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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황제국 ‘고구리’ - 백제·신라도 슬그머니 ‘황제국’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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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나라시대/-[성헌식의 ‘대고구리’]

2016. 4. 25.

스카이데일리

성헌식의 ‘대고구리’…황제국 ‘고구리’  백제·신라도 슬그머니 ‘황제국’ 선언했다

고구리 신하 자처한 속국 확실… 내부에선 ‘황제’·‘왕’으로 불러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6-04-20 19:14:01

 

 ▲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스카이데일리

 

성왕 7년(529) 10월, 백제가 오곡(五谷)에서 고구리의 20만 기병에게 크게 패한 뒤, 두 나라 사이에는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성왕이 다시 고구리에게 납작 업드렸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531년 안장(安藏)제가 재위 13년 만에 슬하에 아들 없이 붕어하자, 이복동생 보연이 즉위하니, 그가 곧 안원(安原)제다.

 

경태후 소생으로 명치제(明治, 문자명왕)의 둘째 아들인 보연은, 자는 흥수였으며 신장은 7척 5촌으로 도량이 크고 용모가 아름다웠다.

 

말 탄 채 활쏘기도 잘하는 등 무술에 통달했으며, 또한 예의범절을 갖춰 능히 윗사람의 뜻을 받들어 모실 줄도 알았다고 한다.

 

명치제는 평소 두 아들에게 “너희는 형제 간에 전위(傳位)해라. 한 마음이면 몸이 나뉘었어도 두 사람이 아니다”라고 일렀다. 실제로 두 태자는 항상 함께 기거하면서 같은 걸 먹고 마셨으며, 의복까지 유사해 마치 쌍둥이로 태어난 듯 했다고 전해진다.

 

안장제가 괴로워할 때면 아우가 항상 곁에서 지켰는데 그 극진함이 이를 데 없었다. 안장제는 죽음이 임박하자 초운황후에게 무릎 꿇고 새 황제에게 새보(璽寶, 옥새와 옥보)를 바치라 명하니 아우가 천자의 자리에 올라 연호를 대장(大藏)으로 바꿨다.

 

안장제는 519년(기해) 4월에 장수(長壽)황제를 고조효무황제(高祖孝武皇帝)로, 명치(明治)황제를 태종효문황제(太宗孝文皇帝)로, 명치제의 부친인 조다(助多)태자를 인종효숙황제(仁宗孝肅皇帝)로, 경(鯨)태자를 선종효양황제(仙宗孝讓皇帝)로 추존하고 모두에게 큰 제사를 올렸다.

 

우리 역사 최초로 ~조(組) 또는 ~종(宗)을 붙이는 묘호(廟號)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안장제는 안종화황제(安宗和皇帝)로, 안원제는 세종경황제(世宗景皇帝)로 추존된다.

 

고구리의 임금에게 최초로 제(帝)라는 칭호를 사용한 때는 장수대제 16년(429) 기사년으로 정월에 졸본으로 가서 동명(東明)성황을 추모(芻牟)대제로, 유리(琉璃)명황을 광명(光明)대제로, 주유(朱留)신황을 대무(大武)신제로, 국조(國祖)선황을 신명(神明)선제로, 태조(太祖)상황을 태조황제로 올렸다고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돼 있다.

 

고구리는 천하를 다스리던 대제국이었기에 당시 고구리 임금들이 자체 연호를 쓴 황제였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다. 광개토태왕 비문 ‘호위영락태왕(號爲永樂太王)’이라는 문구에도 잘 나타나 있으며, ‘수서’와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도 고구리가 건원칭제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요나라(거란)의 제천행사를 기록한 ‘요천제–고리황제품위(遼天祭 高麗皇帝品位)’와 청나라(여진족)의 제천행사를 기록한 ‘만주대제–고리대제의례(滿洲大祭 高麗大祭儀禮)’에도 고구리가 건원칭제했던 황제국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고구리 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 역시 황제라는 명칭을 쓰고 자체연호를 사용했던 황제국이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건원칭제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4090 참조)

 

 ▲ 원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마친 후 대안문으로 들어가려는 고종황제 [사진=필자제공]


백제 성왕, 신라 법흥왕 때 내부에선 황제로 자칭

 

‘고구리사초략’ 안원제 6년(536) 병진에 “원종(신라 법흥왕)이 제를 참칭하고 년호를 건원(建元)이라 고쳤다. 이에 상이 화가 나서 원종을 정벌하고자 하면서 ‘태종(명치제=문자명왕) 이래로 글을 중시했던 폐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소. 정벌하지 않으면 징계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말했더니, 의신이 나서며 ‘지금 그를 정벌한다면 필시 대비하고 있을 것이라 그의 술수에 빠질 수 있으니, 잠시 그의 뜻이 교만하게 놓아둬서 하늘이 벌하기를 기다림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라는 기록에서 신라가 스스로 건원칭제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어 “이때 백제 명농 역시 함부로 황제를 자칭하기는 했으나, 사신을 보내와 신하를 칭하며 바치기가 지난날과 같아서 정벌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 성왕 역시 대내적으로는 황제라고 자칭하면서도 대외적으로 고구리에게는 신하를 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백제가 황제를 칭했다는 사실은 공주 무령왕릉 지석에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해 계묘년(523년) 5월 7일(임진)에 붕어하시니”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공자가 ‘예기’에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천자가 죽으면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錄), 서인은 사(死)”라는 글자를 쓴다고 하지 않았는가.

 

 ▲ 황제와 황후의 곤룡포와 면류관 [이미지=필자제공]


지증왕 이전 500년간 국호도 없이 지내다 '신라'로 정해 

 

신라는 창업 이래 500년이 넘도록 국호도 없는 상태에서 여러 호칭으로 불렸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독립된 나라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지증마립간 4년(503) 겨울 10월,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창업한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라(斯羅) 혹은 사로(斯盧) 또는 신라(新羅)라고도 불려왔습니다.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을 덮는다’는 뜻이므로 신라를 국호를 삼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또 예전부터 나라를 가진 이는 모두 제(帝)나 왕(王)을 칭했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지 22대에 이르기까지 단지 방언으로 칭했고 존엄한 호칭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여러 신하가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리옵니다’라고 아뢰니 임금이 이 말에 따랐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지증왕 이전에는 신라 임금에게 왕(王)이라는 칭호도 쓰지 않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불렸다.

 

국호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국왕이라는 칭호도 사용치 않았다는 두 가지 사실로 미뤄봐 당시 신라는 고구리의 속국이었음이 확실하다. 광개토호태왕 비문에도 흔히 신묘년 기사로 잘못 알려져 있는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고 왜는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 조공을 바쳤다(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라는 문구에 그렇게 언급돼있지 않은가.

 

4년(503)에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한 지증왕은 순장을 금지하는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해 선포했고, 2년 후에는 친히 국내의 주(州)·군(郡)·현(縣)을 정했다. 11년(510) 우산국(于山國)을 공격해 항복을 받고 해마다 토산물을 받기로 했다.

 

지증왕은 15년(514)에 아시촌에 소경(小京)을 신설하고 남방의 인구를 옮겨 도시의 모양을 갖추는 등 나라의 기초를 닦은 임금이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5533 참조)

 

잠시 황제국이었던 신라는 지증왕이 죽자 맏아들 원종(原宗)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법흥왕이다. ‘삼국사기’에는 “4년(517)에 비로소 군사를 다루는 병부(兵部)를 신설했다”고 기술한 것으로 미루어 봐아 당시에 이르러서야 독자적으로 군대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7년(520)에는 율령을 선포하고 문무백관의 관복에 색깔을 이용해 서열을 정하는 등 국가의 체계를 확립한다. 11년(524) 국경 남쪽을 순시하고 국토를 개척했고 가야국의 왕과 회견을 했으며, 19년(532) 금관국(金官國)의 주인 김구해가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는 등 국세를 넓혔다.

 

법흥왕은 23년(536)에 마침내 연호를 건원(建元) 원년으로 칭하게 된다. 즉 고구리에게 간섭받지 않겠다며 독자적인 나라임을 선포했다. 그러기에 고구리 안원제는 신라를 정벌하려 했다.

 

<저작권자 ⓒ스카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스카이데일리
성왕 7년(529) 10월, 백제가 오곡(五谷)에서 고구리의 20만 기병에게 크게 패한 뒤, 두 나라 사이에는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성왕이 다시 고구리에게 납작 업드렸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531년 안장(安藏)제가 재위 13년 만에 슬하에 아들 없이 붕어하자, 이복동생 보연이 즉위하니, 그가 곧 안원(安原)제다.
 
경태후 소생으로 명치제(明治, 문자명왕)의 둘째 아들인 보연은, 자는 흥수였으며 신장은 7척 5촌으로 도량이 크고 용모가 아름다웠다.
 
말 탄 채 활쏘기도 잘하는 등 무술에 통달했으며, 또한 예의범절을 갖춰 능히 윗사람의 뜻을 받들어 모실 줄도 알았다고 한다.
 
명치제는 평소 두 아들에게 “너희는 형제 간에 전위(傳位)해라. 한 마음이면 몸이 나뉘었어도 두 사람이 아니다”라고 일렀다. 실제로 두 태자는 항상 함께 기거하면서 같은 걸 먹고 마셨으며, 의복까지 유사해 마치 쌍둥이로 태어난 듯 했다고 전해진다.
 
안장제가 괴로워할 때면 아우가 항상 곁에서 지켰는데 그 극진함이 이를 데 없었다. 안장제는 죽음이 임박하자 초운황후에게 무릎 꿇고 새 황제에게 새보(璽寶, 옥새와 옥보)를 바치라 명하니 아우가 천자의 자리에 올라 연호를 대장(大藏)으로 바꿨다.
 
안장제는 519년(기해) 4월에 장수(長壽)황제를 고조효무황제(高祖孝武皇帝)로, 명치(明治)황제를 태종효문황제(太宗孝文皇帝)로, 명치제의 부친인 조다(助多)태자를 인종효숙황제(仁宗孝肅皇帝)로, 경(鯨)태자를 선종효양황제(仙宗孝讓皇帝)로 추존하고 모두에게 큰 제사를 올렸다.
 
우리 역사 최초로 ~조(組) 또는 ~종(宗)을 붙이는 묘호(廟號)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안장제는 안종화황제(安宗和皇帝)로, 안원제는 세종경황제(世宗景皇帝)로 추존된다.
 
고구리의 임금에게 최초로 제(帝)라는 칭호를 사용한 때는 장수대제 16년(429) 기사년으로 정월에 졸본으로 가서 동명(東明)성황을 추모(芻牟)대제로, 유리(琉璃)명황을 광명(光明)대제로, 주유(朱留)신황을 대무(大武)신제로, 국조(國祖)선황을 신명(神明)선제로, 태조(太祖)상황을 태조황제로 올렸다고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돼 있다.
 
고구리는 천하를 다스리던 대제국이었기에 당시 고구리 임금들이 자체 연호를 쓴 황제였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다. 광개토태왕 비문 ‘호위영락태왕(號爲永樂太王)’이라는 문구에도 잘 나타나 있으며, ‘수서’와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도 고구리가 건원칭제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요나라(거란)의 제천행사를 기록한 ‘요천제–고리황제품위(遼天祭 高麗皇帝品位)’와 청나라(여진족)의 제천행사를 기록한 ‘만주대제–고리대제의례(滿洲大祭 高麗大祭儀禮)’에도 고구리가 건원칭제했던 황제국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고구리 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 역시 황제라는 명칭을 쓰고 자체연호를 사용했던 황제국이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건원칭제에 대해서는
 
 ▲ 원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마친 후 대안문으로 들어가려는 고종황제 [사진=필자제공]

백제 성왕, 신라 법흥왕 때 내부에선 황제로 자칭
 
‘고구리사초략’ 안원제 6년(536) 병진에 “원종(신라 법흥왕)이 제를 참칭하고 년호를 건원(建元)이라 고쳤다. 이에 상이 화가 나서 원종을 정벌하고자 하면서 ‘태종(명치제=문자명왕) 이래로 글을 중시했던 폐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소. 정벌하지 않으면 징계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말했더니, 의신이 나서며 ‘지금 그를 정벌한다면 필시 대비하고 있을 것이라 그의 술수에 빠질 수 있으니, 잠시 그의 뜻이 교만하게 놓아둬서 하늘이 벌하기를 기다림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라는 기록에서 신라가 스스로 건원칭제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어 “이때 백제 명농 역시 함부로 황제를 자칭하기는 했으나, 사신을 보내와 신하를 칭하며 바치기가 지난날과 같아서 정벌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 성왕 역시 대내적으로는 황제라고 자칭하면서도 대외적으로 고구리에게는 신하를 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백제가 황제를 칭했다는 사실은 공주 무령왕릉 지석에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해 계묘년(523년) 5월 7일(임진)에 붕어하시니”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공자가 ‘예기’에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천자가 죽으면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錄), 서인은 사(死)”라는 글자를 쓴다고 하지 않았는가.
 
 ▲ 황제와 황후의 곤룡포와 면류관 [이미지=필자제공]

지증왕 이전 500년간 국호도 없이 지내다 '신라'로 정해 
 
신라는 창업 이래 500년이 넘도록 국호도 없는 상태에서 여러 호칭으로 불렸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독립된 나라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지증마립간 4년(503) 겨울 10월,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창업한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라(斯羅) 혹은 사로(斯盧) 또는 신라(新羅)라고도 불려왔습니다.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을 덮는다’는 뜻이므로 신라를 국호를 삼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또 예전부터 나라를 가진 이는 모두 제(帝)나 왕(王)을 칭했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지 22대에 이르기까지 단지 방언으로 칭했고 존엄한 호칭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여러 신하가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리옵니다’라고 아뢰니 임금이 이 말에 따랐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지증왕 이전에는 신라 임금에게 왕(王)이라는 칭호도 쓰지 않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불렸다.
 
국호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국왕이라는 칭호도 사용치 않았다는 두 가지 사실로 미뤄봐 당시 신라는 고구리의 속국이었음이 확실하다. 광개토호태왕 비문에도 흔히 신묘년 기사로 잘못 알려져 있는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이라 조공을 바쳐왔고 왜는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 조공을 바쳤다(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라는 문구에 그렇게 언급돼있지 않은가.
 
4년(503)에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한 지증왕은 순장을 금지하는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해 선포했고, 2년 후에는 친히 국내의 주(州)·군(郡)·현(縣)을 정했다. 11년(510) 우산국(于山國)을 공격해 항복을 받고 해마다 토산물을 받기로 했다.
 
지증왕은 15년(514)에 아시촌에 소경(小京)을 신설하고 남방의 인구를 옮겨 도시의 모양을 갖추는 등 나라의 기초를 닦은 임금이다.
 
잠시 황제국이었던 신라는 지증왕이 죽자 맏아들 원종(原宗)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법흥왕이다. ‘삼국사기’에는 “4년(517)에 비로소 군사를 다루는 병부(兵部)를 신설했다”고 기술한 것으로 미루어 봐아 당시에 이르러서야 독자적으로 군대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7년(520)에는 율령을 선포하고 문무백관의 관복에 색깔을 이용해 서열을 정하는 등 국가의 체계를 확립한다. 11년(524) 국경 남쪽을 순시하고 국토를 개척했고 가야국의 왕과 회견을 했으며, 19년(532) 금관국(金官國)의 주인 김구해가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는 등 국세를 넓혔다.
 
법흥왕은 23년(536)에 마침내 연호를 건원(建元) 원년으로 칭하게 된다. 즉 고구리에게 간섭받지 않겠다며 독자적인 나라임을 선포했다. 그러기에 고구리 안원제는 신라를 정벌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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