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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메가처치 논박6-3: 잃어버린 천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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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사상/예수교

2009. 3. 2.

메가처치 논박6-3: 잃어버린 천국(2)
메가처치 구원론 논박(3)
입력 : 2008년 12월 11일 (목) 08:22:40 [조회수 : 3299] 신광은

3.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나라 

1)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질서를 이 땅 가운데 수립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은 무참히 실패로 돌아갔다. 세상 나라의 질서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옛날 가인이 동생의 제사만 열랍되는 것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처럼, 또 이삭이 장남이 아니라 차남에게 축복해야 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에서가 동생에게 축복권을 빼앗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처럼, 또 요셉의 형들이 동생에게 절해야 하는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요셉마저 장남보다 차남 에브라임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처럼, 세상 나라의 질서는 완고하게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반항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계속되는 세상 나라의 저항에 부딪히며 좌절되고 무너졌다. 특히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택함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피라미드의 나라에서 빼내서 역피라미드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끝내 이스라엘은 또 하나의 피라미드의 왕국이 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실패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계속 전진해갔다. 느리지만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하나님의 나라! 시인과 예언자들은 이것을 보았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고 말 것을 그들은 노래하고 예언했다. 점차 예언자들의 모든 예언은 한 인물의 등장으로 초점이 맞추어지기 시작했으며 드디어 그가 등장했다. 그가 바로 예수다!

그가 했던 최초의 설교는 무엇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는 천국을 몰고 왔다. 아니 예수 그가 천국이다. 예수는 새 세상의 건설자다. 이 새 세상은 섬김의 사슬이 지배하는 역삼각형의 세상이다. 이제 자신과 함께 이 새 세상이 세워지게 되었다고 그는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이 선언에 합당한 모범을 보이셨다. 빌립보서의 ‘그리스도 찬가(Christ-Hymn)’가 노래하듯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이시나 자기를 낮추시어 사람과 같이 되셨다. 왕궁이 아니라 짐승 우리 속에 태어나셨다. 이 예수와 함께 세상 질서는 뒤집힌다.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의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예수를 따라 다닌 이유는 ‘한 자리’ 얻어 보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7]라고 부탁했다. 이 은밀한 거래가 나머지 제자들을 발끈하게 한 것은 당연하다.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더 크냐는 논쟁은 끊이지가 않았으며, 심지어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까지 계속되었다. 참으로 제자들은 먹이사슬이 지배하는 세상 나라의 백성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보여주셨다. 친히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시작하신 것이다. 예수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몸소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유명한 말씀을 남기신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막10:42] 예수는 정확히 뱀의 정신, 곧 먹이사슬이 지배하는 정삼각형의 세상 나라의 질서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삼각형의 정점에 있는 자들은 ‘집권자’ 혹은 ‘대인’들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그들은 권세를 부린다. 이것은 세상의 질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가 잔혹한 독재자나 불경건하고 악한 통치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는 세상 나라의 질서 일반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들 대인들이 “은인으로 칭함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는 지금 히틀러 같은 악한 통치자가 아니라 뭇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고 찬양을 받는 위대한 지도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비인간적이고 부도덕한 통치 시스템이 아니라 매우 강력하고 효율적인 지배 체계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은 세상의 질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22:26] 여기서 예수는 지금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힘주어 역설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세상이다. 그리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러한 나라의 시민으로 초청하고 계신다. 이 말씀 바로 뒤에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기겠노라고.[눅22:28-29]

 

이것이 천국의 질서다.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8-12] 

 

이 모든 가르침은 예수가 제자들과 새 언약을 맺으셨던 최후의 만찬석에서 가장 극적으로 선포되었다. 그 자리에서 예수는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 뿐 아니라 섬김의 최고의 모범으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셨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모습의 극치는 바로 십자가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예수는 십자가에서 먹이사슬을 끊고 섬김의 사슬을 새로 이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십자가에서 온전히 드러났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음 같이 서 말 밀가루 속의 누룩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급속히 진전되기 시작했다. 

 

2) 바울과 하나님의 나라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장 날카롭게 이해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죄인 중의 괴수였다. 그런 그를 주님께서 택하시어 은총을 베푸셨다. 그리고 그를 사도의 직분으로까지 높이시어 그로 이방인을 섬기게 하셨다. 참으로 바울 안에서 섬김의 사슬이 지배하는 역삼각형의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다.  

 

G. 로핑크의 말대로 그는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자신이 스승이 아니라 아비처럼 그들을 섬겼노라 고백하고 있으며, 또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는 젖먹이는 유모처럼 그들을 섬겼노라 말한다. 그는 자신의 동역자들을 하대하지 않았으며, 항상 형제라고, 혹은 동역자라고 존대하였다. 그는 또 오네시모의 처분 문제로 빌레몬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얼마든지 상관으로서, 혹은 사도로서 권세를 행사할 수 있었으나, 대신 그는 ‘동무’로서 빌레몬에게 간청한다.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초대교회에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최소한 네 개의 분파로 나뉘어 누가 더 큰 지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여전히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은 사랑으로 연합할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이 과정에서 고린도전서 12장의 ‘몸의 유비’가 나온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전12:21]고 말한다. 바울의 요점은 분명하다. 어느 누구도 머리일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 머리다. 그리고 나머지 모두는 다 같은 지체일 뿐이다.  

 

3) 초대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예수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세상을 섬기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베드로의 가르침에서도 반복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다.[벧전2:9] 주께서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 내심은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인데, 이는 곧 세상에 빛을 비추고 소금의 맛을 내는 섬김의 사역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아브라함의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반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섬김의 사슬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최소한 3세기 동안 초대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디오게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당시 초대교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영혼이 육체와 그 지체들을 사랑하면서도 그것들에게 미움을 당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한다.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으면서도 육체를 온전히 붙들어주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마치 감옥에 갇혀 있듯 세상에 억류되어 있으면서도 가슴으로 세상을 품는다.” 이 익명의 성도가 묘사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역삼각형의 질서 안에서의 자신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행했다.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그들은 세상을 섬기는 위치 말이다.  

 

초대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방식은 그들을 전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 목적이 세상을 섬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G. 로핑크가 잘 요약해서 보여주듯이 그들은 자신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데도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고,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았다. 자신들을 박해하는 원수들에게까지 자선을 베풀었으며, 고아와 과부들을 조건 없이 돌보았으며, 교회에 의한 불신자들의 장례 주선은 제국 내에서 잘 알려진 일이었다. 참으로 초대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체현했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었다. 

 

4. 천국 망각의 역사 

1) 초대교회의 천국 망각 

하이데거의 말이던가. 철학의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하지만 기독교의 역사는 천국 망각의 역사다. 예수를 통해 선포되고 도래하기 시작한 천국을 기독교회가 얼마나 빨리 망각해 버렸는지 모른다. 깔끔하게 떨어진 피라밋 시스템에 대한 유혹은 지독히도 고질적이다. 로마의 행정 및 군대 조직 속에 구현된 피라밋 시스템은 단순히 사회 질서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우주의 본래적 질서 같은 것이었다. 플라톤의 경우 선의 이데아로부터, 또 아리스토텔레스이 경우 ‘제 1원인’인 신으로부터, 또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경우 ‘일자(the one)’으로부터 계층을 이루는 거대한 ‘존재의 대연쇄’의 이미지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쉬이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장 최초로 쓰여진 교부문서로 잘 알려진 클레멘트 제 1서신을 보면 이미 그는 교회의 질서를 잘 조직된 군대 제도에 비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의 감독으로서 어쩌면 그는 역사상 가장 조직적인 로마 군대와 행정 조직의 일사분란함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교회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모임이기보다는 잘 정돈된 질서 잡힌 조직이기를 바란다. 이미 그의 마음 속에는 세상 나라의 질서인 피라밋 시스템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2세기가 되면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가 출현하게 된다. 이 사람만큼이나 피라밋 시스템에 매료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세상의 왕권을 감독에게 부여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 이전만 해도 감독과 장로는 구분되지 않았으며, 복수의 리더쉽에 의해서 교회가 움직여졌다. 그러나 이제 이그나티우스 이후로 감독은 지역교회의 왕이 된다.  

알렉산더의 클레멘트나 오리겐과 같은 이들은 플라톤의 존재의 대연쇄의 질서를 교회에 적용한다. 그들은 마치 이데아와 같은 천상적 교회를 상정하는 데 물론 이들의 이러한 상상력은 그리스 철학자들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오리겐과 동시대의 인물인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을 그리스도와 같은 자기 비움이나 서로 간의 형제 사랑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계승되는 감독 제도에서 찾으려 했다. 이제 ‘감독이 없으면 교회도 없다’는 테제가 성립된다. 키프리안은 온 세계의 보편 가톨릭 교회가 단일한 리더의 통치 아래 통일된 교회의 이상을 꿈꾼다.  

 

2) 기독교 공인과 천국 망각 

AD 313년, 바로 이 해에 제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중지되었다. 몰수되었던 재산은 조건 없이 되돌려졌고, 모든 박해는 거짓말처럼 그쳐졌으며, 제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 신앙이 인정되었다. 이제 기독교는 로마 제국이 공인하는 로마의 공식 종교 중 하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황제와 제국은 여러 가지 방편을 사용하여 기독교에 대한 역차별적 우호정책을 취했다. 역사상 이만큼 극적인 장면이 또 있을까? 그러나 또한 역사상 이만큼 아이러니컬한 사건이 또 있을까? 

 

기독교는 사상 최강대국인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승리했다. 분명 이 승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요, 세상 나라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다. 이 승리의 밑바닥에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비류들에 불과했다. 여성, 노예, 빈민, 무학자들이 대부분의 신자들이었다. 언제나처럼 하나님의 은총은 로마의 권세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 낮은 자들을 향했다. 역삼각형의 하나님 나라 질서가 로마제국 안에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로마제국의 산뜻한 피라밋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하지만 이제 기독교는 제국의 최상층부로 올라갔다. 이것은 승리가 아니라 가장 비참한 패배였다. 

 

바로 이 순간 기독교 신앙은 피라밋 체제 속으로 신속하게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교회는 너무도 빠르게 역삼각형의 질서를 버리고 피라밋 시스템의 최상층부로 올라가기를 기뻐했다. 기독교는 여러 이유로 인해 고도로 합리적인 로마의 행정 조직 속으로 빠르게 흡수되어 들어갔다. 사제들은 공무원들이 되었으며, 교회 활동은 제국의 행정 기능의 일부가 되어 갔다.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두 질서, 곧 먹이사슬이 지배하는 피라밋 시스템인 국가와 섬김의 사슬이 지배하는 역피라밋의 하나님 나라 질서가 만나서 하나가 되었다. 이 희한한 변종이 이른바 국가-교회다. 기독교 신앙은 이제 국가의 지배 권력을 등에 업게 된 것이다. 

 

3) 수위권 논쟁과 천국 망각 

섬김의 사슬은 산산히 조각나고 먹이 사슬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등장한 것이 소위 수위권(首位權) 논쟁이다. 수위권 논쟁이란 전 세계 교회 감독 중 어느 교회의 감독이 가장 높으냐를 다투는 논쟁이다. 이 논쟁에서 두 감독이 결승전을 치루었는데 이들은 각각 로마교회의 감독과 콘스탄티노플교회의 감독이었다. 이 싸움에서 승리의 여신은 로마 교회 감독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리하여 교황제가 탄생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로마교회 수위권 논쟁은 ‘열 두 제자 중 누가 가장 높으냐?’는 예수의 제자들의 논쟁의 재판(再版)이었다. 얼마나 우스운가? 그 옛날 예수의 열 두 제자들이 서로 자신이 높다고 다투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책망하셨는데 이제 500년 뒤의 후손들이 다시 12 선조들 중 어느 선조가 가장 높으냐고 다투다니 말이다. 

 

레오 1세와 그레고리 1세의 활약 덕분에 수위권 논쟁에서 승리자는 베드로로 낙점되었으며,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교회와 그 교회의 감독이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그레고리 1세가 보편교회의 최고 수장의 자리의 이름을 ‘종들 중의 종’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사실이다.  

 

4) 정상정복과 천국 망각 

그레고리 1세에 의한 교황좌 선언(Ex Cathdra)이 있은 후부터, 이제 논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교황과 국왕 중에 누가 더 높은가?’ 피라밋 시스템에서 최정상에 오를 수 있는 이는 오직 하 사람 뿐이다. 하늘에 태양이 둘 일 수 없듯이 말이다. 처음에는 교황의 힘은 감히 국왕과 비교될 수 없었다. 하지만 레오 3세의 탁월한 수완으로 그는 국왕의 권력을 등에 업고 교황의 권위를 확보한다. 그 이후 점차 교황권은 국왕과 대등한 자리에까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세기 동안 두 개의 권위는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각축을 벌였다. 

 

드디어 1077년, 참으로 역사적인 해다.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카놋사에서 굴복시키고야 말았다. 교회의 지도자가 피라밋의 최정상의 자리에 오른 위대한 순간이다. 이노센트 3세에 이르러 그는 교황이 황제의 임명권을 가진다고 주장하며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도대체 교황이 무슨 힘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군주를 이처럼 굴복시킬 수 있었는가? 교황에게는 칼이나 돈이 없다. 대신에 그에게는 특정인을 저주하거나, 심지어 한 국가 전체를 파문할 수도 있는 파문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직임명권 및 황제 임명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또 필요하면 종교재판을 소집할 권세도 가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성서와 전통이 보증한다고 선전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러한 교황의 권세는 금방 추락하게 되었다. 보니파시우스 8세가 우남 상탐(Unam Sanctam)을 선언하며 황제와 교황은 이 땅을 다스리는 두 검이라고 목청껏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무시되고 말았다. 아비뇽의 유수, 십자군 전쟁의 실패, 새로운 세계관의 도래 등으로 교황의 권세는 하염없이 추락했다. 그리고 드디어 종교개혁! 이와 함께 가톨릭 교회와 교황의 권위는 돌이킬 수 없이 추락하고야 만다. 

 

5) 종교개혁 이후의 역사와 천국 망각 

그러나 참으로 기이하게도 이러한 교황권 및 교회의 권위의 추락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조차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세상 나라의 질서 사이의 이질성에 별로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루터와 독일 귀족들 간의 유착관계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듯이 종교 개혁자들 역시 세상 국가의 피라밋 시스템에서 빠져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필요하다면 피라밋 시스템은 적극 활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이 신앙적인 문제로 출발했을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촉발된 종교 전쟁은 신앙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를 뒤섞은 추악한 이전투구가 되고 만다. 개신교 진영과 가톨릭 진영은 이기기 위해서 싸웠으며, 서로 피라밋의 최상층부에 오르고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결과는 무승부!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또 한 번 도외시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이 피라밋 시스템의 최상부에 가장 정당하고 합당하게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은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별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을 촉발시킨 프랑스의 앙시앙레즘(Ancien regime) 속에서 가톨릭교회 성직자는 사회구조의 최상층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개혁주의 신학에 따르는 많은 개신교인들은 물질적인 부와 세상적인 성공은 하나님의 은총의 징표요, 심지어 구원 받은 표지라고까지 믿었다. 이러한 기독교 승리주의와 세속적 성공주의의 기묘한 만남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천국 망각을 부채질하고 있다. 

 

교회와 국가 간의 밀월 관계도 지적할 바다. 칼빈의 제네바 성시화 운동, 올리버 크롬웰의 신권 정치, 아브라함 카이퍼의 기독교 정치 등을 거쳐 공화당을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나 한국의 MB 정권의 지지자들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국가 간의 밀월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 나라의 피라밋 시스템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들을 전부 싸잡아 무익하거나 해롭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히 의미있는 결과들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도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세상 나라 질서 사이의 현저한 이질성은 너무도 자주 무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러한 통치 모델은 신약성서가 아니라 구약성서를 모델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필요에 따라서 종교재판, 폭력, 살인, 전쟁 등도 마다하지 않았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5. 메가처치와 하나님의 나라 

이제 드디어 메가처치를 논할 차례가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가처치는 세상 나라의 피라밋 시스템이 종교적 형태를 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메가처치는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기형적인 교회이다. 교회 외부적으로 메가처치는 경쟁의 원리 위에 세워진 교회이며, 또 교회 내부적으로 메가처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피라밋 시스템이다.  

 

1) 외적 측면 

먼저 교회 외부적인 요인을 살펴보자. 앞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현대의 메가처치는 시장 상황(market situation)에서 태동했다. 교회가 분열되고, 교구제가 무너지고, 선교의 시대가 열림으로써, 종교 및 교단, 개 교회의 무한정한 선택이 가능해진 현대의 시장 상황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메가처치는 결코 생겨날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메가처치는 시장의 산물이다. 이런 점에서 메가처치는 본성상 놀라울 정도로 자본주의를 닮았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윤 추구에 대한 동기, 다시 말해서 인간의 탐욕을 극단적으로 정당화한 초유의 경제 시스템이다. 유사 이래 현대 자본주의 체제만큼 인간의 이기욕이 칭송을 받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이 이기욕이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를 가동시키는 엔진이다. 이 체제만큼이나 약육강식의 원칙이 적용되는 체제가 또 있을까. 오직 강자만이 살아 남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이윤을 많이 창출하는 개인과 기업은 피라밋의 최정상에 오른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세상은 환호와 갈채, 존경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메가처치는 정확히 이 시스템을 따른다.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 신앙이 시장(market)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시장 속에서 모든 것은 팔고 사는 상품으로 치환된다. 심지어 신앙마저도. 판매자는 목사와 교회고 구매자는 신자와 불신자다. 이 시장 상황 속에서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는다. 신앙 시장에서 강자는 ‘가장 영적인 사람이나 교회’로 불리운다. 역시 그 교회와 목사를 향해서 환호, 갈채, 존경이 끊이질 않는다.  

 

자유 경쟁 원리가 도입된 신앙 시장에서 경쟁의 승리자는 바로 메가처치다. 너무도 간단하고 단순한 이 사실을 다들 쉬쉬하고 있으니 참 이해가 안 된다. 참으로 참람한 것은 이러한 목사와 교회 간의 경쟁을 ‘지상 명령의 수행’이니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니 하는 말로 포장하는 것이다. 경쟁이라는 상황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사람도 “그건 선의의 경쟁이야” 라거나 ‘동기야 어쨌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라고 간단히 변명한다는 것이다. 우습다. 이런 말을 하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엘룰식으로 ‘차라리 악마에게 금색 물감을 칠하라’라는 말 뿐. 

 

하나님 나라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나라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가 아니라 작은 자가 은총을 입는다. 그래서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가난한 자는 부요해지지만, 부자는 수치를 당한다. “약한 자를 부르시어 하늘 뜻을 전하셨네”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높은 자, 강한 자, 부자가 아니라, 낮은 자, 약한 자, 가난한 자를 부르신다.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의 ‘힘(power)’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메가처치는 힘 있는 자, 능력 있는 자, 힘 있는 자들이 성공하는 세상 나라 질서의 교회다. 

 

시장 상황은 제로섬(zere-sum) 게임과 같다. 이기는 자가 있으면 지는 자가 있다는 말이다. 마치 도박판에서 따는 자가 있으면 잃는 자도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앙 시장도 마찬가지다. 메가처치는 경쟁에서의 승리자요, 따라서 반드시 패배자는 있을 수밖에 없다. 메가처치 하나는 수 십, 수 백 개의 군소교회의 패배 위에서만 설 수 없다. 몇몇 분들의 존경할 만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근본 판을 뒤엎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경쟁에서의 승리자에게는 부, 명예, 존경이 주어지지만, 패배자에게는 가난, 수치, 그리고 처진 어깨만이 주어진다. 더욱 나쁜 것은 승리자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니 ‘능력의 종’이니 하는 수식어가 붙지만 패배자에게는 무능하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낙인까지 찍힌다. 세상 나라에서는 패배자를 위한 구제책이라도 있지만 기독교 신앙 시장에서는 그런 사회보장책도 없다. 그러면서 한 다는 말이, ‘지들도 기도해서 부흥시키라고 그래.’  

 

그리하여 패배자들도 삼각산 꼭대기에서 목이 터져라 능력 달라고 부르짖거나, 아니면 오늘도 교회 성장 세미나를 한다는 곳을 전전하는 것이다. 결국 패배자들도 시장 상황 속에 적응할 밖에.. 점차 모든 목사와 교회가 피라밋 시스템 속에 편입된다. 어디 그 뿐인가? 성공한 자들을 바라보는 부러운 시선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신학교로 부른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 시장의 경쟁 상황을 더욱 치열하게 만든다. 지독한 수급 불균형은 메가처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악순환이다. 한 편에서는 여남은 명 데리고 끼니를 걱정하며 목회하는 극빈층 목회자들이 있는 데, 다른 한 편에서는 온 세상 곳곳마다 체인점까지 세워가며 예배를 본다. 하나님께서 어느 편의 예배를 받으실 것인가? 진정 메가처치의 예배와 찬송이 하늘에 상달되리라고 믿는가? 

 

2) 내적 측면 

메가처치 내부를 들여다보자. 어린 아이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메가처치는 그 자체로 거대하고 산뜻한 하나의 피라밋 시스템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단 두 세 사람이 모여도 그 중에 한 명은 따를 리더가 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리더를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런데 수 천, 수 만 명이 모이는 메가처치에서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돈과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 어찌 필연적이지 않겠는가? 메가처치의 모든 문제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한 사람에게 돈과 권력이 집중되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교회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줄이어스 씨저가 로마의 문제를 규모의 문제로 보고 이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황제정을 제시했던 것처럼 교회가 대형화될 때 권력의 소수 집중은 더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거대한 규모의 집단을 움직이려면 그만큼 신속한 상황 판단, 의사 결정, 결정 사항의 전달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서 거대 규모의 교회가 피라밋 시스템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소그룹이 발달된 메가처치라고 해서 피라밋 시스템을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중앙 집중과 지방 분권은 언제나 함께 간다. 따라서 교회 전체 구성원들의 자발성을 높이고, 각 구성원들에 대한 깊이 있는 문제의 파악과 대처를 위해서 소그룹은 필수적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굳이 교회라고 특별한 것이 아니고 국가나 일반 기관이라고 다를 바가 없는 조직의 생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피라밋 시스템은 대충 이런 형태를 취한다. 피라밋의 최고 정점에 담임목사가 존재하고, 주변에는 잘 선발된 유능한 부목사급 목회자가 스탭으로 포진하고 있다. 그 밑으로는 협동목사나 전도사, 기관 사역자 등이 있고, 그 밑으로는 교구장, 구역장, 기타 직분자들이 줄지어 서 있다. 여기에 유급직원들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맨 말단에는 평신도가 위치해 있다. 필자는 이러한 피라밋 시스템이 특별히 도덕적으로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필연의 질서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아니라 세상 질서의 일부일 뿐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메가처치에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권력 장악의 문제다. 설교를 하든, 목양을 하든, 뭘 하든, 메가처치 안에서는 맨 먼저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이것은 그냥 당연한 조직의 원리이다. 그래서 메가처치 안에서는 자주 삼국지를 능가하는 계파간의 모사와 술수, 정치가 난무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종종 부교역자들끼리 모여서 식사 자리에서 나누는 메가처치 내의 정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거의 무협지를 보는 느낌이다. 원로 목사와 신임 목사 간의 다툼, 목사와 장로들 간의 다툼,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들 간의 긴장, 혹은 담임목사의 총애를 받으려는 부교역자들 간의 경쟁 등은 메가처치 내에서는 불가피하다.  

 

메가처치는 이러한 경쟁을 더욱 부추기며 이것을 교회 성장의 방편으로 활용한다. 그래서 메가처치 안에서는 서로 다 같이 경쟁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유능하고, 힘있고, 똑똑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누군가가 교회를 장악한다. 통상 교회 내에서 실력은 ‘숫자’로 평가된다. 가장 많이 전도해 오고, 가장 많이 교회에 붙어 있게 하고, 가장 많이 모임에 참석시키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훈장이 붙는다. 물론 이들에게 포상과 성과급, 빠른 승진은 당연하다. 세상적인, 너무도 세상적인 기업처럼 말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메가처치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아니라 세상 나라의 질서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재삼재사 강조하는 것은 이 모든 현상들은 개인의 도덕성의 문제도 아니요, 어쩌다가 생겨나는 부수적인 문제도 아니다. 개인차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메가처치의 구조 안에서 내재하는 본질적인 문제다.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메가처치가 그 자체로 완벽한 피라밋 시스템이기 때문에 최정상에 누가 올라가도 결과는 똑같다는 것이다. 종종 최정상의 자리에 올라야 할 사람들이 담임목사냐, 장로단이냐, 혹은 평신도냐를 가지고 ‘교회 개혁’ 운운하는 데, 이는 넌센스일 뿐이다. 참된 교회 개혁은 피라밋 시스템을 역삼각형의 질서로 바꾸는 것 뿐이다. 

 

6. 유난히 긴 글에 대한 후기 

글이 길어졌다. 독자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글이 길어지다보니 맨 처음 이 글을 시작한 출발점을 놓치지 않았나 염려스럽다. 본 글은 ‘천국’이 어떤 곳이냐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이 글은 성서가 말하는 천국이 무릉도원이나 이어도, 엘도라도 같은 유토피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못 박고 전개되었다. 천국은 재미있고 신나는 드림랜드 같은 놀이동산이 아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냐? 천국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나라다.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 이루어지는 사람들, 영역이 천국이다. 그리고 이 천국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드러났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벽하게 나타났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방식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 방식은 섬김의 사슬이 지배하는 역삼각형의 질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섬기고 인간이 세상을 섬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교회에게 자신을 주고, 교회는 세상에게 자신을 준다. 큰 자가 아니라 도리어 낮은 자를 돌아보는 것, 너도 나도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낮은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섬기는 것,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요, 이 질서가 존재하는 곳이 천국이다. 그래서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기 전에 지금 내가 들어가기로 결단해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는 오늘도 우리에게 촉구하신다. “지금 즉시 돌이키거라, 천국이 임박했으니!”

 

출처; 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