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일본사

천사짱 2007. 11. 8. 10:35
 

3장.

백제 초고대왕 일본 천황 시조 스사노오

百濟 肖古大王 日本 天皇 始祖 速佐之男

  

 

 

 

위 사진은 의자왕의 후손인 일본의 백제왕씨 경복이 750년경에 세운 백제왕신사 사당의 배전(2전)과 현판 모습인데 백제국왕 우두천왕이라 적혀있다.

이 우두천왕은 일본의 건국신 스사노오이며 또한 백제 초고대왕인 것이다.

이 신전 본전에서는 일본에서 백제왕씨를 처음 하사받은 의자왕의 아들 선광 등 씨족을 모시는 것이고, 배전에서는 백제왕 선조, 특히 일본에 처음 온 백제왕 초고왕(우두천왕 = 스사노오)을 제사지내는 것이다.

 

                  백제 초고대왕 후손 일본천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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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제의 건국지 대동강 평양

 

    百濟 建國地 大同江 平壤


백제 온조대왕이 배를 타고 만주를 떠나와 한반도로 들어와서

처음 건국한 곳은 평안남도 대동강의 서쪽가지 보통강 평성시 청룡산성이며 대산한성, 하북 위례성이라 불렀고,

이후에 대동강 동쪽가지 비류강 성천군에 하남위례성을 세웠다. 동서 2성인 것이다.

대동강 하류 평양에 있던 기준의 마한을 병탄하여,

백제가 북으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태백산맥,

남쪽으로는 금강에 이르렀다.

 


 

고구려 국모였던 소서노召西努가 비류沸流왕자와 온조溫祚왕자를 데리고 바닷가로 와서 소금장사를 하여 마침내 어하라於瑕羅를 세운 곳은 고대 어니하於泥河가 흐르던 만주 대석교시大石橋市 진미산성鎭迷山城으로 고려된다. 진미산은 발해 진주辰州가 있었고 그 이름의 유래는 진한辰韓이다. 이를 소서노의 장자인 비류대왕이 물려받았다.


소서노의 차자인 온조왕자가 비류대왕으로부터 독립하여 배를 타고 한반도로 건너와서 처음 상륙한 곳은 미추홀彌鄒忽이라 전하는데, 이는 평안남도 서해안의 영유현永柔縣 미두산米豆山이다. 미추의 변음變音이 미두인 것이다. 미추는 용의 우리말이다. 강룡산降龍山, 견룡지見龍池 등이 미추홀에 남아있다.


온조대왕이 오른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은 평안남도 평성시 자모산慈母山이다. 자모산성이 남아있다. 성 둘레는 5000m이고, 위례성을 호위하는 5방성 중의 북방성이 된다.

온조봉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은좌봉殷坐峰이 그 서남에 있다. 평성시 동남쪽 백족산百足山도 온(溫=百)조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모산성 남쪽에는 청룡산성靑龍山城이 있는데 첫번째 한산 수도 하북 위례성이다. 성 둘레는 약 5000m이다. 그곳을 상차리上次里, 또는 오리동이라고도 하는데, 위례성慰禮城의 지명이 아직 남은 것이다.


다음으로 온조대왕이 한수漢水(=平壤 大同江)로 보호된 도읍지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을 세워 한성漢城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홀골산성忽骨山城이다. 성천은 위례성천이 어원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비류강沸流江이라고도 부른다. 동쪽의 소조산小祖山도 온조산에서 유래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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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7) 백제 세력도

 

 

온조대왕이 처음 쌓은 마수성馬首城은 압록강鴨綠江 남쪽의 의주義州 서남쪽의 백마산성白馬山城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모수성牟水城이다. 낙랑이 마수성 축성을 반대하니 독산禿山, 구천狗川의 두 성을 쌓아 낙랑의 통로를 막았는데 이는 청천강淸川江의 북안 독산면獨山面과 개천군价川郡의 두 성이다.

온조대왕이 다시 한강漢江(=渾江) 서북쪽에 성을 세우니, 이는 압록강의 동북방인 중국 환인현의 혼강渾江에 위치한 오녀산성烏女山城이다.

백제는 환성丸城이라 했고, 지금은 환인桓仁이라 하는데, 청나라 때는 오이고성烏爾古城이라 했었다. 백제계 일본성씨인 화니和邇=丸씨, 우리말로 아이阿爾씨의 고향이다. 신공황후의 성씨가 환씨이니 그 조상들의 원향이다.

 

온조대왕은 평양 위치에 있던 기씨마한箕氏馬韓을 병탄하였다. 그리하여 마한을 합친 백제의 남계는 황해도와 경기도를 지나 충청남도 금강錦江에 이르러서 공주公州 대두산성大豆山城, 다른 말로 콩산성公山城을 쌓게 된다.

당시 백제의 북계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이 패하는 고대에 파사수婆娑水, 파저강婆猪江이라고도 했던 지금의 압록강일 것이다.

초기 백제 동계는 주양走壤이라고 했는데, 대동강 동계인 곡산천谷山川의 달해산達海山 달보산성達寶山城으로 고려된다. 


개루대왕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는데, 평양 북쪽 평성시 청룡산성으로 고려된다. 자모산성 남쪽이다.

백제 전성기 근초고대왕의 한산성은 대성산 남쪽 안학궁지로 고려된다.

고구려가 훗날 한성을 쌓았는데 지금의 평양성이다.

 

(주) 백제의 초기 수도가 대동강 지역인 것은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1)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아스카明日香 기토라고분에서 나타난 벽화의 별자리가 평양 하늘을 관측한 것으로 증거된다. 백제인의 하늘은 평양 하늘이었다. 

 

2) 신라의 수만 개에 달하는 고분과 고구려의 수만 개 고분에 견줄 수 있는 백제 고분은 서울에 거의 없다. 일제강점기에 약 80개 정도 남아 있었다고 전하지만 대부분 고구려식이다. 대신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수만 개 고분이 있는데 이 모두가 백제 귀족 고분이며 이를 이제까지 유령국가 낙랑군의 고분으로 잘못 알고 있다.

 

3) 6세기 공주 무령왕릉 같은 형식의 벽돌塼室 고분의 선구가 만주로부터 대동강에 산재해 있다. 현재 서울 한강에는 벽돌 고분이 없다. 고구려 장수대왕이 백제 개로대왕을 죽인 뒤에 백제는 공주로 천도하였고, 황해도 전실고분도 공주로 직접 이어진 것이다.

 

4) 일본의 벽화 고분은 백제가 전수한 것이다. 그 벽화 고분의 선구가 역시 평양 지방이다. 서울에는 벽화 고분이 하나도 없다. 벽화 고분은 만주의 요양시를 거쳐 평양시에 전해졌고, 그 뒤에 고구려 집안과 신라로 전해졌다.

 

5) 또한 고구려고분으로 선전된 황해도 안악3호 고분의 복식과 관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왕의 복식과 관이다. 고구려왕의 복식과 관은 색이 전혀 다르다. 선비족 동수라는 주장은 묵서에 기록된 출생지가 후한시대 지명 기록이라 맞지 않다. 

 

6) 황해도 사리원의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 묘(468년)는 낙랑의 대방태수묘가 아니라 백제의 대방태수묘이다. 471년 송나라에 개로대왕의 사자로 간 백제 대방태수의 이름도 장무張茂였다. 즉 장무의 부형이 장무이인 것이다.

 

7)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6년 백제를 정벌할 때 뺏은 첫번째 성 일팔성이 만주의 단동시丹東市 봉황산성鳳凰山城으로 [만주지리풍속지]에 기록되어 있다. 즉 396년 이전에 백제 땅은 만주에도 퍼져 있었다.

 

8) 광개토대왕에게 패퇴한 5세기, 백제가 후퇴한 수도 한성은 예성강禮成江에 있었다. 황해도 신계군新溪郡 부여면夫餘面 위라천位羅川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예성강은 본래 위례성강慰禮城江이었던 것이다. 위라천+ 예성강 = 위례성강이다

그곳의 피난 수도였던 태백산성은 백제 말기 수도인 충청남도 부여의 부소산성과 똑같은 형식이다.

 

9) 대동강 평양에서는 506년 경에 고구려인에 의해서 현재의 평양성이 세워질  당시에 만들어진 [평양성벽 각서刻書]가 발견되었는데, 그 성벽에 평양이라는 말은 전혀 없고, 대신에 오로지 [한성漢城]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漢城 下 後部小兄...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했던 대동강 평양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 연개소문의 둘째아들 천남산묘지泉男山墓誌에도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한 곳은 한성漢城으로 나와있다. 즉 지금 평양은 본래 백제 한산성, 고구려의 한성이었다.

[泉男山墓誌]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396년 백제 한산성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빼앗았다.

한편 [평양성벽각서]에서 [한성 하, 漢城 下]는 고구려 한성이 고구려인에 의해 건설 도중에 다시 백제에게 함락되었던 사실을 의미한다. 506년 무령왕 때이다.

 

10) [삼국사기]에서 한성(평양)의 백제 개로왕을 참살한 고구려가 안장왕 대에 국경을 넘어 백제로 쳐내려와서 전투한 곳은 황해도 한복판 오곡군五谷郡이었다. (앞 지도 참조) 북한의 역사책은 이를 백제군의 북침을 유인해서 섬멸한 것이라고 억지로 해석한다.

 

11) [일본서기] 550년조에서 백제가 평양平壤을 쳐서 6군을 수복했는데, 본래 백제 고지라고 했다.

 

12) [삼국사기 거칠부전居柒夫傳]에서 나제동맹군의 백제가 앞서나가서 평양성을 쳤다고 했는데 대동강 평양, 즉 하평양이다.

 

13) [일본서기]에서 550년 백제는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 금현성錦峴城을 빼앗았는데 서로 싸우다가 지친 틈에 신라 진흥왕의 이사부異斯夫가 습격하여 빼앗았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서는 두 성을 우두방牛頭方과 니미방尼彌方이라고 기록했는데 신라 우두방이 있던 곳은 금천군金川郡으로서 지금 예성강의 동편이다. 5세기 아신대왕의 위례성이 예성강 서편 평산군平山郡 태백산성에 있었다.

 

14) 번한왕 기준箕準이 요서에서 위만衛滿에게 밀려나서 피난나온 마한이 대동강 평양이다. [마한세계馬韓世系]에서 기준의 9세 후예인 기정箕貞이 기원전 17년에 백제 온조대왕에게 망했는데, 이때 기씨마한의 세력이었던 선우鮮于씨는 평양 서쪽의 오석산 황룡산성黃龍山城(앞 지도 참조)의 주인이 되았고, 기奇씨는 경기도 행주산성의 주인이 되었고, 한韓씨는 충청북도 청주의 주인이 되었다.

 

전라도 익산 구석에서 기씨마한이 망했다는 주장은 그 후손들의 분산 배치 결과로서 말이 되지 않는다.

 

15) 평양의 백제대왕을 낙랑태수라고 한 것은 동진에서 보낸 근초고대왕의 책명에서 나타나고, 그후 [양나라 직공도梁職貢圖]에도 백제 사신을 낙랑 사신이라고 기록해놓았다. 아울러 이 백제가, 이 낙랑이 양자강 동쪽을 동진東晋 말부터 백년간 거느렸다.

 

16) 백제 초고대왕肖古大王의 이름이 함흥 지명에 다수 남아있다.  뒤에 자세하다.

 

17) [정의괄지지正義括地志]에서는 도이島夷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백제국 서남의 발해 중에 큰 섬 15개소가 있는데 백제에 속했다. 백제가 발해 동북에 위치해 있었으니 백제의 만주 소유가 기록된 것이다. [正義括地志]:「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皆邑落有人居,屬百濟.」

 

이렇게 많은 대동강 백제 평양의 증거가 무시되는 국사는 결코 진실된 역사가 아니다. 제 조상 무덤을 호로새끼 무덤이라 하면서, 스스로 근본을 부인하고 노예처럼 살기로 작정한 것은 사실 우리 국민들의 뜻이 아니다.

고려 말기 이후로부터 왜곡된 지식을 대대로 후손에게 그릇 가르쳐온 양반 학자들의 만행이다.

 

2. 초고대왕의 함흥 거점 일본 진출

       肖古大王 咸興 據點 日本 進出                

 


백제 개루대왕 때에 백제는 함흥에 진출하였고

함흥에 쇠를 다스리는 수시리성을 두어 초고왕자가 지켰다.

160년 초고왕자는 함흥에서 일본 이즈모에 건너가서 일본 전역을 굴복시키고

일본 천조대신 히미코, 즉 세오녀를 포함한 8명의 신녀를 후비로 삼아서 팔중성에 가두고 8명의 자손을 낳았다.

그후 히미코가 탈출하여 큐슈에 야마대국을 세우고,

그 아들이 가야로 건너가서 가야왕의 사위가 되어 얻은 후손이 알알이이며,

알알이가 큐슈로 돌아와 아들을 낳으니 신무천황이 되었다.

 

   

 

백제 6대 초고대왕肖古大王(재위166~214)이 일본의 건국신인 스사노오須佐之男이니, 일본이 최초 천황으로 모신 신무천황神武天皇(194~256)의 증조부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당시 동해안의 정세를 보면 108년에 강원도 삼척三陟이 신라 파사왕婆娑王의 신라 땅으로 통합되었다.

125년에 신라가 동해안의 말갈로부터 침략을 받으니, 백제 기루대왕己婁大王(재위 77~128년)은 백제의 다섯 장군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때 백제가 동해안에 영토가 없었으므로 말갈은 백제를 거치지 않고 신라를 친 것이다. 그러나 말갈과 백제가 전투를 한 곳은 동해안이었다.

 

이후 155년, 백제 개루대왕(재위 128~166년) 때에 신라의 아찬 길선吉宣이 백제로 망명하였다. 이때 신라는 백제를 쳤으나 백제는 여러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에 신라인 길선이 동해안 함흥, 원산 등의 여러 성을 가지고 귀순하여 백제에 받침으로 백제가 동해안에 진출하고, 신라의 탈환 공격을 방어한 것이다.

 

백제는 수도가 하북 위례성, 즉 평성시 청룡산성인 때에, 백제 동부 주양走壤에서 문천시 서쪽 마식령馬息領(고대 마수령馬樹嶺이다.)을 통해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에 진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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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8) 초고대왕의 속고성과 일본 진출도

 

 

이 무렵에 원산시元山市 북쪽 문천시文川市에 속고봉速高峰(문천시 북계), 속고산速高山(722m, = 신증동국여지승람 ; 所依達山, 즉 쇠달산, 문천시 남계) 같은 백제 초고대왕의 별명인 속고왕速古王의 이름을 딴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함흥시 동쪽에는 초고대령草高臺嶺도 생겨났다. 즉 개루대왕 생전에 초고대왕인 속고왕은 원산-함흥 지역에 봉토를 받아서 있었던 것이다.

그후 214년 신라가 사현성沙峴城을 수복했는데, 이는 원산元山 남쪽 고산군高山郡 사현봉수沙峴烽燧가 있던 사현沙峴이다.


문천군에 속고산速高山(722m)이 있다. 문천군 천불산에도 속고봉이 있다.

문천군에 매홀석성妹屹石城이 있었고, 이는 문주文州라고도 했는데 백제 개로대왕을 이은 문주대왕汶洲大王이 고구려로부터 이 지역을 탈환하여 지키고 있었던 곳으로 고려된다.

개로대왕의 참살 때에 문주대왕은 함흥으로부터 신라로 내려가서 구원병 1만을 얻어올 수 있었다.

함흥 동쪽 퇴조만의 퇴조고성退朝古城(석축 4917척)이 백제 고성으로 고려된다. 서쪽에 초고대령草高臺嶺 동북에 초막산草幕山, 제봉산鵜峰山이 있다. 초고대령은 초고대왕령이었을 것이다.

초막산 북쪽에 가장 높은 우두산牛頭山(814m, 현재 봉화산)이 있었고 그 북쪽에 함관령이 있다. 백제 초기에 공격하던 함흥 낙랑의 우두산성이다.

그 서북쪽에 덕산동 초원고성草原古城이 있는데 토성으로서, 1147척의 호위성이다.


함흥 서쪽 6511척의 한당고성閑堂古城이 토성인데, 동해안까지 확장된 백제 동부의 부도성으로 유력하다. 그 위치는 함흥시와 백운산석성의 중간인 상조양면의 중평리다. 북쪽에는 자고성慈姑城이 있는데 이는 평양의 자모산성처럼 북쪽 호위성이다. 한당고성은 백제 초기 등장하는 낙랑 지역이었으며 고구려, 백제의 우수주牛首州였다.


백제 개루대왕蓋婁大王 때에 개루대왕의 왕자 초고왕자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바다를 건너서 일본 시마네현嶋根縣의 이즈모出雲에 진출하였고, 160년에 일본의 여왕 히미코(~247)를 정복하였다.

이는 히미코 여왕의 여사제女師弟인 와카히稚日女命(113~160년)가 초고대왕에게 죽임을 당한 해가 그녀의 고분에서 160년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는 효고현兵庫縣 서궁시西宮市 증암정甑岩町에 있는 월목암신사越木岩神社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일본에 간 최초의 백제인 초고대왕肖古大王은 일본에서 속고왕速古王, 또는 속고대왕速古大王으로 표기한다. 백제에서는 별칭이 소고왕素古王, 상고왕尙古王이었다. 일본말에서 肖,素,尙 은 모두 쇼 발음이다. 이는 원시 부여 발음에서 백제나 일본이 비슷했을 것이다. 단 조照고왕은 근초고왕이다.

그후 초고대왕의 여러 아들들이 일본에 진출하였고, 그리하여 일본에는 백제 속고대왕速古大王의 후손으로서 여러 씨족 가문인 금부련錦部連, 삼선숙녜三善宿禰등 직계 후예를 남겼는데 이는 일본의 고대 기록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 남아있다.

 

특히 여느 백제왕들과 달리 ‘속고대왕速古大王’이라고 [신찬성씨록]에 표기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모든 왕 중에 오로지 유일하게 백제 속고왕만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한반도에서보다 일본에서 초고대왕이 더 추앙받는 현실이다.

 

그외 속고대왕의 후손이 일본 고대 역사에 많이 기록된 것은 속고대왕 때에 일본 진출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일본의 최초 천황이 된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증조부였던 스사노오須佐之男는 일본에서 建速須佐男, 速佐男, 素佐能雄, 素盞嗚, 素佐能雄, 進雄 등으로 표기되어 왔다.

건속建速은 속을 건국했다는 뜻이니, 한반도 동해안 원산 지방인 속국速古國을 처음으로 차지한 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속고왕이라는 일본 이름도 생겨난 것이다. 일본에도 역시 속고를 건설했는데, 시마네현嶋根縣에 처음 팔중궁을 세웠던 수가須賀가 바로 일본의 속고 땅이다.


여기서 스사노오須佐之男의 뜻은 쇠코 왕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백제기>의 소고(素古)왕이나 초고왕(肖古王)이나 [신찬성씨록]의 속고대왕(速古大王)이나 다 쇠코왕이라는 뜻이다. "코"의 우리말 고어가 "고"이다.  

[일본서기]에서 소산오素盞嗚라고도 표기하는데 스사노, 소산오의 뒤부분 산오, 또는 사노 sano가 바로 코를 의미한다. 이는 아프로아시아 언어Afroasiatic etymology 에서 코를 의미하여 남아 있다.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대륙 여러 언어에 남아있다.

현생 인류가 6만년전에 아프리카 아담Y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 흔적이 일본에 남아있는 것이다. 또한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의 출생은 이자나기의 코에서 탄생한다. 사노가 코를 의미하는 것은 더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 앞의 소가 지금 우리말 소이다.

이는 어찌해서 알 수 있는가?

656년에 세워진 야사카 신사(八坂神社)의 기원에 그 의미가 있다.

[八坂社舊記集録]에 의하면

 

八坂郷鎮座大神之記

齊明天皇即位二年丙辰八月韓國之調進副使伊利之使主

再來之時新羅國牛頭山座須佐之雄尊之神御魂齋祭來而

皇國祭始依之愛宕郡賜八坂郷並造之姓十二年後

天地天皇御宇六年丁 社號為威神院宮殿全造營而牛頭

山坐之大神乎牛頭天王奉称祭祀畢

淳和天皇御宇天長六年右衞門督紀朝臣百繼尓感神院祀

官並八坂造之業賜為受續

     奉齋御神名記

神速須佐乃男尊           中央座

 

신사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명천황 2년에 고구려사자가 일본에 올 때에 부사인 이리노사주가 신라땅 우두산에서 제사지내는 스사노오신을 야사카에 모셔와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社伝によれば、斉明天皇2年(656年)、高句麗より来日した調進副使・伊利之使主(いりしおみ)が、新羅の牛頭山に祀られる素戔嗚尊を山城国愛宕郡八坂郷に祀り、「八坂造」の姓を賜ったのに始まるという。他にも各種の記録がある。

 

그런데 백제 온조왕 초기에 우수주가 바로 함흥이다. 또한 소시모리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야사카신사는 본래 우두천왕을 제사지냈는데 명치유신 이후에 소사노오로 이름을 바꾸어 제사지낸다. 

 

고구려 사자가 진흥왕 이후 신라에 편입된 함흥 땅에서 신라에게 압박 받았을 백제 초고왕 신위를 백제 후예인 일본 천왕에게 전해주었던 것이다.

 

백제 초고왕이 그 땅 우수주를 다스릴 때에 쇠코왕이라고 하였던 것이고, 초고왕의 신사가 신라 우수주 우두산에 남아 있었을 때에 고구려사자가 일본에 오면서 가져온 것이다. 

결론은 소사노오는 쇠코왕의 당시 일본말이고 백제에서는 쇠코왕, 즉 소고왕, 초고왕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현재 함경남도 문천시 속고산速高山이 쇠코산의 의미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대 쇠달산所依達山이라고도 했는데 속을 소의所依로 풀어쓴 것이니 역시 쇠를 의미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쇠달산에 신사神祠가 있었다고 전한다. 바로 이리사주가 백제 초고왕 신위를 모셔온 신라 우두산이라고 고려된다.


스사노오의 딸을 수세리공주須勢理毗賣라고 했는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에 수시리고성隨時里古城(400m토성)이 남아있었다.

수세須勢도 중국어 발음기호표기식인 반절半切로 보면 “쉐(shu-e)”발음인데 “쇠”의 우리말 고어다.

정평의 수시리고성은 금이강金伊江이 감싸고 있는데, 금이金伊도 “쇠+l”의 이두吏讀 기록이고 금이강이 쇳물이다. 이 지역에 광산이 많이 있으니 수시리고성은 쇠를 다스리던 곳이기도 하다.

금이강 서북쪽 사수산泗水山(1747m)도 사수泗水가 곧 쇳물이다.

금이강 남쪽에 이웃한 금야강金野江은 고대에 비류수沸流水라고도 이름했다.

 

한편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즉 초고대왕)는 신라국新羅國 땅

소시무리曾尸茂梨(=쇠머리, 우두주)에서 배를 타고 일본 이즈모出雲로 왔다고 하였다.

 

백제 초고대왕肖古大王은 백제의 속국速國, 내지 별국別國을 일본 본토 시마네현嶋根縣에 세운 일본신 스사노오建速須佐男, 즉 쇠코대왕이다. 초고대왕이 건너가 세운 일본 지명인 시마네현嶋根縣은 그 이름에서 일본 팔도八島의 뿌리가 되었고 일본의 뿌리인 것이다.


[고사기]에서 왜여왕 히미코卑彌呼(~247)는 일본에 도래한 초고대왕, 스사노오를 아나세阿那勢라고 불렀는데, 일본은 이를 동생이라고 풀이했으나 일본말 “아나”는 한자로 귀가 되므로, 귀세貴勢가 올바른 기록이며, 이는 존귀한 분을 가리키는 중국 고어다.

 

초고대왕은 이즈모出雲 히가와斐伊川의 수가須賀에 야에가기八重垣 궁을 세웠다. 히가와斐伊川는 함경남도 문천시文川市 서쪽 배지이천配歧伊川에서 유래한 것이다. 문천시에 매성妹城이라는 고성이 있었는데 왕비를 기린 것이라고 고려되고, 히가와의 히도 여신을 의미한다. 문천시에 절문루節文樓가 전해오는데 스시노오의 부인 이름도 쿠시나다櫛名田姬다.

 

즉 쿠시나다가 문천시 배지천에서 초고대왕, 스사노오를 따라서 도일한 백제 본토 여인으로 고려된다.

한편 비이신사斐伊神社는 효소천황孝昭天皇 5년에 세웠다고 한다.

 

[일본서기]에서 스사노오는 신라에서 왔고 근국根國으로 돌아갔다.

실상은 백제가 점령한 함흥에서 일본으로 갔고 다시 백제로 돌아가 초고대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야사카 신사에 모셔온 백제왕 스사노오의 혼령이 신라 땅에서 다시 건너왔을 뿐이다.  

일본 이즈모의 히시미사키에 스사노오의 고분이 남아있다.

스사노오 고분이 있는 시마네현 파천군 대사정 히미곶 히시미사키 신사(日御碕神社) [출운국풍토기]에는 미사키사(美佐岐社)라 했고 [연희식신명장]에는 상신궁(上神宮)에 스사노오를 모시고 하침궁(下沈宮)에는 아마테라스를 모셨다.

스사노오 고분을 가진 신사이니 스사노오에 대한 최초 기록으로 고려되는 그 신사 기록에서 스사노오의 별명이 팔-속수신(-束水神), 팔악염존(八握-髯尊)이었다. 속수(束水)의 왕, 긴수염 왕, 또는 우리말 발음에 의한 흰-수염왕이라는 뜻이 된다

현재 팔속군(八束郡)이라는 지명도 남아 있고. 팔속군에 천구산天狗山이 있는데 이것이 [위지동이전]에서 왜여왕 비미호 야마대국과 상쟁한 천리 동쪽 구노(狗奴)국 위치가 된다.

 

히미곶 고분 능비문에서 스사노오는 갑신년 7754세로 서거했다고 하는데, 2047월에 해당하고, 151년생이 된다. [삼국사기]에서는 166년에 즉위하여 214년에 서거하였다. 따라서 서거년도는 214년으로 보아서, 일본 능비의 151-204년 기록은 초고왕이 일본 속고 땅에서 스사노오로서 재위 기간이 되며 실제 생년은 알 수 없다.

 

히미사키 신사의 기록에서 스사노오는 이즈모국을 세우고, 거기서 백제의 바람(柏葉)을 원하여 언덕에 묻혔다. 백엽(柏葉)은 백제로 해석되는 것이다.

안녕천황(安寧天皇) 13년에 칙명으로 백제송을 신목으로 하여 제사지내고(百枝松神木として) 개화천황 2년에 백제 나무로 신전을 세웠다고 한다. 출운국풍토기에서는 백제 나무(百枝)라고 하였다. 신사 이름이 백제사百枝槐社이기도 했다.

따라서 스사노오, 안녕천황, 개화천황이 백제계라는 확실한 방증이다.

게다가 일본 [신찬성씨록]에는 금부련씨, 삼선숙녜씨, 진야조씨 등이 속고대왕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속고대왕이 기왕의 아들들을 데려 가서 남긴 후예거나 현지에서 남긴 후예들이다.

 


(주) [삼국사기/지리4]의 고구려백제 지명중 “우수주牛首州”를 함흥에 비정하여 잃어버린 고구려, 백제 지명을 밝힌다.

우수주牛首州는 다른말로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했다는데 함흥 성천강城川江의 이름에 흑말천이 있다. 우수주 벌력천현伐力川縣은 함흥의 성천강城川江 유역이다. 횡천현橫川縣은 함흥 동쪽 호련천瑚漣川부근으로 고려되고 자현磁縣은 함흥 서북쪽 자고성慈古城에 해당한다.

우수주 호원군乎原郡은 北原이라고도 했는데, 함흥 북쪽 홍원군洪原郡이다.

나토군奈土郡은 대제大提라고도 했는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이다. 서호西湖 광호廣湖, 동호東湖 등 큰 호수가 많다. 적산현赤山縣은 주이천朱伊川이 흐르는 지금의 함주군청咸州郡廳 자리다. 사열이현沙熱伊縣은 사수산泗水山을 지나 흐르는 금진강金津江으로 추정되니 함흥 남쪽 정평군 定平郡 위치다. 광산이 많고 고대로부터 쇠를 다스리던 곳이다. 초고대왕의 딸이 살던 수시리 고성이 있다.

근평군斤平郡은 심천현深川縣만 있었는데, 함흥 북쪽 신흥군新興郡으로 고려된다.

양구군陽口郡은 북청군이다. 양구근 저족현猪足縣은 오사회烏斯廻라고 했는데, 이는 일본말로 풀어서 한자로 옮기면 압하천鴨坡河이 된다. 북청군의 북쪽 물 이름이며 그곳의 성대리星垈里 고성은 고대의 철산지다.

왕기현王岐縣은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이원군利原郡으로 고려되고, 삼현현三峴縣은 삼봉三峰 남쪽 숙신고도肅愼古都로 추정된다.

성천군狌川郡은 창덕성倉德城이 있던 단천군端川郡으로 고려된다.

대양관군大楊管郡은 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했다. 매곡현買谷縣과 고사마현 古斯麻縣이 있었는데, 고사마현은 무령대왕 이름이고, 청진 북쪽 수성천輸城川의 근원이 되는 부령군富寧郡이 본래 무령군에서 비롯되므로 고사마현이 된다.

매곡현은 청진시淸津市가 되는데 고말산高抹山이 있다.

급벌산군及伐山郡은 이벌지현 伊伐支縣과 수성천현藪狌川縣이 있었는데, 함경북도 도청이 있는 경성鏡城시 북쪽 수성천輸城川을 의미하므로 지금의 경성鏡城이다.

이벌지현은 경성시가 되고, 수성천현藪狌川縣은 청진시 수성천 남쪽이 되고, 문현현文峴縣은 주을朱乙이 된다.

모성현母城郡은 경성 남쪽 어랑천漁郞川, 어랑군漁郞郡이다.

객련군客連郡은 학성鶴城, 길주吉州 명천明川이다.

천성군淺城郡 비열홀比烈忽은 영흥永興이다. 박평博平이라고도 했으니 그 뜻이 천성과 같고, 영흥을 지나는 용흥강龍興江이 고대 비류수 沸流水였으니 당연히 비열홀 이름이 유래되는 것이다. 살한현薩寒縣은 전탄강箭灘江이 된다.

이제까지 비열홀은 안변군安邊郡이라고 알려졌는데 잘못이다. 안변은 천성군의 남쪽 천정군의 남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의 국경군인 안변군이 발해의 공격으로 후퇴한 것으로 고려할 수 있다.

천정군泉井郡은 원산시元山市에 있던 덕원군德源郡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지리지] 지리 2의 해설은 당시 신라 지명만 맞고, 그 내력이 되는 고구려 이름은 거의 틀렸다. 김부식은 통일신라 때에 고구려 유민들이 옮겨온 고구려 지명을 본래 고구려의 지명으로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 춘천도 우수주라고 했는데, 발해에게 천정군 이북을 빼앗기고 이주해온 이주민들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된다. 

 

사족1] 일본 국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일본천황 황실은 서기 700년대에 [고사기] [일본서기]를 통한 역사 조작으로서 자신들이 백제 왕가의 후예라는 것을 천년 이상 감추어왔다.

망한 나라의 후예라기 보다는 하늘에서 떨어진 천손으로 환부멸조 하는 것이 차라리 천황가를 영속하기에 좋다고 판단 것으로 추정된다. 결과는 그후 1300년을 단 한번의 역성혁명 없이 이어왔으므로 소기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지구촌 안에서 이제 진실을 바로 잡을 때가 되었다. 

 

사족2] 한국 국수주의자들 역시 달관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좋다. 지구상에 수많은 영웅이 나서 땅을 정복하지만, 그것은 찰나이다. 결국은 땅에 묻히고 그 땅이 수많은 영웅을 포옹한다.

백제에 나서 일본에 간 백제 왕자는 일본 땅의 영웅이다. 영웅도 땅을 거스르고 하늘을 거스를 수 없다. 건너가서 일본 백성의 왕이 되면 일본 백성을 위한 왕이 된다.

노르만족이 영국가서 왕이 되었으면 영국의 왕이지 프랑스의 왕이 아니다. 독일 작센 지방에서 건너간 영국 색슨족은 서로 2차대전을 치렀다. 

 

역사적 사실(史實)이 현재 사실(事實)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사실(事實)이 역사 사실(史實)에서 유래되는 것이 많으므로 역사 사실(史實)을 바로 알고 현재 사실(事實)에 잘 대처해야 한다. 자기 역사에 게으르면 결국 나라가 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