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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메가처치 논박5-4: 테크노영지주의의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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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사상/예수교

2009. 2. 4.

메가처치 논박5-4: 테크노영지주의의 위협
메가처치 계시론 논박(4)
입력 : 2008년 09월 05일 (금) 18:44:07 [조회수 : 4999] 신광은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3) 전자 매체의 활용

가. 전자 교회의 출현

메시지주의는 메가처치 내에 전자매체를 범람하게 만들었다. 만일에 전자매체가 없었다면 메가처치는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맥루한이 그랬던가? 도구는 신체의 연장이라고. 전자매체는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게 했다. 아니 새로운 신체를 가진 새로운 인간이 출현하게 만들었다.

 

마이크는 설교자의 목소리를 증폭해서 더욱 많은 청중들이 듣게 했다. 전자 통신 기술은 설교를 전 세계 어느 곳으로나 마음대로 보낼 수 있게 했다. 자기 테이프는 설교를 언제까지나 똑같이 저장하고, 복사하고, 편집할 수 있게 했다. 비디오 카메라는 설교 뿐만 아니라 설교자의 이미지도 전송하고, 녹화하고, 복사와 편집이 가능하게 했다.

 

인터넷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언제 어느 곳에서나 다양한 방식으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인공위성은 한 사람의 설교가 동시에 전 세계에 울려 퍼질 수 있게 했다. 기술의 개가요, 신인류의 위업이다.

 

이러한 전자 매체 덕분에 설교자는 자신의 신체의 한계를 손쉽게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덕분에 메가처치가 가능하게 되었다. 전자 매체가 없었다면 초거대 규모의 메가처치가 일반화되는 오늘날과 같은 현상은 결코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큰 교회가 서 너 개쯤 생겼을지는 혹 모르겠다. 전자 매체 없이 메가처치는 없다. 전자 매체는 메가처치의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필수적인 요소다. 돔형 체육관 천정에 매달린 거대한 스크린에 투사된 설교자의 모습은 메가처치의 본질을 기막히게 보여주는 탁월한 은유다. 이러한 점에서 메가처치는 전자 교회다.

 

나. 테크노 영지주의의 출현

그런데 문제는 메가처치가 불가피하게 활용하고 있는 이 전자 매체가 탈육체화, 비인격화 현상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메가처치의 전자매체는 모든 것을 전송할 수 있지만 ‘몸’만은 전송할 수 없다. 때문에 전자매체는 본성상 신체와 아울러, 인격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완전히 반대방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셨으나 육신이 되셨다. 그러나 메가처치 목사들은 전자매체를 통해 육신이지만 말씀이 되려 한다.

 

예수는 한 인간 안에 갇히셨으며, 지역적, 문화적, 시대적 한계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러나 메가처치의 설교자는 전자매체를 통해 무한히 복제되며, 시간과 공간의 모든 한계를 초월하며, 몸의 한계를 마음대로 벗어나고자 한다. 전자 매체 안에서 설교자는 편재하며, 영원하며, 육신을 벗는다. 이러한 점에서 전자매체는 반성육신(anti-incarnation)이다.

 

마이크를 쓰지 않거나, 부속실로 설교를 중계하지 않는 메가처치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는 즉시 교인수는 엄청나게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는 더 이상 메가처치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전자매체를 활용하는 순간 기독교 계시가 탈육신화, 비인격화 되는 방향으로 타락할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다. 큰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성육신의 원칙을 따라 복음 진리를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

 

바로 이 선택의 기로에서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은 큰 교회를 택했다. 그리하여 메가처치가 탄생한 것이다. 전자매체가 도입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목회자와 신자들은 불가피한 신체적 한계와 사회적 조건에 묶여 교회 내에서 비인격화와 탈육신화 현상이 어느 정도 제어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자매체와 함께 모든 구속과 빗장이 풀려버리게 된 것이다.

 

자, 한 번 생각해 보자. 청중들이 너무 많아서 마이크를 썼다. 문제가 있는가? 없다! 청중을 한 곳에 다 모을 수가 없어서 부속실에 모아 예배 실황을 TV로 중계했다. 문제가 있는가? 글쎄, 아마도 없을 것 같다. 설교자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 2부 설교만 하고, 3부와 4부는 2부 설교를 녹화해서 틀었다고 하자. 문제가 있는가? 글쎄, 헷갈린다. 능력 있는 설교자의 설교를 인공위성으로 쏘아서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영상 예배를 드렸다. 문제가 있는가? 모르겠다.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집에서 인터넷으로 녹화된 예배 실황을 보면서 예배를 드렸다. 문제가 있는가? 또 가상현실(VR)로 합성된 교회에 들어가 오감영상으로 조지 휫필드나 스펄전, 마틴 루터 킹의 설교를 듣는 것은 어떨까? 설교 전담반이 본문, 대지, 예화 등도 뽑아 주고, 원고도 작성해 주고, 표정, 제스처, 목소리 훈련까지 시켜서 설교자가 ‘말하는 마네킹(talking mannequin)’이 되었어도 설교만 은혜롭다면 괜찮은 것인가? 정녕 설교만 은혜롭다면 토킹 마네킹 설교자는 괜찮은 것인가? 만일 문제가 있다고 치자. 메가처치에서 교인들은 토킹 마네킹을 골라 낼 수 있는가? 또 골라 낸다고 한들 그 다음은 뭘 할 수 있는가?

 

전자매체는 설교자와 청중 간의 거리를 더욱 벌려 놓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거리와 간격을 합리화하기까지 한다. 전자매체에 의한 정당화와 합리화는 단순하다. “어쩔 수 없잖아.” 전자매체의 활용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쓰게 된다는 것이다. 불가피하다는 생각, 바로 이것이 전자매체 활용의 문제점을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어쩌면 예수의 성육신은 바로 그 필연성에 대한 신적 반전이리라.

 

하지만 메가처치 목사들은 전자매체의 활용에 관한 진지한 신학적 성찰도 없이 전자매체는 마치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이나 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런 기계나 장비들은 21세기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새로운 수단이라는 것이다. 최소한 그런 것은 가치 중립적인 것인양 단순하게 취급해 버린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니 마이크, 녹음기, 카메라, 위성, 인터넷을 쓰는 것은 전혀 무해해 보인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전자매체는 마치 트로이의 목마처럼 슬그머니 교회 안에 들어와 어느 순간 교회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오늘날 교회는 가장 멀리, 가장 빠르게, 가장 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테크노 처치가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교회 안에는 몸과 인격은 증발되고 없다.

 

오늘날 테크노 처치의 목사들을 보라. 그들은 놀랍게도 육신성을 완전히 벗어버렸다. 온 세상의 존경을 받으며 방방곡곡을 날아다니며 말씀을 전한다. 그들의 설교는 세계 여러 나라로 동시에 생중계되며, 인터넷과 케이블 TV를 통해 언제라도 재생된다. 익명적 공간 가운에 확대 투사된 설교자의 이미지는 점차 가현이 되고 있다. 그들의 몸과 삶은 이미지로 증발해버렸으며 오로지 메시지만 남았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가현설자들이 바라보았던 예수의 모습이 아닌가? 거대한 스크린에 웅장하게 확대 투사된 목사의 가현이 예배당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그 가현들은 몸을 벗어버렸으며, 삶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인격이 제거된 이미지요, 기호들이다. 오늘도 그 가현들은 전자매체를 통해 주옥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웅변했던 그리스도보다는 마르시온이나 발렌티누스, 도케티스트를 더 많이 닮았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메가처치 안에서 기독교 진리는 점차 테크노 영지주의(techno-Gnosticism)의 위협을 받고 있다.

출처; 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