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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시대/고고학

2020. 11. 28.

제주 삼양동 유적(濟州三陽洞遺蹟)

선사문화문화재 | 유적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여러 유물이 발견된 생활유적.   사적.

 

 

제주 삼양동 유적 전경

분야선사문화

유형문화재지정기관문화재청지정부류사적지정번호제416호, 유적성격생활유적건립시기청동기 및 초기철기시대규모14,132.9㎡소재지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1동 1660-5 외소유자제주시 외시대선사

지정기관문화재청

지정부류사적지정번호제416호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여러 유물이 발견된 생활유적.사적.

 

키워드

개설

사적 제41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제주시 동쪽에 위치한 삼양동의 동서 1.2-1.5㎞, 남북 0.5-0.6㎞의 2만여 평 범위에 분포하며,. 해발 높이 12-14m 정도의 해안단구상의 편평한 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은 제주시 삼양동 일대 부지 토지 구획 정리 사업 중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유적지 앞의 해안가는 사빈(沙濱)이 발달하여 넓은 해수욕장이 조성되어 있다. 이 유적지에서는 1970년대에 지석묘(支石墓)가 확인되었고, 1986년에 적갈색토기(赤葛色土器)와 마제석부(磨製石斧) 등의 유물에 대한 수습 보고가 있었고, 1997년 4월부터 1999년 4월에 걸쳐 제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들 조사에서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주거지 236기를 비롯하여 석축담장, 쓰레기 폐기장, 마을 외곽을 두른 도랑유구 등 대규모 마을유적이 조사되었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공렬토기(孔列土器),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돌도끼, 대패, 철제도끼, 동검(銅劍)과 검파두식(劍把頭飾)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2006년도에는 유적에서 동남쪽으로 500m 떨어진 지점인 제주 세무서직원사택 부지에 대한 국립제주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공렬토기가 출토된 말각장방형(抹角長方形)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삼양동 취락이 청동기시대 말기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2007~2008년에는 유적의 남쪽 건너 삼양동과 화북동에 걸치는 삼화택지개발지구에 대한 발굴조사가 호남문화재연구원과 국립제주박물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2007년에는 삼양동의 동쪽에서 봉개동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확장 지점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지석묘 이외에 합구식(合口式) 옹관묘(甕棺墓)가 발굴되었다. 2008년에는 원당봉 기슭에서도 취락이 조성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내용

삼양동유적에 대한 1997~1999년의 발굴조사에서 258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는데, 이 가운데 원형 주거지 173기, 장방형 주거지 17기, 부정형 주거지 18기, 지상식 가옥 중 불다짐이 처리된 부정형 주거지 20기, 굴립주 주거지 8기 등이 발굴되었다. 이들 주거지의 대부분은 삼양동식 토기가 출토되는 평면 원형의 송국리형 주거지(松菊里型 住居址)이다. 삼양동유적에서 발견된 ‘송국리유형 주거지는 금강유역에서 가장 이른 단계에 속하는 전형적인 송국리형 주거지와 동일하다. 주거지의 지름은 주로 3~5m인데, 비교적 큰 것은 지름이 5.1~5.2m이고, 작은 것은 3.6~3.8m이다. 주거지의 면적은 최대 27㎡에서 최소 8.9㎡에 걸쳐 있는데, 대부분은 12~16㎡이었다. 이들 주거지의 면적은 충남과 호남 지역의 송국리형 주거지에 비하면 2/3에 해당된다. 다만 2지구 6호 주거지의 경우는 지름이 6m, 면적이 37㎡로 예외적으로 큰 편에 속한다. 주거지의 내부에서는 삼양동식 토기를 비롯하여 단면 원형 및 삼각형 점토대토기, 환옥(丸玉), 동촉(銅鏃), 철기, 유리구슬, 석제 검파두식, 석부, 석착(石鑿), 숫돌, 갈돌, 갈판 등 유물과 함께 소맥, 대맥, 콩, 비자, 도토리, 봉숭아씨 등 탄화곡물도 출토되었다. 석기 중에서 유병식(有柄式) 마제석검(磨製石劍), 삼각형석도(三角形石刀), 유구석부(有溝石斧), 편평편인석부(扁平偏人石斧) 등 석기 세트는 주거지와 함께 한반도 서남해안지역의 ‘송국리유형’의 특징적인 것이다. 특히 동촉은 1구역 27호 원형 주거지에서 출토되었는데, 삼릉형(三稜形)으로 평양 정백동 37호 목곽묘(木槨墓)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하였다.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를 중심으로 삼양동유적의 문화 단계를 설정할 수 있는데, 토기는 세 개의 군(群)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토기군은 공렬토기(孔列土器)와 구순각목토기(口脣刻目土器), 적갈색 항아리로 이루어져 있다. 공렬토기는 공렬이 구연(口緣) 외면에 얕게 눌러 찍혀진 전형적인 것과 구연 내면에서 비교적 깊게 자돌(刺突)된 것으로 나누어진다. 두 번째 토기군은 원형 및 삼각형 단면의 점토대토기로 구성되어 있다. 점토대토기의 주요 기형으로는 발형토기와 장경호(長頸壺)가 있다. 장경호는 표면이 마연(磨硏)되어 있고, 점토대토기는 태토(胎土)에 따라 한반도산과 제주산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세 번째 토기군은 다수의 원형 주거지에서 주로 공반(共伴)되어 출토되는 외반구연(外反口緣) 호형토기와 직립구연 발형토기로 이루어져 있다. 기존에 이런 기형의 토기는 제주 곽지리 유적에서 주로 출토되어 ‘곽지리식 토기’로 일컬어졌었다. 그런데 삼양동유적에서는 직립 구연의 토기가 상대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삼양동식 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세 토기군은 상호 간의 중복관계, 외래 금속유물과 옥제품 등 공반 출토유물, 방사성탄소연대 등 자료를 통하여 유적의 연대를 설정할 수 있다. 첫 번째 토기군의 연대는 서기전 3세기 이전, 세 번째 토기군의 연대는 서기전 3~1세기로 추정된다. 두 번째 토기군의 연대는 세 번째 토기군의 이른 단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삼양동유적은 서기전 3세기 이전부터 서기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걸쳐 조영된 대단위의 마을 복합유적으로 한반도의 대표적인 청동기·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인 충남 부여의 ‘송국리유형’ 주거문화 말기 단계에 해당된다.

 

특징

삼양동유적은 크고 작은 주거지를 중심으로 하여 창고, 저장공, 조리 장소, 노지, 마을 공간을 구획한 경계 석축과 배수로, 폐기장, 패총, 고인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합유적이다. 그리고 한반도와 일본의 야요이(彌生)시대 주거지와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삼양동유적의 주거지 자체는 완전한 정형성을 보인다. 중앙에 집회용 노지를 중심으로 하여 작은 광장이 배치되어 있고, 그 주위로 원형주거지 다수가 둥글게 들어서 있어 단위 주거군의 정형성을 띠고 있다.

마을 유적 전체를 보면, 중심 주거지 구역 안에서만 중요유물이 출토되는 양상을 하고 있다. 특히 12~15기의 소형 주거지군 안에 지름이 약 6m인 대형주거지가 배치되어 있다. 이런 대형 주거지 내부에서는 환옥, 동검, 각종 옥과 구슬 등의 위세품이 출토되었다. 이런 공간 배치와 출토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마을은 불평등 사회, 혹은 계급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삼양동유적은, 제주도에서 탐라국 형성기의 사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된다.

 

의의

삼양동유적은 제주도에서 한반도의 대표적인 청동기·초기철기시대의 송국리 주거문화 말기 단계를 설명할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유적으로 탐라국(耽羅國) 형성기 제주 선주민문화(先住民文化)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마지막 단계를 설명해 줄 수 있고, 원형 주거지의 발굴 상태가 당시 마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할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어 한국과 일본에 있는 이 시기의 유적과 비교에서도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 「濟州道 古代土器文化의 硏究」(李淸圭,『호남고고학보』제1집,1994)

  • 『文化遺蹟分布地圖-濟州市-』(濟州大學校博物館,1998)

  • 「濟州地方 埋藏文化財의 發掘과 保存」(강창화,『古文化』 56,2000)

  • 『濟州市三陽洞遺蹟-Ⅱ·Ⅲ地區』(濟州大學校博物館,2001)

  • 「濟州道 赤褐色硬質土器 硏究」(김경주,『韓國上古史學報』第35號,2001)

  • 「삼양동 유적(濟州 三陽洞 遺蹟)」(국립문화재연구소,『韓國考古學事典』,2001)

  • 『濟州市三陽洞遺蹟-Ⅰ·Ⅳ地區』(濟州大學校博物館,2002)

  • 「제주삼양동선사유적(濟州三陽洞先史遺蹟)」(문화재청,『국가지정문화재 지정보고서(사적ㆍ사적 및 명승)』,2003)

  • 「耽羅 以前의 社會와 耽羅國의 形成」(강창화,『강좌 한국고대사』 제10권,2003)

  • 「제주지역 고인돌과 보존현황」(나정욱,『세계 거석문화와 고인돌』,2004)

  • 『제주의 역사와 문화』(국립제주박물관,2005)

  • 「耽羅成立期 聚落의 形成과 變遷」(金慶柱,『호남고고학보』제22집,2005)

  • 『濟州道誌-第7券』(濟州道,2006)

  • 『삼양유원지 조성사업 부지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제주문화예술제단·㈜21세기컨설팅,2006)

  • 『제주제무서 직원사택 부지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국립제주박물관,2007)

  • 『제주시 삼양2동 2132-1번지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국립제주박물관,2007)

  • 「유구와 유물로 본 제주도 송국리문화의 수용과 전개」(김경주,『제주도 송국리문화의 수용과 전개』,2009)

  • 『濟州 三和 나地域 遺蹟-Ⅰ·Ⅱ구역』(호남문화재연구원,2010)

  • 『濟州 三和 나地域 遺蹟-Ⅲ구역』(호남문화재연구원,2010)

  • 『제주 삼화지구 유적』(제주문화유산연구원,2010)

  • 『제주 삼양1동 1249-7번지 유적』(제주문화유산연구원,2010)

  • 「제주삼양동선사유적(濟州三陽洞先史遺蹟)」(문화재청,『문화재대관 사적 제1권(증보판)』,2010)

  • 『제주 삼양동 주민센터 신축부지내 문화재 발굴조사 보고서-제주 삼양동 유적(2136-9번지)』(제주문화유산연구원,2011)

  • 『제주 삼양동유적-Ⅵ지구(1665-1번지)』(제주문화유산연구원,2011)

  • 『제주 삼양동선사유적지 관리사무소 건축부지내 문화재 발굴조사 보고서-제주 삼양동 유적-Ⅳ지구(1665-1번지)』(제주문화유산연구원,201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제주 삼양동 유적(濟州三陽洞遺蹟))]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A0%9C%EC%A3%BC%EC%82%BC%EC%96%91%EB%8F%99%EC%9C%A0%EC%A0%81&ridx=0&tot=1565

 

 

 

삼양동유적(濟州 三陽洞遺蹟)

원삼국시대 제주도를 대표하는 마을유적으로, 제주시 동쪽에 위치한 삼양동의 동서 1.2~1.5㎞, 남북 0.5~0.6㎞의 2만여 평 범위에 위치한다. 그 대부분은 밭으로 조성되어 있고, 유적지 주변부로는 민가가 들어서 있다. 해발 높이 12~14m 정도의 해안단구상의 편평한 대지에 위치하는데, 유적지 동쪽으로 속칭 ??음나물내?? 건천이 있고, 북쪽 해안으로 수량이 풍부한 용천수가 발달하여 있는 바, 현재 제주시 상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음나물내를 건너 동쪽으로 해발 172m의 원당봉이 솟아 있는데, 지표조사에 따르면 이 원당봉 기슭에도 유적이 분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1973년에 동 유적 남쪽으로 고인돌(支石墓) 3기가 보고된 바 있고, 1986년 제주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서 이 일대에서 원삼국시대에 속하는 적갈색토기와 돌도끼 등의 유물을 수집한 바 있어 이미 유적의 존재가 알려졌지만, 주거지 유구는 1996년 제주시에서 실시한 토지구획정리 공사에 의해서 노출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제주대학교박물관에서 수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한 결과, 확인된 주거지는 총 220여 기에 이른다. 이 중 155기의 주거지 내부조사가 이루어지고, 나머지는 윤곽만 확인되었다. 유적은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각 필지별로 대체로 1~5구역으로 구획되어 발굴되었다. 1996~97년의 1차조사는 1?2-2구역 시굴조사, 1997년의 2차 조사는 1?2~2?3구역 발굴과 4?5구역 시굴조사, 1998~99년의 3차 조사는 2-1?2?4?5구역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결과 거의 전범위에서 집자리가 확인되었지만, 도로시설 예정구역의 집자리는 상당수가 이미 구획정리공사로 잘려나간 상태였다. 228여 기 주거지 중 반움집 형태로서 원형(圓形)이 167기로 가장 많고, 장방형(長方形) 17기, 부정형(不定形) 7기, 지상식으로서 부정형 주거지 20기와 굴립주 건물지 7기가 확인되었다. 원형주거지는 이른바 송국리형으로서 내부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내부 양쪽 끝에 중심기둥의 구멍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작은 것은 직경 2.2m 내외이고, 가장 큰 것은 6.6m로서, 평균적으로 직경 4~5m의 크기를 갖고 있다. 주거구역이 중심과 주변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대체로 제Ⅱ구역이 그 중심에 해당하고, 그 중 중심 거주지는 Ⅱ-2구역의 6호 주거지로 추정된다. 6호 주거지에서는 중국 한대(漢代)의 환옥을 비롯하여 유리구슬, 청동기, 철기 등의 외래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6호 주거지의 북쪽으로 인접하여 각종 토기와 유리구슬, 동물뼈, 조개껍질 등이 다량 폐기된 유구가 있다. Ⅱ-2구역의 서쪽에 인접한 Ⅱ-1구역에는 원형 주거지 사이사이로 다량의 토기가 완전 소성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는 부정형의 집자리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토기제작 등의 작업장으로 추정된다. 굴립주 건물로서 대표적인 것이 제3구역에 위치하는데, 직경 50㎝ 정도의 기둥구멍이 4기씩 3열 배치되어 있는 바, 대체로 창고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단위 주거지군 배치상에 두드러진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10여 기 전후의 주거지가 군을 이루어 한가운데를 비우고 원형으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가장 동쪽에 위치한 Ⅴ구역의 예가 대표적인데, 한 가운데에는 야외 화덕자리(爐址)가 배치되어 있다. 주거지 이외에 마을을 구성하는 시설물로서는 석축담장지 2개소, 폐기장 1개소, 구상유구(溝狀遺構) 1개소가 확인되었다.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되는 유물로는 우선 토기를 들 수 있는데, 단면 원형?삼각형 점토띠토기(粘土帶土器)와 제주도의 특징적인 적갈색 외반구연항아리형토기가 특징적이며, 석기로는 간돌검(磨製石劍), 간돌화살촉(磨製石鏃), 홈자귀(有溝手斧), 돌도끼(石斧), 돌끌(石鑿), 숫돌(砥石), 갈돌(石棒), 갈판(?石) 등이 있고, 금속유물로는 한대 삼각형 동화살촉(銅鏃), 주조쇠도끼(鑄造鐵斧), 그리고 장신구류로서는 유리구슬, 환옥 등이 있으며, 자연유물로서, 보리, 콩과 쌀이 수습되었다. 200여 기가 넘는 주거지로 구성된 마을 유적지로 지금까지 조사된 남한 최대의 마을 유적지 중의 하나로서 원삼국시대에 초기복합사회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제주도에 원삼국시대 집자리가 남한지방에서 청동기시대에 유행하였던 송국리형주거지라는 점에서 집자리 짓기 방식의 전통이 남한에서 제주도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사전명

한국고고학사전(2001)

 

제주 삼양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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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삼양동 유적(濟州 三陽洞 遺蹟)은 제주시 삼양동 일대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던 당시에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이다. 1999년 11월 16일 사적 제416호로 지정되었다.

목차

개요[편집]

제주 삼양동 유적은 제주시 삼양동 일대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던 당시에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이다.

1997년 4월부터 1999년 7월에 걸쳐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청동기-초기철기시대를 전후한 시기의 집터 200여 곳을 비롯하여 돌을 쌓아 만든 담장, 쓰레기를 버리던 폐기장, 마을의 외곽을 두르고 있던 도랑 자리가 있는 큰 규모의 마을 유적이 확인되었다. 집 터는 14기만 움집 형태로 복구되었다.

집터 내부에서는 토기류(구멍띠토기, 덧띠무늬토기[점토대토기]), 적갈색항아리 등)와 석기류(돌도끼, 대패, 갈돌, 숯돌 등), 철기류(철제도끼, 손칼), 청동기류(동검, 칼자루끝장식[검파두식] 등), 불에 탄 곡식류(콩, 보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제주도 청동기시대 후기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제주도에서 생산되지 않았던 중국계 유물로 알려진 옥환, 요령식동검편, 유리옥과 철기류들이 출토되고 있어 삼양동 사람들이 한반도를 비롯한 외부지역과도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명칭 변경[편집]

원래 이름은 '제주삼양동선사유적'이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각주[편집]

  1.  문화재청고시제2011-116호 Archived 2017년 11월 9일 - 웨이백 머신,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고시》,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7560호, 392-412면, 2011-07-28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