 전면에,교환을일상으로,재분배를준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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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사상/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2008. 10. 25.

  생명평화시대의 신경제질서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호혜를 전면에, 교환을 일상으로, 재분배를 준비하며'
  2008-10-24 오후 5:33:24
  다음 글은 오는 11월 11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 회의에서 필자가 발표할 예정인 강연, '호혜를 전면에, 교환을 일상으로, 재분배를 준비하며'의 전문이다.
  
  이 글은 지난 21일 게재된 '생명ㆍ평화ㆍ통일'과 함께, 다가올 생명평화시대의 바람직한 사회상에 대한 필자의 구상을 정리한 것으로 '생명ㆍ평화ㆍ통일'가 통일한반도의 미래상에 대한 구상이라면 이 글은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넘어선 미래의 경제질서에 대한 필자의 구상을 담고 있다.
  
  후쿠오카 회의 주최측의 양해를 얻어 회의에 앞서 이 글을 게재한다. 편집자

  
  호혜를 전면에, 교환을 일상으로, 재분배를 준비하며
  
  전 세계 인류경제사의 대전환점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실험은 거의 완전한 실패로 막을 내렸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장경제도 1930년대 공황보다 훨씬 더 악성적인 대혼돈 속에서 파멸적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좌우 사이를 뚫고 인류의 새로운 기대를 모았던 '몬드라곤', '기브츠', '야마기시(山岸)' 공동체들과 협동운동 역시 바람 앞의 촛불이다. 오직 개체성을 중심한 분권적 융합의 '모샤브'만이 살아남았다.
  
  어디로 갈 것인가?
  
  경제는 예술과 같은 창조물이 아니다. 어떠한 전통으로부터 산 지혜를 얻어 참으로 새 시대의 인류경제를 살릴 것인가?
  
  연초, 일본 생활협동조합 그린코프의 방문이 있었다. 대화의 초점은 고대 아시아의 '호혜시장(互惠市場)'의 새로운 가능성 여부와 한국 민중 전래의 '계(契)'나 '품앗이' 따위 개체-융합(個體-融合) '의 현대적 생활력에 관한 것이었다.
  
  그린코프는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먼저 아시아의 시민과 민중 속에서 새로운 문명사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나는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서 19세기 한국에 제기된 '후천개벽(後天開闢)' 즉, 전 인류문명사의 근원적 대전환의 일환으로 고대신시(神市)의 '호혜(reciprocity)'와 현대 생물학의 '내부공생(內部共生·endosymbiosis)'을 토대로 한 '호혜시장-생명운동'을 제안했다.
  
  또한, 동시에 그 슬로건으로 '호혜를 전면에, 교환을 일상으로, 재분배를 준비하며'를 제안했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대서양 시장의 일상화된 스태그플레이션과 극단적으로 만연한 카지노 자본주의의 진흙 밭에서 첨예한 실용영역인 경제전환의 배경이 될 수 있는 대문명변동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때의 문명변동은 반드시 과거로의 용의주도한 입구(入口)와 미래로의 참으로 헌신적인 출구(出口)를 거의 동시에 열어야 하는 쌍방향성을 요구하는 법이다.
  
  이 쌍방향성은 인간 내면의 영성(靈性)과 윤리·생명·생활·생태의 문제, 정치·경제·사회·문화, 그리고 전 지구와 우주 영역에 걸친 과감한 네오 르네상스, 원시반본(原始返本) 및 고대회복(古代恢復)의 대변동과 개인·지역·민족과 문명과 전 세계 사이의 '중심성을 가진 네트워크(the integrated network)'에 토대를 둔 세계문화대혁명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것이다.
  
  이 해체적 성취 과정의 중심성이 바로 '생명과 평화'요 '혼돈적 질서'다.
  
▲ ⓒ프레시안

  나와 한국 생협 일부, 그리고 그린코프의 호혜담론의 사활적 열쇠는 바로 그 같은 파천황의 대변동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느냐의 문제였다.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런데 올해 봄 5월부터 한국의 서울시 한복판 시민민주주의 정치의 중심인 시청광장에 이른바 '촛불'이 켜진 것이다.
  
  이 '촛불'은 사실 2002년 한국에서 개최된 월드컵 축구대회 때 그 6월 한 달에 걸친 청소년과 여성과 쓸쓸한 대중 700만의 이른바 '붉은악마'의 응원 사태로부터 시작된 후천개벽운동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
  
  인터넷의 디지털 네트워크에 의한 끊임없는 토론에 의해 도달한 '집단지성'이란 이름의 합의에 의해 지도자도, 조직도, 동원체제도, 책임자도 없는 수만, 수십만, 수백만 이상의 청소년, 여성, 쓸쓸한 대중이 일사불란하게 긴 시간을 세계 역사 상 유례없는 '신개념의 군중행동(앰네스티 조사관, 노마 강 무이코의 보고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양하게, 자발적으로, 그럼에도 유기적, 창조적으로 활동한 신개념의 군중행동)'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완전히 한국 2008년 5월만의 유일한 군중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99년 시애틀 WTO 반대시위 역시 이와 비슷한 '개체-융합'의 '우발적'인 '자기조직화' 현상이었다. 즉, 세계적 현상으로서의 보편성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촛불은 긴 한국 민주화 운동 전면에서 매우 흔했던 시위 양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전의 모든 시위 아젠다에서는 볼 수 없던 먹을거리, 물, 가스, 건강, 생태계 문제와 교육, 그리고 고용이 아닌 최소한의 생계 문제가 날카로운 항의의 초점이 됐으니 생명·생활·생존·생계·생태와 영적인 교육제도가 정치 전면에 클로즈 업 되었다. 이 역시 역사에 처음 나타난 사건이다. 생명정치, 생활자치의 시작이다.
  
  그 시위 형식은 어떠했는가?
  
  6월 10일 이후 6월 29일까지, 그리고 7월 중순 이후의 얼마간 좌파 시위대의 낡은 유형들이 개입한 경우 이외에는 철저한 비폭력·평화의 원칙을 고수했으니 바로 현대 문명사 대전환의 싸인 마크인 '생명과 평화'의 원칙을 웅변적으로 압축했다.
  
  이 같은 생명 평화 운동은 조직화된 시민운동단체의 유기농운동도, 환경운동도, 녹색당 유형의 정치운동도 아닌 그야말로 비조직 대중의 우발적· 개체적· 혼돈적· 자발적· 창발적인 생활 자치운동으로서 역사 상 전혀 새로운 운동 양식이다.
  
  이 촛불운동의 정치적 항의는 다분히 문화적 표현양식을 띄고 있다. 68년 프랑스의 5월 문화혁명과는 또 다른 정치적 문화축제이니 고대 한국과 아시아의 '풍류(風流)'라고밖에 볼 수 없다.
  
  태고 한민족 신화에서의 혼돈적 질서(混沌的 秩序)인 혼돈 및 여성성 '팔려(八呂)'와 질서 및 남성성 '사율(四律)' 배합 비율의 우주 음악 질서가 '풍류'다. 그것은 음악 등 예술에서 우선 '팔풍사유(八風四維)'로 나타난다.
  
  이 풍류의 악센트는 해학(諧謔)과 풍자(諷刺)다. 이것이 근대 이후 거리의 정치 행동에서 이미 자취를 감춘 고대민중의 정치문화이니 동아시아 네오 르네상스의 강렬한 예감이라 하겠다.
  
  '풍류'는 반드시 '화백(和白)'을 끌고 온다. '화백' 역시 고대 아시아의 직접민주주의 정치회의 양식으로서 고대 유가(儒家)의 우주적 지치주의(至治主義)의 특징인 '팔정사단(八政四壇)'의 원시적 원형이라는 직접 민중정치요, 고대의 '태양정치(太陽政治)'로서 단하(壇下)의 군중의 시끄러운 팔정(八政)과 단상(壇上)의 대의(代議)의 조용한 질서 있는 사단(四壇) 사이의 여러 날에 걸친 불꽃 튀는 논쟁과 합의과정으로서 촛불 시위과정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 측에서 끊임없는 직접민주주의는 바로 고대 무위정치(無爲政治)의 부활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긴 시간의 시위광장에는 우선 군중이 스스로 솥을 걸고 밥과 반찬을 지어 나누는 과정에서 전통 농촌의 오일장(五日場)이나 도시의 난전(亂廛)과 같은 낮은 단계의 다양한 교환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고대 호혜시장인 '신시(神市)'의 예감이다.
  
  바로 이 같은 '풍류', '화백', '신시'의 가능성이 촛불 기간에 군중의 광장에서 출현한 것은 동아시아와 세계 역사에서 결코 우연한 사건일 수 없다. 바로 고대의 회복이다.
  
  촛불시위의 주체 문제는 어떠한가?
  
  촛불의 주체는 철저히 이십대 미만의 미성년· 여성· (비정규직 및 소수 피차별민중과 연결된) 쓸쓸한 대중으로 한정된다.
  
  조직노동자나 좌파 운동가, 이념지향의 대학생이나 정치집단의 등장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모두 그들 자신의 정치적 효과를 위한 개입이었다.
  
  이들, 미성년· 여성· 쓸쓸한 대중은 동서의 모든 고전에 공통되게 지적된 철저한 피 보호대상, 소외계층, 아직 아무런 권리와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꼬래비'에 불과한 사람들, 예수의 '산상수훈'(신약)에 등장하는 '저주받은 자(네페쉬 하야)'에 불과한 사람들이다.
  
  바로 이들이 정치 전면에 주체로서 등장한 것이다.
  
  한국 19세기 후천개벽의 우주사적인 의미를 역철학(易哲學), 역과학(易科學)으로 정리한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이란 책이 있다.
  
  정역은 바로 이 같은 미성년, 여성, 쓸쓸한 대중 같은 '꼬래비'가 정치주체로 등장할 때(十一一言)가 다름 아닌 후천개벽의 때로서 노자(老子)가 '무위정치(無爲政治)'라고 불렀던 고대의 이상정치가 회복되는 때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역은 이때 기왕의 선각자나 종교인, 정치인들은 뒤로 한발 물러나 교육, 문화, 제사, 그리고 보완적 정치(代議民主主義)로서 미성년, 여성, 쓸쓸한 대중의 직접정치를 조용히 돕는다고 말하고 있다. 십오일언(十五一言)
  
  이 또한 노자가 말한 고대 이상정치인 '성인(聖人)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민중이 모든 정치를 다 맡아하는(我無爲而民自化)' 무위정치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지난 5월 이후 7월 초순까지 시청 광장에 켜진 촛불은 두 가지다.
  
  처음의 미성년, 여성, 쓸쓸한 대중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첫 촛불'과 좌우 양 극단 사이의 폭력의 악순환(6월 하순)을 끊고 들어온 천주교 사제단과 불교 승가회 스님들의 평화와 생명의 '새 촛불'이 그것이다.
  
  첫 촛불이 '십일일언'이라면 새 촛불을 '십오일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고대정치의 부활인 셈이다.
  
  불교, 천주교, 일부 기독교의 이후의 촛불과의 관련과 항의집회, 신부-스님의 '오체투지(五體投肢)' 등은 바로 이것을 증명한다.
  
  정역은 바로 이것이 정치와 사회에 나타나는 후천개벽의 시작이라고 보고 이때 지구에 후천개벽의 거대한 우주현상이 나타나는데 바로 이것을 '기위친정(己位親政)'이라고 부르고 있다.
  
  '기위'란 우주 간지(干支)에서 '꼬래비'이니 12간지 중의 제6위로서 '대황락위(大荒落位)'를 말한다.
  
  '저주받은 위치'인 것이다.
  
  바로 이 '기위'가 본래의 자기 자리 즉, 임금 위치(親政)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지구 역사에서 중국의 주(周)나라 성립 전후한 시기인 3000년경부터 지구 자전축과 북극 방향의 성운군, 북극성, 북쪽 은하 등이 서남방으로 45˚ 각도로 경사(傾斜)져 있다가 후천개벽과 함께 우주 정치의 중심 위치인 북극(스티븐 호킹에 의하면 북극은 물과 생명의 탄생지로서 지구만 아니라 온 우주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라는 것이다)에로 본래의 제 위치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5만 년 전 선천(先天)의 우주와 생명의 원형을 다시 창조적으로 회복하는 후천개벽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미신이거나 망상에 불과한 것인가?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가 한국에서 열렸고 촛불의 전 단계였던 700만 붉은 악마의 주역이었던 미성년, 여성, 쓸쓸한 대중이 한 달간 그 아름답고 힘찬 응원 문화로 전 세계를 뒤흔든 바로 2002년의 2년 뒤인 2004년 지구 자전축의 북극 이동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쓰나미'가 무엇인가?
  
  2004년 인도네시아에서 대해일로 26만 명이 한꺼번에 죽은 사건이다. 그 원인은 서구 과학자들에 의해 지구 해양판과 대륙판의 충돌 때문이었다고 보고되었고 그 충돌은 다시 지구 자전축의 북극 이동 때문이라고 보고되었다.
  
  그러나 주류 유럽과학계의 시비 때문에 지금까지도 논쟁 중이라 아직까지 라틴어 학명이 유보된 채 4년간이나 그대로 일본어 '쓰나미'로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역이다.
  
  정역은 지구 자전축의 북극 복귀 때엔 북극 자체에 파천황의 변화가 오고 대빙산이 녹아 남반구 해수면이 급격 상승해 온 지구의 날씨가 추위와 더위 사이를 왕래하며 침강(沈降), 융기(隆起), 해일, 지진, 산불, 화산 등이 접종(接踵)한다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2005년에 북극을 형성하는 두 개의 극(極)인 지구에너지의 수렴구조의 극인 지리극(地理極·geographic pole)이 지구에너지의 외계 우주로의 확산구조의 연결 극인 자기극(磁氣極ㆍmagnetic pole)이 상호이탈, 관계 재편성 과정이 매스컴에 보고되었다.
  
  그것은 대빙산의 본격적 해빙, 동토대(凍土帶) 밑의 메탄층 폭발로 인한 북극의 대해빙과 동시에 적도의 결빙(結氷)으로 케냐에 눈이 내리며 온난화와 간빙기(間氷期)의 교차 생성으로 극도의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드나들어 대 전염병 창궐 시대가 오고 세계 인구의 절대 다수가 바이러스와 괴질로 죽는 그야말로 '기위(己位)' 즉, '대황락(大荒落)'의 지옥의 시절이 지난 다음 겨울엔 온화하고 여름에는 서늘한 아시아 대륙의 중간 기온으로부터 시작되어 동지(冬至), 하지(夏至) 중심의 극도로 춥고 극도로 더운 시절이 없어지고 온화하고 서늘한 춘분(春分), 추분(秋分) 중심의 4천 년 유리세계(琉璃世界)가 온다고 정역은 주장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유리세계'가 '대황락'으로부터 지구 자전축의 북극 이동에 따른 전변기 시작의 무렵에 이미 아시아 대륙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아시아 신문명, 후천개벽의 시작이 아시아에서 이루어진다는 전망은 바로 이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지구혼돈은 극에 달할 것이다. 생태계 혼란과 멸종, 변종, 변질 사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현재에도 계속 보고되고 있는 생명계의 괴변(怪變)은 주목을 요한다.
  
  죽지 않는 생명체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태안반도 기름사태 이후 과학계의 보고다. 2006년 영국의 과학 잡지 '네이처'지에 영국 과학자 '마이클 위팅'의 '재진화(re-evolution)'라는 보고서가 나왔다.
  
  이미 1세기도 훨씬 전에 찰스 다윈에 의해서, 이어 현 세기 초에 저 유명한 진화론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뎅에 의해서 심지어 현대의 첨단적인 자유의 진화론자들에 의해서까지도 우주와 생명진화는 완성되어 종 변화는 끝이 났다고 공식적으로 선포된 바 그 사실이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최근 수천만 년 전에 퇴화돼 버린 곤충 30여 종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다시 돋아나는 것이 관찰되었다는 보고서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40대 성인의 절반 이상이 병원에 가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는 정도의 극심한 피로감으로 절대 노동력이 대규모 감퇴하고 불임(不姙) 부부가 격증하고 있으며 불감증(不感症) 환자와 자살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인간 기형아 다수 출산과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생물 종의 새로운 출현 등은 이제 놀랄 일도 되지 못한다.
  
  암(癌)을 비롯한 불치병의 대량 확산, 괴이한 감기, 조류독감, 아토피의 괴질화, 보편화된 정신이상, 영적인 부패,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는 각종 괴이한 생활 이상자의 무수한 출현이 상식화 되고 있다.
  
  미국, 중국의 음식물 수입품 속의 오염요소들, 유전자 변형식품들의 문제, 농산품 거의 전량 내부의 화학약품 등은 한국에서 생명과 평화운동이 문명이나 정치 차원이 아닌 일상적인 생활 자치를 의미하는 바로 그 까닭이다.
  
  한국의 대학생 자살자 수가 한 달 평균 거의 3명에 육박한다. 최근 유명 여배우의 자살은 큰 충격이다. '베르테르 효과', 모방자살 또한 대유행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거대한 변동이 오고 있는 것 아닌가?
  
  이미 19세기인 1860년에 후천개벽 사상인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선생은 현대를 '악질만세(惡疾滿世)'라고 부르고 '십이제국(十二諸國) 괴질운수(怪疾運數) 아동방(我東方)이 먼저 하네' 읊었다.
  
  이것은 고대회복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이것은 고대 아시아의 신시경제(神市經濟), '호혜시장(互惠市長)'의 현대적 부활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나는 이미 호혜시장에로의 경제전환이 이루어지려면 지구변동과 직결된 현대문명사의 대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혀 말한 바 있다.
  
  바로 이 변동이 현실적으로 오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아시아 경제에 있어서의 고대 호혜시장의 현대적인 성립 필연성은 경제사학적으로도 확고하다고 볼수 있는 것인가?
  
  유럽 제일주의 경제사학에서 예외 없이 멸시당하고 가차 없이 폄훼되어 온 아시아적 생산양식, 아시아적 가치, 아시아적 전제주의라는, 이젠 거의 상식이 돼버린 유럽적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우월성에 대해 일단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인가?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저서 '리오리엔트'에서 약간의 의견을 들어보자.
  
  유럽경제 전통의 우월성에 비해 아시아의 그것을 폄하하는 데에 있어 항상 비전(秘傳)의 무기처럼 사용되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카를 마르크스 같은 유럽인이 실체도 없는 예외주의를 증명하기 위해 날조한 신화라는 것이다.
  
  마르크스, 베버, 토인비, 브로델, 월러스틴 등이 발 딛고 있는 유럽 중심주의의 반역사적, 반과학적, 이데올로기적인 오류는 이제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와 에릭 존스 등이 공들여 조립하고 윤색한 '유럽의 기적'을 관통하고 있는 유럽중심주의가 아닌 글로벌리즘에 눈을 돌려야 할 때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계 미국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등 이슬람적 관점 등이 주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더 프랑크는 동남아시아의 리콴유나 마하티르 등이 대표하는 '아시아적 가치' 안에 게승된 중국 및 아시아의 전통적 경제 사상 및 그 활력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런 점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생명경제의 샘물을 찾기 위해 그 실마리를 프랑크 자신의 다음과 같은 칼 폴라니 비판에서 찾아보자.
  
  '칼 폴라니는 유럽에서 19세기에 자신이 말한 '대전환'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세계 어느 지역에도 원격지 무역이나 분업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시장 관계도 형성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고대 제국 사이의 무역과 시장 관계를 부정하는 폴라니(Polanyi, 1957)의 주장을 반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하나둘이 아니며 반대로 시장의 확대가 비교적 최근에야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이곳을 기점으로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므로 기타 여러 지역, 특히 아시아권의 세계시장, 영향과 교역관계 등 현실적 중요성을 갖는 시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다수의 연구들을 도매금으로 무용지물을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물론 그럴 것이다. '그렇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니다'라는 것이다. 프랑크에 의하면 폴라니가 부정한 글로벌한 여러 가능성, 특히 아시아의 가능성 역시 구체적인 연구와 검증에 의해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인인 우리는 이미 그것은 안다. 고대 이후 아시아의 시장과 무역, 교환관계가 유럽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캄캄한 밤중이 전혀 아닌, 그 나름의 엄청난 활력을 가진 것이었음을 환히 알고 있다. 물론이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와는 차원이 약간 다르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활동의 전통에 대한 '아니다-그렇다', 그리고 '그렇다-아니다'를 이미 앞에 전제하고 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와 같은 유럽과 아시아 경제사의 '아니다-그렇다', '그렇다-아니다'의 상호관계 자체가 그 나름으로 지금 활력을 잃어가는 현 시국에 있어 바로 그 양축 사이의 '아니다-그렇다'라는 드러난 차원 아래 오래도록 숨은 차원으로 있으면서 기왕의 양 문명의 드러난 차원을 추동하고 격려하며 수정 비판하든 어떤 근원적인 경제적 원리의 생명력이 이제 전 인류 문명사의 근본적 대전환의 계기를 맞아 그 스스로 새로운 드러난 차원의 경제적 현실로 개시(開始) 현현(顯現)하는 거대한 차원 변화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바로 이 새로운 차원이 드러나면 이것이 기왕의 드러난 차원의 양 문명 간의 '아니다-그렇다'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아니다-그렇다'의 살아있는 생성관계를 맺게 된다는 바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프랑크는 말한다.
  
  '폴라니는 아시아 역사가 가진 그 유구한 경제적 활력의 현실 전통을 모두 신화로 대처해버리고 <호혜와 재분배>라는 비경제적 사회관계가 그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찾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 있다. 실증적 경제사학자가 비경제적 사회관계로 취급하고 있는 호혜와 재분배가 이미 유럽과 아시아 등에서 이렇게 저렇게 다양한 형태로 생성 발전해 온 교환제도라는 현실과의 상관관계에서 이미 우리가 전제한 대변동 앞에 앞으로 과연 어떠한 형태의 새로운 경제 차원을 만들어낼 것이냐 하는 것이다.
  
  폴라니 자신이 호혜와 재분배를 비경제적 사회관계로 취급했다. 마르크스와 베버와 월러스틴의 견해는 더 물어볼 것도 없다.
  
  여기 참석한 우리들 자신마저도 호혜와 재분배는 비경제적 사회관계로밖엔 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매일 매일의 경제상식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몹시 배고프다. 호혜와 재분배라는 비경제적 사회관계에 굶주린 것이다. 내 말이 틀렸는가?
  
  바로 그 비경제적 사회관계 안에 숨어 있는 새로운 영적인 생명 경제학을 오늘의 싸늘한 교환현실에 결합함으로써 오늘의 경제와 문화와 생활을 크게 전환하지 않으면 우리의 굶주림인 '기위(己位)' 즉 '대황락(大荒落)'의 깊은 어둠을 우주생명의 주체의 위치, 그 눈부신 빛으로 복귀, 개벽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 여전히 망상에 불과한가?
  
  만약 망상이 아닌 현실적 과제로서 인정된다면 우선 아시아 고대의 호혜, 교환, 재분배의 비경제적 및 경제연관에 관한 지식이나 지혜 또는 그 견해의 대강을 칼 폴라니로부터 시작해서 함께 더듬어 찾아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폴라니의 '대전환'이다.
  
  '경제학과는 본래 무관한 두 가지 행위 원칙으로부터만 생산과 분배에서의 질서가 보증된다. 그 두 가지 행위 원칙이 바로 호혜(互惠(reciprocity)와 재분배(再分配·redistribution)이다.'
  
  '대칭성과 중심성은 호혜와 재분배의 필요에 부합될 것이다.'
  
  생산과 분배의 질서로서 호혜와 재분배가 새롭고 근원적인 원리로 작용하려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이때 대칭성과 중심성은 현대 문명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것이 이제부터의 우리의 공부와 실천의 과제일 것이다.
  
  '호혜와 재분배에 대한 현실적 교환의 관계는 시장 패턴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이 시장체제는 시장사회에서만 기능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갖는 의미다.'
  
  호혜시장이 고태종교(古態宗敎)의 테두리 안에서 활성화될 수 는 없다. 그렇다면 호혜시장의 가장 긴급한 현실문제는 도리어 시장패턴과의 연관을 현대적인 대 문명사 변동이나 우주생명연관의 생활적 전환 속에서 치밀하게 고려하는 일이다. 다음은 J.R.스탠필드의 '폴라니연구'다.
  
  폴라니는 자유와 죽음과 사회 세 가지 구성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하는 세계관을 거부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추구할 것은 정신의 자유다. 그러나 그 정신의 자유가 진실의 부정을 의미하거나 윤리, 법, 권위의 부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정신의 자유는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하고 윤리의 지시를 준수하며 법에 따라 행동하고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다. 줄기차게 끝까지, 무엇이든 심사숙고하지 않고 물러설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잠든 인간을 흔들어 경계하는 눈빛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내면의 진실을 탐구하고 온갖 종류의 계급과 민족의 진실을 좇는 것이다. 말하자면 틀에 박힌 모럴리스트의 훈계에도 불구하고 이를 넘어서서 순수윤리의 오솔길을 따라가는 것. 법을 무시할망정 정의의 편에 서는 것. 덕망 있고 진실한 권위에 대해서만 경의를 표하고 퇴폐적인 성공과 과시적인 권력에 기초한 거짓권위에는 등을 돌리는 것이다.'
  
  폴라니의 이 같은 윤리적 결단이 반드시 우리의 경우 모범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어쩌면 초비상사태 속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참고해 우리 스스로의 생활적 전환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스탠필드는 말한다.
  
  "달톤은 호혜성을 '사회적으로 입장이 분명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상호간에 일어나는 의무적인 선물주기와 답례(Counter gift-giving)'로 규정한다. 호혜성은 지속적이고도 의례적인 선물교환 방식이 비공식적으로 제도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공식적으로는 고도의 의례관계 속으로 제도화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집단의 여러 대칭적인 분화(symmetrical division)가 하위집단에서도 일어날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집단으로 분화되면 '호혜성이 의미하는 것은 한 집단의 구성원이 다른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선물주기와 답례라는 행위를 하고 또 그 집단의 구성원 또는 제3, 제4의 집단은 처음에 선물 받은 집단에게 같은 행위를 한다는 점이다."
  
  '호혜성은 현대인의 감각으로 포착하기는 매우 난해하다.'
  
  '원시공동체에서 호혜는 경제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발생한다. 그러나 일반적 현상인 가정에서의 호혜는 교환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만 경제적 현상으로 주목하는 현대의 관찰자들에게 아직도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남아있다.'
  
  '호혜성의 사회적 또는 정치적 기능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으며 오히려 지배적일 것이다.'
  
  '교환의 유일한 목적은 호혜성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보다 밀접한 관계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에서도 호혜성의 결속기능은 뚜렷하다. 의례적인 방식을 통해 똑같은 물건을 주고받는 교환의 목적은 둘은 하나라는 소속의식을 강조하고 그리고 강화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nichomachgos ethics)>에서 <어떤 종류의 공동체든 선의(善意)가 존재해야 한다. 이 선의 또는 필리아(pgilia)는 호혜성 속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혜성이 명확하게 경제적 기능을 갖는다는 점을 스탠필드는 강조하고 있다.
  
  '호혜성의 핵심은 서로간의 사회적 관계가 가장 중요하고 이것에 의해 호혜성이 규정된다. 사회적 관계란 대면적(face to face)이고 가족처럼 친근한 개인적 관계를 말한다. 현대의 사회과학 용어로는 공동(community)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명백한 수정이 필요하다. 상식적인 공동체와의 비교를 용납하는 수동적 상황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아가 현대생물학의 <내부공생(內部共生)·endosymbiosis)>이나 현대진화론에서의 <개체-융합(identity-fusion)>으로 개념해석을 다시 내릴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정확한 이해방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재분배(再分配·redistribution)'란 무엇일까?
  
  스탠필드는 말한다.
  
  '통합메커니즘으로서의 재분배는 어떤 중앙기구에 재화와 용역을 옮겨놓는 강제적 이전(transfer)을 포함한다. 재분배는 사회적으로 인정한 중앙, 일반적으로 왕, 추장, 수장 또는 사제에서 물품, 화폐대상, 또는 노역 등의 강제적 지불을 수행하도록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접수한 분배물을 방위 또는 축제 같은 부락 공동체의 사업을 위해 재배분하고 특정인에게 보상한다.'
  
  '재분배는 집단의 생산물이 한 곳에 모이고, 물질적으로 그리고 용도전환을 통해 다시 구성원들에게 분할되는 것을 의미한다. 확실히 중심성(Centricity)은 재분배의 작동을 위해 필요한 제도적 패턴이다. 중앙기구는 정치적 도는 종교적 기초를 갖는다.'
  
  앞으로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문제로서 1만 4000년 전 파미르 고원의 마고(麻姑)문화와 그로부터 출현한 천시(天市) 또는 신시(神市)의 기본척도인 팔려사율(八呂四律)이라는 혼돈적 질서(混沌的 秩序)에 기초하는 재분배의 엄밀한 재규정이 꼭 요청된다.
  
  '현대인들에게 재분배는 아마도 국민국가의 성립, 그리고 행정관리절차에 의해 분업이 확실히 극복된다고 하는 식의 관계로 상기하면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재분배는 분업, 해외무역, 공공목적을 위한 징세, 방위준비라고 하는 현존체제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시스템 고유의 기능은 전체 사회시스템의 틀 안에서 연출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지나치리만큼 비경제적 동기를 부여하고, 지극히 생동적인 체험 속으로 완전히 흡수되어 버린다.'
  
  마지막으로 칼 폴라니가 호혜 등을 경제통합유형으로 대응한 각도를 살펴보자.
  
  '칼 폴라니의 사회경제론, 시장자유주의를 넘어서' 속에서 김영진이 정리한다.
  
  '폴라니는 경제통합유형을 크게 호혜(reciprocity), 재분배(redistribution), 그리고 교환(exchange)으로 분류했다. 호혜란 일정한 사회적 관계가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사회적 의무로써 재화와 서비스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는 행태이다. 재분배는 자원에 대한 중앙 집중적 관리와 그에 따른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교환은 시장에서 상품을 통해 교환하는 방식이다. 각각의 유형에 있어서는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는 경제 과정에서 인간들 사이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제도적 장치가 서로 다르다.
  
  통합유형의 구분은 특히 경제 과정이 사회의 정치적, 문화적 영역과 서로 연계되는 방식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와 관련해 폴라니가 '지지구조(supportive structures)'라고 부르는 사회조직 원리가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이를테면 호혜의 통합유형은 평등주의적 사회조직원리라고 할 수 있는 소위 대칭적 사회구조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재분배와 교환의 통합유형은 각각 중앙 집중적 관료체제와 시장행태로 뒷받침된다.
  
  개개인의 경제적 동기나 행위도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주어진 사회적 관계와 긴밀히 연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호혜와 재분배의 통합유형에서 경제활동의 목적은 개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과 법을 실행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경제 행위의 원리도 교환이 아니라 상호의존과 나눔이 지배적이다. 결국, 경제과정은 사회적 과정에 종속되어 있는데, 사회적 관계는 이러한 경제과정에 통일성과 안정성을 부여하게 된다.'
  
  여기 부연해 현대에서 호혜를 논의할 경우 다음의 네 가지 생명의 특성이 사회경제적으로 철저히 붕괴되거나 왜곡돼 있음을 주목하고 이에 대응해야 한다는 점이 유념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과 자연 생태계 사이의 순환성.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
  인간과 자신의 노동 사이의 다양성.
  인간과 신 사이의 영성.
  
  이상 네 가지 사이의 호혜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호혜, 교환, 재분배'에 관한 칼 폴라니의 견해를 기초적으로 살폈다.
  
  다음.
  
  한국의 한 뛰어난 재야 신시(神市) 연구자 좌계(左契) 김영래(金永來) 선생의 호혜시장 구조론을 일별할 필요가 있겠다.
  
  신시(神市)
  
  호혜시장을 뜻한다. 시장에서 재화(상품과 용역)를 거래할 때 반드시 계(契· 호혜서클, 개체-융합identity-fusion 또는 내부공생endosymbiosis의 개체성을 중심으로 하는 분권적 융합으로 노동양식에서는 '품앗이' 등으로 나타난다)를 들어야 하는 시장을 뜻한다.
  
  동양의 고서(古書)에는 천시(天市), 천고시(天高市), 신고시(神高市), 또는 전조후시(前朝後市)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계를 반드시 들게 하는 궁극적 이유는 영역(領域) 개념을 탈피해, 탈 국가적으로 계군으로서의 인류애(人類愛)를 사회에 축적시키기 위한 고대인의 사회적 고안(考案)이었다.
  
  이 호혜시장은 철저히 생산계(生産界)를 분리하는 시장이었다.
  
  마르크스는 교환시장의 피해를 교환-축적-교환이라는 이른바 삼범식(三範式)이 갖는 자본축적의 역동성에서 찾았는데, 이 시장은 소비계에서 쓰이는 거래매개체와 생산계에서 쓰이는 거래매개체가 완전히 구분되고 생태계나 사회 환경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생산계와 소비계를 단절시키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피해가 전혀 발생할 수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다음은 필자 자신의 신시관(神市觀)의 약간 부분이다.
  
  신시는 옛 한민족의 신화적 고향인 1만 4000년 전 파미르 고원의 마고성(麻姑城) 신화 중의 '천시(天市)' 모델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마고성의 관측대인 소(巢·일종의 지구라트)에서 관측된 성운군(星雲群) '천시원(天市垣)'으로부터의 우주음률(宇宙音律)인 '팔려사율(八呂四律)' 즉 혼돈성, 여성성이 '여덟'에 질서와 남성성이 '넷'으로 이루어진 '혼돈적 질서(混沌的 秩序· chaosmos)' 즉 '여율(呂律)'에 의해 기획된 도시, 삶, 기준과 원형으로서의 '천시(天市)'에서 흘러나온 것이 '신시(神市)'다.
  
  신시는 이같은 우주율(宇宙律)의 반영인 제의와 유희, 풍류(風流)와 직접민주주의 정치회의인 화백(和白)과 함께 펼쳐진 호혜시장이라 한다.
  
  풍류는 혼돈한 우주소리인 팔풍(八風)과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정제된 사유(四維)의 율격(律格)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진 혼돈적 질서요 생명적 평화의 음악과 제의요, 유희였으며, 화백을 단하(壇下)의 시끄러운 군중의 직접 토론을 의미하는 팔정(八政)과 단상(壇上)의 균형잡힌 대의(代議)의 의견접수 및 평가를 의미하는 사단(四壇) 사이의 역시 혼돈적 질서를 기본으로 하는 '성인(聖人)은 함이 없는데(無爲) 백성(民)은 스스로 모든 것을 다 다스리는(自治)' 무위정치(無爲政治), 태양정치(太陽政治)였다.
  
  여기에 신시(神市) 즉 호혜시장의 원리가 있다.
  
  호혜는 그 원리가 팔려(八呂) 즉 거의 혼돈에 가까운 생명과 사랑과 모심의 신령(神靈)의 영역이니 인간과 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자신의 노동이나 생산물 사이의 자리이타(自利利他), 서로가 서로에게 돌아감이다.
  
  교환은 엄격한 질서를 뜻하는 사율(四律)이니 동아시아 고대 이래의 균형인 동서남북이나 태양, 소양, 태음, 소음 등의 사상(四象) 등으로 소비와 생산 및 공급, 유목계와 정착계, 그것들을 연결하는 사각(四角) 사이의 엄정한 거래관계였다.
  
  세 번째의 획기적 재분배는 복잡하다. 호혜 즉 팔려의 혼돈한 영과 생명, 모심과 시장의 영역과 교환 즉, 사율의 엄격한 대응 기능과 상호거래의 질서와 균형의 영역 사이의 상생(相生)이나 상극(相剋)의 '아니다-그렇다(不然其然)'의 드러난 질서 아래 숨어 있어 그 질서를 추동하고 창조하고 유지하며 비판 수정하다가 어느 날에는 그 스스로 드러난 질서로 개시 현현되어 현실화할 때는 팔려의 호혜와 사율의 교환 사이의 이러저러한 상호관계상 여러 쌍의 '혼돈적 질서'나 '기우뚱한 균형(분명 양극 사이의 균형은 균형이로되 어느 한쪽에 그 때 그 때마다 또는 조건과 날씨, 사람과 경우에 따라 중심이 더 가 있는 기우뚱한 상관)'이 발생하게 된다. 즉, '생극(生剋)'과 숨어있던 새 차원이 드러나는 '복승(複勝)' 사이의 차원 변화다. 그리하여 세 차원은 분명 '8'과 '4'의 관계이면서도 또한, 하늘(天), 땅(地), 사람(人)의 '3' 즉 호혜, 교환, 재분배의 상호 복잡한 관계 외에 그 연관과 관리를 책임지는 중심 부처인 왕검계(王儉系)와 단군계(檀君系)의 음양(陰陽) '2'라는 '셋'과 '둘' 사이의 혼돈적 질서인 '엇'을 반영하는 재분배이므로 단순한 재분배가 아닌 이른바 '획기적 재분배'가 된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너무 생생하여 무질서한 혼돈의 불균형이나 공산주의에서 나타난 평균적, 관념적, 추상적인 죽은 균형이 아닌 바로 '역동적 균형'이었다 한다.
  
  바로 이것이 곧 참다운 '생명과 평화'의 기초다. 생명은 혼돈이고 평화는 혼돈에 토대한 질서일 때 비로소 진짜 평화인 법이다. 이것이 불교 우주관과 연결된다면 어떻게 될까?
  
  화엄경 십지품(十地品) 안팎의 거의 모든 구조 속에 팔려사율과 함께 풍류, 신시, 화백, 그리고 호혜, 교환, 재분배와 아니다-그렇다의 원리와 함께 숨고 드러남, 열림과 닫힘, 천지인 삼극과 음양 이극, 그리고 그에 의해 드러나는 근본으로서의 텅 빈 영원한 푸른 하늘의 그 '한'에로의 유추가 가능한 온갖 복잡한 혼돈적 질서, 예컨대 '달이 천 개의 강물에 저마다 다르게 비침(月印千江)'이거나 '작은 먼지 한 톨 속에 우주가 담겨 있음(一微塵中含十方)'과 같은 원리가 도처에 널려 있어 '호혜, 교환, 재분배'의 신시는 이제부터 시작되는 전 지구와 전 우주적인 후천개벽의 대 문명사 변동에 대응하는 한 개인 생활의 전 우주적인 확산 연관 속에서 획기적인 영적(靈的) 생명경제에로 호혜시장이 나아갈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나의 용어로는 이른바 '화엄개벽(華嚴開闢)'이다. 이것은 물론 나의 개인적인 견해다.
  
  물론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약간 실증성이 빈약한 듯 느껴지는 이러한 견해를 고대 호혜시장론의 결구로 제시하는 데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이제부터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서만 아니라 호혜시장에 대한 우리의 파천황의 창조적 발상이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어떻게 그 창조적 발상이 참으로 가능할 것인가? 이쯤에서 일본의 벗들에게 한마디 아첨에 가까운 높은 칭찬을 감히 하려고 한다.
  
  일본 현대 문명의 첨병인 노무라(野村) 종합연구소가 10여 년 전에 발표한 '창조전략'이란 리포트 얘기다. '노무라' 쪽은 그 리포트에서 '콘셉터' 즉 '창조적 발상 지원 시스템'이라는 탁월한 아이디어를 내어 놓았다.
  
  콘셉터(Concepter).
  
  컴퓨터가 아니라 컴퓨터를 거느린 콘셉터! '창조적 발상 지원 시스템'이다.
  
  정보화가 아니라 정보화의 콘텐츠 중심인 창조화의 시대를 열자는 것이다. 그 단위는 '비트'가 아니라 '창조적 발상량(創造的 發想量)'이다.
  
  한 전문가의 천의무봉(天衣無縫)한 무궁무진한 창의력을 수많은 관련 전문인들이 둘러싸고 연관 각 방면의 질문을 집중함으로써 눈부신 새 아이디어를 거듭거듭 폭발시키고 즉각 즉각 그것을 컴퓨팅해 바로바로 현실적 대안으로 성안시키는 시스템이다. 필요하면 즉각 보도도 하고. 어떤가?
  
  '호혜시장'을 콘셉터에 걸어볼 용의가 없는가? 바로 그 콘셉터 운영의 질문 및 대답의 방향성에 나의 호혜시장에 관한 나의 복합적인 견해를 활용할 수 없겠는가?
  
  이해가 되는가?
  되기를 바란다.
  
  이제 호혜시장. 그것도 동아시아로부터, 그리하여 아시아로부터, 그리하여 아메리카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로 확산되어갈 호혜시장의 후천개벽적 신문명사 전체의 현실적 근거와 배경을 살펴볼 때가 되었다. 현실 이야기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이야기부터 하자.
  
  '역사의 종말'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시대의 폐막을 알린 후쿠야마가 이제 신자유주의 자본시장의 몰락을 예언하고 있다.
  
  그는 미국 월스트리트 발(發) 금융위기로 미국이 '자본주의 비전'과 '민주주의 신장'이라는 두 가지 국가 브랜드의 손상을 입었다고 지적했다.
  
  후쿠야마는 '미국 주식회의 몰락(The Fall of America INC)이라는 글을 통해 이를 밝히고 대응 방안을 제시한다.
  
  후쿠야마는 첫 브랜드인 자본주의 비전의 손상과 관련해 월 스트리트 붕괴로 레이건 혁명은 끝났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에 동의했다. 그는 작은 정부를 내건 이른바 '레이건 혁명'은 호황과 기술의 출현을 가져왔지만 감세와 금융시장의 자율화(탈규제)라는 두 가지 신성불가침 정책 탓에 재정적자 심화와 소득 양극화를 초래하고 구제금융 투입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그는 '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누적되는 미국의 쌍둥이(무역, 재정) 적자는 레이건 혁명이 위험에 처한 신호였다고 분석한다. 달러화 약세는 재정적자를 심화시켰으며, 2000~2001년 캘리포니아 주의 전력시장 자유화에 따른 전기세 폭등, 2004년 엔론 회계 부정사건 등으로 국내적으로도 탈규제의 대가를 지불했다고 지적한다.
  
  후쿠야마는 이어 미국의 두 번째 브랜드인 '민주주의 신장'이라는 가치도 이라크 침공이나 정권 교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활용한다는 점에서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사우디아라비아를 지원하고, 민주선거를 통해 집권한 하마스나 헤즈볼라를 인정하지 않는 점을 들면서 이 때문에 미국의 민주주의 신장 주장은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는 미국의 패권 추구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꼬집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스템 적응 능력과 국민들의 탄력성 덕분에 미국의 영향력은 건재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감세 및 규제완화 정책 탈피, 공공부문 재건, 금융기관 감독 강화 등을 제시한다.
  
  후쿠야마의 지적은 매우 정확하다.
  
  그러나 그는 역시 평론가다.
  
  문명사가도 예언자도 군사전문가도 아니다. 거시경제학자는 더욱 아니다.
  
  미국 자본주의 시장의 근본적 몰락 원인이 근면과 정확한 교환, 생산 소비 유통질서에 대한 거의 운명적인 집착을 가능케 한 막스 베버 이후의 서구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실종과 함께 시작된 주식, 부동산 투자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카지노 자본주의의 창궐에 있음을 못 보고 있다.
  
  악성적이긴 하지만, 정확한 것은 도리어 월 가(街)의 장삿꾼들이다.
  
  '아메리카를 팔아서 아시아를 사라'는 농담이 월 가에 유행한 것은 괘 오래됐다. 후쿠야마의 예상처럼 미국이, 그리고 그에 따라 유럽이 지금의 피 마르는 살인적 공황을 넘어선다 해도 그것은 이미 권태와 불안으로 가득 찬 현상유지의 '유착(癒着)' 상태에 불과할 것이다.
  
  케인즈주의가 부활하고 국유화와 국가개입이 있다 해도, 수많은 내부개혁과 중도노선이 확정된다 해도, 이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요컨대 중심이동은 필연일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시장의 불꽃은 현상 유지의 권태에서는 타오르지 않는다. 자본의 정열은 항상 막대한 초과이윤의 높은 산맥과 깊고 깊은 바다를 향해서만 타오른다. 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미래의 꿈의 시장이 된 지 오래다.
  
  코의 별칭이 곧 '오까네(現金)'인 일본인들이 중앙아시아 도처에 재팬 파운데이션을 세우기 시작한 지도 오래 되었다. 아시아의 구석구석에 시끄러운 일본인들의 목소리다.
  
  영국의 주식 그라프는 기후 변동과 함께 아시아를 향하고 있다. 분명한 감지력이다.
  
  북극에서 얼음이 녹고 적도에 눈이 내리는 이 지구에서 최근 날씨에서 드러나듯 겨울 최저 영하 5도와 여름 최고 섭씨 15도로 점차점차 조정되어 머지않은 미래에 동지(冬至) 하지(夏至) 중심이 아닌 춘분(春分) 추분(秋分) 중심의 서늘하고 온화한 날씨가 평균이 되리라는 아시아 대륙으로의 대규모 인구 이동에 대한 예감은 기후 혼돈 시대, 신 유목 문명기의 첨단 세계시장의 당연한 상식이다. 더욱이 어마어마한 석유와 천연가스의 거의 무한한 매장지 아닌가! 아무리 떠들어도 대체 에너지 시대는 아직 요원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거의 잊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제가 태어난 첫 샘물인 아시아에로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미 곤충 겨드랑이 밑 날개가 다시 돋는 것이 생명계의 현실이라면, 그리고 진화는 종(種)적 개별성 안에 폐쇄되지 않는 무한 확산 작용이라면 르네상스는 15세기 이탈리아 국소 한정의 재진화가 결코 아니다. 르네상스보다 더 근원적이고 전 인류적인 대규모 네오 르네상스가 지구 대 혼돈 시대의 전 세계 생명 평화의 문화 대혁명에 대한 심각한 갈증 때문에도 이미 불가피한 필연인 것이다.
  
  인류 문화는 지금 불교와 신화를 향한 걷잡지 못할 동경으로 한없이 목마르다. 영혼의 텅 빈 무궁과 생생한 신화적 스토리의 유혹은 역으로 저 요란한 할리우드를 막심한 고비용 저효율의 삼류회사군으로 매일 매시간 한없이 전락시킨다.
  
  아시아로 들어가는 길목은 네 곳. 아직 북쪽은 얼어 있어 동남, 서남, 동북이었다.
  
  동남은 인도와 필리핀 등이 이미 열렸고, 서남은 이란혁명의 호메이니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와 오펙크(OPEC) 방어막 대문에 총을 앞세울 수밖에 없었다. 동북은 북한 핵과 김정일 강성선군 지배만 완화시킨다면 중국과의 평화와 철군의 타협 아래 동북아시아 집단 안보체제에 의해 아시아시장 진출의 평화적 경제 교두보를 열 수 있는 전망이 이미 섰다.
  
  머지않은 날 한반도 주둔군 헤드쿼터는 하와이로 빠질 것이다.
  
  노 정권의 전시작전권 탈환 요구에 대해 한발 물러난 미 국방부의 후퇴가 과연 노 정권의 승리일까?
  
  월 가의 농담, '아메리카를 팔아서 아시아를 사라!'는 그저 농담일 뿐인가?
  
  최고 CEO의 농담은 민감한 장사꾼에겐 잠언(箴言)일 뿐이다.
  
  'SELL USA'가 무엇인가?
  
  미국에 투자된 거대 자본들이 미국에서 빠져나가 러시아, 중국, 아랍에 투자되고 있다.
  
  미국의 빈 터에 도리어 일본 자본이 투자되고 있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시장을 휩쓰는 판에 일본만이 정상이다. 일본도 물론 영향을 받겠지만 파멸적 피해의 중심은 아니다. 아직은 '스타 연기자(star performer)'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농담인가?
  
  서울 한복판에 수개월씩 켜진 촛불은 전 세계 역사에 그 유례가 없는 동방 불교 27개 종단 20만 불자의 초대형 정치집회를 가져오고 가톨릭과 불교 사이의 의미심장한 피투성이 공동수행(共同修行)을 끌어내고 있다.
  
  16세기 북경에서 마테오 리치가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한 동서 문명사 통합의 꿈의 길이다.
  
  이것이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본 그린코프 생협이 20여년간 줄기차게 아시아 민중무역을 축적해온 바탕 위에 바야흐로 아시아 호혜시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이 인류의 미래경제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시아 각지에서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을 비롯한 온갖 자그막 자그막한 사회적 기업과 페어트레이드가 대유행이다.
  
  나는 재작년 중앙아시아 여행에서 고대 호혜시장의 전통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다시금 아시아에 새로운 세계시장의 거대한 물결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곧 '호혜, 교환, 재분배'의 현대적 전개 이외에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날카로운 판단을 얻고 돌아왔다.
  
  이제 아시아와 온 세계는 제 일차적으로 한국과 일본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마도 급격히 경제적 생명 평화 운동인 호혜 시장을 확산시키게 될 것이다.
  
  이미 한국과 일본은 고대로부터 그 상호적 문화 흐름을 축적해 왔다. 그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최근 한국문화의 한류(韓流) 유행과 일본의 욘사마 물결의 엔카운터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은 호혜시장을 통한 후천개벽운동에서 마땅히 서로 도와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미국과 중국의 역할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동 터 오는 동아시아, 태평양 신 문명의 비결(秘訣)의 핵심을 19세기 한국의 우주적 역학(易學)인 정역(正易)은 여덟 글자로 압축하고 있다.
  
  民兌合德 震巽補弼
  (한국과 미국이 힘을 합하고 일본과 중국이 이를 돕는다.)
  
  일본과 중국의 보필의 위상이 정역과 다른 것이 나의 등탑팔괘(燈塔八卦)의 내용이다.
  
  정역의 震(우뢰)이 중국인 데 반해 등탑팔괘에서는 巽(바람)이고, 정역의 巽(바람)이 일본인 데 반해 등탑팔괘에서는 거꾸로 그것이 중국이니 일본이 곧 도리어 民兌合德 개벽의 중요촉발자인 震인 것이다.
  
  다음 기회에 아마도 콘셉터를 통해 해명할 때가 있을 것이다.
  
  변증법의 시대는 이미 갔고 이제부터의 세계는 드러난 차원의 생극(生克)과 숨은 차원이 드러난 차원으로 열리는 복승(複勝)의 '아니다-그렇다'(不然其然)의 세계다.
  
  이것이 다름 아닌 등탑역(燈塔易)이다. 이것이 또한 후천(後天)이요, 호혜(互惠)시장이니 이른바 4000년 유리세계(琉璃世界)다.
  
  우리의 슬로건인 '호혜를 전면에, 교환을 일상으로, 재분배를 준비하며'의 구체적 결집(結集)의 첫 걸음이 바로 다름 아닌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이란 사실에 그윽한 감격을 느낀다.
  
  지금의 전 세계 시장위기의 출발이 다름 아닌 금융위기이기 때문이다. 매우 현명하다.
  
  호혜시장은 경제란 이름의 현실적 생활에서의 후천개벽이다. 개벽의 유일 최초 최고의 조건은 '모심(侍)'이다.
  
  호혜시장은 두말할 것 없이 '모심의 경제'다.
  
  독일의 금세기 최고의 지혜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현대 인류의 최고 윤리를 '모심'이라 단정했고, 호주의 탁월한 생태학자 발 폴럼우드는 현대 지구의 대혼돈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모두를 거룩한 우주공동주체로 드높이는 모심 밖에 없다고 거듭거듭 강조한다.
  
  나는 우리가 제기하는 '호혜-생명운동'의 윤리와 문화를 '모심'이라고 했다. 이 '모심'을 실천할 일본 민중 속의 주체가 여성, 미성년, 쓸슬한 대중, 즉 피차별 소수민중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교토의 철인 '쓰루미 �스께(鶴見俊輔)' 선생 자신의 가르침이다.
  
  우리 앞에 걸림돌이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 중 첫째가 일본의 낡아빠진, 그리고 오만한 극우 파시즘이다. 그들은 지금도 술잔을 높이 들며 '다시 한 번 100년!'을 외치고 있다. 그런데 그 100년의 시작은 바로 다름 아닌 1910년의 한일합방이라는 것이다.
  
  좌시할 수 있겠는가?
  
  이 엄청난 지구 전체의 대전환 앞에서 그것이 용서될 수 있겠는가?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IIR)는 '최근의 금융위기는 지정학적인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면서 '서방은 지고 동방이 떠오르고 있다'고 분석한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서방에 공포가 있다면 희망은 동방에 있다'고까지 말한다.
  
  CLSA 아·태지사장 로브 모리슨은 '우리는 글로벌 자본이동을 목격 중'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찌 생각하는가?
  
  아시아시장이 완벽하게 안전할 까닭은 없다. 많은 풍파가 뒤따를 것이고 혼돈도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계지역에 부는 혼합성 이상태풍일 가능성이 더 높다. 바로 그 혼돈성을 통해서 시장이동은 더 큰 창조적 파동으로 확정될 가능성 말이다. 단순한 경제차원이 아닌 것이다. 예컨대 프로테스탄티즘 중심에서 고대 부활과 화엄불교적 세계관 통합에로의 전환 역시 그 한 영역이다. 중심 이동은 어떤 경우에도 현재의 파장이 세계적일수록 더욱더 전세계적 차원의 아시아 중심성을 확장할 것이다. 이른바 '중심성이 있는 네트워킹' 말이다.
  
  이런 때에 아시아를 또 다시 후쿠야마의 도마 위에 올려놓을 것인가?
  
  일본 극우파의 '또 다시 100년'주의자들의 문제는 우선 여기 계신 일본의 존경하는 여러 벗들의 책임이다.
  
  그것은 매우 엄중한 책임일 것이다.
  
  만약의 경우 그것은 지난 100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전 인류문명사에 대한 영원히 기억될 일대 반역으로까지 단죄될 것이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2008년 10월 8일 아침
  한국 일산에서 모심.
   
 
  김지하/시인

출처: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40081024171731&s_menu=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