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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학계의 거짓말 잔치(42) 동천왕의 평양 천도 ‘사실상 불가능’ 억지 쓰는 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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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연재/고대사학계의 거짓말잔치

2018. 6. 12.

동천왕의 평양 천도 ‘사실상 불가능’ 억지 쓰는 이병도
 
황순종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의 저자
 
황순종  기사입력  2017/09/11 [14:31]
 
 
고대사학계의 거짓말 잔치(42) 동천왕의 평양 천도 ‘사실상 불가능’ 억지 쓰는 이병도

이제부터는 3국의 도읍지와 주요한 지명을 포함하는 그 강역이 어디였는지 등 구체적 역사지리에 대한 근거를 확인하면서 고대사학계에서 어떻게 거짓말로 이를 부정하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 낙랑군과 삼국의 대략적 위치

백제는 발해 서안 낙랑군 서쪽, 신라는 남쪽
『삼국사기』를 보면, 낙랑에서는 시조 혁거세거서간 때에 도성인 금성(金城)을 공격했으며, 다음 남해차차웅 때도 2회 금성을 공격한 기록이 있고, 3대 유리이사금 13년(서기 36)에는 “낙랑이 북변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고 했으며, 4년 후에는 “(낙랑의) 화려·불내 두 현 사람들이 공모·연합하여 기병으로 북쪽 경계를 침범하여··· ”라고 하여, 신라 초기에 북쪽의 낙랑에서 자주 괴롭힌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고대사학계의 논리에 의하면 신라의 북쪽에는 동예, 서쪽은 백제가 있었으니 『삼국사기』 초기의 이런 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부정할 것이다. 필자는 이미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 고대사』(만권당, 2012)에서 자세히 논증하였지만, 3국은 모두 대륙에서 일어난 나라들이었다.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 땅을 얻어 일어났으며 그곳이 보하이 서안에 있던 낙랑군의 서쪽 내륙이었다. 그러므로 마한의 동쪽에 있던 진한에서 일어난 신라 또한 보하이의 남안과 중국 동해의 산둥성 지역에 있었음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고대사학계에서는 억지 논리로 이런 기록들을 부정하고 있다. 지금부터 간단히 살펴본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는 하북성 중부지역
먼저 고구려의 도읍에 대해 보면 첫 도읍지 졸본이 지금의 허베이성 중부 지역이었다. 그 후 고구려는 도읍을 가까운 환도성으로 옮겼다가 11대 동천왕 때인 247년 다시 평양으로 옮겼다. 이때의 상황을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치러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거기로 옮겼다. 평양은 본시 선인(仙人) 왕검의 택지였다. 혹 말하기를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한다.”
 
이때 중국의 3국시대 위나라에서 관구검이 쳐들어와 환도성이 크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평양으로 천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 평양이 옛 단군왕검의 택지라고 했으며 혹은 왕험(王險)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왕험은 중국의 사서에 위만조선의 도읍으로 기록되었으며, 단군 ‘왕검’을 ‘왕험’으로 표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평양은 지금 북한의 평양이 결코 아니며 만주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곧 충분히 설명할 것이다. 그  전에 위 기록에 대한 이병도의 견해를 보기로 하자.

“이때 평양 부근은 낙랑의 수도가 엄연히 존재했던 터이므로 거기로 이도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까닭이다.”(국역 삼국사기 상』, 1980, 396쪽)

이병도는 지금의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천도할 수는 없었다고 주석했다. 이병도는 고구려가 6대 태조왕 때 건국되었다고 주장했으므로 그보다 훨씬 후대의 이 기록은 믿어야 할 텐데도 또 부정하고 만다. 매국사관에 맞지 않으면 『삼국사기』는 언제나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평양으로 천도했다니까 그 평양은 아마도 지금의 평양이 아닌 다른 곳이었을 것으로 보아 그 평양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만주의 옛 평양이 드러나고, 그것은 반도사관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지금 평양이 아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는 다른 기록이 있으니, 그 ‘지리·고구려’ 조에 이렇게 썼다.

“혹 말하기를 고국원왕 13년에 평양 동쪽 황성으로 이거(移居)하였는데, 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 중에 있었다고 하니 그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동천왕의 위 평양 천도 후 약 백 년이 지난 고국원왕 때(343) 평양에서 가까운 동쪽 황성으로 옮겼는데, 이 황성이 서경(지금의 북한 평양) 동쪽 목멱산에 있었다는 설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 편자들이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과 그 후의 황성이 지금의 평양에 있지 않았다고 생각한 사실을 보여준다. 즉 단군왕검의 평양이나 위만의 왕험이나 모두 지금의 평양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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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11 [14:31]  최종편집: ⓒ w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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