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환기9218해,신시배달5919해 단기 4354해,서기 2021해, 대한민국 102해(나뉨 73해),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5. 여러나라 시대 5.7.1 〈1000년의 시간을 넘어… 中 둔황 석굴에서 만난 고구려·신라·고려인들〉~ 5.14 〈부여는 만리장성 북쪽에 있었다〉

댓글 0

야발의 글

2021. 4. 11.

5.7.1  201376일 조선일보 1000년의 시간을 넘어둔황 석굴에서 만난 고구려·신라·고려인들

 

이선민 선임기자

 

고구려·신라·백제·고려인 인물상 무더기로 확인

동양 고대 문화의 보고(寶庫)인 중국 둔황 석굴에서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 고대 한국인의 복식과 의관(衣冠), 생활상을 보여주는 인물상이 무더기로 확인됐다.

 

 

깃털 네 개 조우관 쓴 고구려인, 말을 탄 신라 사신, 사신 따르는 고려 짐꾼둔황 석굴에서 확인된 고대 한국인 인물상. 왼쪽은 막고굴 제138굴의유마힐경변에 들어 있는 고구려인으로 깃털을 네 개 꽂은 조우관(鳥羽冠)을 썼다. 가운데는 막고굴 제61굴의오대산도의 부분 그림인신라송공사에서 말을 탄 사신이다. 오른쪽은 역시오대산도의 일부인고려왕사에서 사신을 따르는 짐꾼이다.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제공

 

 

둔황연구원 리신(李新) 연구원은 5일 경주시 우양미술관에서 경상북도 주최,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주관으로 열린 '2회 경주 실크로드 국제 학술회의' 발표를 통해 "막고굴·유림굴·(西)천불동 등 둔황 석굴군()의 석굴 중 40개에서 고구려·백제·신라·고려인이 그려진 그림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리 연구원은 "주로 불경(佛經)을 소재로 한 둔황 석굴 벽화에는 인접 각국의 왕과 사신, 불교 신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관모(冠帽)와 복식·외모 등으로 판단할 때 '열반경' 벽화 7, '유마힐경' 벽화 29, '범망경' 벽화 3개에서 고대 한국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둔황 석굴군에서도 가장 큰 벽화인 막고굴 제61굴의 '오대산도(五臺山圖)' 안에서 확인된 '신라왕탑(新羅王塔)' '신라송공사(新羅送供使)' '고려왕사(高麗王使)' '보리지암(菩提之庵)' 등 고대 한국과 관련 있는 그림 4점은 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둔황 석굴에서는 그동안 고대 한반도의 특징적 모자인 조우관(鳥羽冠)을 쓴 인물상과 장구를 치는 모습 등 고대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간헐적으로 발견됐지만 전체적인 실태가 밝혀지기는 처음이다. 이선민 선임기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7/06/2013070600135.html)

 

 

5.7.2  201376일 조선일보 백제인도 조우관(鳥羽冠) 신라·고려인들은 같은 스타일 흰 바지

 

이선민 선임기자

 

['둔황' 최대벽화 오대산등서 古代 한국 관련 그림 다수 확인]

 

古代 한국인 모습 왜 둔황에? -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들 둔황으로 대거 이주 돼석굴 만들고 불교 활동 참여"

古代 한국 문화연구에 도움 - 당나라~송나라 시기의 그림, 한국 인물상 공백 메울 자료

 

 

둔황 막고굴 제237굴에서 확인된 백제인.

 

 

둔황 석굴군()에서 확인된 고대 한국인 인물상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막고굴 제61굴의 주실(主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는 초대형 벽화인 '오대산도(五臺山圖)'에 들어있는 한국 관련 4점이다. 높이 3.5m, 길이 13.5m'오대산도'는 중국 산시성(山西省)의 유명한 불교 성지 오대산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중국 오대(五代)시대(907~960) 말기에 제작됐으며 둔황 벽화 중에서 가장 크고 세밀한 작품으로 꼽힌다.

 

 

'오대산도'에는 신라와 고려가 중국에 보낸 사절단이 함께 등장한다. 이는 밑그림이 만들어진 것이 신라(기원전 57~935)와 고려(918~1392)가 공존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오대산도의 오른쪽 아랫부분에 있는 '신라송공사(新羅送供使·신라에서 보낸 공양 사신)'라는 화제(畵題)의 그림에는 통역원, 사신, 두 관원, 마부 등 5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머리에 복두를 쓰고 옷깃이 둥근 단령(團領)을 입고 있다. 그 왼쪽 아래에 있는 '고려왕사(高麗王使)'라는 그림에는 연락관, 사신, 짐꾼 등 3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머리에 갓을 쓰고 둥근 옷깃의 짧은 상의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장포를 입었다. 신라 사절단과 고려 사절단은 관복은 다르지만 같은 양식의 흰색 긴 바지를 입고 있다.

 

 

'오대산도'의 아랫부분에 그려져 있는 '신라왕탑(新羅王塔)''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오대산에서 수행한 승려'가 세운 탑이다. 리신 연구원은 탑의 주인공을, 신라 귀족으로 당나라에서 7년간 공부하며 오대산을 찾았던 자장(慈藏·590~658) 스님으로 추정했다. '보리지암(菩提之庵)' 그림은 만년에 오대산에서 수행하고 공부한 혜초(慧超·704~787) 스님의 거처였던 보리사 터에 다시 지은 암자를 그린 것이다.

 

 

다른 둔황 석굴에서도 고대 한국인 인물상이 많이 확인됐다. 고구려인은 조우관(鳥羽冠)에 깃털을 보통 두 개 꽂았지만 세 개 또는 네 개를 꽂은 경우도 있었다. 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해 목도리와 허리띠를 하는 일이 잦았다. 백제인은 머리에 조우관을 쓰고 날씨가 안 추워서 옷깃이 밖으로 접힌 번령()의 옷을 입고 있었다.  

 

막고굴 제61굴의 오대산도에 들어 있는 신라송공사의 전체 모습. 중앙에 신라에서 온 사신 행렬이 보이고 오른쪽에 두 명의 중국 관원이 이들을 맞고 있다.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제공

  

 

둔황 석굴의 벽화에 고대 한국인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로 리신 연구원은 불교 전파와 고구려·백제 유민(遺民)의 둔황 이주를 들었다. 둔황 벽화는 인접국들이 불교에 귀의하는 모습을 많이 담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구려·백제·신라인도 들어갔다는 것이다. 또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둔황 지역으로 적지 않은 유민이 이주됐고, 이들이 석굴 조성과 불교 신앙 활동에 참여하면서 석굴 벽화에도 표현됐다는 것이다.

 

 

고대 한국인 인물상이 확인된 둔황 석굴들의 조성 시기는 당나라 초기(618)부터 송나라 초기(1035)까지 걸쳐 있다. 국내에는 이 시기의 인물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5일 국제 학술회의에서 리신 연구원의 발표를 들은 임영애 경주대 교수(중앙아시아학회 회장)"그동안 한국 학자들의 접근이 자유롭지 않았던 둔황 석굴의 고대 한국 관련 자료가 많이 공개됐다는 점은 긍정적"이라며 "하지만 조우관으로 분류된 일부 그림은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 등 학문적으로 따져봐야 할 부분도 상당히 있다"고 말했다. 이선민 선임기자

(출처;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7/06/2013070600160.html)

 

 

5.8  201496일 조선일보 "갸름하고, 찢어진 눈가장 오래된 韓國人 얼굴 찾았다"

 

 

미네소타김민구 교수 "2~3세기 夫餘 얼굴상 2점 확인"

머리에 상투 튼 모양귓불엔 귀고리용 구멍 뚫려

 

 

부여 2~3세기 금동 얼굴. 높이 17.9. /김민구 교수 제공

 

 

길고 갸름한 얼굴에 위로 쭉 찢어진 눈꼬리, 머리엔 상투를 틀고 귓불을 뚫은 중년 남성.

 

중국 지린성에서 출토된 한 뼘짜리 얼굴상이 고대 한국인 최고(最古)의 얼굴 조형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민구(37) 미국 미네소타대 미술사학과(동양미술) 조교수는 "일제강점기 지린성 지린시 동부 둥퇀산(東團山)과 마오얼산(帽兒山) 일대에서 출토된 금동 얼굴상 2점은 한민족계 고대국가인 부여(夫餘) 2~3세기의 유물"이라고 밝혔다. 최근 발간된 '미술사논단' 38호에 수록된 '부여의 얼굴: 둥퇀-마오얼산 출토의 금동면구(金銅面具)와 그 외연(外延)'이라는 논문에서다.

 

 

김 교수는 "둥퇀-마오얼산 일대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 혹은 고구려계 유적일 것이라 막연히 추정했으나 중국 지린성문물고고연구소 등이 최근까지 발굴 조사한 결과 부여의 왕성지(王城址)임이 확인됐다""금동 얼굴 역시 후한 말기나 훨씬 늦은 시대의 거란계 유물로 추정돼왔으나 출토지가 부여 왕성지로 확인되면서 명실공히 부여의 유물로 확인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 일대에선 금동 얼굴이 최소 6점 발견됐다. 4점은 일찍 자취를 감췄으나 2점은 중국 뤼순박물관(추정)과 지린성박물관에 각각 전한다. 그나마 국내 학계에선 광복 이후 잊힌 유물이다. 둘 다 얼굴은 갸름하고 인상은 강렬하다 못해 기괴하다.

 

 

지린성 마오얼산에서 출토된 부여 금동얼굴. 오른쪽은 훼손 전 원형을 추정한 그림. /김민구 교수 제공

 

 

이 중 둥퇀산에서 출토됐다고 전하는 얼굴상의 높이는 17.9. 정수리 부분이 상투를 튼 것처럼 볼록 솟아있고, 귓불에 천공(穿孔·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어 귀고리를 착용했음을 시사하는 점 등이 고대 한민족 특유의 습속을 보여준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이마의 주름, 벌어진 입, 살짝 내민 혀. 이 얼굴은 관동청박물관(현 뤼순박물관)1926년 발간한 소장품 도록에 사진이 처음 등장한다. 다른 한 점은 중국 고고학자 리원신(李文信·1903~1982)1934년 마오얼산 아래 밭에서 발굴했다. 높이 13.8. 지린성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얼굴상의 용도는 뭘까. 김 교수는 마구(馬具)나 무기 등에 장식용으로 장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부여(기원전 2세기 이전~기원후 346)는 철기를 기반으로 이 지역에 최초로 고대국가를 성립한 세력이다. 이들의 문화가 이후 고구려·백제는 물론 바다 건너 왜()에까지 정치·언어·이념·종교 등 다방면으로 계승됐다. 김 교수는 따라서 이 얼굴상은 고대 한국인 자신의 모습이라 할 입체 조형 최고(最古)의 걸작이라고 했다.

 

 

미술해부학 박사인 조용진 얼굴연구소장은 부여족과 연관된 브리야트족의 얼굴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상당히 유사하다. 긴 얼굴에 광대뼈, 홀쭉한 뺨, 얇은 입술 등 북방계 얼굴이라고 했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5~6세기 신라 기마인물형 토기의 얼굴과도 비슷하다. 한국인을 포함한 극동 퉁구스 계통 민족의 공통적 특징을 잘 담고 있는 전형적 북방계 얼굴이라고 말했다. 허윤희 기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06/2014090600811.html

 

 

5.9 20141230일 플러스코리아 세계적 역사학자 보수기교수 '신라가 지구의 중심이었다'

 

리복재 기자 

 

비상한 관심,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비판 쏟아져

 

 

무함마드 보수기 교수가 최초로 공개한 2천년전 고대 페르시아의 고지도에 나타난 경주. 사진=경북신문 이은희기자 © 편집부

 

 

[민족/역사/통일=플러스코리아타임즈-리복재 기자] 2천여 년 전 제작된 고대 페르시아의 지도에 신라의 수도 경주가 지구의 중심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1224일 경북 경주시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열린 제92회 화백포럼에서 해양실크로드의 세계적 역사권위자인 이란 테헤란대학교 역사학과 모함마드 보수기 교수(사진)"2천여 년 전 제작된 고대 페르시아의 지도에 경주를 자오선의 시작으로 명시하고 있다""이 문서는 신라가 이미 국제적인 왕국이었으며 세상과 폭넓게 교류했다는 점을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고 주장했다고 경북신문 이은희 기자가 25일 보도했다.

 

 

보수기 테헤란대학 역사학과 교수. 사진=영남일보 © 편집부

   

 

이 매체에 따르면, 보수기 교수는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 본초자오선 이전에는 신라의 왕경이었던 경주가 동서를 가르는 중심축이었고, 경주를 자오선의 시작으로 정하고 경주를 기점으로 지구상의 동서가 나눠졌다는 것.

 

 

보수기 교수는 이날 '실크로드를 통한 신라와 페르시아의 역사적 교류'라는 주제의 강의에서 한 장의 고지도를 최초로 공개하면서 "당초 지리학을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의 지도에는 칼레닷 섬(현재 스페인의 카나리아 제도)을 자오선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이후 페르시아의 자오선은 당시의 신라, 즉 현재의 경주를 자오선의 0도 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이후 이슬람의 지리학 문서에는 이에 따라 신라의 강데즈(경주=금성. 현 중국대륙의 낙양=동경)를 자오선의 기준점을 설정했다"고 덧붙였다.

 

 

보수기 교수는 그동안 '강데즈'라는 지명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신라의 왕경인 경주가 과거 '금성'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강데즈'가 경주임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페르시아어로 ''''을 뜻하고 '데즈'''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대 페르시아 문헌에 수시로 강데즈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이 지명을 신라와 연결 짓지 못해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다""그러나 지금은 중요한 퍼즐 조각 하나를 완성함으로써 실크로드상의 동쪽 시작점이 신라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날 보수기 교수는 신라의 공주와 페르시아 왕자가 결혼해 페르시아를 재건한 영웅을 낳은 사실을 묘사한 고대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를 설명하면서 이 서사시는 신라와 페르시아의 다양한 교류가 이뤄졌다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도로와 왕국 총람' 등 많은 페르시아 문헌에 신라를 "금이 많은 도시, 물이 맑고 젊은이가 많은 도시, 사시사철 꽃이 만발하고 살기 좋은 도시여서 한 번 방문하면 돌아가고 싶지 않은 도시로 묘사돼 있다""신라는 페르시아에서 유토피아로 여겨진 최고의 왕국이었다"고 밝혔다.

 

 

모함마드 보수기 테헤란대학 역사학과 교수가 공개한 고대 페르시아 문헌. 필사본인 이 사서에 신라가 여러번 언급돼 있다. 사진는 영남일보 © 편집부

 

 

한편,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는 보수기 교수가 발표한 논문 이전엔 지금까지 아랍과 페르시아인 학자들이 편찬한 총 23권의 각종 역사서, 지리서, 백과사전, 풍물지 등에 신라가 부분적으로 언급됐다. 이 내용은 1970년대 이후 재미학자 정기원을 비롯해 김정위·정수일 교수를 중심으로 상당 부분 논의돼왔다. 특히 김정위 전 한국외대 이란어과 명예교수는 2005중동사를 증보편찬하면서 중세 중동인 18명이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를 어떻게 묘사했는지에 대해 썼다. 이후 이희수 한양대 교수가 ·이슬람 교류사등에서 중동인의 신라 묘사에 대해 언급했다. 보수기 교수는 이번에 처음으로 페르시아의 고대 문헌을 인용해 이 사실들을 뒷받침했다고 전제한 뒤,

 

 

보수기 교수는 학술대회에서 “9~16세기 많은 페르시아와 아랍 문헌들에는 신라에 대한 흥미롭고 유용한 정보가 많은데 마티니 교수가 발간한 쿠쉬나메를 제외하곤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이란인은 이란에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 수세기 동안 신라와 교류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정치와 역사에 대한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산조페르시아의 멸망(AD 632)으로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슬람세계로 전해졌다. ‘신라(Sila)’라는 명사는 이란의 상인에 의해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를 거쳐 이슬람 문화와 문학 속에 녹아들어오게 된다는 보수기 교수의 말을 전했다.

 

 

이에 대해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지구조선사 지명선 대표는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이란 테헤란대 보수기교수는 경주(금성)가 원래 지구 자오선의 기준점(0)이 되는 세계의 중심이라고 밝혔다" 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신라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은 세계를 석권한 지배국이었다는 큰 사건인데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보수기 교수에 대해서도 "보수기 교수는 대륙신라를 이해못하고 신라가 한반도에 위치한 것으로 생각하여 한반도 경주(금성)를 지목했으나, 신라는 대륙에 있었고 경주가 바로 하남성 낙양이었는데 페르시아지도의 강데즈는 곧 낙양(금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한반도 경주가 아니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역사의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보수기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다른 재야사학자도 경주(慶州)는 대륙의 동경(東京)이며, 동경이 곧 낙양(洛陽)이라는 지명으로 시대에 따라 다르게 쓰인 것뿐이지, 결국은 같은 지명이라며 이 글을 쓴 기자도 경주(慶州)가 낙양(洛陽)인 줄 모르고 쓴 것 같지만, 아마 기자가 경주를 대륙지명인 낙양이라고 썼으면 아마 학계가 난리 났을지도 모르겠다면서 천자문(千字文)에선 동서이경(東西二京)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는 대륙에서의 동경(東京)이요 다른 하나는 서경(西京)이며, 서경은 곧 장안(長安), 동경은 현 경북 경주시가 아니라 대륙 낙양이 경주(慶州)고 지명까지 설명했다.

 

 

  

모함마드 보수기 테헤란대학 역사학과 교수가 발견한 신라’. 고대 페르시아 글자로 쓰여 있다. 사진=영남일보 © 편집부

 

 

다음은 역사의 중요성을 감안해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의 기사를 여과 없이 인용 보도한다.

 

보수기 교수에 따르면 최초로 신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9세기 중엽 술레이만 시라피(Sulayman Sirafi)’라는 이란의 항해사다. 그는 극동지역을 여행한 이란 상인이기도 했다. 시라피는 그의 책에서 중국의 바다 한쪽에 알 신라(Al Sila, al은 관사)’라는 섬이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흰색 피부를 가졌고, 그 나라에 도착한 사람은 한 사람도 그 나라에 대한 기록을 갖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흰색 매를 가지고 있다고 썼다.

 

 

보수기 교수는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처음으로 극동아시아에 건너간 무슬림은 시라피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븐 코르다드베(Ibn Kordadbeh)’라는 페르시아의 지리학자가 AD 846년에 쓴 지리서에는 중국의 가장 끝 지점인 광쑤 근처에 많은 산과 많은 왕들이 있는데 그곳에는 금이 많다. 이슬람인 중에 그곳에 정착한 이도 있는데 살기가 좋았기 때문이다라고 나와 있다. 이븐 코르다드베의 정보는 페르시아와 극동아시아 간 문화적 관계에 기초했다. 11세기에 쓴 쿠쉬나메는 페르시아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텍스트다. 쿠쉬나메의 중요한 텍스트는 이슬람 이전에 속하는데 동양과 서양의 두 길에 바탕을 두고 있다.

 

 

페르시아인은 신라에 대해 신라(Silla)’ 또는 바실라(Basilla)’라고 했다. 바실라 혹은 신라 역시 한국에 대해 비슷하게 언급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다 역사적 동질성을 갖고 있다. 보수기 교수가 발표한 고대 페르시아 문헌에 기록된 신라의 묘사와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 교류논문에 나타난 신라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실크로드 © 편집부

 

 

마수디(Masudi·출생미상~957)가 쓴 황금초원과 보석광산 총람과 지리서인 학습과 개관속 신라

 

<중국 해안 건너 신라와 그에 예속한 섬을 제외하곤 이 나라에 대해 많이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이라크인과 일부 외국인이 신라와 그 섬에 정착했으며 그곳을 고향으로 선택했다. 신라는 공기가 맑고, 물이 깨끗했으며 농토가 비옥했다. 또한 보석과 광석물이 많은 데다 획득하기도 쉬웠다. 그래서 신라에 정착한 대부분의 사람은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떠나는 이도 극히 적었다. ‘왕국과 도로총람에 따르면 중국의 동쪽에 한 나라가 있다. 이 나라에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한 사람 역시 맑은 공기와 비옥한 토지, 깨끗한 물에 반하고 풍요한 생활과 주민들의 친절한 행동으로 인해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일곱째 종족은 신라를 비롯한 중국과 그 주변지역이다. 그곳에는 노아의 아들 야벳과, 야벳의 후손 아무르족의 거주지다. 한 명의 왕이 그들을 통치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한편 김정위 교수는 중동사에서 아무르를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야벳의 장자 고메르(Gomer)’로 봤다. 김 교수는 야벳의 일곱 아들 중 아무르의 이름이 빠질 때도 있었는데, 이때 아무르 대신 주마르(Jumar)’를 사용했으며 주마르는 고메르의 아랍어 철자라고 추정했다)

 

 

이븐 나딤(Ibn Nadim·출생미상~995)이 쓴 세계 각 나라의 목록(Al Fehrest)’에 나타난 신라

 

<중국에 신라라고 부르는 땅이 있다. 신라는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나라다. 그곳에는 금이 아주 많다>

 

한편 9~11세기의 지리학자 알 비루니와, 알 마수디, 알 이드리시는 각각 지도에 신라(Silla)라는 지명을 표시했다. 특별히 알 비루니(Al Biruni)’는 그의 지도 알 카눈(Al Qanun)’에 신라의 위도와 경도를 표시했다. 그는 신라에 대해 중국의 동쪽 끝에 위치하며 몇 명의 사람만이 바다를 통해 그곳으로 여행한다"고 썼다.

 

 

1092년 타바리(Mohammad Bin Ayub Tabari)가 쓴 갈렙이란 책에서의 신라

 

<중국과 가까운 또 하나의 도시는 신라다. 그곳은 강하고 견고하다. 신라의 왕은 매년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한다. 만약 조공을 보내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아 폐허가 될 것이다. 만약 조공을 보내면 이러한 상황은 완전히 변한다>

 

 

마르위지(S.Z.T. Marwzi)가 쓴 동물의 자연적 번성에 나타난 신라

 

<중국 영토의 가장 끝에 신라라는 땅이 있다. 무슬림이나 어느 이방인이든 그곳에 가면 정착하고 결코 떠나지 않는다. 유쾌하고 살기에 좋기 때문이다. 많은 금이 거기에서 발견된다>

 

 

에드리시(Edrisi·1099~1167)가 쓴 먼 지역을 가로지르는 트레킹 모험속 신라

 

<신라는 중국의 북동부에 위치한다. 당시 몇 명의 사람이 신라를 여행했다>

 

 

투시(M.bin.A. Tusi·1161~1178)가 쓴 창조의 경외감에 나타난 신라

 

<신라는 중국에 있는 한 도시다.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결코 이 도시를 떠날 수 없다>

 

 

바크란(M.N.Bakran·1208)의 저서 세계 이야기에 나타난 신라

 

<마친(Machin) 혹은 중국 내지를 보실라(Bosila)라고 하는데 중국의 맨 끝부분에 있다. 이 지역은 산악지대이며, 때론 보신라로 불린다. 일부는 물속에 있다. 이 도시같이 예쁘고 풍요로운 도시는 발견할 수 없다. 소수의 사람이 이 도시에 도착하지만 너무나 살기 좋은 곳이라서 이 도시에 한번 가기만 하면 떠나지 않는다>

 

 

자카리야 카즈위니(Qazwini·1203~1282)가 쓴 창조의 경이로움과 존재의 희귀성나라들이 남긴 발자취에 나타난 신라

 

<신라는 너무나 완벽하고 좋은데, 중국의 한 지방이다. 물이 달고 땅이 비옥하며 맑은 공기가 있어 가난하고 비루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너무나 아름답다. 질병도 적다. 사람들이 만약 물을 땅에 뿌리면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고 한다. 유해동물과 해충, 파리와 전염병도 이 땅에선 거의 없다. 다른 지역에서 병이든 사람을 누구나 신라에 데려오면 병이 완쾌된다. 자카리야에 라지는 누구든지 신라에 오는 사람은 이곳에 정착하는데 풍부한 금과 과일, 맑은 공기와 물 등 살기 좋은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라는 유쾌한 나라다. 중국의 가장 끝자리에 위치한다. 공기가 맑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길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향유고래의 배설물에서 나는 향기)이 난다고 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은 물론 드물고 파리와 야생동물 또한 거의 없다. 다른 지역의 어떤 환자도 이곳에 오면 치유된다. 모함마드 자카리야 라지는 누구나 이 땅에 들어가면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 떠나려 하지 않는데 그건 자원과 금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 진실을 안다>

 

 

세드 빈 알리 조자니(Jojani)가 쓴 도로와 왕국 총람에 등장한 신라

 

<신라는 중국의 맨 끝부분에 위치한다. 어떤 사람은 신라를 바신라라고 부르는데 바신라 역시 해변을 갖고 있다. 바신라는 부유하고 아름답다.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개 젊은이다. 그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매우 적은데 한번 그곳에 가면 살기가 좋아 떠나지 않는다>

 

이상으로 볼 때 페르시아인의 눈에 비친 신라는 무릉도원이자 이상향이다. 하기야 사막과 황무지로 된 그곳에서 바라본 동방의 신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일 수도 있다. 그들의 문헌에서 보듯 한번 신라를 찾은 사람은 그곳에 정착해 돌아오지 않는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관한 이 기록들은 한자문화권 밖에서 나온 문헌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수기 교수의 논문에 대한 반론도 있다.

 

송수환 울산대 연구교수는 ‘Silla’ ‘Sila’ ‘Shila’혹은 군도라고 언급된 것을 볼 때 한반도의 신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대양의 극동에 신라라는 섬이 있다’ ‘중국의 해안 쪽으로 신라라는 섬들이 있다’ ‘중국 저편 동해에 여섯 개의 섬으로 형성된 신라라는 나라가 있다는 설명을 예로 들었다. (·사진=영남일보 박진관기자)

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39204&section=section78&section2=%ED%95%9C%EA%B5%AD%ED%86%B5%EC%82%AC/%EC%A0%95%EB%A6%BD/%EC%9C%A0%EB%AC%BC%EC%9C%A0%EC%A0%81%EB%AC%B8%ED%99%94%EC%9E%AC/)

 

 

5.10  2015821일 신동아 20159월호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 ‘잃어버린 땅고구려 고토(古土)를 가다

 

이정훈 편집위원

 

 

삼국사기의 자를 해석하지 않은 역사학계

 

지안(集安)엔 국내성 아닌 황성이 있었다

 

장수태왕은 이북 평양으로 천도한 적 없다

 

말로만 식민사관 탈피, 실제론 일제 史觀에 묶여

 

 

 

 

괄목상대(刮目相對). 오랜만에 찾아간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가 그러했다. 밝아지고 화려해지고 북적였다. 이유는 한국인이 풀어놓는 때문인 듯했다. 2003년 중국이 펼치는 동북공정이 알려진 후 수많은 한국인이 광개토태왕비 등이 있는 지안을 찾아왔다. ‘한국인의 성지가 된 탓에 지안에서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다.

 

 

71일 지린시 인근의 한 다리에서는 고구려-발해 역사 탐방에 나선 한국의 지방공무원들을 태운 버스가 추락해 10(운전자 포함하면 11)이 숨졌다. 이 소식을 들은 최두영 지방행정원장은 지안으로 날아가 사고를 수습하다 75일 투신자살했다.

 

 

과거 지안에는 꼬질꼬질한 지안호텔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도시에나 있을 법한 홍콩성호텔[香港城大酒店]의 불빛이 번쩍인다. 최 원장은 이 호텔에 묵었다가 자살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지안박물관은 몇 해 전만 해도 매우 초라했다. 그런데 지금은 해자(垓字)’ 모양을 한 작은 연못을 두른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다.

 

 

압록강이 휘돌아가는 첩첩산중인 지안에는 한국인만 오는데, 그들이 쓴 돈으로 지안은 환골탈태했다. 바뀐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안박물관에 들어가니 바로 한국인을 알아본 직원들이 따라붙으며, “절대로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다. 슬쩍 찍는 것을 보면 불러 세워 삭제하게 했다. 이전 박물관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들은 동북공정을 의식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고 그런 모조품을 펼쳐놓고 중국 고구려운운하는 설명만 잔뜩 달아놓았는데, 뭐가 두려워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가. 전시 내용이 한국에 알려질 경우 일어날 반발을 염려한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으로부터는 돈만 벌고, 중국이 생각하는 고구려사를 한국인에게 주입하겠다는 것인가.

 

 

고조선 자도 안 보여

 

내몽골자치구와 맞닿은 랴오닝성 젠핑현 우하량(牛河梁)은 한국에서 가기엔 매우 멀다. 베이징(北京)이나 선양(瀋陽)공항에서 자동차로 꼬박 하루를 달려야 한다. 그런데도 그곳을 찾는 것은 고조선의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하량 일대에서는 후기 구석기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이러한 유물과 유적은 내몽골자치구 츠펑(赤峰)시 인근에 있는 홍산(紅山)에서 먼저 나왔기에 홍산문화로 통칭된다.

 

 

홍산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것이 황하(黃河) 중류에서 일어난 오르도스 문화다. 오르도스 문화는 바로 하()-()-()나라의 중국 역사로 이어진다. 중국 고대 문헌에는 오르도스 문화를 지칭하는 것이 제법 있다. 그러나 홍산문화 기록은 전무해, 홍산문화는 요동(만주)과 한반도로 이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한국인은 우하량에 흥분한다.

 

 

우하량에서는 눈동자에 녹색 옥()을 박고 흙으로 빚어 구운 여성의 얼굴상() 등과 곰 이빨을 박아서 만든 곰상(熊像)의 파편 등이 발굴됐다. 두 개의 상() 앞에 제물로 올려진 것 같은 돼지 뼈 등이 함께 발굴됐기에 학자들은 우하량에 살던 이들이 여성(여신)신과 곰을 숭배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분석은 환웅(桓雄)족과 결혼동맹을 맺어 단군을 낳은 웅녀(熊女)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삼국유사 등에 거론된 고조선의 실체를 보여준 것이기에, 뜻있는 이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중국은 그러한 우하량에도 역사 공작과 돈벌이를 할 준비를 해놓았다. 적잖은 입장료를 받는 우하량 유지(遺址)박물관을 지어놓고 중국 역사에 흡수됐다고 꾸며놓은 홍산문화를 보여준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곳에서는 고조선의 자도 보이지 않는다.

 

 

숨 막히는 중국의 역사 공작이다. 답답한 심정이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둘러보지 않으면 고조선의 역사 흔적을 볼 수 없기에 많은 한국인이 지안과 우하량을 찾는다. 중국의 역사 도발은 장난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무대응에 요지부동이다. 새로운 연구는 하지 않고 일본 학자들이 과거에 내린 판단만 고수한다. 말로는 식민사관 탈피를 주장하면서.

 

 

지안엔 국내성 아닌 黃城

 

고구려사를 바로 세우려면 고구려의 수도와 영토가 어디였는지부터 밝혀야 한다. 먼저 수도 문제를 살펴보자. 우리 국사 교과서는 중국 지안을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으로 비정한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맞지 않다. 그런데도 누구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뜻있는 이들은 한국 역사학계는 죽었다라고까지 말한다.

 

 

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온 고구려의 천도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표에서 주목할 것이 서기 343년 고국원왕 137월에 한 5차 천도다. 이 천도는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 4차 천도 1년 뒤에 일어났다. 1년 만에 다시 수도를 옮긴 것은 누란의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 위기는 뒤에서 상술하고, 5차 천도에만 집중해보자.

 

 

삼국사기는 이 천도에 대해 추칠월이거평양동황성, 성재금서경동목멱산중[秋七月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으로 적어놓았다. 학자들은 이 한문을 가을 7월에 (왕이) 평양의 동황성으로 옮겨왔다. 동황성은 지금의 서경 목멱산 가운데에 있다고 번역해왔다. 삼국사기는 고려 때 김부식이 중심이 돼 만들었기에 지금[]’은 삼국사기를 낸 고려 때를 의미한다. 이는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해석이다.

 

 

그런데 인하대의 복기대 교수(고고학)는 이 해석에 강력히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이 번역은 원문 두 번째 문장에서 고딕으로 표기한 ()’자를 해석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을 넣어 제대로 번역하면, “이 성은 지금[삼국사기를 출간한 고려]의 서경 동쪽의 목멱산 가운데에 있다가 된다고 설명한다. ‘서경 목멱산이 아니라 서경 동쪽의 목멱산이라는 것이다.

 

 

자를 넣어 해석한 그는 첫 번째 문장에 나오는 동황성도 황성을 띄어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전체 원문은 가을 7월에 (왕이) 평양 동쪽에 있는 황성(黃城)으로 옮겨왔다. 이 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의 목멱산 가운데에 있다는 뜻이 된다. 과거에는 이 성을 동황성으로 보았으나 그는 황성으로 본다. 복 교수의 해석이 고구려 수도인 평양을 찾는 단서가 돼준다.

 

 

국내성 광개토왕비는 없다

 

광개토태왕은 고국원왕의 손자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태왕 때 다시 평양성으로 천도(6차 천도)하니, 광개토태왕릉과 그 비석은 황성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광개토태왕릉비는 지금 지안에 있다. 그럼 지안이 바로 황성이 되어야 한다.

 

 

삼국사기는 국내성을 2대 유리명왕부터 10대 산상왕 때까지의 수도였다고 밝혀 놓았다(참조). 그렇다면 국내성 근처에서는 19대인 광개토태왕의 능비가 발견될 수 없다. 삼국사기만 제대로 봐도 국내성에는 광개토태왕비가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지는데 국사 교과서는 광개토태왕비가 있는 지안을 국내성으로 비정하는 무지(無知)를 보인다.

 

 

지안을 국내성으로 처음 비정한 이는 일제 때 활동한 일본인 학자 도리이류조(鳥居龍臧)였다. 일제 때는 고구려사는 물론이고 역사 연구 자체가 일천했으니 정확한 역사를 추적할 수 없었다. 도리이는 제한된 자료와 자기 판단으로 지안을 국내성으로 비정했다. 그런데 광복 70년이 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은 속절없이 이를 따른다.

 

 

에서 보듯 고구려는 95년간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가 1년간 환도성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황성에서 84년을 보내고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는 85년 만에 다시 평양성을 수도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85년 전의 평양성과 85년 후의 평양성은 같은 곳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는 서로 다른 곳으로 분석해왔다. 85년 후 옮겨간 평양성은 이북의 평양성에 있고 그전의 평양성은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이 대세였다. 국사 교과서는 85년 전의 평양에 대해선 아예 거론도 하지 않는다. 고구려가 평양성(85년 전의 평양)을 처음 수도로 삼은 것은 서기 247년인 11대 동천왕 212월이다.

 

 

 

동천왕이 평양성을 수도로 삼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전의 고구려는 환도성을 수도로 삼았다. 동천왕 208월 고구려는 소설 삼국지에도 나오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역사에서는 조조의 성을 따서 曹魏로 부른다)의 장수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다.

 

 

이 때문에 동천왕은 환도성은 병란을 치렀기에 다시 수도로 삼을 수 없다며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기게 했다(천도를 했다는 뜻). 이 사실을 전한 삼국사기는 이어 평양은 본디 선인(仙人) 왕검이 살던 곳으로, 왕의 도읍터 왕검이라고도 한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라고 기록했다. 왕검은 단군을 가리킨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사달(태백산 신단수 아래 신시라고도 한다)에서 나라를 연 단군왕검은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첫 번째 천도) 비로소 조선이라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은 이 평양성이 지금[삼국유사를 편찬한 고려]의 서경이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단군왕검이 첫 번째로 천도한 곳이 평양인데, 고구려의 동천왕은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 평양이라고 하면서 천도를 했으니, 고구려는 고조선을 이은 것이 분명해진다.

 

 

고조선 평양이 고구려 평양

 

 

평양성을 수도로 삼은 고구려는 95년간 번성하다, 다시 심각한 위기를 만났다. 모용황이 이끄는 전연(前燕)군의 압력을 받게 된 것. 고구려는 선비족이 세운 전연과 사이가 좋지 않아 오랫동안 싸웠는데, 그러한 전연이 모용황 시절 강성해졌다. 모용황이 침입할 것이 분명해지자 고구려는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수도인 평양성을 증축했다(고국원왕 4). 세자를 전연에 보내 모용황을 알현하고 달래보게도 했다(고국원왕 10).

 

 

그런데도 모용황이 침입할 의지를 굽히지 않자 고국원왕은 128월 환도성으로 피난성천도를 했다. 그러자 그해 12월 모용황이 남로(南路)와 북로(北路)로 침공했다. 이 공격으로 모용황군은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의 부인과 어머니를 붙잡았다. 그러나 고국원왕은 단웅곡이라는 곳으로 도주해 붙잡히지 않았다. 고국원왕 생포에 실패한 모용황군은 고구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고국원왕 아버지인 미천왕 무덤을 파 시신을 끌고 갔다.

 

 

전연에 지고 백제에 죽고

 

처절하게 패배한 고국원왕은 환도성은 물론이고 평양성으로도 들어갈 수 없어 평양 동쪽의 목멱산 가운데에 있는 황성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전연군이 고국원왕을 굴복만 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전연은 중국으로 쳐들어갈 뜻이 있었기에 고구려 땅을 장악하기 위한 부대는 남겨놓지 않았다.

 

 

고국원왕은 당나라에 끌려갔던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보장왕 다음으로 고단했던 임금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동명성왕을 시조로 모신 이복형제 사이다. 그래서인지 고국원왕 선대에서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신도 교환하지 않았다(백제와 고구려는 망할 때까지 서로 단 한 번도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고구려를 굴복시킬 정도로 강력했던 전연은 모용황이 죽으면서 약해졌다. 서쪽에서 일어난 전진(前秦)이 맹렬하게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전연은 중국 진출이란 꿈을 접고 방어에 급급하다 무너져갔다. 견디지 못한 전연에서는 태부(太傅)’라는 높은 벼슬을 가진 모용평이 고구려로 도주해왔는데, 복수심에 불탄 고국원왕은 그를 붙잡아 전진으로 보냈다. 그해 전연은 패망했다(고국원왕 40, 서기 370).

 

 

고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해 약탈하는 것이 국력을 키우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전연이 패망하기 1년 전(369), 힘을 회복한 고국원왕은 백제 때리기에 나섰다. 2만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백제를 치러 간 것.

 

 

그런데 치양이란 곳에서 싸우다 패배했다. 전연에 패한 후 처음으로 기병한 것이 백제와의 첫 전쟁이었는데, 고구려는 또 패배한 것이다.

 

 

그러자 2년 뒤(371) 백제의 근초고왕이 복수를 해왔다. 3만 병사를 이끌고 원래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국원왕은 병사를 이끌고 막으러 나갔다가 조준하지 않고 쏜 화살인 헛살[流矢]’에 맞아 두 달 뒤 붕어했다. 그러한 고국원왕의 손자가 광개토태왕이다. 광개토태왕은 할아버지의 원한 갚기에 나섰다.

 

 

광개토태왕비는 그의 아들 장수태왕이 세운 것이라, 당대의 일은 삼국사기보다 더 상세히 기록해놓았다. 광개토왕비는 백제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백제를 백잔(百殘)’잔국(殘國)’으로 새겨놓았다. 이 비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원문은 생략. 는 비문에서 판독이 되지 않는 글자).

   

 

광개토태왕은 전연을 세운 선비족의 잔당도 토벌했다. 광개토태왕비는 선비족을 패려(稗麗)로 표현했다. 비문은 광개토태왕이 패려를 쳐서 얻은 새로운 영토를 시찰까지 했다며 이렇게 표현했다(원문 생략).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복수

 

광개토태왕이 백제를 친 것은 남진정책, 선비를 두들긴 것은 서진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장수태왕 때 한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렇게 본 이유로 장수태왕 때 평양으로 천도한 것을 꼽는다. 국사 교과서 편찬자들은 장수태왕이 수도로 삼은 평양은 이북 평양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그런 판단을 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장수태왕이 천도한 곳은 85년 전 수도로 삼은 평양이다. 삼국사기 고국원왕 조는 평양 동쪽에 황성이 있다고 했으니, 평양은 황성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 황성은 지금의 지안이니, 평양은 지안 서쪽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북 평양은 지안의 남쪽에 있다. 따라서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은 이북 평양이라는 국사 교과서의 주장은 삼국사기 내용과 완전 배치된다.

 

 

장수왕이 옮겨간 평양이 지안(황성)의 서쪽에 있다는 것은 요나라 역사서인 요사(遼史) 지리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요사는 지금의 랴오닝(遼寧)성 랴오양(遼陽)시가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도읍을 옮긴 평양이라고 밝히고 있다. 요사는 장수태왕이 아닌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설명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기사는 신동아 20132월호 참조).

 

 

삼국사기는 고국원왕 137월 조(앞에서 을 고딕으로 표현한 부분)에서 ‘(도읍을) 평양 동쪽 황성으로 옮겼다. 이 성(황성)은 지금 서경의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다고 함으로써, 고구려의 평양은 고려의 서경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고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삼국유사도 ‘(고조선이 수도로 삼은) 평양은 고려의 서경이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이는 평양에 대한 현재 해석을 완전 뒤집는 중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역사학계는 고려가 서경이라고 한 평양은 이북 평양이라고 고집해왔기 때문이다. ‘이북 평양이 고려와 조선의 평양이다라는 주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과 다르다.

 

 

고구려의 평양이 이북 평양이 아니라는 것은 조선시대 청나라에 사신 일행으로 갔던 이들이 써놓은 여행기에서 숱하게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너 요양 근처로 가니 그곳을 평양이라고 한다. 조선에 있는 평양과 어떻게 다른가란 의문을 남겨놓았다.

 

 

장수태왕은 南進 아닌 西進

 

요동에 있는 평양을 이북의 평양으로 끌고 온 것은 조선이다.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뒤집은 이방원이 명나라 황실에 화녕과 조선 중에 나라 이름을 정해달라고 하자 명 황제가 조선을 골랐다. 그때 조선은 요동을 장악하지 못했다. 요동을 수복하려는 최영을 죽이고 등극한 것이 이성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북 평양을 평양이라 부르며 기자의 사당과 기자의 무덤을 지었다. 이 정책이 성공해 요동에 있는 평양과 별도로 이북 평양이 만들어지면서 역사 추적에 혼란이 생겼다.

 

 

장수태왕이 평양으로 다시 수도를 옮긴 것은 고구려의 국력이 회복됐다는 뜻이다. 고구려를 괴롭히다가 사라진 연나라(전연)는 그 후 다시 일어나는데, 이 연나라를 앞의 연과 구분하기 위해 후연(後燕)이라고 한다. 후연은 장수태왕의 고구려와 맞서다 세력이 약해져 황실이 바뀌는데, 이를 북연(北燕)이라고 한다. 북위(北魏)가 공격하자 북연 황제인 풍홍은 고구려로 도주해왔다.

 

 

장수태왕은 그를 2년 정도 받아줬다가 죽여 북위로 보냈다. 장수태왕은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를 영원히 멸망시킨 것이다. 증조부인 고국원왕의 원수를 단단히 갚은 장수태왕은 평양으로 천도(427)하고 48년이 지난 475(장수왕 65)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공격하고 백제 개로왕을 잡아 죽였다. 아버지 광개토태왕에 이어 또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고구려는 이렇게 장악한 한성을 고구려가 수도로 삼았던 평양성, 국내성과 함께 3경으로 삼았다는 것이 중국 정사인 북사(北史) 등에 있는 기록이다. 그러한 고구려는 함께 북연을 없앤 북위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100여 년간 싸우지 않고 잘 지냈다.

 

 

고구려는 705년 역사에서 233번 외국에 사신을 보냈는데 그중 37%에 해당하는 87회를 북위와 교환했다. 장수태왕-문자명왕-안장왕-안원왕 4명의 왕만 상대한 것이 북위인데, 이렇게 많은 사신을 보낸 것은 고구려가 북위와의 외교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장수태왕 때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처럼 데리고 있었고 백제에는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으니 남쪽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새로 강국이 된 북위와의 관계에 전력을 기울였으니, 그때의 고구려 정책은 서진정책으로 보아야 한다.

 

 

장수태왕의 고구려가 이북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조선사다. 조선사는 장수태왕의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폈다고 써놓았다. 일제는 고구려의 힘이 제대로 알려지는 것이 싫어 이렇게 했을 수 있는데, 한국 역사학계는 이를 검토하지 않고 받아들여 앵무새처럼 그대로 사용해왔다.

 

 

의무려산이 요동 · 요서의 기준

 

강성기의 고구려가 랴오양시 인근에 있는 평양을 다시 수도로 삼았다면 고구려는 서진을 한 것이 분명하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이미 패려를 정벌해 새로 확보한 영토를 광개토태왕이 둘러보는 유관토경(遊觀土境)을 했고 장수태왕 때는 북연의 황제를 죽였으니 서쪽으로 영토를 넓혔을 것이 분명하다.

 

 

흔히 말하는 만주평원은 요하 좌우에 있는 드넓은 평야를 가리킨다. 지금은 요하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하라고 하지만, 현지에 가서 보면 요동과 요서는 요하라는 물길을 통해 하나로 연결됐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 역사학계는 전성기의 고구려가 요하를 지나 지금의 요서평원 어디쯤을 국경선으로 삼았을 것으로 막연히 추측한다.

 

 

우리 역사학계의 큰 오류 중 하나는 고구려는 돌성[石城]만 쌓았다는 인식이다. 우리도 토성(土城)을 쌓았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 풍납동에서 발굴된, 백제가 쌓았다고 보는 대규모 토성이다. 요하 동서에는 이렇다 할 돌산이 없어 돌성을 지을 방법이 없다. 그곳에서는 토성을 지어야 한다. 랴오닝(遼寧)성의 베이전(北鎭)시에 가면 고구려 때 쌓은 것이 확실한 토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베이전시는 요서 지역의 요하평원이 끝나고 의무려산(醫巫閭山)’이라는 남북으로 긴 산맥이 시작되는 곳에 있다(중국은 산맥을 산으로 표기한다). 그러한 베이전시에는 고구려와 동시대인 북위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마애불상이 있다. 고구려를 상징하는 돌로 만든 무덤도 발견됐다(그러나 오래전에 도굴돼 유물은 없었다). 이는 고구려가 의무려산 동쪽을 확실한 영토로 지배했다는 뜻이다.

 

 

고구려와 대륙 세력은 의무려산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요동·요서를 나누는 기준은 요하가 아니라 의무려산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전성기 고구려는 의무려산을 넘어 만리장성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까지 차지했다는 증거가 있다. 산해관 동쪽에 갈석산이 있는데 중국인들은 이 산을 동쪽(왼쪽)에 있는 갈석산이라 하여 좌갈석으로 불렀다. 갈석산은 삼국지의 주역인 조조가 오른 곳으로 유명한데 지금도 그 이름으로 불린다.

 

 

만리장성 근처까지 차지

 

당나라 때 두우라는 중국인이 만든 책 통전(通典)’에는 ‘’지금(당나라 시절) 북평군 남쪽 20여리는 고려(고구려) 땅인데 그곳에 좌갈석이 있다[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爲左碣石]’라고 해놓았다. 이는 고구려가 좌갈석산을 차지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의무려산을 넘어 산해관 근처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만리장성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학계는 의무려산도 넘어가지 못한 모양으로 고구려 최대 영토를 그린다. 고구려가 이북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잘못 비정했으니,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도 좁게 그리는 어리석음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웃는 것은 통전을 비롯해 많은 사서와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이 있는 땅을 차지한 중국이다. 한국 역사학계는 언제 식민사학에서 벗어날까. 고구려의 원혼이 땅을 칠 노릇이다.

(출처; 신동아 201509월호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14209/1)

 

 

5.11  20151113일 브레인미디어 "부여 계승한 백제, 해외까지 진출한 글로벌 국가였다!"

 이효선 기자

 

13차 한민족미래포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 강연

 

 

13차 한민족미래포럼이 지난 1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렸다.

 

 

"고등학교 국정 교과서의 서술에 의하면, 백제 건국 시조는 온조이고 그 계통은 고구려가 된다. 고구려가 종가(宗家)라면, 백제는 그 작은 집이 되고 마는 셈이다. 백제 건국 집단이 고구려에서 남하했다는 기록을 일방 통행시키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가 지난 12일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제13차 한민족미래포럼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이 교수는 '글로벌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이 교수는 백제사 왜곡에 대한 사안을 뽑아 허구성을 지적하고, 그 근간이 되는 대표적인 사례를 제시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백제는 고구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아들의 나라가 아버지의 나라와 수백 년간 전쟁을 벌인 국가로 본다""백제 건국 세력을 잘못 풀이한 바람에 선입견이 생긴 것이다. 이것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

 

 

<삼국사기>를 보면, '온조 시조 전승(傳承)''비류 시조 전승' 2종류의 백제 시조 전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온조 시조 전승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본문에 굵은 글씨로 적혀 있는 것이며, 비류 시조 전승은 백제본기 할주(割註)에 작은 글씨로 기록된 것이다. 현재 온조의 고구려 기원설과 비류의 부여 기원설이 팽팽한 상황이나, 온조 전승이 본문에 적힌 덕에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이 교수는 "온조 이야기는 근거가 너무 박약한데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백제 시조 온조왕은 만들어진 역사다. 온조 일행의 남하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다. 어머니 소서노를 데리고 간 것은 비류왕"이라고 말했다. 또한, 백제 건국 세력은 고구려계가 아닌 부여계라며, 시조의 경우만 하더라도 부여계 전승 대 고구려계 전승이 4:1로 부여계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했다.

 

 

"472년에 개로왕(백제 21대 왕, 455~475)이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에서 '저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했다. 이것보다 분명한 기록이 어디 있나? 일국의 최고 통수권자인 국왕이 외교 문서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부여에서 찾았다. 실제로 백제 왕실의 성씨는 부여(扶餘) 씨이다. 온조 건국설화가 맞는다면, 고구려 왕실의 고() 씨를 써야 맞지 않는가?"

  

 

이 교수는 "중국 사서에 보면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라고 했다. 백제와 고구려는 뿌리가 같은, 대등한 형제국가이고 경쟁상대"라며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에 소재한 약소국이 아니다. 고구려에 대한 열등감이 아닌 오히려 자긍심을 지닌 민족이었다. 세상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는 천손국(天孫國) 의식으로 주변 국가와 외교적 관계를 맺으며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고 말했다.

 

 

해상을 통한 백제의 활동 영역. 백제는 국제성과 독창성으로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가교 역할을 했다.

 

 

"백제는 해상을 통해 중국 남부까지 진출했다. 제주도는 물론 북규수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삼고 대만해협을 지나 필리핀 군도까지 항로를 연장했다. 다시금 항로를 연장시켜 인도차이나 반도에까지 이르렀으며, 지금의 캄보디아를 가리키는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

  

 

이 교수는 "해상 실크로드의 동쪽 출발점이 백제다. 물산이 풍부해 인구도 제일 많았고 생산력도 높았다. 중국인, 왜인을 조정의 요직에 기용하는 등 다문화를 지향하는 열린 국가였으며 선진국이었다"고 했다. 백제는 한반도 남부에 국한된 작은 나라가 아니라, 해외까지 진출하며 다양성을 추구한 글로벌 국가였다.

  

 

한민족원로회가 주최하는 제14차 포럼(2016114)에는 하버드대학교 박사인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학교 교수가 초청되어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을 주제로 강연한다. 한민족미래포럼은 격월로 홀수달 두 번째 목요일에 열린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동서남북의 분열과 대립, 정파 간의 양극화를 극복하고, 국민이 행복한 나라가 되기 위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필요한 정책을 제안하고자 마련된 자리이다. 이효선 기자

(출처; 브레인미디어

http://www.brainmedia.co.kr/brainWorldMedia/ContentView.aspx?contIdx=17020&fromMenu=MediaListSection01&menuCd=BrainLife)

 

 

5.12  201642일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중국 북제는 고구려 속국이었다. 중국 동북공정 끼어들 틈 없어...

 

신완순(한울빛새움터 원장)

 

중국 516국 시대의 북조정권은 사실상 모두 우리 역사다...

    

남북조 시대의 북제(北齊)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역사에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사서를 보다보면 이러한 냉엄함을 항상 느낀다. 보통은 승자에겐 박수를, 패자에게는 동정을 보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널리 읽혀지고 있는 중국의 역사소설인 <삼국지연의><초한지>를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등장인물에 대해 보이는 반응도 마찬가지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는다.’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주인공은 항우이다. 항우에 대한 인식도,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는 용맹스러운 장군이라는 이미지보다는 힘만 좋을 뿐 우직하고 고집이 세고 자만하여 일을 망쳐버린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이는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중원대륙의 역사를 한족(漢族)중심의 역사로 일관되게 의도되어 서술한 결과의 산물이다.

 

 

한족 중심 역사서술 폐해 심각...

 

<삼국지연의>의 폐해의 심각성에 대하여는 이미 언급을 한 바 있고 <초한지>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승자인 한()나라를 세운 유방보다도 패자인 항우를 주목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어쩌면 항우의 처지와 평가가 고대의 역사와 강역을 잃어버린 우리와 너무 많이 닮아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당나라 말기에 두목(杜牧, 803~ 852)이 지은 제오강정(題烏江亭)’이라는 항우에 대한 추모시는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암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일로 기약할 수 없으니 (勝敗兵家事不期)수치를 감추고 참을 수 있어야 진정한 남아로다. (包羞忍恥是男兒)강동의 자제에는 인재와 호걸이 많으니 (江東子弟多才俊)땅을 차지할 날이 다시 옴은 아직 알 수 없도다. (卷土重來未可知)이 시는 항우가 유방과의 결전에서 패하여 오강(烏江) 근처에서 자결한 것을 탄식한 노래이다. 여기서 권토중래(捲土重來), 땅을 차지할 날이 다시 온다는 말은 어떤 일의 한 번 실패에 굴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남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이 고래로부터 대륙의 역사를 한족중심의 역사로 왜곡 재편하려 한 것은 비단 현재의 동북공정 뿐만 아니다.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한 중국역사지도집 중의 주 시기전도’ - <속후한서>에서 북제 강역의 서쪽은 요동과 접하고 있다 하였으니 요동은 지금의 섬서성과 황하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북제는 고구려 별부(別部)... 발해왕(渤海王)이 통치

 

공자의 <춘추>와 사마천의 <사기> 또한 마찬가지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진수(陳壽)<삼국지>가 위()나라 중심으로 편찬된 사서인 반면, 유비의 촉한(蜀漢)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서가 <속후한서(續後漢書)>이다. <속후한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송()나라 때 소상(蕭常)이 편찬한 <속후한서><소씨속후한서(蕭氏續後漢書)>라하고 원()나라 때 학경(郝經)이 편찬한 <속후한서><학씨속후한서(郝氏續後漢書)>라 부른다. <속후한서>는 유방이 세운 한(, 보통 전한 또는 서한이라 부른다)과 유수(劉秀)가 세운 후한(後漢, 동한이라고도 한다)에 이어 유비가 세운 촉()을 촉한이라 하여 앞선 두 왕조를 잇는 정통왕조로 보는 한족 중심의 역사관을 세우기 위해 편찬된 사서들이다. 얼핏 보면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엄청난 시각의 차이가 있다.

 

 

<삼국지>는 유비를 황제가 아닌 선주(先主)’, 그 아들 유선을 후주(後主)’라 칭하고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반면 <속후한서>는 유비를 소열황제(昭烈皇帝)’라 하고 유선을 소제(少帝)’ 또는 말제(末帝)’라 하여 황제로 칭하고 정통성을 이은 역사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한족 중심의 역사로 끌고 가려는 처절한 몸부림 속에 철저히 계산되어 만들어진 역사(a made-up history)’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이 송()나라와 명()나라로 이어져 <삼국지연의><초한지> 등의 소설을 만들어냈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조선시대의 소중화 사상에 물든 일부 잘못된 선비들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현대의 우리들도 여기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소씨속후한서>에는 흔히 말하는 사이(四夷) 즉 우리 역사에 관한 기술이 빠져 있으나 <학씨속후한서>에서는 동이(東夷)에 관한 역사 기술이 우리의 눈을 확 잡아끈다.

 

 

원래 <학씨속후한서>90권으로 된 원()나라 때 학경(郝經)이 편찬한 사서이다. 편찬자 학경의 자는 백상(伯常)이며 능천(陵川)사람이다. 벼슬이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에 이르렀고 소문관대학사 영록대부(昭文館大學士榮祿大夫)에 추증되었으며 죽은 뒤에는 기국공(冀國公)으로 추봉,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학씨속후한서>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하는 진수(陳壽)<삼국지>를 개편하고, 송나라의 배송지가 주해한 <삼국지>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비교하여 뺄 것은 빼고 취할 것은 취하여 교간된 것이다. 이 중에서 동이(東夷)에 관련된 사항은 <속후한서>81 열전 제78편에 부여, 고구려, 발해 등 11개의 나라에 관하여 기술된 부분이다.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속후한서 동이열전>중에 동옥저, 읍루, 삼한 등 나머지 7전은 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이전 고구려조에 우리 학계에 일반화된 기존의 역사 인식을 흔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북조 시대의 <북제(北齊)>에 관한 기술이며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별부(別部)는 발해이다. 그 땅의 동쪽은 바다에 닿아있고 서쪽은 요동과 접하고 있다. 풍속이 점차 중국과 같아졌으며 수인(蓚人) 고환(高歡)에 이르러 위()나라 효무제(孝武帝)를 축출하고 그 아들 고양(高洋)이 마침내 동위(東魏)를 빼앗아 제왕을 칭하고 나라 이름을 제()라 하였다. 고위(高緯)에 이르러 주()나라 무제(武帝)에게 멸망하였다.(句麗別部曰渤海其東際海西接遼東俗漸同中國至蓚人高歡逐魏孝武帝其子洋遂簒東魏稱尊號國號齊至緯爲周武帝所滅)”

  

 

요수는 황하... 요동지역은 황하 유역

 

북제(北齊)는 남북조 시대 550년에 건국되어 577년 북주(北周)에 의해 멸망한 나라이다. 선비족인 탁발씨에 의해 386년에 세워진 북위(北魏)6진의 난으로 인하여 534년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나누어졌는데 동위는 북제가 되고 서위는 북주가 된다. 동위는 실질적으로 발해왕(渤海王) 고환(高歡)이 통치하였으며 그의 아들 고양이 나라 이름을 북제라 한 것이다.

 

 

이러한 북제가 고구려의 별부인 발해로서, 바로 고구려의 연방에 속한 속국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비록 51자의 짧은 기록이지만 남북조 시대의 고구려의 역사를 밝힐 핵심적 요소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중화 사관에 의해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발간된 중국역사지도집((() 시기 전도’- (그림1)를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학경의 <속후한서>의 내용과 지도를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먼저 요동의 위치문제이다. 지도에서 북제의 강역을 보면 서쪽 경계는 위쪽으로는 황하 동쪽과 아래쪽으로는 낙양(洛陽)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양자강 북쪽을 표시하고 있다. ‘동쪽으로 바다에 닿아있고 서쪽은 요동과 접하고 있다는 구절에서 서쪽의 요동은 현 중국의 섬서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황하가 그 경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동이라는 개념은 요동과 요서를 나누어서 분류가 되지만 일반적으로 요동은 요동과 요서를 합한 개념으로 사서에서 많이 쓰이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또한 요동이 그냥 고구려를 가리킬 때도 많다. 예를 들면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것을 요동정벌이라 하였다. 따라서 북제의 강역으로 보는 요동은 현재의 요녕성이나 하북성 지역이 아닌 황하 인근 유역이며 황하가 자연스럽게 요수(遼水)였음을 밝혀준다.따라서 요동은 현 요녕성에 있는 요하의 동쪽이었다.’는 기존의 지명 비정은 마땅히 재고되어야 하며 현 요하 동쪽으로 고구려의 강역을 표시하는 역사인식 또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북제가 고구려의 별부인 발해였다는 것을 담고 있는 학경의 <속후한서>, 청나라 건륭제 때 국책사업으로 편찬된 사고전서에 실려있다.

 

 

또한 송나라 악사(樂史)가 편찬한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172 하 동이편에 보면 동이의 땅은 흉산(胸山)으로부터 동쪽이다. 그 북쪽은 낙랑(樂浪조선(朝鮮요동(遼東)이며 그 남쪽은 민((진안(晉安)의 동쪽 모두가 그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흉산(胸山)은 현재의 중국 하남성에 있는 숭산(嵩山)으로 보인다. 태산(泰山), 항산(恒山), 형산(衡山), 화산(華山)과 함께 중국의 5악으로 불리는 숭산은 5악 중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숭산은 인체의 심장 부근에 해당되는 산이며 의미상으로 흉산(胸山)이며 이 흉산은 발음은 숭산과 유사하다.

 

 

따라서 <태평환우기>에서 말하는 동이의 강역은 하남성 낙양 부근 숭산의 동쪽에 해당되며 황해 연안을 따라 현 하북성에서 복건성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동이는 동쪽 지역에 있는 유((((() 지역이며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이()를 가리킨다는 것을 앞서 학경의 <속후한서> 동이전의 맨 첫머리에 싣고 있어 <태평환우기>의 기사에 신뢰감을 더해주고 있다.

 

 

고구려 2대 유리왕, 북제와 북위의 전신 선비 정벌

 

북제의 전신이 되는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다. 북위와 고구려가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스럽게 잘 지낸 것을 사학자들은 고구려의 외교력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선비족은 고구려 2대 임금임 유리명왕 때 이미 정벌하여 속국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관계가 후대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별 갈등이 없었던 것이다. 북위에서 동위로 또한 동위가 북제로 변천하는 과정에는 항상 고구려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며 이들은 실질적인 고구려의 전위부대 성격의 국가였던 것이다. 북제가 고구려의 연방에 속한 속국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우리의 역사에서 이들 고구려의 연방에 대한 국가들을 지워버림으로써 중국의 한족들은 속으로는 오랑캐라 경멸하면서도 선비족의 역사까지 그들의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 연방의 일원이었던 선비 등의 역사까지 포함하여야 한다. 분열과 통합을 거듭해온 대륙의 역사는 동이가 나설 때 정리가 되고 안정이 되었다는 것을 많은 사서에서 읽을 수 있다. 그들은 항우를 노래한 시처럼 언젠가 동이가 중원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올 것이라는 공포를 항상 안고 살고 있다. 우리는 항우의 권토중래, 아니 고구려의 다물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신완순(한울빛새움터 원장)

(출처;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305)

 

 

5.13  2016618일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삼국사기' 일식기록, 고구려는 제국, 하북성 산동성까지 차지했다.

오종홍 기자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우리 고대역사의 새 지평을 열다...

 

위만조선의 도읍지 왕검성은 하북성 창려지역이다.”

 

고구려의 개국지, 졸본은 하북성 의무려산 근처다.”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은 요녕성, 요양이다.”

 

고려의 강역은 서북으로는 요하, 동북으로는 흑룡강성 동녕현 일대다.”

 

이성계가 회군한 압록강은 요하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주장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 등 우리역사의 실질적인 출발점이자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역사의 강역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가 17일 새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고구려의 평양과 그 여운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한 자리에서 이와 같이 밝혔다. 모두 11명의 발표자가 참여한 가운데 열린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문헌사료 뿐만 아니라 교통, 환경, 기후 및 천문학, 지리학 등이 동원되어 입체적, 종합적으로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첫 발제자로 나선 전 동아일보 기자 이정훈 씨는 고구려 외교사로 본 고구려의 흥망을 발표하면서 이른바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이 요동지역에 있었음을 고증하였고 여기서 고구려가 나왔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개국지인 졸본이 의무려산 일대라고 하는데 이정훈씨는 고구려가 나온 현도군을 요동으로 봄으로써 고구려 개국지의 위치에 근접했다는 평가다. 이씨는 신라와 돌궐 등은 당나라와의 외교를 잘 한데 반해 고구려는 당나라와 외교를 못함으로써 멸망한 것으로 보아 눈길을 끌었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단국대학교 김철웅 교수는 소중화 조선시대의 사신들이 남긴 연행록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평양의 위치를 밝히려 하였다. 특히 서기1488년 윤1월에 제주도로 가다가 난파되어 명나라 해안에 표착한 최부가 기록한 표해록과 서기 1712년 최덕중의 연행록 일기를 통해서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과 고구려 당나라 전쟁시의 평양이 현재의 요양이었음을 밝혔다. 최부의 표해록은 당시 요동성, 요양에 살던 고구려의 후손들과 현지 요동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져 있다. 특히 고당전쟁시의 도읍지, 즉 평양이 요양이라는 것이다. 당시까지 고구려의 후손들이 고구려의 풍속을 이어가고 있었고 고구려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인하대학교 고조선 연구소에서 주최한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11명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자기 전공분야에서 고구려의 평양과 강역을 연구한 성과물을 내놓은 자리였다. 거의 대부분의 학자가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은 현재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요령성의 요양이었음을 밝혀냈다.

 

 

세 번째 발제자로 나선 인하대학교 박시현 교수는 고당전쟁시 신라의 김유신이 평양의 소정방에게 보급을 하였다는 기록을 재검토함으로써 평양이 현재의 평양이 아닐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서기662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현재의 우리나라 임진강선에 놓고 해석을 하면 맞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시기나 지형을 놓고 볼 때 너무 무모한 작전이라는 것이다.

  

 

네 번째 발제에서는 경희대학과 경북대학에서 윤순옥, 김효선, 황상일, 지아지엔칭 교수가 참여하였다. 네 명의 교수 모두 지리학이 전공이었다. 윤순옥 교수가 대표로 발표하였다.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요녕성의 요하유역과 이 지역의 요택의 지형변화추이를 검토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왕검성과 고구려의 일부 영토를 확정하려고 하였다. 요하의 지리적 환경은 명나라 때 까지 사람이 왕래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거칠었음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매국식민사학이라고 비판을 받는 강단주류사학이, 한나라의 한사군이 현재의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이 같은 주장은 맞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어서 인하대학교 윤한택 교수는 고려의 서북경계를 밝힘으로써 평양의 위치를 찾고자 하였다. 윤교수는 고려사에 나오는 기록에 기자가 책봉을 개시한 곳이 요좌라고 한 것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소중화 조선의 이성계 때 까지 일관되게 고려의 서북경계가 요수, 요하였음을 밝혔다. 따라서 이성계가 회군반란을 일으킨 압록강이 현재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수, 요하지역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고려의 동북경계는 어디일까, 이어 발표한 경복대학교 이인철 교수는 고려사와 이조실록 그리고 소중화 조선의 여러 문집을 바탕으로 고려의 동북경계를 찾아냈다. 윤관 장군이 개척한 동북9성의 공험진과 선춘령의 위치를 밝히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문헌기록을 토대로 개략적인 위치를 확인하고 실제로 현지를 답사함으로써 위치를 확정하였다. 그 결과 북한 회령 북쪽, 중국 흑룡강성 동녕현 일대였음이 드러났다. 지정학 적으로도 이 곳이 연해주, 북한 지역으로 가는 요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다 당시 고려윤관장군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국경선을 표시하는 첩경입도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어 강원대학교 남의현 교수는 동녕부를 통해서 평양성과 압록강을 새롭게 비정해 나갔다. 국내 사료와 중국 측 문헌을 종합해 본 결과 고려 말까지 평양과 압록강은 현재의 평양과 압록강이 아니라고 했다. 평양은 요녕성 요양이며 압록강은 요하였다는 것이다. 인하대학교 복기대 교수는 소중화 조선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의 평양이 다르게 정해졌다고 하였다. 이전에는 요녕성 요양이 평양이 분명한데 소중화 조선이 들어서면서 명나라 사대주의 바람을 타고 평양이 현재의 북한 평양으로 굳어졌다고 하였다. 인하대학교 박사과정의 이인숙씨는 교역을 통해서 왕검성을 비정했다. 윤내현 교수와 같이 하북성 창려 일대로 보았다.

  

 

인하대학교 임찬경 교수는 고려시대, 중국 송나라 사진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서 역사체계를 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것과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려는 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역사체계를 채택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소중화 조선은 중국사대주의에 매몰되어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 체계를 택하여 오늘날 반도식민사관을 일제가 더욱 구축하게 하고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일식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강역은 중국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까지 미첬다. 한국천문연구원의 양홍진 박사는 일시기록은 과학적인 자연현상이기 때문에 거짓으로 기록할 경우 거짓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했다. 위 그림은 당시 일식 위치도다. 관측 지점을 아무리 늘려도 하북성, 산동성에서 관측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강역이 이 지역까지 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내 식민사학이 이어받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발상지인 졸본이 현재 중국 하북성 일대인 의무려산 지역임을 삼국사기를 들어 밝혔다. 대무신 태왕3, 서기20년에는 이곳에 사당을 지었으며 영류태왕 2년인 서기619년까지 고구려 태왕들이 이곳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는 기록을 제시했다. 이것은 고구려가 망할 때 까지 중국 하북성까지 차지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고구려의 도읍지인 평양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요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새롭게 밝혀진 것은 중국의 사서가 왜곡된 것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 천문연구원 양홍진 박사가 역사천문기록을 통해서 고구려의 강역과 평양을 찾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일식기록을 통해서 고구려의 평양과 강역을 밝혔다. 일식기록은 과학적인 것이라서 거짓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식분도가 넓게 나올 수 도 있는 일식도의 성격상, 관측지가 변동이 될 수 있으나 당시 중국의 일식기록과 비교해 보면 정확한 위치는 어렵지만 대략 적으로 어디인지는 확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최소한 고구려의 강역은 중국 하북성 더 나아가 산동성 일대까지 나왔다. 그것도 중국 측 기록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같은 시기 고구려 모본태왕이 중국의 산서성 태원까지 정벌한 사실을 볼 때 삼국사기의 기록이 얼마나 실사성을 갖추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샘이다. 고구려와 당시 중국의 경계가 이 일대였기 때문에 모본태왕이 중국 산서성 태원까지 정복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한편 양홍진 박사는 중국이 우리나라의 천문 일식기록을 베껴가서 기록한 사실도 밝혀냈다. 고구려의 초기역사기록인 서기116년부터 219년에 이르는 기록을 통해서 알아낸 것이다. 동한시대의 일식기록과 고구려 일식기록을 비교하고 동한시대의 일식기록을 통해서 서한시대의 강역을 알아냈다. 또한 동한시대의 일식기록을 통해서 동한의 강역을 알아냈다. 이들 기록에 의할 때 한나라의 강역은 하북성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나왔다. 따라서 한나라가 요녕성을 차지하고 심지어 북한 평양까지 차지하여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주장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현재 중국과 국내 매국식민사학이라고 비판 받는 한국고대사학회 등이 주장하는 중국식민기관 한사군 재북한설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국내외 문헌사료와 천문학, 지리학 등 현대과학을 총 동원하여 가장 객관적인 방법으로 우리 고대사의 실체가 밝혀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일제식민사관과 소중화 조선이 우리역사를 왜곡, 날조한 주범이라는 것도 드러났다. 학술회의장은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참석하였다. 또한 아침10에 시작하여 저녁5시에 끝났음에도 중간에 빠져 나간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높은 관심을 보였다. 아울러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고급 점심식사를 제공하여 학술회의를 풍성하게 하였다. 학술책자도 348쪽이나 되어 학술논문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번 학술회의를 이끈 인하대학교 고조선 연구소의 복기대 교수는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의 위치를 밝히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고대사의 주요 강역을 밝히는데 2년여의 세월을 투자했다고 하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일제식민반도사관과 소중화 조선사관을 추종하는 강단주류사학이 제시하는 증거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증거를 제시해서 우리 고대사의 강역을 밝혔다. 이런 점에서 우리역사의 지평을 반도에서 대륙으로 넓히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오종홍

(출처;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555)

 

 

5.14  201869일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부여는 만리장성 북쪽에 있었다

 

오종홍 기자

 

우리 국사교과서에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 어떻게 들어가 있나 짚어본다.

 

한나라 식민지,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나

 

부여는 지금 처럼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 만주에 있었나

 

고구려 발상지, 졸본은 과연 만주 환인현인가

 

한나라 군대와 싸운 서안평이 압록강 하구 건너 단동일대였나

 

모두 식민사관에서 나온 것이다

 

 

식민사관에서 말하는 서안평은 현재 북한 압록강 하구 건너 단동일대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 1차사료인 <요사> 지리지는 중국 내몽골자치구 파림좌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중국과 일본에 팔아먹는 강단식민사학자들 외에 바른 역사를 찾겠다고 열심히 뛰는 인물들 중에도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인사도 눈에 띈다. '민플러스'라는 진보매체에 연재를 하고 있는 박경순이라는 역사저술가다. 그는 한사군 하나인 현토군, 졸본, 부여, 서안평 등을 식민사관으로 편찬된 국사 교과서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나라 역사는 그 나라 국민정신을 만든다. 특히 국사교과서라는 책을 통해서 국가가 전 국민을 상대로 가르친다면 더욱 그렇다. 더구나 어린 학생들부터 교육한다면 미치는 영향은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국사책은 과연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우리 역사 머리부분에 해당하는 상, 고대사가 궁금하다.

 

 

1.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나

 

우리 국사교과서는 우리에게는 아주 이질감으로 다가오는 역사를 초반부에 다룬다. 소위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다. 조선(단군) 서쪽 변경 끝자락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일을 마치 우리역사 머리 부분인 양 다루어 주입시키고 있다.

 

 

더구나 그 사건이 본래 일어난 지역이 아닌, 우리나라 북쪽 서북한 지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른바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한사군, 특히 낙랑군 위치다. 낙랑군은 중국 식민통치기관이다.

 

 

일제는 우리역사가 중국 식민통치로 시작했다고 날조했다. 이런 사관이 우리 국사책에 스며 있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우리역사를 축소, 왜곡하여 낙랑군 위치를 현재 북한 평양일대로 본다. 현행 국사책이 이것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보자.

 

 

서기2007년도 교학사 판 중학교 국사교과서 33쪽에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 성장을 얘기하면서, “4세기 초 미천왕 때에는 남으로 대동강 유역을 확보한 후, 요동지역으로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이 표현을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4세기 초 북한 평양에 있는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을 몰아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삼국사기> 미천왕조에는 서기313년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아 왔다고 나온다. 이 기록을 왜곡해서 평양에 있는 낙랑군을 고구려 미천왕이 멸망시키고 대동강 유역을 확보했다고 한 것이다. 이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고대사학회라는 단체가 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위시하여 전국 대학교 고대사 전공한 교수들이 회원으로 있다. 이들이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이 부분을 뭐라고 기록하고 있을까. 역시 서기2007년 교학사 판 49쪽을 보자. 삼국정치 발전편 고구려 부분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미천왕 때에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 책에는 아예 낙랑군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미천왕 때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냈다는 것은 앞서 밝힌 서기313년에 미천왕이 낙랑군 포로 2천여명을 사로잡아 왔다는 것에 터잡은 말이다.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냈다는 것은 멸망시켰다는 말이다. 실제로 한국고대사학회는 멸망시켰다고 한다. 위 중학교 국사교과서와 표현만 달랐지 같은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은 결코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냈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낙랑군 포로 2천여명을 사로잡아왔다고 한다. 이 고등학교 국사책 서술은 북한 평양에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있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가르쳐 준 것을 그대로 받아쓰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낙랑군은 북한 평양에 있었던 것일까. 먼저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이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보자. <사기> 조선열전 초반부에 나온다.

 

 

"위만이 망명했다. 무리 1천여 인을 끌고 왔다. 상투를 틀고 만이복장을 해서 동쪽으로 국경을 넘어 패수를 건너 진나라 옛 빈 땅인 상하장에 거주하면서 진번, 조선 만이를 점차 복속했다. 결국 연나라, 제나라 망명자들이 그를 왕으로 삼고 도읍을 왕험이라고 했다."

 

 

"주석8: 색은에 따르면 지리지에서 낙랑에 운장이 있다. 주석9: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동쪽에 있다."

 

(満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斉亡命者王之都王険. [] []索隠案地理志樂浪有雲鄣. []臣瓚云王険城在樂浪郡浿水之東.사기/조선열전)

 

 

이 기록을 보면 위만이 망명자들과 함께 최종 도착한 곳은 진나라 상하장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연나라, 제나라 망명자들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고 왕험성을 도읍으로 했다. <사기> 조선열전 주석에는 낙랑에 운장이 있다고 한다.

 

 

본문 진나라 옛 공터인 상하장에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나라 상하장이라고 했으니 진나라를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진나라 경계는 진 장성 동단이 기준이다. 진장성 동단은 현재 하북성 난하 동남쪽 갈석산까지다(태강지리지, 진서/지리지, 통전 등)

 

 

특히 <진서> 지리지를 보면 낙랑군이 어디에 있었는지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낙랑은 한나라 때 설치했다. 6개현을 통할하고 있는데 호수는 37백이다. 조선현은 주나라 기자를 봉한 곳이다. 둔유현, 혼미현이 있다. 수성현에는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이 일어나는 곳이다. 루방현, 사망현이 있다(樂浪郡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낙랑군에는 수성현도 있는데 이 수성현에는 진나라가 쌓은 진장성 곧 만리장성 일어나는 곳이라고 한다. 만리장성 동쪽 끝에 낙랑군 수성현이 있다는 말이다. 만리장성은 동쪽 끝은 현재 중국 하북성 산해관 서쪽이다.

 

 

<사기> 하본기 주석에는 태강지리지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태강지리지에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일어나는 곳이다(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여기에는 보다 명확하게 낙랑군 수성현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만리장성에 이어 갈석산까지 등장한다. 갈석산이 어디에 있는 지 알면 낙랑군 위치도 확인된다.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난하 동남쪽에 존재한다.

 

 

이런 기록은 이후 나오는 중국 다른 사료에 계속 반복해서 등장한다. 낙랑군이 북한 평양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1천 수백 킬로미터 덜어진 중국 하북성에 있었다는 것이다.

 

 

소위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하북성에 있었다는 것은 그 동쪽은 우리 땅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 현재 요하를 건너 더 훨씬 서쪽까지 우리 역사 강역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제는 낙랑군을 북한 평양에 갖다 놓음으로써 이 광활한 땅을 모두 중국에 팔아먹었다. 그리고 서북한 지역의 초라한 땅만이 우리역사 강역이라고 왜곡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 국사책이 그대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부여는 어디에 있었나

 

그렇다면 우리 국사책은 부여를 어디에 갖다 놓고 있을까. 앞서 언급한 우리 고등학교 교과서 49쪽을 보면 부여를 길림성, 흑룡강성 일대로 그려놓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사기> 화식열전에 의하면 부여는 연나라 북쪽 인근에 오환과 함께 있다. 부여가 연나라 북쪽에 있다는 얘기다. 연나라는 그럼 어디에 있었는가. 발해와 갈석사이에 있다고 한다.

 

 

발해는 현재 하북성 천진시 바다인근이다. 갈석은 갈석산으로 하북성 난하 동남쪽이다. 부여가 이 연나라 북쪽에 있다고 한다(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北鄰烏桓, 夫餘 사기/화식열전).

 

 

<한서> 지리지에는 부여는 연나라 수도인 계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또 주석에는 구체적으로 부여위치를 말하고 있다. 부여는 장성북쪽에 있는데 현토로부터 1천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南通齊, 碣之間一都會也 北隙烏丸夫餘師古曰:「薊縣, 燕之所都也. , 勃海也. , 碣石也.師古曰:「訓際是也. 烏丸, 本東胡也, 爲冒頓所滅, 餘類保烏丸山, 因以爲號. 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夫讀曰扶.한서/지리지)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 동이전에는 부여가 장성 북쪽에 있고 현도군과는 1천여리가 되며 남으로는 고구려, 동으로 읍루,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하고 있다고 한다. 또 북쪽에는 약수가 있고 방이 2천여리라고 한다(夫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裏,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二千裏 삼국지/위서/오환선비동이전).

 

 

부여 위치를 가장 객관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중국 정사인 1차사료에는 일관되게 부여가 장성 북쪽에 있다고 한다. <사기>/화식열전의 연나라 북쪽 부여 위치와 통한다. 그런데도 우리 국사책은 부여가 현재 만주 길림성에 있다고 그려놓고 있다.

 

 

중국 요령성 조양시 원대자 고분군에서 발견된 벽화다. 묘 주인이 고구려 태왕을 상징하는 백라관을 쓰고 있다. 백라관은 중국 <구당서>, <신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태왕이 쓰는 관이라고 나온다. 똑 같은 벽화가 북한 안악3호분 고구려 벽화묘에서도 발견된다. 벽화에서 주인공이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고 그 위 주변에 다시 선으로 투명색 관이 하나 더 쓰여 있다. 이것이 백라관이다.

 

 

4.고구려 발상지 졸본은 어디인가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왔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일어나 첫 번째 도읍지는 어디일까. 먼저 앞서 언급한 중학교 국사책을 보자. 33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구려의 지배 세력은 부여 계통의 이주민이었으며,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토착민들과 힘을 합하여 나라를 세웠다(기원전37)”

 

 

이번에는 앞서 언급한 고등학교 국사책을 보자. 47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1세기 후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또 같은 책 37쪽에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인 졸본(환인) 지방에 자리 잡았다. 이 지역은 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여 힘써 일을 하여도 양식이 부족하였다.”

 

 

모두 고구려 발상지를 압록강 근처로 비정하고 있다. 고등학교 국사책은 이곳을 졸본성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졸본성이 압록강 인근이라고 한 점이다. 고구려가 이 언저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현재 만주 환인현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졸본성이 이곳에 있었을까. 졸본은 다른 말로 흘승골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현재 요하 서쪽 조양시 인근 의무려산 일대로 나온다. 여기가 고구려 중심지라는 소리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자.

 

 

"<통전>에 의하면 주몽이 한나라 건소2년경에 북부여에서 동남으로 가서 보술수를 건너 홀승골성에 살았다. 나라 이름을 구려라고 하고 고를 씨로 삼았다. <고기>에 이르길,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 나와 졸본에 이르렀는데 곧 홀승골성이다. 졸본과 비슷한 곳이다."

 

 

"옛날에 대요가 망하지 않았을 때 요나라 황제가 연경에 있었는데 우리 조빙자들이 동경을 지나 요수를 건너 하루 이틀에 걸쳐 의주醫州(의무려산이 있는 주)에 이르렀다. 이어 연나라 계로 향했다. 이러한 이유로 (졸본=홀승골성이 의무려산이라는)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주몽이 홀승골성을 도읍으로 했다."

 

"按通典云: “朱蒙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 古記云: “朱蒙自扶餘逃難, 至卒本.” 則紇升骨城卒本, 似一處也.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景=燕京,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自朱蒙立都紇升骨城삼국사기/지리지."

 

 

<삼국사기> 기록이 진실하다는 것은 앞서 중국 1차사료에 나오는 부여위치를 볼 때 확인된다. 앞서 부여위치가 중국 진나라 만리장성 북쪽에 있었음을 확인했다. 이것이 진실하다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태왕과 태조태왕 때 일어난 사건으로도 증명된다. 모본태왕은 중국 산서성 태원까지 진격하여 한나라를 정벌한다. 그리고 다음 왕 때 요서에 10개성을 쌓는다.

 

 

고구려본기2 모본왕 2, , 군대를 보내 한나라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했다高句麗本紀2-慕本王-2年 二年, ,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삼국사기/고구려본기)”

 

 

고구려본기2 태조대왕3, 2월 요서에 10개성을 쌓아 한나라 병력에 대비했다(高句麗本紀3-大祖大王-3,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지금으로 말하면 난하 동쪽 하북성 까지 고구려 강역이었다는 소리다. 그러니 고구려 중심지는 당연히 요하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조양시 부근에서 안악3호분과 같은 양식의 무덤이 발굴되기도 했다. 벽화도 고구려 태왕들 모습을 하고 있다.

 

 

북한에 있는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다. 주인공이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고 그 주위에 선으로 그려진 관을 하나 더 쓰고 있다. 이것이 요하 서쪽 조양시 원대자묘에서 발견된 벽화묘의 주인공 백라관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 판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직접 1차 사료다. 현재 요하 건너 서쪽, 조양시 동쪽에 위치한 의무려산 일대가 고구려 발상지 졸본으로 나온다. 왜 이 서쪽에서 고구려 태왕 묘로 보이는 원대자 유적이 나왔는지 알 수 있다. 사료와 고고유적이 맞아 떨어지는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5. 서안평은 어디인가

 

서안평은 우리 고대사에서 주요한 지명이다. 서안평이 어디냐에 따라 고구려 판도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식민사관에서는 서안평이 현재 압록강 하구 건너편 중국 단동일대라고 한다. 서안평이 여기라고 한다면 고구려는 이 서안평을 두고 중국 한나라와 전쟁을 벌인다. 고구려 땅이 여기에도 못 미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중국 내몽골자치주라고 파림좌기라고 한다면 그 동쪽은 고구려 땅이 된다. 서안평을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크게 달라진다. 서안평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태왕조, 동천왕조에 등장한다. 태조태왕조에는 서기146"가을 8월에 왕이 장군을 파견하여 한나라 요동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처자를 약탈하여 얻었다(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고 한다.

 

 

이 얘기는 중국 <후한서> 동이열전에도 나온다(,桓之閒,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양쪽 사료가 교차 검증이 되니 역사사실로 믿어도 될 것이다.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조에도 서기242년에 서안평을 왕이 장군을 파견하여 요동서안평을 파괴했다고 한다(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이 기록들은 하나 같이 '요동서안평'이라고 한다. 서안평이 요동이라고 한다. 압록강 하구 단동이 요동이라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다. 지금 따져 보아도 요동은 현재 요하 동쪽 언저리를 나타낸다.

 

 

이 기록들을 볼 때 서안평을 기준으로 당시 고구려와 한나라가 국경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안평은 <요사>지리지, 상경부편에 의하면 임황부에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현재의 내몽골 자치주로 나온다. “상경도상경 임황부는 본래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 땅이었다. 신나라 왕망이 북안평이라고 했다(上京道上京臨潢府,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 新莽曰北安平.요사/지리지/상경부).

 

 

위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 당시 요동은 현재 요하를 건너 현재 내몽골 자치주 파림좌기 언저리라는 얘기다. 이렇게 기록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 가면 고구려 윤곽이 나온다. 판도가 그려진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머릿속에 고구려 판도를 현재 요하 이동 만주지역으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지리비정은 모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반도사><조선사> 및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내놓은 책이나 논문이 다 이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이 식민사관을 현재 우리나라 거의 모든 학자들이 따르고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역사관련 책들이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6. 정부가 나서서 역사 바로 잡아야한다

 

일제는 우리나라 역사 강역과 시간을 축소해서 반도로 가두어 놓았다. 모두 조작 날조한 것이다. 중국 1차사료에 뻔히 역사진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부정적인 내용만 뽑아다가 역사를 구성했다. 그 때는 이것이 통했다. 그러나 서기21세기 지금 모든 정보가 공개되고 있고 손가락 몇 번만 두들기면 모든 1차사료가 바로 뜬다. 지금은 정보통신이 고도로 발달해서 모든 사료가 개방되어 있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식민사관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버젓이 거짓된 역사를 국가가 앞장서서 전 국민에게 국사교과서를 통해서 주입시키고 있다. 일제식민지 노예사관으로 여전히 일본에 예속시키고 있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 부역한 이병도, 신석호 등 친일사학자들이 우리 역사학계를 장악했다. 이들이 식민사관으로 우리 국사책을 만들었다. 우리 국사책은 아직도 일제 조선총독부 지배를 받고 있다.

 

 

수 많은 적폐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우리 정신을 지배하는 역사적폐가 가장 심각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혼돈 속에서 가치관을 상실한 채 헤매고 있다. 모두 일제식민사관의 후유증이다. 이제 실상을 바로 알고 정부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할 때다. 오종홍 기자

(출처;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2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