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환기9218해,신시배달5919해 단기 4354해,서기 2021해, 대한민국 102해(나뉨 73해),

[스크랩]메가처치 논박(5) 내용주의의 함정

댓글 0

종교와 사상/예수교

2009. 2. 4.

메가처치 논박(5) 내용주의의 함정
입력 : 2008년 08월 26일 (화) 00:59:18 [조회수 : 4300] 신광은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2) 내용주의(contentism)의 함정

많은 사람들이 설교의 위기를 말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대안으로 ‘성서적인 설교’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옳다! 분명히 성서적인 설교는 설교의 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대안 중 하나다. 너무 많은 강단에서 비성서적인 설교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너무 많은 목사들이 설교 본문으로 성경 한 구절 읽은 뒤, 목사는 자기 생각과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설교한다. 분명 이것은 문제다.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묻고 싶다. 과연 설교자가 성서적으로 설교하기만 하면 설교의 위기는 저절로 해결되는가? 목사가 강해설교의 원리에 충실하게, 주석학적으로나, 성서신학적으로, 조직신학적으로, 그리고 설교학적으로 모범적인 설교를 했다고 치자. 그러면 설교의 위기는 해소되는가? 성도들이 설교하는 대로 삶을 살게 될 것인가? 과연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성서적인 설교를 하는 목사가 없어서 문제인가? 지금 성서적으로 설교하는 교회의 성도들은 목사가 설교한 대로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는가?

 

설교의 내용만 성서적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설교의 내용주의(contentism)라고 불러보자. 메가처치는 설교에 관한한 바로 이 내용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메가처치 목사들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메시지의 내용이 얼마나 성서적이냐?’라는 것이란다. 만일 내용만 성서적이라면, 설교는 그 자체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왜? 진리가 능력이니까. 말씀이 능력이니까. 일단 내용만 성서적이면, 전하는 방법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고 본다. 수 만 명이 운집한 곳에서 마이크로 설교하든, 위성으로 전 세계 지교회에 영상을 쏴서 방송하든, 케이블 TV에서 방송하든, 인터넷에 띄우든 괜찮다는 것이다. 이런 기묘한 광경은 설교에 대한 내용주의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가. 진리는 스스로 역사한다?  

메가처치 목사들은 메시지의 ‘내용’이 성서적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엄청난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도 성서적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문화에 맞게, 기술에 맞게 맘대로 써도 된다고 생각한다. ‘오직 말씀(only the Bible)’이라는 종교개혁적 기치는 ‘오직 내용(only content)’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신화를 믿고 있다. 만일 설교자가 성서의 내용만을 순수하게 전하기만 하면, 사도행전적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설교가들은 설교하기 전에 엄숙한 목소리로 이렇게 기도한다. “주여, 부족한 이 종의 모습은 가려 주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증거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전도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말한다. “나를 보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세요.” 스피커 볼륨을 최대한 높여서 듣든 말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노방전도자도 내용주의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불전함에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스탬프를 박아 시주(?)한 용맹한 전도인도 다 내용주의에 사로잡혀 그런 것이다. 천지 사방에 전도지를 뿌리는 것도, 거대한 전광판에 ‘God is love’라는 글씨를 띄우는 것도 다 내용주의 때문이다.

 

교회에서 목회자나 다른 교인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사람 볼 것 하나도 없어요. 기도하고 말씀보시면 되요”라고 권면하면 그것은 내용주의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래서 이런 복음성가도 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겠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겠네.”

 

소리든, 영상이든, 책이든, 전파든…, 매체가 뭐가 되었든, 복음의 진리는 어떠한 통로나 채널을 통해서도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매체(media)나 채널(channel)이 아니라 메시지의 내용(content)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메시지가 그 메시지를 전하는 매체나 사람과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서 메시지는 스스로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메시지의 ‘사효성(ex opere operato)’이라고 할 것이다. 이 말은 약사가 문제가 있어도 약사가 전해주는 약은 변함없이 효력이 있다는 것과 비슷한 뜻이다. 약사와 약의 효과는 별개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나 복음 전도자와 분리되어 복음 진리는 그 자체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성례전을 사효화했다면, 개신교는 메시지를 사효화했다. 

바로 이러한 내용주의가 메가처치라는 인격 부재 공간을 허용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내용주의는 메가처치의 목사가 저 멀리서 익명의 청중에게 복음을 전해도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성서는 이런 진리관을 알지 못한다. 자명한 진리관은 그리스적 진리관이지 성서의 진리관이 아니다. 성서의 진리관은 인격적 진리관이다. 야훼, 그분이 진리다. 그리고 예수, 그분이 진리다. 진리가 무엇(what)이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 진리가 누구(who)냐고 물어야 한다. 예수는 “내가 곧 진리”라고 하셨다. 예수, 그분의 몸, 삶, 말이 진리다. 그리고 이 진리는 제자들의 몸, 삶, 말로 증명될 때 가장 올바르게 전달된다.  

 

그러나 메가처치는 이러한 진리관을 알지 못한다. 진리는 마치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보편적이고, 객관적이고, 대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리는 증거하는 자의 인격과 무관하며, 진리는 스스로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메가처치에서 이 원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진리는 스스로 역사한다’고 믿기 때문에 먼 거리에서도 설교할 수 있으며, 인격적 관계도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바로 내용주의적 믿음 때문에 메가처치가 가능한 것이다. 메가처치 성도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내가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잘 몰라도, 또 목사님이 나와 직접 함께 계시지 않아도, 목사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능력이 있겠지. 하나님의 말씀은 목사님의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나에게 직접 은혜를 줄 수 있는 거야.’ 바로 이 믿음 때문에 메가처치 설교자들은 설교를 TV로 중계하고, 녹음해서 방송하고, 케이블 TV나 위성으로 방송하고, 인터넷에 띄우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몸이 없이 진리가 전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누가 감히 이런 ‘짓(?)’을 하겠는가?

 

나. 몸 없는 진리의 비극

앞글에서 보았다시피 내용주의는 정확히 영지주의자들의 진리관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몸’보다는 예수의 ‘메시지’와 ‘내용’을 중요시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전한 메시지, 곧 ‘예수는 사랑이시다’와 같은 메시지를 복음이고 진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의 ‘메시지’는 수용했어도 예수의 ‘몸’은 부인했다. 그러나 신약성서와 교부들의 일관된 가르침은 예수의 ‘몸,’ 그것도 ‘진짜 몸’으로 오신 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몸으로 오셨다’고. 이것이 진리이고 복음이라고. 이것은 사도들과 교부들이 한결같이 고수하고자 노력했던 복음 진리다. 예수의 인격이 진리고, 몸으로 오신 예수가 복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관은 빠르게 오염되었다. 한편으로 객관화, 대상화, 사물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관념화, 추상화되었다. 정통 기독교 역시 이 두 가지 위협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다. 교회는 이단과 싸우면서 점차 정통 교리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신앙 고백이 신조와 신경으로 변화되었다. 신조와 신경의 유익은 대단히 크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기독교 진리의 핵심인 몸과 인격에서 점차 벗어나 객관화되고 추상화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점차 몸 없는 진리가 교회에 가득 차게 되었다. 

신앙 고백이 신조와 신경으로 굳어지면서부터 기독교 진리는 점차 도구화되었다. 정통 신조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주입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정통 신조를 ‘암송만 하면’ 신앙이 저절로 생기게 된다고 믿었다. 정통 신조는 그래서 편리한 개종의 도구가 되었다. 불신자들에게 간소화된 신조와 신경을 외우게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정통 신조는 개종의 도구가 됨과 동시에 이단 박멸의 도구가 되었다. 그래서 정통 신조는 사상 검증을 위한 척도로 사용되었다. 점차 기독교 진리는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종교 재판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이며, 마녀를 화형시키는 잔인한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 진리는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신대륙의 수많은 원주민을 유린하는 폭력과 착취, 지배의 수단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오류 없는 정통 교리’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기독교 진리가 몸과 삶에서 벗어났을 때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다. 주님과 사도들의 모범

기독교의 진리는 몸과 삶에서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은 예수와 사도들의 모범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레슬리 뉴비긴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켰다. 예수께서는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한 권의 책은커녕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으셨다. 왜? 진리는 예수 자신이기 때문에 책에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몸, 삶, 말이 진리인데, 그 중에서 설혹 삶의 이야기는 쓸 수 있을지 모르고, 또 예수의 말도 글로 기록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의 몸은 책에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책을 남기지 않으신 이유가 아닐까.

 

뉴비긴의 말대로, 예수께서는 책을 남기는 대신에 사람을 남겼고,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공동체를 남겼다. 예수는 그 제자 공동체에게 자신의 ‘말’을 맡겼고, 자신의 ‘삶’을 따르게 하였으며,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의 ‘몸’도 주셨다. 제자 공동체는 예수의 몸, 삶, 말을 예수로부터 전해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또 자신의 제자들에게 같은 식으로 예수의 몸, 삶, 말을 전해 주었다. 최소한 초대교회 300년 동안 이 원칙은 지켜졌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 공동체가 진리를 전해 받고 전해 주는 방식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진리는 예수의 몸, 삶, 말의 합이다.

 

제자들도 예수의 이러한 뜻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 같다. 신약성서를 보면, 신약성서의 기자들도 글을 남기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복음서의 기록은 사도들의 기억력의 한계 때문에, 수명의 한계 때문에 불가피하게 기록되었다. 좀 우스운 상상이지만 사도들의 기억력이 녹슬지 않고, 또 그들이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아마도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은 기록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신약성서의 많은 서신서들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기록되었다. 가령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로 갈 수 없어서 쓴 편지고, 데살로니가전서는 사탄이 바울의 데살로니가 재방문을 막는 바람에 쓴 편지고, 옥중서신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써 보낸 것이다. 그래서 편지를 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편지를 쓰게 되는 것에 대해서 양해(excuse)를 구했다. 이처럼 사도들은 경전을 남기려는 거룩한 의도로 성서를 쓴 것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기록이 성서(the Bible)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글을 쓰면서도 사도들은 자신들의 글로 인해 자신과 성도들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때문에 요한은 두 번째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이1:12] 똑같은 말을 요한은 세 번째 편지에서도 반복한다.[요삼1:13-14] 편지로 쓸 말은 엄청 많지만, ‘종이와 먹’ 혹은 ‘먹과 붓’은 관계를 멀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얼굴을 마주 보면서 직접 말하겠다고 요한은 말한다. 메시지와 내용만 강조했던 영지주의와 투쟁했던 요한은 이러한 식으로 성육신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바울도 심오한 교리적 가르침이나 신학적 통찰을 <신학대전>이 아니라 편지 속에서만 전하고자 했다. 로마서가 <신학대전>과 다른 점은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신약성서가 단 두 종류의 장르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두 종류의 장르는 무엇인가? 하나는 삶의 이야기인 전기(biography)요, 다른 하나는 서로 간에 주고받는 편지(letter)다. 두 장르의 공통점은 인격적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글의 내용 못지않게, 독자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었다.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는 것을 꺼려했다는 점에서 바울은 요한과 다르지 않다. 특히 그는 눈이 어두워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도 마지막 인사와 사인은 꼭 손수 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살후3:17] 그는 편지 속에 메시지와 함께 자신의 신체의 일부도 함께 보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사도들은 자신이 받은 진리와 자신의 몸이 분리되는 것을 꺼려했다.

 

오늘날의 교회가 설교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메시지의 내용만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도 성서적이 될 필요가 있다. 진리는 예수의 몸, 삶, 말이다. 교회는 예수의 몸, 삶, 말을 받은 공동체다. 교회는 성찬을 통해 예수의 몸을 먹어야 한다. 교회는 예수의 삶을 모방함으로써 예수를 재육화(re-incarnation)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후에라야 교회는 ‘말’로 진리를 선포할 수 있다. 교회가 말로 진리를 전할 때 기억할 원리가 있다. 교회가 증거하는 가장 온전한 형태의 말의 증언은, 미리 생각해둔 말이나 잘 정리한 설교 원고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로부터 충일한 영의 발산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눅12:11-12] 교회는 이런 식으로 예수의 몸, 삶, 말을 받고, 전함으로 가장 온전하게 진리를 증거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내용주의에 기초한 메가처치의 설교는 대대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