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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메가처치 논박6-4: 천국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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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사상/예수교

2009. 2. 4.

메가처치 논박6-4: 천국의 정치학
메가처치 구원론 논박(4)
입력 : 2008년 12월 27일 (토) 11:05:12 [조회수 : 2399] 신광은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현대 교회의 많은 문제는 그릇된 구원론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그릇된 구원론은 그릇된 천국관에서 비롯한다. 간단히 말해서 구원이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천국을 오해하면 구원도 오해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떻게 오해되었는가? 보통 생각하는 천국은 죽으면 들어갈 수 있는 내세의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은 내세의 유토피아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 그러자니 유토피아행 티켓을 따는 것이 중요해 진다. 마치 은하철도 999 같은 '구원 열차'를 타야 한다.
 
어떻게 유토피아행 티켓을 딸 수 있는가? 오랫동안 개신교회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것은 무엇인가? 회심이다. 회심은 또 어떻게 하는가? 많은 개신교회는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면 회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럼 예수 영접은 무엇인가? 그건 영접기도를 따라하고 교회 나가기로 하면 된다. 그러니까 영접기도를 따라하고 교회에 나가는 것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 영접은 회심이고, 회심은 믿음이고, 믿음은 구원이다. 요약하면 천국행 티켓은 '지금' 영접 기도를 따라하고 교회에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천국관과 구원관이 초래한 결과는 기독교 신앙이 이 땅의 질서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않게 된 것이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천국을 하늘로 던져버렸으니 말이다. 기독교는 점차 죽어서 있을 '좋은 날'만 기다리며 지옥 같은 이 땅의 '험한 날'을 견디는 진통제가 되어 간다. "이 세상, 이 세상, 나의 집은 아니요, 우리 구주 머지않아 다시 오실 때,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요 이 땅에 있을 맘 없도다." 교회 안에서 울려 퍼지는 이 노래는 기독교가 '민중의 아편'으로 퇴락했음에 알리는 독백이다.
 
하지만 구주 예수께서는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았다. 예수는 날마다 "나라(천국)가 (지상에) 임하옵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천국은 내세의 유토피아이기 앞서 지상에 임하는 나라다. 그리고 만일 천국이 지상에 임한다면 천국은 불가피하게 지상의 질서에 충격을 가한다. 지상에 임하는 천국은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발산한다. 이것이 예수가 가르치셨던 천국이다.
 
1. 왕의 귀환
 
예수의 최초의 가르침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 말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라, 혹은 예수를 믿으라는 말로만 이해되고 만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도덕적 과오를 참회하라는 윤리적 권고나 기독교에 귀의하라는 개종 요청이 아니다. 예수의 이 선포는 곤도르 왕국으로 돌아온 아라곤왕이 '백성들이여,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외쳤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한 마디로 예수의 출현은 왕의 귀환이었던 것이다.
 
1) 요아스왕의 귀환
 
요아스의 아버지는 아하시야왕이다. 그런데 아하시야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죽고 만다. 그가 북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때마침 일어난 예후의 쿠데타로 말미암아 피살당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왕의 모후 아달랴는 이 기회를 틈타 본인이 여왕이 되기를 꿈꾼다. '대비의 난'이라고 해야 할까. 권력욕에 눈이 멀어 대왕대비께서 그만 노망이 나고 마신 것이다. 이 노망난 할머니가 먼저 한 일은 왕손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모든 왕자들이 할머니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역대하 22장)
 
그런데 선왕의 누님, 여호사브앗이 왕자 중 한 명, 요아스를 간신히 구해낸다. 그녀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부인인데 어린 조카 요아스 왕자를 피신시켜서 유모를 딸려서 성전으로 도피시킨다. 요아스는 성전에서 6년 동안이나 은둔생활을 한다. 그리고 드디어 7년째 되는 해에 제사장 여호야다 부부는 왕실의 적통(嫡統), 요아스의 왕위 즉위식을 거행한다.
 
이를 위해서 여호야다는 남북왕국의 족장들과 레위인들을 소집하고, 호위대를 꾸리고, 백성들을 동원한다. 성전에서 성대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의 귀환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진다. 6년간 아달랴를 따르던 온 백성들이 귀환한 왕을 향해 만세를 부르며 새 왕의 즉위를 축하했다. 이것을 본 여왕 아달랴는 옷을 찢으며 "반역이로다"를 외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아댤라를 따르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왕국의 마문 어귀에 처형된다.
 
2) 그리스도의 귀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심히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를 창조하시고 이 세계를 다스릴 왕의 자리에 인간을 앉히신다. 인간은 그 근본이 흙인 존재로서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셨는지 몰라도 야훼께서는 인간에게 온갖 존귀와 영화로 왕관을 씌우신다. 하해와 같은 은총으로 왕관을 씌워주신 것이다. 그리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시고 그로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다.(시편 8편) 따라서 에덴은 하나님의 왕국인 동시에 아담의 왕국이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아담은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야훼를 배신한다. 야훼의 보좌를 탐낸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바라던 대로 그는 보좌를 얻었다. 그러나 그 보좌는 하나님 나라의 보좌가 아니라 기껏 한 개인 왕국의 보좌였다. 대신에 그는 웅대한 하나님 왕국의 보좌를 잃어버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거래였다.
 
이로 인해 하나님 왕국의 보좌는 공석으로 남았다. 그리고 마귀는 이를 불법적으로 찬탈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허용하신다. 그 때부터 시작해서 예수의 때까지 사탄은 하나님 왕국의 보좌에 앉아 왕 노릇을 한다. 세상은 이제 그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월터 윙크가 보여주는 대로 사탄의 피라미드 체제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그런데 왕이 귀환하셨다. 왕실의 적통(嫡統)이신 예수가 태어나셨다. 요시아의 출현이 아달랴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처럼 예수의 출현은 사탄을 충격으로 몰아넣는다. 황급히 그는 예수를 찾아와 담판을 지으려 한다. 그의 목적은 왕의 귀환을 막는 것이었다. 마태와 누가는 이 장면을 자신들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 사탄이 예수를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예수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탄의 유혹은 그 옛날 아담을 유혹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옛 뱀 사탄은 역삼각형의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피라미드 모양의 질서로 바꾸고 아담으로 하여금 맨 꼭대기 자리를 차지하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아담은 뱀의 꾐에 넘어갔다. 마찬가지로 예수 앞에서 사탄은 예수에게 세상의 위대한 영광과 권세들을 보여준 뒤 그를 세상의 꼭대기, 곧 왕의 자리에 앉게 해 주겠노라고 빅딜(big deal)을 한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4:6) 단, 한 가지 조건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절하라는 것이다.
 
사탄에게 절하라? 사탄이 그리스도께 무슨 큰 절이라도 하라고 했단 말인가? 물론 아니다. 사탄이 예수께 제안한 것은 지극히 간단하다. 그냥 자신의 통치 질서에 반항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는 질서, 강자가 약자를 먹어치우는 시스템, 재능 있고 출중한 자는 높이 올라가지만 게으르고 무능력한 자는 추락하는 지극히 당연하고 효율적인 피라미드 시스템을 그냥 그대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사탄이 예수께 한 요구는 '아무 말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묵종, 이것이 사탄의 요구였다.
 
너무도 쉬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 침묵하고 따르는 것은 곧 세상의 질서를 따름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한 배반이다. 예수는 세상의 질서를 정죄하기 위해서 오셨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요7:7) 그래서 예수는 사탄의 제안을 거부한다. 아담은 넘어갔지만 예수는 넘어가지 않으셨다. 승리했다.
 
사탄을 이기신 예수의 출현은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왕국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예수의 모습을 보고 거라사의 군대 귀신은 이렇게 소리친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 또 어떤 귀신은 이렇게 소리질렀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5:7)
 
3) 그리스도의 왕국
 
에덴은 하나님의 왕국이면서 동시에 아담의 왕국이었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나라다.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께만 속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나라(바실레이아)를 맡겨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천국은 이제 그리스도의 나라요,(계11:15) 아들의 나라가 된다.(골1:13)
 
마태가 주목한 대로 예수는 왕이시다. 천국은 어떤 나라인가? 한 마디로 예수가 왕이신 나라다. 예수가 왕으로 오셨다는 건 심대한 뜻이 있는데 이는 오직 예수만이 참되신 왕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세상 나라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의 것이었으며,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에게 절한 모든 자들, 곧 느부갓네살이나 고레스, 알렉산더, 씨저, 칭기스칸, 술레이만 등에게 왕좌를 물려주거나 빼앗았다. 그런데 참 왕이 오셨다. 그러자 가짜 왕, 공중 권세 잡은 자는 이제 하늘에서 번개같이 땅으로 곤두박질한다.(눅10:18) 이와 함께 그가 세운 모든 왕들도 거짓 왕들로 판명난다.
 
순식간에 세상 나라가 굴욕을 당했다. 세상 나라는 이를 참을 수 없었다.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늘 세상 나라의 백성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눅11:51) 그리하여 예수께서도 세상 나라의 집권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다. 세상 나라는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였지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세상 나라의 권세를 KO시키셨다. 이건 무슨 뜻인가?
 
십자가에서 세상 나라 질서의 극단과 하나님 나라 질서의 극단이 서로 충돌한다. 피라미드 구조의 사탄 체제는 십자가에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는 극단적 폭력과 반역을 자행한다. 그러나 예수는 희생과 대속의 죽음으로 역삼각형 구조의 하나님 나라의 체제를 극명하게 드러내신다. 마치 흑과 백이 비교되듯이 두 나라의 질서는 십자가에서 명명백백히 비교된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의와 사탄 나라의 불의가 폭로된 것이다. 이로써 십자가는 위대한 승리의 훈장이 된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셔서 뭇 사람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골2:15, 새번역) 솔로몬의 등장으로 아도니야의 거짓 왕권이 폭로되듯이, 또 요아스의 등장으로 아달랴의 정체가 폭로되듯이 예수는 십자가에서 미완의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완성하시고 사탄 왕국의 질서를 여지없이 폭로시킴과 동시에 참 왕으로 등극하신다.
 
천국은 어떤 나라인가?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천국은 예수가 임금인 나라다. 예수가 주(主)시고, 예수가 왕(王)이시다. 그의 다스림은 온 나라에 미치며 그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까지 이른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오직 예수만이 왕이시다. 다른 왕은 다 가짜다. 바로 이 사실로부터 천국과 지상의 나라들의 충돌이 일어난다.
 
2. 천국의 정치학
 
1) 두 가지 오해
 
가. 첫 번째 오해

 
예수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오해가 늘 존재한다. 한 편에서는 예수를 세속 정치인 중 한 사람으로 본다. 이들은 예수가 세속의 군주나 정치인일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예수의 통치가 세상의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작동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 속에 기독교식의 정치적 영역이 존재할 것처럼 믿는다.
 
예를 들면, 예수 시대의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유대 왕국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위대한 전사나 군주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심지어 제자들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가룟 유다는 군사 봉기를 통해서라도 메시야의 왕국이 수립되기를 열망했던 열혈 당원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예수를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보았다.
 
콘스탄티누스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상 나라의 통치 영역 속에 그리스도의 통치도 존재할 수 있을 것처럼 믿어왔다. 이 믿음은 교회와 세상 나라를 씨줄과 날줄처럼 깊이 엮고 말았다. 이 엮임은 아직까지 다 풀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에 의한 정치가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이루리라는 신화는 여전히 건재한다. 이들은 기독교가 가장 훌륭한 정치적 성과를 만들어 내리라고 기대한다. 이는 예수를 정치인으로, 그리고 예수의 통치를 세속의 정치로 오해하는 것이다.
 
예수가 빌라도에게 잡혀왔을 때 빌라도는 이렇게 묻는다. "네가 쿠데타를 꾀한다고 하던데, 도대체 네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네가 꾸민 일이 무엇이냐?"(요18:35, 필자 의역) 빌라도의 이 질문은 예수의 정치성에 대한 첫 번째 오해에 기초한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에게 정치적 노선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를 세속적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착각했다.
 
예수는 세상의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겨루어 이길만한 위대한 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 대해서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종들이 내가 재판에 넘겨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겠는가?"(요18:36, 필자 의역) 예수에 따르면 천국은 세상 나라와 섞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는 세상의 통치와 혼합되지 않는다.
 
나. 두 번째 오해
 
예수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예수를 탈정치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빌라도의 두 번째 질문과 관계가 있다. 예수께서 자신의 나라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답하자 빌라도는 이렇게 묻는다. "그렇다면 너는 왕이 아니구나."(요18:37, 필자 의역) 메시야의 왕국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왕국을 '지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로 이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메시야의 왕국은 공중에 붕 뜬 하늘나라로 생각하곤 한다.
 
천국을 세상 나라와 경합하는 정치적 국가로 보는 것이 천국을 세상 나라와 뒤섞어 놓는다면 천국을 탈정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천국을 추상화하고 관념화시킨다. 천국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라라기보다는 역사의 종말 이후에나 구경할 수 있는 종말론적 왕국으로 연기된다. 아니면 마음 속에서만 잠깐 맛보는 심령천국으로 내면화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짓이다. 관념화되고 추상화된 천국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 몰핀밖에 안 된다.
 
"그렇다면 너는 왕이 아니구나"라는 빌라도의 물음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하신다. "내가 왕이니라."(요18:37) 예수는 분명하게 자신이 왕이라고 선언하신다. 뿐만 아니라 "나는 왕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다"고 답하신다.(요18:37, 필자 의역) 천국은 관념의 왕국이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하신다.
 
2) 예수의 정치학
 
존 요더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를 예리하게 간파해냈다. 사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다. 만일 예수가 실제 몸을 가진 진짜 인간으로 오셨다면 어떻게 그가 정치 경제적 실존과 무관한 인물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가 만왕의 왕으로 오셨다면 그의 존재의 정치적 함의를 어떻게 간과할 수 있겠는가?
 
요더의 지적대로 예수는 출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가 태어났을 때 헤롯대왕은 예수를 자신의 정치적 숙적으로 여기고 유아학살을 자행했다. 예수는 동방 왕국의 사절단으로부터 축하 받았다. 예수는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선포했으며, 예루살렘 입성은 일종의 왕위 즉위식이었다. 예수의 지휘로 잠시 동안 예루살렘 성전이 해방구가 되었으며, 끝내 예수는 쿠데타의 주모자로 기소되고 처형되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씌어졌다.
 
요약하면 예수는 철저하게 정치적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는 보통의 정치인이 아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권력을 장악하려 하거나, 대중을 동원하거나, 정부를 전복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반대로 행하셨다. 권리를 포기하고, 대중을 떠나시고, 권세자들에 붙잡혀 처형되셨다. 그러나 이것은 탈정치적 행보가 아니라 정확히 하나님 나라의 정치 행위다. 예수의 행적을 탈정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를 초래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예수 사건은 정치적 사건이었으며, 예수는 정치인이셨다. 다만 하나님 나라 방식의 정치를 하신 것이다. 참으로 예수는 새 국가의 건설을 기획한 정치인이셨다. 이것이 예수 정치학의 의미이다.
 
3) 천국의 정치학
 
동일한 논리가 천국에도 적용된다. 천국을 세상 나라와 어깨를 견주는 그런 하나의 국가(a country)로 보는 것은 오해다. 천국은 세상 나라와 겨루거나 섞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천국을 탈정치적인 순수한 관념물로 보는 것은 더욱 큰 오해다. 물론 천국은 현세에만 존재하는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천국은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나라다. 그리고 만일 천국이 지금 여기서 시작된다면 천국은 이 땅에서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천국이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천국이라는 말 자체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천국이 무엇인가? 나라가 아닌가? 천국이 나라인데 천국이 어찌 정치적이 아닐 수 있겠는가? 천국은 분명 정치적인 그 무엇이다. 이 점에서 천국이 세상 나라와 충돌하는 점이 있으니 이는 천국이 세상 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국민들에게 국가에 충성할 것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천국도 자기 나라 백성들에게 충성을 요구한다.
 
국민이라면 마땅히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천국 백성들도 자기 나라에 충성할 의무가 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국가에 충성하라는 정치적 요구나 다를 바 없다. 백성들은 또 자기 나라의 임금에게 충성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천국 백성도 자기 왕에게 충성해야 한다. 이 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를 주군으로 모신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왕을 바꾸는 행위다. 즉 충성 대상을 예수로 교체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를 주군으로 삼기 위해서 기존의 주군에게는 등을 돌려야 한다. 자고로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곧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다. 천국 백성도 마찬가지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두 나라에 충성할 수 없다. 따라서 천국 백성은 충성 대상을 택일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신앙이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다. 임금을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배타적 결정을 요구한다.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그물을 손질 하는 것, 세관에서 세금 거두는 일, 죽은 가족을 장사지내는 일, 쟁기를 들고 밭일 하는 것 등을 동시에 할 수 없다. 여호수아는 이 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오늘날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
 
하여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이란 지극히 정치적인 개념이다. 이 때문에 천국은 정치적 스캔들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 예수에게 충성하는 자들은 더 이상 세상 나라와 세상 임금들에게 충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세상 나라는 자신의 조국이 아니다. 천국이 자신의 조국(祖國)이다. 세상 군주도 더 이상 자기 임금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주군(主君)이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라. 이것이 천국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 나라를 적대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도리어 천국 백성들은 세상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며 할 수 있는 한 모든 면에서 협조한다. 국가에게 세금을 납부하고, 국가의 치안과 방범 및 질서 유지 활동에 적극 협조한다. 그리스도인은 국가에 '협조'하되 '충성'은 그리스도께만 돌린다.
 
하지만 국가는 이러한 천국 백성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국가는 충성을 먹고 사는 일곱 머리 괴물이기 때문이다.(계 13장) 국가는 근대의 정치철학자들이 말하는 그런 시민들의 자발적 협의체에 그치기를 원치 않는다. 국가는 항상 최고의 권력 기구로서 국민들의 절대 충성과 절대 복종을 요구한다. 국가는 늘 가치 판단의 기준이요, 선악의 심판자이기를 원한다. 즉 국가는 항상 국민들에 대해서 신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천국 백성이 세상 나라에 협조하되 충성하지 않는 태도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불가불 천국과 세상 나라는 충돌한다. 정치적 분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천국은 예수가 왕인 나라다. 천국 백성은 왕의 말에 복종한다. 주의 명령에 복종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가리켜 제자도라고 한다. 로드쉽(Lordship)은 제자도(Discipleship)를 요구한다. 이와 함께 천국의 스캔들은 점차 정치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 전반으로 확대된다.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은 기존의 삶에서 충성하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등을 돌리게 하기 때문이다.
 
쉐인 클레어본의 말대로 모든 사람은 충성 대상을 정하고 그에 따라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혹자는 돈에 충성하고, 또 혹자는 성공에, 혹자는 사회적 지위에, 그리고 어떤 이들은 건강·가족·안전·쾌락 등에 각각 충성한다. 그리고 이 충성심이 그들의 삶을 결정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은 이들 모두에 대한 충성을 그치게 만든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가치는 평가 절하되며 더 이상 그것들을 뒤쫓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은 거대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때문에 사도행전에서는 복음을 '천하를 어지럽히는 염병'이라고 불렀다.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복음이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바울의 복음 전도로 수많은 마술사들이 주께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쓰던 마술책들을 몽땅 불태워버렸다. 이때 이 책들의 가격은 은 오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단위를 데나리온이라고 보면 노동자 5만 명의 하루 일당이다. 분명 이것은 에베소의 산업구조와 경제 시스템 전반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액수였다.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바울의 전도 활동으로 인해 에베소의 아데미 여신상 제작 산업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섬길 참되신 그리스도를 소개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이상 아데미 여신상을 구입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여신상 제작 산업이 뿌리 채 흔들린다. 이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에서 추방당한다. 이처럼 천국 복음은 사회적 파장을 낳는다.
 
3. 초대교회 이야기
 
1) 관용의 제국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이유를 살펴보자. 핍박의 이유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로마 제국이야 말로 역사상 가장 관용적인 국가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관용의 정신, 곧 똘레랑스(tolerance)는 로마 제국이 그토록 광대한 영토와 그토록 수많은 인종 및 민족들을 오랜 기간 동안 잘 다스릴 수 있는 이유였다. 특별히 로마 제국은 종교에 대해서는 가급적 관용적이었다.
 
이러한 로마인들의 관용 정신을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판테온(Pantheon)이다. 판테온이란 번역하면 만신전(萬神殿) 쯤 되는데 세상의 모든 신들을 다 모셔놓은 신전이라는 뜻이다. 만신전 안에는 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종교의 신들이 사이좋게 들어차 있다. 이러한 만신전은 로마제국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다 껴안으려고 했던 노력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제국민들의 문화와 종교를 기꺼이 인정하는 대신에 제국을 향한 충성과 황제 숭배는 일괄적으로 요구했다. 알아야 할 것은 황제 숭배가 종교적 성격 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관용과 자유만으로는 광대한 제국을 통일하고 질서를 유지할 수는 없는 법. 제국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통치 이념과 지배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는데 이것을 로마인들은 시민종교로서의 황제 숭배에게서 찾았다.
 
2) 정치범 집단

 
로마 제국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다른 종교와 별다르지 않은 태도를 취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제국민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한다면 제국도 기독교를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또 원한다면 판테온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도 허락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초대교인들은 두 가지 모두를 거부했다. 황제 숭배와 제국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했으며, 아울러 판테온에 그리스도가 모셔지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역겨워했다.
 
초대교인들이 적지 않은 경우 정치범으로 여겨진 것은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그들은 로마제국을 향해서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으며 황제 숭배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즉 초대교인들은 로마를 자신의 조국(祖國)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외국에 와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물론 이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로마 제국에 협조했다. 하지만 충성은 오로지 그리스도께만 돌렸다. 이런 태도가 로마 제국에 주는 거북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수차례의 유대인 폭동에는 거의 가담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보다 제국의 법을 잘 준수했다. 세금 때문에 저항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제국과 황제에게 아무런 신성도 부여하지 않았다. 초대교인들이 봤을 때 황제는 '신'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제국의 관리권을 잠시 위임받은 아저씨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초대교인들은 침례·세례를 받기 전에 모든 종류의 충성 맹세와 황제 숭배를 해야 하는 직업을 포기해버렸다. 공무원직을 그만두었으며, 군대를 전역해 버렸고, 교사직도 포기해 버렸다. 또 국민의례를 요구하는 경기장이나 극장 및 기타 모든 시민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한 기독교인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점차 이러한 움직임은 제국의 기반을 뒤흔드는 위협처럼 보였다. 바로 이것이 관용적이고 인내심 많은 로마 제국이 그토록이나 혹독하게 기독교를 핍박하게 된 이유였다.
 
3) 파로이코이(paroikoi)
 
<클레멘트 1서>는 현존하는 교부 문서 중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 중 하나다. 로마교회의 감독 클레멘트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인데 그는 대단히 흥미로운 인사말을 쓰고 있다. 자신이 속해 있는 로마 교회를 가리켜 '로마에 있는 식민지(colony)'로, 또 고린도 교회를 '고린도에 있는 식민지(colony)'로 불렀다. 식민지라면 어디 식민지인가? 천국의 식민지다. 그렇다. 오랫동안 초대교인들은 교회를 지상에 존재하는 천국의 식민지로 여겼다.
 
이러한 관점은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앞서 이야기한 대로 초대교인들은 로마제국을 자신들의 조국(fatherland)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의 조국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지상에 있는 어떠한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하늘나라에 속한 자들이다. 그런데 이런 천국의 국민들이 지금 잠깐 외국에, 즉 이 세상에 여행 나와 있다. 하워와스의 표현대로 잠깐 거쳐가는 거류민(resident alien)이었으며, 초대교인들의 표현대로 파로이코이(pariokoi)였다.
 
둘째, 초대교인들은 교회를 모종의 정치적 집단으로 이해하였다. 초대교인들은 교회를 단순한 종교적 모임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를 모종의 국가 비슷한 것으로 이해했다. 물론 이 국가는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이다. 누구보다도 초대교인들은 부활 이후의 영원한 나라를 사모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듯 천국은 죽은 다음 가는 곳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들이 벌써 천국의 식민지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국 대사관의 담을 넘은 탈북자를 생각해 보자. 탈북자는 힘겹게 북한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하지만 그는 배나 비행기를 탈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북경에 있는 한국 대사관으로 뛰어들었다. 담을 넘은 탈북자는 꿈에도 그리는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된다. 아직 중국 땅이지만 그는 이미 한국에 들어왔다. 왜냐? 북경의 주중 한국 대사관은 비록 중국에 있지만 한국법이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한국 땅이다.

이와 비슷하게 초대교인들은 자신들을 일주일에 한 번 모였다 흩어지는 종교 단체 쯤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천국이라는 나라에 이미 들어온 새 나라의 새 시민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국적을 로마에서 천국으로 옮긴 자들이었으며, 또 왕을 로마 황제에서 그리스도로 갈아치운 자들이었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은 절대로 황제를 퀴리오스, 그러니까 '주(主)'라고 부르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퀴리오스라고 불렀다. 그 옛날 정몽주가 하여가(何如歌)를 부르며 자신을 회유하는 이방원을 단호히 물리치며 단심가(丹心歌)로 화답했던 것처럼 초대교인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주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한다는 뜻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의미였으며, 로마식의 모든 방식을 따르지 않겠노라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때문에 초대교회는 제자도의 모범을 보여준다. 참으로 초대교회는 제자도 공동체였다. 모든 것이 특이했다. 하다못해 옷 입는 방식부터 달랐다. 화장·장식·염색 등도 삼갔다. 식성·취향·취미도 달랐고, 말하는 방식이나 행동거지, 호칭 등이 다 외국 문화처럼 낯설었다. 초대교인들은 자신들의 칙칙한 삶의 방식을 놀랍게도 '로마에 대한 대안'이라고 여겼다. 로마인들로서는 참으로 황당한 노릇이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렇다. 초대교회는 정치 집단이었다. 물론 정당을 조직하거나 군대를 갖춘 그런 정치 집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국가(國家)'에 소속된 자들로 여겼으며, 자신들은 로마의 황제가 아닌 다른 주군을 섬기는 '신민(臣民)'이라고 확신했다. 여기서 초대교회가 그토록 강력한 사회적 파장과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비밀을 알게 된다. 천국은 하늘에 붕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 굳게 뿌리내린 생생한 실체였던 것이다. 이것이 잃어버린 천국의 비밀이다.
 
4. 결론
 
자,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초의 선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는 오랫동안 부당하게 찬탈당한 하나님의 왕국의 왕위를 다시 되찾으실 왕세자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이제 무너져 버렸던 옛 왕국을 다시 세우기 원하신다.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본래의 주군을 저버리고 정통성이 없는 마귀와 사탄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비록 이들의 출신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사탄에게 충성을 바쳐 왔기에 그들도 다 반역자고 배신자다. 능지처참에 처해야 마땅한 대역 죄인들이다. 그런데 새 임금은 너그러우시다. 그리고 그가 세울 나라는 평화의 왕국이다. 새 임금은 놀라운 관용령을 선포하신다. "만일 누구라도 돌이키면 지금까지 악한 왕을 섬긴 내 백성들의 모든 불충과 반역을 용서하겠다. 자, 이제 내게로 오너라. 나와 함께 새 나라를 세우자."
 
예수는 이 땅에 나라를 세우기 원하신다. 이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따라서 이 나라는 죽음을 넘어서 영원에까지 미친다. 하지만 이 나라도 분명 나라다. 그리하여 지금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만일 누구라도 이 나라에 들어오기 원한다면 그는 결단해야 한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정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선택한 이들은 세상 나라를 향한 충성을 철회해야 하며 새 임금과 새 나라에게 충절을 바쳐야 한다.
 
새 나라는 세상 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피라미드 체제라는 점에서 다 똑같다. 그러나 새 나라는 강자가 약자를 섬기는 역피라미드의 나라다. 이 나라는 잃어버린 사랑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며, 망각해 버린 섬김의 질서로 평화를 일구는 나라다. 구원은 결국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는 것이다. 회개란 고작 눈물 몇 방울에 "믿습니다"라고 한 마디 립서비스 하는 것이 아니라 피라미드 체제를 끊고 돌이키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행위다. 이는 마치 국적을 옮기는 귀화와 다를 바 없다.
 
새 나라에 들어온 그이는 이제 새 나라의 국민의 일원으로서 살아야 한다. 이러한 새 나라 국민의 삶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그는 더 이상 세상 나라에 충성하지 않으며 새 나라에 충성하기 때문이다. 새 나라의 국민은 세상 나라에 대해서는 협조하되 충성하지는 않는다. 새 나라의 주권은 국왕이나 국민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린 양에게서 나온다. 그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한다. 이러한 그의 삶은 전적으로 이질적이며, 그리하여 새 나라 국민의 삶은 세상 나라의 모든 질서와 문화를 근본적으로 뒤엎는다. 바로 이것이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에게 미친 영향력이다. 그리고 오늘도 예수는 이러한 삶으로 우리를 초청한다. 따라서 예수의 회개 초청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정치적 초청이었다.

출처; 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6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