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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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5. 여러나라 시대 5.3 〈설득력 더해가는 '삼국의 대륙존재설'〉~ 5.6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 거란 역사서 ‘요사(遼史)’ 의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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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10.

5.3 2008317일 플러스코리아 설득력 더해가는 '삼국의 대륙존재설'

이종호(과학저술가)

 

기록에 나타난 고대 천문현상 관측지 추적

 

일반적으로 고대의 사서에는 자연의 특이 현상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의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과 직결된다는 고대인들의 믿음 때문이다. 기록된 자연 현상 중에서도 특히 천문현상은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사서의 기록은 위정자나 집필자의 주관에 의해 선별되고 변조되며 후대에 갈수록 윤색될 수 있다. 그러나 천문현상은 큰 틀에서 뉴턴의 자연법칙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정확하게 검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후대에 가더라도 변조가 불가능하고 설사 조작이 있었다고 해도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갑자기 발견되는 사료들은 천문현상 기록을 토대로 사료의 진위여부를 가려주기도 한다.

 

 

■ 『삼국사기에 나타난 천문기록의 의문

 

1994, 고대사에 대한 열기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매우 놀라운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

 

 

서울대학교 박 창범 교수와 경희대학교의 라 대일 교수는 삼국시대 천문현상기록의 독자관측사실 검증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일식의 기록을 통해 3국의 천문현상을 관측한 위치(수도로 비정)를 추정하였다. 그 결과 기록된 일식의 관측 위치는 놀랍게도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안이었다.

 

 

[사진설명] 삼국사기천문기록에 의한 삼국의 수도 비정도.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기록을 근거로 삼국의 수도를 비정한 결과 삼국의 전반기에는 모두 중국 지역에 위치했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박창범 교수는 비록 후대에 쓰인 것이지만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나온 천문기록을 근거로 삼국의 수도가 어디인가를 비정할 수 있는, 즉 관측자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조사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 일어난 일식이 67, 혜성출현이 65, 유성과 운석의 낙하가 42, 행성의 이상 현상이 40, 오로라 출현 12회로 총 226회의 천체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연구에 사용된 일식 기록은 서기전 54년에서 서기 201년까지의 초기신라 일식 16, 787년 이후의 후기신라 일식 9, 백제 전 기간의 일식 20회와 고구려의 일식 8회였다. 결론은 삼국이 서기 200년 이후에 수준 높은 천체관측을 했으며 기원전부터 천체관측은 삼국이 독자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개개의 일식도를 보면 어느 한 일식은 식()의 정도 차이가 있지만 광범위한 지역에서 관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혁거세 4(BC 54)의 일식은 식분이 서울과 동경에서 0.7, 시안에서 0.8, 상하이에서 0.9, 방글라데시의 데카에서는 1.0(개기식)이다. 그러나 특정국가가 기록으로 남긴 모든 일식은 어느 지역에서든 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신라에서 141년에 측정된 일식은 한반도와 그 이동에서는 볼 수 없다. 또한 신라 166년의 일식은 장안 이서에서는 볼 수 없다.

 

 

따라서 특정 국가가 관측한 일식의 식분도를 모두 합하여 평균하면 평균식분이 최대인 지역을 찾을 수 있고 이것을 통해 최적 관측지 즉 천문관측 현상을 관측하였던 관측자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고대 천문현상의 관측은 그 국가의 수도 근방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관측자의 위치'는 그 국가의 수도가 어디 있었는지는 물론 그 당시의 강역이 어디인지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의 일식을 관측한 위치는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백제에서 기록된 20개의 일식 관측지는 요서 지역(발해만)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기원전 201년 이전 신라의 일식 16개에 의한 관측자의 위치는 양자강 유역이었고 787년 이후 신라에서 기록된 일식 9개의 관측자 위치는 한반도 남쪽이라는 점이다. 신라의 일식기록이 201년을 마지막으로 787년에 다시 등장할 때까지 무려 580여 년의 공백기간이 있는데 이 기록이 엄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즉, 일식기록만으로 따진다면 신라는 중국 본토 지역에서 한반도로 일정 시기에 넘어왔다고 추정할 수도 있게 된다.

 

 

문제는 신라의 경우 초기 신라의 관측자 위치가 잘못되었을 확률은 매우 낮다는 점이다. 관측자가 한반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것을 차용했을 확률은 겨우 0.24퍼센트였다. 결론적으로 삼국의 일식 기록이 중국의 기록을 차용한 것일 확률은 0.026퍼센트였다.

 

 

고구려의 관측자 위치는 신라나 백제보다 매우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고구려가 광대한 영토의 여러 곳에서 천체를 관측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박 교수의 논문에서 다룬 천문현상 연구에 의한 삼국의 관측자 위치는 우리의 고대사에서 규명할 부분이 매우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원래 삼국사기의 천문기록에 대해 과거의 학자들이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다. 일본학자들의 견해도 기원 5세기까지는 중국의 기록을 그대로 차용했거나 꾸며내었으며 7세기 중반 이후에야 비로소 삼국이 독자적으로 천문관측을 시작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근거는 백제본기에 의할 경우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것이 없다가 375년에 이르러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만들었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한자를 수용하기 이전에는 기록이 없었다는 뜻인데, 삼국사기에 백제가 기록한 이 공백기의 일식기록으로 태백주현(224) 등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설명] 4세기 백제의 발전도. 고등학교 국사에는 4세기 백제가 중국의 요서와 산동반도, 왜의 규슈 지방에 진출했다고 적었다

 

 

천문현상기록이 구전으로 전래되어 오다가 한문을 수용하면서 이를 글로 적었다는 가설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과거의 천문현상은 현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시점이 중요하지 지나간 과거의 천문현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당시의 시점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과거의 천문현상이 수백 년을 걸쳐 구전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지므로 중국에서 차용했다는 것이 무난한 해석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과학은 삼국사기의 기록이 삼국에서 독자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중국에서 천문기록을 차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삼국에서 독자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한 것이 현재까지 전달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한문이 수용되기 이전에 한민족의 기록문자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 전에도 옛글이 있었다는 기록이 매우 신빙성 있게 느껴짐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 신지글자 있었다, 국정브리핑, 2004.05.29 참조).

 

 

백제의 요서영유()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루어지는 삼국시대를 거론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한국 측의 정사로 볼 수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초기 기록이 너무나 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백제만을 따로 분리한다면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는 3세기 중엽까지 백제는 마한 54국의 하나라고 하는데 반해 삼국사기에서는 온조왕대에 이미 고부(古阜) 지방까지 확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삼국사기에서는 고이왕대에 이미 6좌평과 16관등제라는 잘 짜여진 국가조직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국가체제 내에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 요서 지방에 있었다는 기록 때문이다. 학자들을 더욱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자료가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음에도 중국 측의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선 대한민국 정설로 볼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에 나타난 백제의 요서영유()을 살펴본다.

 

 

송서(488):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요서지역에 설치되었다는 진평군에 대한 기록이 너무 불명확해 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진평군과 백제군의 위치는 중국 복단대학역사지리연구소에서 간행한 중국역사지명사전을 보면 진평군은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에 설치되었으나, 471년에 진안군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남제서(南齊書, 537년 이전): 백제는 변진(弁辰)의 나라로 진대(晉代)에 일어나 번작(蕃爵)을 받았다. 스스로 백제군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

 

 

양직공도(梁職貢圖, 526 539): 백제는 예부터 내려오는 동이의 마한에 속한다. ()말에 구려(駒麗)가 요동을 차지하니 낙랑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

 

 

양서(梁書, 629 639): 백제란 조상이 동이다. 동이는 세 한국이 있으니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가 있고 마한은 54국이나 된다. 그 중에 큰 나라는 인가가 만여 호가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가 되어 모두 합치면 도합 10여만 호가 되는데 백제란 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후대에 점점 강성해져 모든 조그마한 나라들을 병합했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대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다스렸다.

 

 

남사(南史, 627 649):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리에 있었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의 땅을 차지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통전(通典, 801): 처음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건넜다하여 백제라 한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을 차지했다(현재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

 

 

송서에 실린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록은 주로 백제의 대 중국 외교 자료에 의해 편찬되었으므로 이들 기록이 5세기 후반 경 백제와 중국의 외교관계에서 비롯된 사실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송서의 내용은 모두 당대의 외교기록인데 요서영유 기록만은 전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건 기록으로 학자들은 이와 같은 기록이 있었던 이유로 당시의 시대적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송서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고구려와 상대되는 백제가 요서지방을 차지하고 이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는 대목이다.

 

 

반면에 남제서의 경우 전반부분의 일부가 결실되어 있는데 유원재(兪元載)'스스로 백제군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라는 내용이라고 발표했다. 남제서송서와 같은 내용이지만 진평군 진평현이 백제군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 두 개의 사서는 당대의 변화된 인식의 일면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양직공도에는 백제의 사신도(使臣圖)와 함께 백제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는데 백제의 원류, 요서영유, 대중관계, 문화관계의 기사를 담았다. 특히 백제의 원류기사를 마한으로부터 구했으며 백제가 아닌 낙랑이 요서지역을 차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록은 남조계 사서에만 전해지고 당사국인 백제와 북조의 사료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백제가 중국 본토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당시의 동북아시아사상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당사국인 북조계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고 남조계의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남조와 북조에서의 인식이 달랐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백제의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삼국유사, 삼국사기가 워낙 후대에 저술된 것이므로 요서영유()에 대해 일연과 김부식이 여러 가지 이유로 누락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제서』〈백제전자치통감에 의하면 488년과 490년에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여 크게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488년의 전쟁은 남제서의 앞 부분이 멸실되어 잘 알 수 없지만 490년의 전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해(490)에 위군이 다시 수십만의 기병들로 백제의 지경을 공격했다. 백제 모대(동성왕)는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 4명으로 하여금 위군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495년 백제의 동성왕은 남제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경오년에 험윤이 저희들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침범해 오므로 사법명 등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요격하여 크게 이겼고 그들을 베어 적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습니다.'

 

 

북위가 백제의 지경을 공격함으로서 시작된 이 전쟁도 한반도에 있는 백제가 중국으로 원정군을 보내 전투를 벌였다고는 볼 수 없다. 490년 전쟁에서 북위는 수십만의 기병을 동원했다고 했는데 당시 북위가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려면 이들을 운송시킬 대함선이 필요하다. 해로를 통해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북위가 강성한 고구려(장수왕 시대)의 영토를 통하여 백제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역시 고구려가 순순히 허락했을 리는 없는 일이다. 적어도 수십만 명이 통과하려면 고구려와 북위가 상당한 조약을 맺거나 혈전을 치렀어야 하며 이럴 경우 북위에서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백제의 동성왕은 이 전투에서 공로를 세운 장군들을 광양태수, 청하태수, 광릉태수, 성양태수로 봉해달라고 남제에 청했다. 동성왕이 부하 장군들의 임명을 요청한 영토들은 남제가 북위에게 빼앗겼던 땅으로 광양은 오늘날 북경 부근 대흥현 또는 밀운현, 청하는 북위 때에 하남성 상현 부근, 광릉은 광소성 회음현 동남 지역, 성양은 강소성 또는 하남성 신양현 부근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백제가 중국 일부 지역에 거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백제와 북위간에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인 산동반도는 요서영유()의 지역과는 다른데 백제가 언제부터 산동에 거점을 잡고 있었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요서지역에 진출했던 백제 세력이 고구려와 전진의 연합에 의해 공격당하자 남쪽으로 내려간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의 역사책 신당서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백제의 국경이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해안지방까지 뻗쳐 있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최치원전에도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고구려 백제가 강성할 때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는 오, 월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연, , 노국 들을 괴롭혀 중국의 큰 우환거리였다.'

 

 

이상과 같은 사료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해서는 긍정설과 부정설이 있다. 3의 의견은 백제가 아니라 마한, 부여, 낙랑 등 다른 세력이 주체인데 백제로 기록되었다는 견해이다.

 

 

백제의 요서영유를 긍정하는 견해를 제시한 사람은 실학자 신경준으로부터 임수도, 정겸(丁謙) 등의 중국인과 신채호 , 정인보, 이민수, 일본인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등으로 이어지며 그 위치를 요서, 산동, 강소, 절강(遼西, 山東, 江蘇, 浙江) 등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추정하였다. 북조가 백제의 요서영유()을 누락시킨 것은 북조의 사관들이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김상기는 백제가 고구려의 요동진출에 대항하기 위해 근초고왕 말기에 요서지방을 점령했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요서영유()에 긍정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 측의 자료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반면에 백제의 요서영유()을 부정하는 입장은 실학자인 한진서를 비롯하여 주로 일본의 연구자들로부터 나온다. 이들은 중국 측 사료에서 백제가 요서지방을 영유했다는 시기인 진말(晉末)에는 모용씨가 요서지방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중국과 백제의 지리적 관계를 볼 때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3의 의견으로 요서영유의 주체는 백제가 아니라 낙랑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부여 또는 마한과 관련된 세력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백제의 요서영유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로 다루는 것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정사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그대로 인정할 경우 삼국의 역사를 재편해야 하는 상황도 피할 수 없으므로 현 단계에서 ''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요서영유()은 비록 ()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론이라고 볼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정식으로 다루었으므로 어느 정도 공인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교육부의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도 백제가 중국대륙에 진출했다고 적었다.

 

 

'백제는 발전 과정에서 요서, 산동 지방에까지 진출하여 대외적 영향력을 과시하였으며,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로는 중국의 남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사진설명] 우적도(1978년 신신문화출판사 간행 중국역사도설)

 

  

대륙 백제

 

백제의 '요서 영유()'은 한반도 백제 세력에 의해 중국 내의 일정 지역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근래 이도학 박사는 한반도 세력에 의한 백제가 아니라 또 다른 백제 세력이 중국 내에 존재했다는 파격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이도학 박사는 자치통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문제의 핵심으로 제기했다.

 

 

자치통감: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처했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衰散)해져서 서쪽으로 연()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기원후 346년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서 부여의 발상지인 녹산은 송화강 유역을 가리키는데 한반도 서남안에 백제가 존재했다는 상식에 비추어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고구려보다 더 북쪽에 있는 송화강의 부여국을 어떻게 백제가 공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백제가 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지역을 아무런 견제 없이 무사히 통과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로 볼 수 있다. 결론을 말한다면 백제는 연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야 하며 중국 본토에 위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정인보 등은 4세기 초에 있어서 백제의 해상발전을 요서 진출의 한 근거로 보았다. 그러나 송화강 유역은 만주 내륙이므로 해상진출과는 어울리지도, 관련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나 물길을 의미하는 오기(誤記)로 본다고 지적해 놓았다.

 

 

여하튼 부여는 고구려(또는 물길)의 침략을 받은 후 서쪽으로 연()나라 가까이에서 고립무원의 상태로 있다가 346년 전연(前燕)의 모용황의 17000명의 침략을 받아 국왕 현() 이하 5만여 명의 백성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비록 전연왕이 현에게 '진동장군(鎭東將軍)'의 작위를 주면서 사위를 삼는 등 회유책을 쓰기도 했으나 이후 부여는 전연과 전진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이를 두고 당시에 부여가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부여의 영토는 추후 강력한 제국인 고구려에 병합되므로 고구려에 병합되기 전까지 어떤 형태로든 부여가 존재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다음 기록들도 백제의 위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송서: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후한서: 가을에 궁()이 드디어 마한(백제)과 예맥의 군사 수천 기()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했다.

 

 

위의 기록 역시 우리가 배운 고대사의 상식으로 보면 해석이 되지 않는다. 한반도 남단의 백제가 어떻게 중국 대륙 요동의 동쪽 땅에 있게 되는지, 또 백제군사가 어떻게 만주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예맥의 군사와 함께 움직일 수 있었는지 말이다.

 

 

앞에서 인용한 기록들은 모두 중국 만주 땅에 백제라는 또 다른 나라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자료로 볼 수도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삼국사기에도 대륙 백제에 대한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대무신왕이 비류수 상류를 지나 부여를 공격하기 2년 전인 기원후 19, '백제 주민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찾아왔다'라는 글이 있다. 한국전통문화학교의 이도학 박사는 이 기록이 만주지역의 백제 존재에 대한 국내 측의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꼽았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대륙 백제는 고구려의 속국 정도로 추정한다. 광개토왕릉비문'백잔(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구절을 두고 일부 학계에서는 과장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실제 만주의 백제는 이런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면 전후 상황이 쉽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백제의 중국 지역 존재설은 중국 송나라 시대인 13-14세기에 제작된 중국역사도설』〈우적도(禹迹圖)와 이를 기본으로 한 송본지리지장도』〈우적도(禹迹圖)로도 증명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 지도에는 현재의 중국 영토에 관련되는 지명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리민족사연구회의 오재성은 송본지리지장도는 송나라가 진한(秦漢)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지나(支那, 秦漢 = Chin Han, 이하 중국이라 적음)의 역사를 밝히는 역사부도로 볼 수 있으므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우적도(禹迹圖)에서 제일 주목되는 것은 삼국시대에 거론되는 지명들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지명인 북평(北平), 태원(太原)은 물론 진번(珍播, 眞番)과 주애(朱崖) 사이에 동이의 유적인 치우천황(蚩尤天皇)의 무덤이 있는 동평(東平)과 조선의 기자무덤이 있는 몽성(蒙城) 등이 나타난다.

 

 

특히 백제의 지명으로 사서에 나온 황산(黃山), 평원(平原), 대산(大山), 제성(諸城), 백마(白馬), 동명(東明), 정성(項城), 주류성(周留城), 동성(桐城), 독산(獨山), 덕안(德安) 등은 한반도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현 중국 반도의 동쪽 지역 즉 현재의 중국 요동지역에서 발견된다.

 

 

삼국사기』〈개로왕전(蓋鹵王傳)의 대토목공사에 관한 내용도 우적도에 의하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연와로 성을 쌓고 화려한 궁궐을 지었다.

도리하(郁里河)에서 돌을 가져다 아버지의 뼈를 장사지냈다.

하수(河水(한수(漢水), 한강(漢江))를 따라 사성(蛇城)에서 숭산(崇山)의 북쪽까지 제방을 쌓았다.

 

 

이들 기록에 나오는 지명은 중국의 황하(黃河)지역에 존재한다. 황하에는 제방이 있으며 숭산이라는 지명도 있고 제방의 서북쪽에 백제 지명인 청하(淸河)가 있고 그 북쪽에 석문(石門), 광양(廣陽)이 있고 동쪽에 성양(城陽)이 있으며 숭산의 북쪽에는 백제가 요서에 설치했다는 진평2(晉平二郡)이 있다.

 

 

[사진설명] 송본지리지장도. 백제에서 보이지 않는 사서의 지명들이 이들 지도에는 나온다(백제는 중국에 있었다)

 

 

<우적도>가 한국 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한민족과 연관이 많은 요(, 현재의 중화민국 지도에서는 좌권(左權)으로 적혀 있음)의 위치 때문이다. 현재는 요하의 동쪽을 요동이라 하고 서쪽을 요서라고 하는데 우적도(禹迹圖)를 참조하면 요동 요서는 요수(遼水)가 기점이 아니라 요(, 좌권)가 기점이 된다(백제의 요서영유()의 요서는 이 기록에 의할 경우 요의 동쪽에 있음).

 

 

우적도(禹迹圖)에 의하면 적어도 삼국지위지동이전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들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고구려는 현재 만주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아시아 동북부를 차지하고 그 아래 지역인 현재 중국 본토의 동부에 백제가 있었고 그 아래에 신라가 있었던 것이 된다.

 

 

특히 남제서에는 백제의 동성왕 시대에 산동반도 지방에 7개 군에 태수를 두었으며 임승국은 동성왕의 능이 산동의 청도서북(靑島西北(百支莢王之墓))에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백제가 중국 지역을 통치한 연한을 통산하면 약 400년에 가깝다고 적었다.

 

 

백제의 주민 구성을 보면 한강 하류 지역인 마한 세력권으로 포함하여 지배집단을 이루게 되는 북방 유이민들이 정착하기 이전, 이 지역 선주민 세력은 대개 한족(韓族)계통으로 볼 수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환제부터 영제 말기(147 189)에 이르면서 한예(韓濊)가 강성해져 낙랑군이나 그 지배 하에 있는 현의 힘으로는 이들을 제어할 수 없게 되자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 들어갔다. 건안 연간(196 219)에 공손강은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거친 땅을 쪼개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摸) 등을 보내어 유민(流民)들을 결집시켜 군사를 일으켜 한예를 토벌했다. 이 이후로 왜()와 한은 드디어 대방군에 소속되었다.'

 

 

이들 한예들이 주로 백제의 피지배층으로 보이며 백제 지배층을 구성했던 세력들은 각각 다른 지역에서 시차를 두고 남하하여 한강유역 각지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제 주민 구성에 신라, 고구려, , 중국인들이 섞여 있게 된 것은 4세기 전반 중국의 군현이 축출된 이후 급변하던 삼국간의 정세에서 많은 중국계 인물들이 백제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의 경우도 중국영유의 여지를 갖고 있다. 안호상은 신라의 국역이 만주의 삼개성(三個城)과 중화(中華)의 구개주(九個州)였다고 적었다. 장보고의 신라방(新羅坊)이 중국에 있었다는 것을 확대하여 신라방이 아니라 신라가 영유하는 지역이 중국에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오재성은 신라가 중국 본토에 영토를 갖고 있었다는 주장은 삼국사기로도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다고 적었다. 307년부터 통치자의 호칭을 ''으로 했던 신라와 503년 간(()에서 신라국왕으로 불렀던 신라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구당서는 은산, 신성, 고대인성의 고구려 동쪽에 있는 신라가 있고 고구려 남쪽과 백제 동쪽에 있는 신라가 있다고 기록했다. 이 설에 의하면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에서 분리된 사로신라(斯盧新羅)와 한반도에서 간()에서 신라왕이 된 신라가 있었다는 것이지만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삼국지위지동이전후한서의 기록도 인정하고 송대의 우적도(禹迹圖)도 인정하면서 현재 중국에 있는 지명도 참고한다면 삼국의 위치가 현재까지 인정되는 역사와 전혀 달라지게 된다. 한반도를 무대로 구성한 고구려 신라 백제 특히 백제의 역사는 한 마디로 엉망이 된다는 뜻이다.

 

 

[사진설명] 비류의 근거지로 알려진 백제우물’. 인천 문학산성 밑에 있었지만 지금은 매립돼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인천지역에서 삼국시대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됐거나 출토된 적이 없어 고대사 연구의 공백 지대로 남아있다(새로 쓰는 백제사)

 

  

비류백제와 온조백제

 

중국에 백제가 있었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4세기 중반에 만주 지역에서 확인되는 백제와 한반도 중부지역에 있던 백제국은 어떠한 관계였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이도학 박사는 명쾌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백제 건국사에는 두 사람의 시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왕의 둘째 아들인 온조가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 시조는 온조의 형인 비류인데 그는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인 구태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백제 건국세력이 부여계 또는 고구려계라는 서로 다른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중국 역사서들은 백제 건국자가 부여계 구태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주서: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해마다 4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

 

 

수서: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망이 돈독했다.

 

 

한원: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

 

 

한국과 중국 측 기록을 종합해보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와 비류 형제는 부여계이고 구태라는 인물도 부여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삼국사기에서도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로 씨를 삼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하간 백제 왕실은 부여계인 온조계와 비류계로 나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데 이와 같은 배경으로는 백제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글에 '우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고 백제가 나중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했으며 백제의 역대 왕들이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왔다는 점 등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동명왕 사당인 동명묘는 하남 위례성인 몽촌토성의 정동쪽에 위치한 숭산(현재 이름은 검단산, 경기도 하남시 소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도학 박사는 한강 유역에 등장하는 세력이 온조계이며, 만주 쪽 백제는 비류계 세력으로 추정한다. 문제는 다같이 부여의 후예인 비류계와 온조계가 '어떻게 결합했느냐'인데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만주지역의 비류계 백제는 강성한 전연의 계속되는 압박과 고구려의 강한 구속 정책에 의해 거점유지가 어려워짐에 따라 한반도로 남하했다. 그 결과 동일한 계통인 양 지배층은 대결을 피한 채 더욱 강화된 국가체를 형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 건국설화상 형()으로 전해진 비류계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해 왕실교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만주지역 백제세력의 한강유역 정착은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충남대 박순발 교수는 '서울의 석촌동 백제 고분군 지역의 기단식 석실 적석총(이른바 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 지역의 이전 시기 고분들과는 판이한 만주 지역의 고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4세기 후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앞 시기의 묘제형식을 계승, 발전시킨 양식이 아닌 새로운 묘제 양식을 지닌 세력이 돌발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이다.

 

 

박창범 교수의 천문기록 연구에 따른 백제 신라의 위치 비정은 앞에서 설명한 대륙백제(신라도 포함)설을 지지해주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백제의 최적 관측지가 발해만 유역이라는 사실은 백제의 요동영유() 등을 감안할 때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신라의 경우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견해를 보인다. 물론 신라 최적 일식 위치가 양자강 유역이라는 결과와 관련해, 가야의 허 황후가 양자강 유역의 허씨 집성촌과 관련이 있다는 설과 후대에 신라방이 설치된 곳이 양자강 하구 근처이므로 신라와 양자강 유역을 연결해볼 수 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음을 덧붙인다.

 

 

기록이 많지 않은 고대사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현재적 한계이다. 여하튼 우리 고대사를 과학으로 풀어 보면 앞으로 그 미스터리가 더욱 많이 규명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출처: 플러스코리아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9741§ion=section78§ion2=)

 

 

5.4  2008330일 플러스코리아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부여사

 

많은 독자분들이 역사관련 기사를 애독하고 계십니다. 저희 플러스코리아는 일제 식민사관를 청산하고 우리의 민족사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 [환단고기] 등 우리의 문헌들를 중심으로 고대 중국 문헌들과의 비교분석, 고고학를 토대로 유라시아 대륙과 만주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차원에서 가장 객관적인 관점으로 민족사학을 정립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과거인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우리 조상들의 정신과 역사에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고 미래를 설계하는 민족비젼이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관심과 애정바랍니다. 감사합니다.[편집부]

 

 

부여의 유래와 어원

 

부여라는 나라이름의 시초는 초대 단군왕검의 막내아들로 국방에 능통했다는 부여(夫餘)에서 왔다. 외교에 능통했다는 첫째인 태자가 부루(夫婁 : 2세 단군, 재위 기원전 2240~2182), 둘째가 부소(夫蘇 : 구려(원시 고구려=고리국)에 봉해짐), 셋째가 부우(夫虞 : 진번국(요동의 제후국)에 봉해졌다. 부여란 명칭은 초대 단군왕검의 넷째 아드님의 이름인데, 초대단군은 아들 부여를 제후국 국왕으로 봉했다. 그 나라의 이름이 부여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원시부여라 부른다.

 

 

장군출신 44대 구물단군은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쇄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티벳, 단군 44~47대까지 188년간의 수도)으로 옮기고 국명 또한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기에 이른다. '부여'로 국명을 바꾼 구물단군께서는 아마도 국방에 능했다는 단군왕검의 넷째 아드님이신 부여의 후손이라 여겨진다.

 

 

- 타 오르는 "(부여)" 을 상징하는 백제왕관(무녕왕릉 출토) -

 

 

'부여'의 어원은 청동기 문명을 가지고 알타이 지역에서 동진해 온 단군족의 이동과 관련된다고 보여진다. 단군왕검의 네 아드님의 이름에 들어 가는 ''의 어원은 당시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퍼져 있던 말(페르,펴라,벌 등)의 의미로 '(fire)'을 의미한다.

 

 

청동기 문명의 주역 단군족(부여.고구려)

 

또한 청동기 문명의 주역인 단군족은 ''이 중요했고, 몽골과 만주지역의 부여에 대해 고대 중국문헌은 "집마다 철갑옷.철기구 등이 가득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만큼 청동문명의 주역인 단군족이 ''을 이용하여 쇠를 자유자재로 잘 활용했다는 증거이며,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또한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역시 '개마무사'라는 철갑기마부대를 보유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고대 중국문헌은 부여와 고구려를 단군족(예맥족)의 직계후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예맥족은 요서(난하=고리국의 발원지)지역에서 청동기 문명을 일으켜 요동지역으로 이동하여 전파한 종족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청동기문명의 중심지와 관련하여 고고학적으로도 동진해 온 단군족의 초기 중심지는 요서지역의 난하(고구려의 발원지=번조선 수도=고구려 수도 평양성)지역이라 볼 수 있으며, 단군족의 중심세력이 동이족의 터전이며 북방의 외부세력의 침략과 유입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인 요동지방의 하얼삔(진조선의 수도 아사달)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일부는 한반도 지역으로 들어가 대동강 평양(마한의 수도)에 터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청동검의 형태도 만주와 유라시아 지역은 단군족의 이동시기형태인 비파 청동검이고, 비파청동검이 변형된 한반도의 세형동검은 단군족의 정착시기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민족사 역사왜곡하는 MBC

 

사전에 상황과 구조를 전제로 사건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조사확인없이 방송윤리를 위반해 가면서까지 대한민국의 원천기술을 보유한 황우석죽이기에 불을 당긴 MBC는 특허를 노린 황우석 죽이기 음모세력의 돈다발에 수단화되지 않았다면 상업주의에 치중한 엄청난 반국익적 오류로써 대국민 사죄와 수습에 나서야 한다. 또한 역사왜곡으로 수 많은 민족사학 세력으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받았던 사극 주몽과 일본자금유입설과 관련한 태왕사신기에 이어 소설가 최인호의 ‘4제국 가야를 드라마화 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미리부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드러 나야할 문제지, 결코 일개 방송의 이윤창출를 위한 상업주의적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MBC는 자신의 엄청난 오류에 대해 대국민 사죄와 수습에 나서던지 방송국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과 조상을 수단화하고 국민을 파는 반민족 반국가적 방송행위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엄청난 오류에 대한 사죄없이 겉으로 민족과 민중을 내세우며 생각하는 척 하며 속으로는 잇속을 챙기려는 파렴치한 행위는 추악한 위선과 거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편집자 주]

 

 

고구리 건국이야기를 다루었던 MBC드라마 <주몽> 무엇이 왜곡되었나?

 

우리 고대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드라마이였지만, 제작 전 문헌자료에 대한 치밀한 비교분석과 자문없이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상황설정과 지나친 극적 구성으로 실제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한 사극이였다. 진실을 외면한체 조상들의 역사를 돈벌기를 위한 상업성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건 엄청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에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대사의 고리를 고스란히 복원시켜주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드라마 <주몽> 시대의 역사를 알아보고 한민족 상고사의 국통맥을 간추려 소개하며,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고 있는 반민족적이고 반국가적인 일제 식민사관에 대항할 자료로 제시한다.

 

 

어린시절 주몽은 겁쟁이?

 

왜곡의 한 예로, 고구려를 창건한 주몽의 인물됨을 살펴보자.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도, 주몽은 기골(氣骨)이 뛰어나 범인과 달랐으며, 불과 일곱 살이 되어 스스로 활을 만들어 백발백중의 실력을 자랑하였다고 나온다. 그래서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기에(善射者謂朱蒙) 그를 또한 주몽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주몽은 나이 스물이 되도록 활은 고사하고 칼 한번 들어보지 못한 겁쟁이로 나온다. 극적 전개를 위한 각색이라고 해도, 고구려 창업군주의 인물됨을 왜곡하는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드라마 <주몽>이 한민족의 상고사 특히 부여사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MBC주몽의 한 장면

 

 

천제지자(天帝之子) 고주몽

 

근래 TV 사극은 옛사람들의 정신의 맥과 한민족의 문화를 소개하는 측면보다는, 권력과 재물을 둘러싼 야비한 다툼만을 부각시켜서 드러내는 경향이 짙다. <주몽> 역시 고대 인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전제로, 우리 역사를 지나치게 정치사, 전쟁사로 몰아가는 문제점이 있다.

 

 

고대 인물들이 현대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  

 

주몽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주몽이 영특하고 대범하고 영웅적인 기개가 있으니, ()부여국 왕자들이 주몽한테 왕위를 뺏길까봐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부여를 떠나라고 한다. 주몽이 도망을 가다가 엄리대수(淹利大水), 즉 지금의 송화강에 다다랐다. 강을 건너야 되는데, 뒤에서는 ()부여 군사가 주몽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온다.  

 

 

그 때 주몽이 수신(水神)에게 말하기를, “아시천제지자(我是天帝之子)”,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라고 외친다.

 

 

이 말은 나는 천제 즉,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천자다.’ 이런 뜻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에게 천제 문화, 천자문화가 생생히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호태왕 광개토열제의 비문에도 우리 고주몽 태조께서는 천제지자(天帝之子)’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쓰여 있다. 그 말은, 당시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대행자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잃어버린 한민족사의 고리, 부여(夫餘)

 

이제 구체적인 역사 내용을 살펴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부여사의 왜곡으로 인해 드라마 <주몽>의 등장인물간의 인척관계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다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진(高辰)의 손자인 불리지(일명 고모수高慕漱)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유화부인과 해모수가 부부인연을 맺은 것으로 설정하여, 유화부인이 시증조할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이런 역사왜곡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부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

 

드라마에서는 주몽이 태어난 나라를 부여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흥망사를 살펴보면, (원시)부여, 대부여,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서부여, 남부여 등 수많은 부여가 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 시청자들의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몽이 태어난 나라는 동부여이다. 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자인 해모수 단군의 고손자로서 황손(皇孫)이다. (삼국유사도 분명히 해모수가 북부여의 건국자임을 밝히고 있다.) 광개토열제의 비문에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했던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사가들의 역사왜곡과 국내사가들의 중국사 베끼기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을 잘 모르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왜곡에 기인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다 언급하기 힘들지만, 중국은 한() 무제 때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 이후로 동방의 천자국(天子國), 스승의 나라, 조선(朝鮮, 고조선)의 역사를 일부러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조선은 세상에서 아는 것과 달리 하나의 국가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주체국 아래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는 일종의 연방체제로 이루어진 대제국이었다. 조선이란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단지 제후국의 이름만 거론하면 조선은 역사 속에서 오리무중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후세의 김부식과 같은 우리의 역사가들은 중국인들이 써준 역사를 베끼기에 급급했던 탓에 우리의 역사, ()조선사는 실체가 없는 신화로만 남게 된 것이다. ()조선사를 역사 속에서 지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부여사 또한 지우는 것이었다. 조선의 역사 계승은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거쳐서 열국시대와 사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가야), 남북국시대(대진국·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게 되는데, 북부여를 역사 속에서 지우면 뒤에 생겨난 국가들은 ()조선과 전혀 관계없는 역사의 미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중국인들은 노렸던 것이다. 

 

 

읽어버린 부여사

 

그럼 구체적으로 부여의 정체를 풀어보자. 이것이야말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다빈치코드>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올 동양 한민족사의 실체에 얽힌 중대한 비밀코드를 풀어내는 열쇠이기도 하다.  

 

 

()조선의 역사 |

 

단군조선은 군사지휘권을 가진 진조선(만주.연해주.몽골.시베리아)을 중심으로 번조선(산동.요서)과 마조선(한반도)으로 분할통치하는 3한 관경제 나라였다. 진조선의 단군은 대단군으로 불리였으며, 번조선과 마조선은 대단군의 혈족이나 덕이 있고 현명한 유명인사가 부단군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부여의 원뿌리는 ()조선(朝鮮)이다. ()조선은 마흔일곱 분의 단군이 나라를 다스렸다. 한 나라를 크게 진한(辰韓, 후기엔 진조선) 번한(番韓, 후기엔 번조선) 마한(馬韓, 후기엔 막조선) 셋으로 나눠, 진한은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번한 마한에는 부단군을 두어 일종의 연방체제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삼한 안에도 더 작은 제후국들이 존재했다.

 

 

대부여의 등장

 

44대 단군은 구물(丘勿)단군이다. 그는 본래 43대 물리단군 때 상장군(上將軍)이었다. 43대 단군 때 사냥꾼의 두목 우화충이 사냥꾼들을 모아 반역을 저질렀다. 그들이 수도를 점령하고 물리단군이 피난 중에 죽자, 이에 맞서 반란자들을 제압한 이가 바로 상장군 구물이었다.

 

 

이에 5(우가 마가 구가 저가 양가; 5인으로 구성된 조정의 주요 대신(大臣)) 제신들은 그를 44대 단군으로 추대하게 된다.  

 

 

구물단군은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쇄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개원(開原), 단군 44~47대까지 188년간의 수도)으로 옮기고 국명 또한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기에 이른다. ()조선의 종통은 보전하고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다. (‘부여란 명칭은 초대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의 이름인데, 초대단군은 아들 부여를 제후국 국왕으로 봉했다. 그 나라의 이름이 부여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원시부여라 부른다.) 

 

 

요컨대 ()조선의 국호가 부여(대부여)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조선의 국통은 다름 아닌 부여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제식민사학을 답습한 국사교과서에서는 ()조선과 부여가 어떤 관계이며, 또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어떻게 국통맥이 이어졌는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있다.

 

 

북부여의 등장

 

()조선 말기인 대부여로 오면서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군권이 독립되고, 진조선의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군웅들이 할거하며 나라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47대 단군 고열가(高列加)50여년에 걸친 치세에도 결국 이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고, 5가 대신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산으로 은거하게 된다.(BCE 238) 이로써 2,096년간의 ()조선은 막을 내리고, 5(五加)에 의한 과도기의 공화정이 실시된다.

 

 

이 무렵 ()조선의 종실(宗室) 사람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나(BCE 239) 세력을 키우면서 6년간 계속된 공화정을 철폐하고 5가 제신들의 추대로 단군조선의 대통을 이어 다시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하게 된다(BCE 232). 이렇게 대부여의 국통은 북부여로 이어진 것이다.  

 

 

해모수는 국가 체제를 그대로 보전하고 나라 이름만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해모수도 단군으로 호칭했으므로, 해모수 단군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해모수가 북부여라고 나라이름을 정한 데에는, 북부여가 대부여곧 단군 ()조선의 정통정신과 법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역사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해모수(단군조선의 제후국 고리국 왕손)/고두막한(47대 고열가 단군후손)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그러면 북부여의 국통은 어디로 이어졌는가? 고구려로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구려후(高句麗侯) 고진(高辰)3대손이다.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옛날 시조 추모(주몽)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다(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 하여 강한 북부여 계승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단군의 ()조선-북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사의 국통은 삼신문화가 전수된 정신사적인 정통맥일 뿐만 아니라, 직계조상과 후손으로서 혈통줄을 타고 계승된 것이다.  

 

 

드라마 <주몽>에서 보이는 부여는 엄밀히 말해서 동부여이다. 그런데 해부루가 다스렸던 동부여는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듯 중국의 전한(前漢)과 국경을 맞대고있지도 않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가질 수도 없었다. 동부여는 가섭원 부여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만주 흑룡강성 통하현(通河縣)에 위치하고 있어 북부여에 의해 막혀 한나라와 교류를 할 수 없었다.

 

 

드라마가 상정하는 그 자리에는 사실 북부여가 자리잡고 있었다.

 

 

 

역사에서 사라진 인물, 동명성왕 고두막한

 

또 드라마에서 볼 때 전한(前漢)이 매우 강성하여 부여 국내에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역사적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동부여를 떠나온 고주몽은 북부여의 국통을 잇게 되는데, BCE 58년 고무서 단군이 죽자 고주몽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즉위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은 북부여의 6대 단군인 고무서(高無胥)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후일 소서노는 그의 아들 온조와 함께 백제를 건국한다.  

 

 

그러니까 소서노는 드라마에서처럼 거상 연타발의 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 본문에서조차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 후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단지 일설로만 연타발의 딸일 가능성을 주를 달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나라의 국통맥을 치졸하게 끊어놓는 것이다. 연타발은 고구려의 창업공신으로 고주몽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BCE 200년경 유방이 한나라를 일으킨 후, 연나라 사람 위만이 한의 세력에 쫓겨 ()조선의 분국인 번조선의 변방으로 피난을 와 있다가 BCE 194년 번조선 왕조를 강탈하게 된다.

 

 

고추모의 어머니 유화와 고추모

 

 

이후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 한나라 무제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인해 번조선 위만정권도 막을 내리게 된다.(BCE 108) 한 무제는 계속해서 번조선 일대와 북부여의 서쪽변방으로 침략을 하는데, 이 때 서압록(요하)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가는 곳마다 격퇴하여 민심을 크게 얻게 된다. 고두막한은 또한 ()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그는 민심과 혈통을 바탕으로 북부여 4대 고우루 단군을 이어 제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개칭하게 된다.

 

 

따라서 세상에서 말하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은 고주몽이 아니다. 또한 북부여를 창건한 해모수도 아니다.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인 것이다. 그가 바로 북부여 5대 단군이며 고주몽의 장인이 된 6대 고무서 단군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니까 소서노의 할아버지인 셈이다.  

 

 

물론 주몽이 동명부여’(졸본으로 도읍을 옮겼기에 졸본부여라고도 함)를 계승하였으므로, 주몽을 동명왕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참고로, 북부여 4대 단군 고우루를 이어 그의 동생 해부루가 5대 단군으로 먼저 즉위하였으나, 고두막한에 쫓겨 동쪽의 가섭원이란 곳으로 나라를 옮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부여의 시작이다.) 

 

 

고두막한의 태양 같은 의기와 충의에 힘입어 사실상 한나라는 조선의 고토에서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한나라가 번한의 영토 부근에 한사군(낙랑, 임둔, 현도, 진번)을 설치한 것은 사실이나 고두막한을 필두로 한 민중의 뜨거운 저항으로 조기에 무너지고 만다.

 

 

지금의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제 이 한사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혹자들이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된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라 할 수 있다. 

 

 

민족사의 맥은 정신사에서

 

이상의 내용은 주로 한민족의 정통도가사서를 묶어 편집한 환단고기내의 단군세기, 북부여기, 고구려국본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개한 것이다. 이런 사서들은 한양조선 시대조차 중국에 사대하는 풍토로 인해 금서로 묶여 있었다. 흔히 강단 사학자들이 기존의 역사 서술구도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역사 서술의 사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참역사는 정신사를 알아야 한다. 왜 고주몽 성제는 최초의 연호(年號)다물(多勿)’이라고 했던가? 다물이란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회복하다’, ‘되물리다는 뜻을 가진 한민족의 고어(古語)이다. 고주몽 성제는 ()조선의 역사적 문화적 영광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혈통적 정신적인 연계성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고구려와 고조선이 별개의 나라인 것처럼 서술하는 현재의 역사 기술 풍토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한민족의 참 역사는 고조선이 나라를 다스렸던 근본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한민족 역사는 단순히 청동동검과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유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오늘날과 같이 스테인리스 그릇이 아닌 토기에 음식을 해먹었더라도 오히려 오늘날 인간보다 훨씬 더 수승(殊勝)한 인간적 덕성으로 살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선사(先史)시대라 하여 반 짐승과 동일한 인간으로 보는 현대의 역사 인식도 또한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부

(출처: 플러스코리아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9904§ion=section78§ion2=)

 

 

5.5  201027일 플러스코리아 기사 신라 '황금보검'의 실체와 주인은 누구? 도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왜 한반도남부지역에서 발견이 되었나

윤복현 역사칼럼

 

경주 대릉원 인근 계림로 14호 고분에서 출토된 눈부신 황금보검은 이국적이고 화려함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도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왜 한반도남부 경주지역에서 발견된 것일까?

 

 

황금보검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그 원형을 보유하고 있는 검이라 할 수 있다. 다채로운 색감과 수정과 금으로 장식한 섬세한 조형미는 과히 예술적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런데,이러한 황금보검이 출토된 지역은 켈트족이 활동했던 불가리아 트로키히지역으로 유럽과 로마제국을 공포로 도가니로 몰아 넣으면서 로마제국으로부터 엄청난 금액의 조공을 받았던 4세기 훈족의 본거지이기도 했다.그러나, 신라의 황금보검의 원형은 켈트족이 주인공들이였으나,켈트족이 사라진 후에 로마인들이 제작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문제는 황금보검이 신라인들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아니면 주문제작한 것인지의 문제인데,정밀한 고고학적 검사를 통해서 황금보검은 동로마 금장식 장인들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유리잔들 또한 당시 로마인들이 제작한 로마유리잔들이였다.당시 신라인들은 로마에서 인도로 이어지고 인도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국제 해상무역로를 통하여 활발한 국제교역을 했음을 할 수 있다. 경주는 계획된 국제도시였고, 서역인들로 넘쳐 났으며, 서역인들은 신라인들로 살다가 신라땅에 묻히기도 하였다.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신라인들

 

국경이 없이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었던 유라시아 초원지역은 언제나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되고 융합되는 공간이였다. 그리고 그 문화교류의 주인공들은 '몽골리안'으로 대변되는 아시아 초원세력이였다. 기원전 800년 스키타이로 시작되는 초원문화의 특징은 '황금문화'였다. '알타이산''황금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시아 초원세력은 황금으로 샤먼문화를 표현하며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했다., 자신들의 얼굴은 황금처럼 누런 색이며 황금처럼 빛나는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후손들과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목축을 위해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초원의 주인은 정세변화와 기후변화에 따라 자주 바뀌었다. 지금은 유라시아대륙을 지배하며 동서문명을 하나로 이어 주었던 징기즈칸의 후예들인 몽골인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지만, 고대에는 스키타이.흉노.선비.거란.몽골로 불리운 북방의 한민족이 초원길을 통하여 유럽에 한국의 문명을 전파하였고, 한국문명의 젖을 먹은 유럽은 다시 발전시켜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통하여 아시아를 침력하는 서양 제국주의 시대를 열기도 하였다.

 

 

이들 초원세력 중에 경주.김해.일본열도지역에서 출토되는 기마유물들의 주인공은 바로 4-5세기 선비족이다.

 

 

흉노족은 이미 한나라에 공격을 당하여 초원지역에서 사라지거나 선비족에 흡수된 시기가 2-3세기다. 한나라에 투항한 김일제세력도 물론 흉노세력이지만, 기원전 10세기에 한나라에 투항한 세력이기 때문에 기마문화를 상실하고 남흉노족처럼 한족화된 흉노계이기 때문에 김일제세력이 개국을 도운 신나라가 후한 광무제엑 망하고 산동지역에서 해로를 따라 한반도남부지역으로 들어온 시기가 서기1-2세기이기 때문에 경주지역의 4-5세기 적석목곽분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고구려 유리태왕때부터 전쟁을 시작한 고구려와 선비족은 관계는 악연관계라고 할 수 있다. 만주지역과 한반도 북부지역을 평정하고 고구려 선조들의 나라 고리국이 존재하는 요서지역으로 진출하려는 고구려 태조왕 시기부터 초원세력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선비족은 요하지역을 경계로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중원지역을 노리는 선비족의 무용부족국가 '전연'은 먼저 고구려를 굴복시킨 후에 중원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고국원왕 때 드디어 전연은 황제 모용황이 5만군대로 고구려가 예상못한 험한 남부공격루트를 따라 쳐 들어와 환도성을 점령하고 5만의 고구려인들과 미천왕의 무덤을 도굴하여 미천왕의 시체를 가지고 갔다.

 

 

반면 고구려북부지역으로 공격해 들어올 것으로 예상한 고구려는 고국원왕의 동생 고무로 하여금 5만의 군대로 방어하게 하였으나, 모용황의 동생이 지휘하는 고작 수천의 선비군대로 공격했기 때문에 고구려 북부전선은 고구려군대가 선비군대를 막았고,고구려군에 패한 선비군대는 사분오열되어 일부가 동해안 루트를 따라 경주지역까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선비족이 고구려를 공격한 당시 조양지역에 묻힌 선비족 나라 전연의 고분에서 경주.김해지역 적석목곽분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청동솥(동복)들이 발견되었다는 점은 고고학적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할 수 있다.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주인은 2세기이후 흉노족을 흡수하고 초원의 주인이 된 선비족

 

유럽지역을 지배한 소수의 훈족과 몽골기마군대의 위력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선비의 수천 기마군대가 사로국을 무너뜨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고 볼 수 있다. 선비모용씨는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개국했고,일부세력은 김해 등 가야지역으로 들어가 가야의 지배세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선비족의 구리솥-동복(),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흉노계 선비 기마상()

 

 

신라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 경남 창녕의 가야의 적석목곽분()

 

 

신라 법흥왕이전까지 신라왕족은 모두 모씨였다고 할 수 있다.신라가 김씨왕조라는 인식은 진흥왕시대부터이다. 법흥왕은 자신의 이름을 모진에서 김원종으로 개명했다고 [삼국사기][양서-신라전][만주원류고]에서는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경북 울진군에서 발견된 법흥왕봉토비문에도 수 많은 모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다.신라 법흥왕은 법령을 공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신라개혁에 앞장 선 왕이다. 순장의 인원도 사람에서 모형으로 대체하도록 국법으로 명시한 것은 아마도 초원문화를 포기하고 농경문화를 선택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신라왕조를 연 선비족은 모씨에서 김씨로 개명을 한 것일까? 그것은 당시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하는 고구려가 원수지간인 선비 모용씨가 신라왕조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게 된다면 신라의 국운은 그야말로 태풍앞에 촛불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고, 신라권력집단에서 소외된 김알지세력과 동일한 초원세력으로써 연대함으로써 숫적으로도 열세한 선비족이 신라권력을 유지하는데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예 김일제후손으로 자처하는 성씨 개명을 단행했다고 할 수 있다. 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 서기 521년 중국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요 이름은 ()이라고 적고 있다. 그 뒤 이연수란 당나라 학자가 편찬한 南史(남사)란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을 ()이름을 ()로 기록하고 있다. 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梁書(양서)의 기록을 南史(남사)에서 옮겨 적다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국역사서 通典(통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慕秦으로 적고 있다.

 

 

흔들거리는 신라금관

 

 

신라개국신화는 선비족 모용부족의 신화가 유사하며, 선비모용부족장들은 흔들거리는 왕관을 쓰고 다녔다는 점에서 흔들거리는 금장식의 신라왕관의 주인은 선비족의 모용부족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선비족 모용부족의 나라 '전연'에서 활약한 사람들의 고분에서 발견된 장신구와 유리그릇 등 각종 출토물이 신라와 가야, 나아가 일본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 선비족 모용씨가 신라-가야-일본열도로 진출하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출토 유물-로마에서 수입한 유리잔

당시 신라가 해로를 통하여 로마와 교역했음을 증명하는 유물이다

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3768&section=section78&section2=%EC%83%81%EA%B3%A0%EC%82%AC/%EA%B3%A0%EB%8C%80%EC%82%AC/)

 

 

5.6  2013122일 신동아 201302월 호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거란 역사서 요사(遼史)’ 의 놀라운 증언

이정훈 기자

 

요령성 요양은 본래 고조선 땅이었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이후 요양이 수도

 

패수도 요양 근처, 발해 중경도 요양에 위치

 

 

사회과부도 교과서의 고구려 지도. 우리 교과서는 장수태왕 이후 고구려가 지금의 북한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고 밝혔으나, ‘요사는 광개토태왕 이후 패망할 때까지 요양을 평양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고대에는 지금의 요서를 요동으로 불렀으니 고구려 영토는 요하를 건너 서쪽까지 미쳤다.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우리를 압박한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지금의 중국 땅에서 일어났고 관련 유적과 자료가 중국에 있으니 우리는 발만 동동 구른다. 이런 답답함을 타개하기 위해 몇몇 학자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정사(正史)요사(遼史)’를 완역했다. ‘요사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와 함께 제3자의 관점에서 우리 고대사를 알려주는 사서로 꼽혀왔다. 이 때문에 여러 학자가 부분 번역했지만 완역되기는 처음이다.

 

 

번역 기획은 복기대 뇌교육대학원 교수(고고학)가 했다. 복 교수는 중국 유학 시절 요사금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만주지역을 답사해 사료와 맞춰보며 요사’ ‘금사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귀국 후 그는 스승인 윤내현 단국대 교수와 요사전문가인 김위현 명지대 교수와 협의한 뒤 교육인적자원부를 설득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밀어붙일 때라 교육부도 우리 국사를 다시 연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요사’ ‘금사인정 안 하는 중국

 

그리하여 역사 기초자료 번역 및 연구 사업을 입안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을 통해 번역을 지원했다. 단국대 이상훈 교수와 이성규 교수가 실무를 맡아 출판을 하고 번역은 김위현 교수가 제자 김한기 변은숙 씨 등과 함께 했다. 김 교수는 번역의 전체적인 틀을 만들어 세밀히 고증했다.

 

 

중국은 한 왕조가 끝나면 다음 왕조가 이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렇게 25개 역사서가 만들어졌다(통칭 ‘25’). 그런데 선비족이 세운 북위 등 516국 시대의 왕조와 요, , 몽골족의 원(), 여진의 후예인 만족(滿族)이 건국한 청()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었다. 한족이 겁낸 적국인데 중국을 지배하고 통치했기에 다음 왕조는 그들의 역사서를 제작했다. 그런데 요사금사를 제작한 것은 한족이 아닌 몽골족의 원나라였다. 두 사서만 비()한족이 만든 것이다(반면 원사는 한족 왕조인 명나라가 만들었다).

 

 

이 때문에 중국 역사학계는 두 사서가 부정확하다며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조선과 대한민국에도 전해져 같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두 사서는 원나라 말기 몽골인인 탈탈(脫脫)의 주도로 급하게 제작됐기에 약간의 오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 역사학계는 이를 이유로 두 사서의 기록을 무시한다. 그러나 제3자인 우리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기술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요는 고려와 세 번 전쟁을 했고,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적국 고려의 선조인 고구려와 고조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으니 이들의 기록은 더욱 객관성을 갖는다. 학자들은 이에 착안해 동북공정에 맞설 객관적 사료 확보를 위해 1월 중순 요사번역본을 내놓았다. ‘금사는 내년 말 완역본을 낼 예정이다.

 

 

요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요나라 지리를 정리한 지리지. 그중에서도 요나라 동쪽 지방인 동경도부분이다. 요나라는 동경 서경 남경 상경 중경의 오경(五京) 제도를 갖고 있었다. 요나라는 동경도(東京道)의 중심인 동경을 지금의 요령성 요양(遼陽)에 뒀다. 그때도 요양은 요양으로 불렸다.

 

 

요사지리지 동경도 편은 요양이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는 글귀로 시작한다. 조선은 고조선을 가리킨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해놓았는데 요사에선 도읍지가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4군은 만주에 있었다

 

고조선에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있었다. 지리지는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옥에서 풀어줘 그가 조선으로 가자 그 땅에 책봉했다고 밝혀놓았으니 조선은 곧 기자조선이다. 8조법금은 기자가 만들었는데, 지리지도 (기자)8조법금을 만들었다고 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요양에 도읍했음을 재확인했다.

 

 

지리지는 기자조선이 40여 대 왕을 이어오다 중국 연()나라 때 매우 약해져 연나라에 속한 진번조선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연나라는 중국 역사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때의 연은 진시황의 진()과 다투다 패배한 전국 7중의 하나인 연이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은 진시황이 죽자 곧 무너지고, 항우와 유방이 다투다 유방이 승리해 한(, 서기전 206~서기 220)나라가 등장했다.

 

 

황제가 된 유방(한고조)은 고향 친구이자 부하 무장으로 공을 세운 노관을 연왕(燕王)에 봉하고 제후로 삼았다. 유방은 건국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면서도 그들이 한나라 왕실을 넘보지 않을까 의심했다. 한나라군 총사령관으로 항우 군을 궤멸시킨 1등 공신 한신을 특히 의심해, 몇 가지 혐의를 씌워 그의 허리를 잘라 죽였다(요참형·腰斬刑). 그때 한신이 원한에 사무쳐 남긴 말이 바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한신이 죽임을 당하자 책사 장량은 재빨리 낙향했다. 장량이 은둔한 곳이 오늘날 유명 관광지가 된 장가계(張家界). 유방이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해가자 연왕인 노관도 불안을 느껴 흉노의 땅으로 도망갔다. 노관 밑에서 장수를 하던 이가 위만인데, 상사가 달아나자 그도 위기를 느껴 요양으로 도주했다. 지리지는 그때 요양 일대는 빈 땅이었는데 위만이 들어와 왕을 했다고 밝혀놓았다. 위만조선이 일어난 것이다.

 

 

한나라와 위만조선은 당연히 사이가 나빴다. 이 때문에 유방의 손자로 7대 황제가 된 유철(한무제)이 해륙(海陸)으로 맹공격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세웠다. 지리지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그 땅을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으로 삼았다고 밝혀놓았다. 그렇다면 한4군은 요양을 중심으로 한 만주에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한4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고 배웠다

 

 

우리는 요령성 땅을 세로로 가르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동쪽을 요동(遼東)’, 서쪽을 요서(遼西)’로 부른다. 요령성을 관통하는 강을 요하로 부르게 된 것은 거란이 요나라를 세운 다음이다. 요나라가 있기 전 이 강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고대의 기록은 중국인만 남겨놓았는데, 요양은 중국인의 역사 무대인 중원(中原)에서 너무 먼 곳이기에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요하의 ()’멀 요자다. 한족은 요하를 멀리 있는 강으로만 이해했다. 고대 중국인들은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흐르는 강을 요하라고 불렀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연결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산해관까지를 영토로 인식했으니, 그곳에서부터 동쪽의 강은 요하로 통칭됐다.

 

 

산해관 동쪽으로 난하, 대릉하, 그리고 지금의 요하가 있다. 진나라 때의 중국인들은 난하를 요하로 불렀으니 난하 동쪽이 요동이었다. 난하 동쪽은 지금 요하의 서쪽이니, 요나라 이전인 고구려 시절에는 요동이 요서가 된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는 요동을 지금의 요동으로 보고, 고구려 성()이 전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던 것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수()와 당()의 성은 지금의 요하까지 이르도록 동진(東進)시켰다. 고구려 영토를 중국에 헌납한 것이다.

 

 

요사지리지는 요양은 진()나라 때 요동의 변방에 속했다고 밝혀놓았다. 요양은 요하 바로 동쪽에 있으니, 요동의 변방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진나라 시절이라면 요동의 변방에 있는 것이 맞다. ‘요사는 고대의 요동이 지금의 요서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요양이 고구려 수도 평양

 

거란의 선조는 고구려와 혈투를 벌이고 패배해 복속됐다가 고구려가 무너진 후 세력을 형성해 고구려를 이은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리다. 따라서 이들이 고구려와 관련해서 거론한 지리 기록만큼은 정확하다고 봐야 한다. ‘요사지리지는 고구려와 선비족 간의 싸움을 소재로 고구려 수도인 평양의 위치를 거론한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연결한 것은 북쪽에 있는 흉노의 공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 이후 한나라의 여러 왕이 흉노를 토벌했다. 흉노족이 힘을 잃은 내몽골 지역에서 일어난 게 선비족이다. 선비족에서는 모용부와 우문부 탁발부 등 여섯 부족이 강력했는데, 리더는 부족 이름을 성()으로 사용했다.

 

 

먼저 크게 일어난 것은 모용외-모용황 부자(父子) 때의 모용 선비족이다. 아버지 모용외가 세력을 키우자 아들 모용황은 황제에 올라 연()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모용씨가 세운 연나라를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노관이 이끌었던 한나라 제후국인 연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전연(前燕)’으로 표기한다.

 

 

그때 중국에서는 유비와 조조 손권이 다투던 3국 시대가 끝나고 중국인과 북방민족이 뒤엉켜 싸우며 여러 왕조가 명멸하는 위진남북조시대, 일명 516국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전쟁이 잦았다. 동쪽에서 팽창하던 고구려는 서쪽에서 확장하던 모용외 세력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연전(高燕戰)을 벌인 것이다.

 

 

가장 강력한 고연전(高燕戰)’은 고구려 고국원왕 때인 342년 전연의 초대 황제 모용황 군의 침입으로 일어났다. 모용황은 아버지가 당한 것을 앙갚음하려는 듯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고구려군을 대패시키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아내를 생포했다. 그리고 고구려가 감히 대항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갔다

  

 

이에 고국원왕이 굴복해 신하가 되겠다고 하자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고 어머니도 보내주었다. 그리고 고국원왕을 제후국 고구려의 왕으로 임명했다. ‘삼국사기는 전연의 공격을 받기 전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었는데 침공 후인 343년 고국원왕이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천도했다고 적어놓았다.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의 압록강가에 가보면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태왕의 능을 비롯한 여러 고분과 광개토태왕비, 그리고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사가들은 전연군에 대패한 고구려가 임시 천도한 곳이 집안 일대가 아닐까 보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복수혈전

 

고구려를 굴복시킨 전연은 고국원왕이 살아 있던 370년 새로 일어난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고국원왕은 원수를 갚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로 진나라를 부추겨 전연을 공격해 무너지게 했다. 전연을 무너뜨린 진나라는 진시황의 진나라 등과 다르다. 사가들은 이 진을 다른 진과 구분하기 위해 전진(前秦)’으로 적고 있다.

 

 

전연이 전진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기 전, 모용황의 동생 모용수가 전진에 투항해, 부견의 부하가 됐다. 전연이 무너진 이듬해 근초고왕이 이끄는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국원왕은 평양(평양 동황성인 듯)까지 쳐들어온 백제군과 싸우다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371). 기사회생을 위해 애쓰던 풍운아 고국원왕은 그렇게 스러졌다.

 

 

이로써 백제는 무너진 전연을 대신해 고구려의 새로운 원수가 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이 등극하면서 국력을 회복했다. 그러던 382년 전진이 동진(東晉)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그러자 전진에서 부견의 부하로 있던 모용수가 독립해 384년 다시 연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이를 후연(後燕)’으로 부른다.

 

 

후연이 출범한 해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이 죽고 동생인 고국양왕이 등극했다. 이듬해(385) 1월 고국양왕은 후연을 공격해 승리했다. 그해 11월에는 후연이 반격해 승리했다. ‘고연전이 재개된 것이다. 391년 고국양왕이 죽자 그의 아들 광개토태왕(391~412)이 등극했다. 396년 후연에서는 모용수가 죽고 아들 모용보가 황제가 됐다.

 

 

광개토태왕은 400, 402, 404, 407년 연거푸 공격해 후연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광개토태왕 군은 지금의 내몽골과 하북성 지역까지 깊숙이 침투했다. 광개토태왕비는 선비족을 비려(碑麗)’로 표현하면서 광대토태왕이 비려를 공격해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고 적어놓았다. 지리지는 모용보가 이끄는 후연이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의 옛땅을 내주게 된 것을, ‘모용보가 고구려왕 고안(高安·광개토태왕의 이름)을 그곳(요양)에 살게 했다고 적어놓았다.

 

 

후연은 광개토태왕 군과 함께 탁발 씨가 세운 또 다른 선비족의 나라 위(·북위)의 공격을 받아 그로기 상태가 됐다. 탁발 선비는 위나라를 세운 뒤 성을 원()씨로 바꿨다. 이 위나라를 조조가 세운 위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북위또는 원위로 표기한다. ‘요사지리지는 원위의 태무제가 그(광개토태왕)가 살고 있는 평양성으로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이것도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요양으로 재천도했음을 보여준다.

 

 

407고연전이 끝나자 후연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고구려 출신인 고연이 새 왕조를 열었다. 고연은 연을 그대로 국호로 삼았는데, 사가들은 이를 북연(北燕)’으로 명명했다. 광개토태왕의 복수심은 대단했다. 그는 할아버지(고국원왕)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를 공략해 아신왕을 생포해 항복을 받았다. 백제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광개토태왕비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새겨놓았다.

 

 

북한도 평양 수도합세

 

고구려와 합세해 후연을 무너지게 한 북위는 516국 시절 선비족이 세운 나라 가운데 가장 강력했다. 이러한 북위는 고구려와 싸우지 않고 외교 관계로 경쟁했다. 고구려와 북위가 양대 효웅이던 시절 또 다른 선비족인 거란이 등장했다. 광개토태왕은 이들을 공격해 굴복시켰다. 그 후 거란은 고구려가 약화될 때만 반기를 드는 고구려의 반()복속 종족이 됐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장수태왕 때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기록했다. 시차는 있지만 평양 동황성에 있던 고구려가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지리지에서, 장수태왕 때 옮긴 평양은 서경이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고려 때 서경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 국사학계는 장수태왕 때 고구려가 북한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보게 됐다. 북한 역사학계는 평양이 고향인 김일성 가계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사지리지는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평양으로 불렀던 원래 수도 요양으로 재천도했다고 밝혀놓았다. 이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가장 큰 혼란이다. 고구려와 싸운 거란이 요양을 고구려의 수도라고 해놓았는데, 우리 역사학계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은 북한의 평양인가, 중국의 요양인가.

 

 

고구려 말기인 영양왕 때 수나라가 대군을 보내 공격했다가 살수(薩水)에서 을지문덕 군에게 대패했다. 내호아가 이끈 수나라 수군은 패수(浿水)를 따라 들어가 평양을 공격하려다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 수군에게 일격을 당했다. 우리는 고구려의 수도를 평양으로 보기에 패수를 대동강으로, 살수는 청천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 사서들의 기록은 다르다. 살수에 대해 거론한 중국 사서는 거의 없지만, 패수를 거론한 사서는 많다. 중국 사서들은 패수가 요령성에 있었던 것으로 서술해놓았다. ‘요사지리지가 요양 인근의 강 이름을 거론하는 중에 패수가 있다. 패수가 요양 인근에 있다면 수나라와 싸울 때의 고구려 수도는 평양이 아니라 원래부터의 수도인 요양이라는 얘기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들은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가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뒀다고 했다. ‘요사지리지도 마찬가지인데 안동도호부는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았다. 고구려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닌 요양을 수도인 평양으로 삼고 있을 때 당나라에 패망했다고 밝힌 것이다.

 

 

요양이 광개토태왕 이후 고구려의 수도였다면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은 지금 요하를 건너 훨씬 서쪽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때는 그곳을 요동으로 불렀으니 전방 성들은 그곳에 있고, 고구려는 지금 요하 혼하 태자하 등을 해자(垓字)로 삼아 수도인 요양을 보호했을 것이다.

 

 

발해 중경 현덕부 위치가 다르다

 

 

<지도2>는 사회과부도에 표시된 발해의 5. ‘요사대로라면 발해의 중경은 지금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1000km 떨어진 요양에 있어야 한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발해의 서쪽 국경선은 요하를 건너 당(중국) 쪽으로 훨씬 서쪽에 그어져야 한다.

 

 

고구려에 복속한 종족 중 가장 충성한 것은 말갈족이다. 말갈족은 고구려가 수, 당과 전쟁할 때 적극 참전했다. ()씨 성을 쓰는 말갈족이 고구려의 귀족이 됐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무너지자 대씨 집안의 대조영이 일어나 대진국(大震國)’을 세웠다. 중국 사서들은 대진국을 발해로 표기했다.

 

 

대진국은 과거보다 세력을 키운 거란을 지배했다. 대진국은 당나라와 통일신라가 스러질 무렵 위기에 처하는데, 그때 야율(耶律)씨가 이끄는 거란족이 일어나 대진국을 무너뜨렸다. 그 후 요나라를 세우고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강국이 됐다. 요나라와 남중국의 송나라, 그리고 고려는 위--오가 다툰 중국의 삼국시대처럼 삼각체제를 형성하며 부딪쳤다.

 

 

황제를 자칭한 나라들은 3경이나 5경 제도를 택했다. 발해는 대이진(大彛震)이 이끌 때 5경 제도를 택하고 황제국을 선포했다.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조선 실학자들의 추정을 근거로 중경 현덕부가 중국 길림성 서고성자(西古城子)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는 우리 교과서의 발해 강역과 5경의 위치다. 그러나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은 전혀 다른 기록을 남겼다.

 

 

요사 지리지는 당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요양)을 홀한주로 바꾸게 했다.대이진 때 옛 평양인 홀한주를 중경 현덕부로 불렀다고 적었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우리는 중경 현덕부를 서쪽으로 1000km 옮긴 새로운 발해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중경이 요양에 있었다면 서경은 중경 서쪽에 있을 테니, 발해의 서쪽 국경선은 지금의 요하 건너 훨씬 서쪽에 그어져야 한다.

 

 

우리 역사학계는 우리와 다툰 인접 국가 사료에 기록된 것보다 작은 영토선을 그려놓았다. 이는 겸손이 아니라 어리석음에 가깝다. 이렇게 하니 중국은 얼씨구나하며 동북공정을 밀고 들어온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었다고 고집하는 것은 한민족이 한반도에서만 살았다는 전형적인 반도사관이다. 반도사관은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 때 생겼다. 우리가 정사(正史)로 인정하는 삼국사기는 고려 때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 중종 때 인쇄된 것이 전해진다. 중종 이전 삼국사기는 여러 번 개수(改修)됐으니 여기에도 소중화 사관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고구려와 발해사를 또 축소했다. 조선을 지배하게 된 일제는 이를 적극 전파해 식민사관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그것에 짓눌려 대륙사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산해관에서 끝나는 만리장성을 동쪽으로, 동쪽으로 자꾸 확장하고 있는데.

(출처; 신동아

http://shindonga.donga.com/3/all/13/1118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