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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대약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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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력사/-[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8. 6. 7.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대약진운동

자력갱생으로 선진국 추월을 꿈꾸다

요약 신정권은 중국을 산업화된 강대국으로 변화시키고 본격적 사회주의 체제를 확립시키기 위해 1차 5개년 계획을 시행하였다. 가시적인 변화에 고무된 신정권은 급진적이고 성급한 목표의 대약진 운동을 일으켜 자력갱생으로 선진국을 추월하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 : 3 · 15 부정선거(5대 정부통령 선거); 4 · 19 혁명; 제2공화국 수립
1961년 : 5 · 16 군사정변
1962년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작
1963년 : 제3공화국 수립

목차

  1. 국가의 재건, 5개년 계획을 시행하다
  2. 소농 중심의 농업생산체제를 집단농장화하다
  3. 공 ‧ 상업 기업의 국유화를 진행하다
  4. 사회주의 과도로의 총노선에 들어서다
  5. 급진적이고 성급한 목표의 대약진 운동이 일어나다
  6. 농촌에서 인민공사화 운동이 일어나다
  7. 산업 간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농민들이 저항하다
  8. 대약진운동을 추진했던 모택동, 공개적으로 비판당하다

국가의 재건, 5개년 계획을 시행하다

1952년에 이르면 중국은 오랜 전쟁과 분열로 폐허가 되었던 국가를 재건하는 데 성공한다. 토지개혁은 이미 이루어졌고 한국전쟁도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곡물 생산량은 중일전쟁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였고 공장은 다시 수리되었으며 석탄이나 철강 생산은 1940년 초의 정점을 초과하게 되었다.

 

1953년부터 1차 5개년계획이 시행되었다. 신정권은 이를 통해 중국을 산업화된 강대국으로 변화시키고 본격적인 사회주의 체제 확립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다. 1953년 '사회주의 과도로의 총노선'이 제정되고 모든 개인의 재산과 자본주의적 형태의 소유권들이 국가의 소유로 전환되는 혁명적인 조치가 1956년까지의 불과 3년 사이에 전국에 걸쳐 이루어졌다.

 

중국은 공산화된 후 전국에 인민공사를 조직하고 집단농장을 만들어 비약적인 생산성 향상을 꾀했으나 오히려 생산량이 감소하는 등 실패로 끝났다.

소농 중심의 농업생산체제를 집단농장화하다

농촌의 집체화 작업은 소련의 집단농장인 콜호즈와 유사한 합작사의 설립으로 완성되는데, 소농 중심의 농업생산체제를 집단농장화하는 것으로, 소련과 달리 단계를 밟아 점진적으로 실시되었다. 첫째는 호조 조 설치 단계로, 농민 개인의 토지 및 생산 요소의 소유권을 인정하였다. 둘째는 저급 농업생산합작사 단계로 생산성 재산을 집체(소속감이 강한 집단)가 관리 행사하되 이익은 농민이 가져온 각자의 토지, 농구와 가축의 숫자에 근거하여 분배한다. 셋째는 고급 농업합작사로 완전 집체화되어 이익 분배는 폐지되고 엄격한 노동에 따라 분배한다. 1954년 10만 개였던 농촌 합작사는 급격히 늘어나 1956년에는 90%의 농민이 이미 합작사에 가입하게 되었다. 본디 18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던 농촌합작사 운동이었다.

공 ‧ 상업 기업의 국유화를 진행하다

공업 · 상업 기업의 국유화는 1955년 말 시행되어 1956년 초 완결되었다. 국유화 진행은 자본가들 자신에게 맡겨졌다. 가장 열성적이었던 자본가들이 공상 연합회의 지도 아래 공작조로 조직되었다.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용기있게 사회주의의 길을 가는 애국적 민족자본가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대규모 거리 행진과 대중 시위가 벌어졌다. 국가는 국영이나 합영이라는 이름으로 기업 국유화를 진행하였다. 이와 함께 경제 세력이자 사회 자율 세력인 중국의 실업 부르주아 세력이 제거되었다.

사회주의 과도로의 총노선에 들어서다

단기간에 지주 계급이 제거되었고 전통적인 가부장제 가족은 쇠퇴하였다. 도시 부르주아는 분쇄되었고 지식인들은 침묵하게 되었다. 20세기 전반 시민 사회의 태동을 가능케 했던 각종 제도들은 파괴되었고, 공식적인 구조와 함께 자발적으로 운용되던 전통 사회의 자율성마저 사라졌다. 신정권을 지지하던 많은 사람들은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으나 점차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급진적이고 성급한 목표의 대약진 운동이 일어나다

1957년 1차 5개년 계획이 끝난 후의 각종 수치들은 신정권을 고무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8년부터 대약진 운동이 전개되었다. 유화적이고 온건한 풍조는 사라지고 급진적이고 조급한 목표들이 등장하였다. 모택동은 사회주의 체제와 사상 개조를 완성하였으니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앞당겨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스탈린 사후의 중 · 소 대립과 맞물려 일어났다. 중국은 '사회주의 모국' 소련의 발전 모델을 접고 대약진 운동이라는 독자적이고 더욱 빠른 자력갱생의 노선을 실시함으로써 제3세계 국가들에게 발전과 혁명의 본보기가 되고자 했다. 타이완 해협을 둘러싼 긴장은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대약진운동훗날 대약진운동의 최대 실패로 손꼽히는 토법고로가 늘어서 있다.

 

국가의 자원이 전력, 석탄, 석유, 철강 등 중공업 분야에 집중되어 투입됐다. 특히 철강 생산량은 대약진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마을마다 용광로가 들어서서 숟가락과 밥솥 등 거의 모든 쇠붙이를 빨아들였다. 열기에 휩싸인 모택동은 15년 안에 영국을 뛰어넘고, 미국까지 따라잡겠다고 호언했다. 대중들도 제국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력갱생으로 선진국을 추월한다는 목표가 마음에 와 닿았다.

 

대약진운동철광석 생산을 위해 야간 근무를 하고 있는 노동자들.

농촌에서 인민공사화 운동이 일어나다

대약진 운동과 더불어 농촌에서는 인민공사화 운동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인민공사는 파리 코뮌에서 따온 이름으로 공산주의 사회의 기초 단위를 의미했다. 인민공사 안에서 농업 · 공업 · 상업 · 교육 · 군사 훈련 등 모든 활동이 자족적으로 이루어진다. 100~200호의 합작사가 4,000~5,000호의 인민공사로 변모하는 것이다. 농민들은 인민공사라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로의 검증되지 않은 삶의 형태에 속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에서는 모든 재산이 국유화된 상태에서 노동한 대가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공산주의에서는 모든 재산 형태가 소멸되고 가정도 국가도 철폐되며 노동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단계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의하면 고도의 금융자본주의가 정점에 달한 국가에서 성립 가능한 체제이다.

 

농촌으로 떠나는 관리들공산당 정부는 대약진운동의 일환으로 많은 당 관료들을 농촌 지방으로 내보냈다.

 

집단생활 방식이 도입되어 공동식당이 생산자들을 맞았고, 무료 식사 제공은 일반화되었다. 아이들은 유아원에서, 노인들은 양로원에서 생활했다. 평등 · 박애의 새로운 삶의 형태가 만들어지고 물질적 자극은 사라졌다. 새로운 도덕관념을 불어넣기 위해 교육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당은 '공산주의는 천국이며, 인민공사가 천국으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대중들은 감옥 같은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초인적인 노력으로 기진했고 그 직접적인 성과의 혜택을 맛볼 수 없다는 데 실망했다.

 

인민공사 단원들의 식사대약진운동이 시작되면서 인민공사 단원들은 무료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산업 간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농민들이 저항하다

대약진 운동의 결과는 참담했다. 야심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기적은 대중에게 맡겨졌다. 근대적 기술 혁신이 없는 열악한 생산 환경에서 대중의 열정에만 의존하여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잘, 그리고 더 경제적으로'라는 구호가 강조되었다. 목표량에 이르지 못했어도 허위보고를 올리는 일이 빈번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중공업 분야에 자원의 절반이 투입되었지만 전통적 방식으로 생산된 철강은 상품성이 적었다. 산업 간의 불균형은 심화되었고 혹독한 노동이 수반되고도 열악한 분배에 절망한 농민들은 조직적인 태업으로 저항했다.

 

야간 노동램프 불빛에 의존해 야근 근무를 하고 있는 인민공사 노동자들.

 

1958년 11월 〈인민일보〉의 사설에는 농민들에게 휴식과 수면을 위해 6시간은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고 언급될 정도였다. 게다가 흉년이 이어졌다. 도처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결국 대약진 시기에 중국은 수백만 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재난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약진운동을 추진했던 모택동, 공개적으로 비판당하다

1959년 노산(루산)에서 열린 당 지도부 회의에서 모택동은 공개적인 비판에 직면한다. 국방상 팽덕회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당 분열 시 모택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직위에서 파면되었다. 모택동은 '여러분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시 산으로 들어가 농민군을 조직해 싸우겠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결국 검소하고 신중한 실용주의자 류소기에게 국가 주석의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그는 경제가 회복되자 반격을 시작했다. 이른바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닥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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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책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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