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환기9218해,신시배달5919해 단기 4354해,서기 2021해, 대한민국 102해(나뉨 73해),

25 2008년 10월

25

책, 연재/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 오역(誤譯)의 역사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 오역(誤譯)의 역사 아무리 영어가 출중하다 해도 조지훈의 시 ‘승무’를 영역하기란 어렵다는 어느 영문학자의 말을 듣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다. 나도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어는 참으로 어렵다. 이 땅에 태어났으니까 영문도 모르고 배웠지, 만약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웠어야 할 입장을 생각한다면 아찔하다. 그 많은 어미 변화를 어떻게 문법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미 변화는 그렇다 하더라도 저 천변만화하는 형용사는 또 어쩔 것인가? 우리나라 속담에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말이 의미하듯이 우리 언어의 형용사 변화는 느낌으로 아는 것이지 문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문헌에는 오역(誤譯)이 많다. 오역은 그 번역자의 외국어 실력이 낮을 경우와 ..

25 2008년 10월

25

책, 연재/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美, 한반도 4대국 분할 시도했다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美, 한반도 4대국 분할 시도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돌아보노라면 회한이 많이 일어난다.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실은 역사학에서 부질없는 일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런 가상을 하는 일이 허다하게 많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라 할 수 있는 분단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렇다. 분단 자체가 회한이기는 하지만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분단선이 너무 남쪽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비극적이었다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만약 분단선이 조금만 더 북쪽으로 올라가 서울이 북한 야포(野砲)의 사정권에 들지 않았고, 38도선으로부터 서울이 1일 진입권에 들지 않았더라면 김일성은 그렇게 간단하게 개전을 결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영토..

25 2008년 10월

25

책, 연재/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3·1운동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3·1운동 기미년 3월 1일에 있었던 일 기미년(1919년) 2월 하순 어느 날, 어스름이 깔리는 서울 안국동 사거리 근처에 한 사내가 땅 밑을 바라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일명 신승희)이었다. 그는 발 밑으로 들려오는 어떤 기계 소리를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옆 건물인 보성사(普成社)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천도교에 소속된 인쇄소였다. 불빛은 없었다. 그가 닫힌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니 안은 불빛이 환했고 윤전기에서는 무엇인가 인쇄 중이었다. 빼내어 보니 ‘독립선언서’였다. 인쇄소를 급습당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33인의 한 사람)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신철은 선언서 한 장을 챙겨들고 말없이 인쇄소를 나갔다. ▼조선인 ..

25 2008년 10월

25

책, 연재/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두계학파와 실증사학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두계학파와 실증사학 역사가는 얼마나 객관적이며 정확하고 정직할 수 있으며, 그들의 학통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고, 상황의 논리로부터 얼마나 용감할 수 있을까? 멀리는 사관(史觀)의 차이에서부터 시작해 가까이는 이념의 굴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학은 역사의 굴곡만큼이나 복잡다단하다. 특히 한국 사학사가 이토록 어려움을 겪은 것은 일제시대라고 하는 타율적 세뇌의 과정이 너무도 길고 집요했기 때문이다. 한 세대를 넘는 시간 속에서 일제의 세뇌를 견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사에서의 외압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역사학의 굴절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다음과 같은 소극(笑劇)은 여염의 우스개 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장수왕때 ..

25 2008년 10월

25

책, 연재/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김옥균은 실패한 이상주의자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김옥균은 실패한 이상주의자 사람이 일생을 사는 동안 어떤 사람을 만나 그로부터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을 받아 평생 가슴에 새기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도 젊었을 적에 만났던 그런 분이 있었다. 연세대 신학대학장을 지내신 지동식 (池東植) 박사님이다. 어느 해 그분께서 노환으로 임종이 가까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서둘러 경기 고양 화전(花田)의 댁으로 그 분을 찾아뵈었다. 병석의 그 분(목사님)은 나에게 교회 잘 다니라고 유언하실 줄 알았더니 그런 말씀은 입밖에도 꺼내지 않으시고, “인간은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을 수 없다. 그러니 너는 훗날 그릇이 작아 물이 넘치는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젊은 날에 그릇을 크게 하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 말씀이 내게는 유언이 되..

25 2008년 10월

25

책, 연재/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환곡의 폐해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환곡의 폐해 2001/07/13 나는 충청도 산골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 한 겨울 새벽이 되면 나는 일어날 시간이 되어서 잠에서 깨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의 냉기 때문에 잠에서 깨곤 했다. 그 새벽에 나는 지주가 아버지를 불러내어 왜 빚을 갚지 않느냐고 호통치는 것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신보다 나이 어린 지주에게 수모를 겪은 아버지는 수치심 때문에 자식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 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은 사회 생활 시간에 “우리의 역사에는 춘궁(春窮)에 굶주린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봄에 양식을 꿔주었다가 가을에 갚는 훌륭한 환곡 제도가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소견에도 ‘그런 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우뚱거..

25 2008년 10월

25

책, 연재/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14]명성황후의 초상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14]명성황후의 초상 입력 2001-07-06 18:41수정 2009-09-20 12:03 어떤 인물에 대한 추모의 정(情)은 우선 그의 모습을 그리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남달리 관상과 인상을 중요시하는 한국인들이 얼굴 모습을 그토록 중요시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추모의 감정이 지나쳐 없는 모습을 그리거나 상상이 지나치다면 그것은 추모가 아니라 오히려 고인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명성황후의 초상을 둘러싼 논쟁이다. 우선 사진 (1)을 보자. 요즘의 초 중등 교과서에 명성황후의 어진(御眞·실제 얼굴)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황후의 어의(御醫·의사)였던 언더우드 여사의 ‘토미 톰킨스’(1905· 292쪽)와 고종의..

25 2008년 10월

25

책, 연재/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훈요십조와 지역감정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훈요십조와 지역감정 2001.6.22 한국 현대사가 안고 있는 아픔이 어디 한 두 가지일까만은, 아직도 우리에게 애물처럼 달려 있는 것은 지역 감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역 감정이란 동서고금의 어느 곳에나 있었던 것이라고는 하지만 특히 우리의 경우에는 그 골이 너무 깊어 많은 사람의 가슴에 멍울지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호남 기피’였다. 이 문제는 사회과학자들의 오랜 쟁점이 되어, 누구는 박정희(朴正熙)의 개발 편중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남긴 훈요십조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서기 943년, 눈을 감기 직전 가까운 신하였던 박술희(朴述熙)를 불러 훈요십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