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영광을

정우산기 2006. 12. 27. 11:15
신라는 고시씨의 후예다

番朝鮮이 岷江(1 차 西鴨綠江) 以西에 있었기 때문에 武漢 일대에서 건국한 新羅가 番韓의 후예라는 舊唐書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朝鮮(辰韓, 眞朝鮮)이 大夫餘, 北夫餘, 高句麗로 이어졌는데, 또 辰韓이 등장하고 斯盧國이 건국됐다고 한다. 이 辰韓은 眞朝鮮의 辰韓이 아니다. 後三韓의 辰韓도 아니다. 後三韓은 箕準이 衛滿에게 속아 떠난 뒤, 五加의 무리들이 大將軍 卓을 받들고 산을 넘어 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蓋馬國(熊心國)은 北蓋馬大嶺 즉 陰山山脈의 북쪽에 있으며 句茶國(瀆盧國)은 北蓋馬大嶺의 서쪽에 있는 나라다. 月支國은 句茶國의 북쪽 500 리에 있다.

後三韓의 弁韓, 辰韓은 “馬韓의 다스림을 따르고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馬韓政令世世不叛 北夫餘紀)"던 반면, 新羅, 百濟, 伽倻가 일어난 三韓은 “서로 다투고 싸워 왔고 세월이 오래되도록 서로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三加羅所謂加羅者首邑之稱也自是三汗相爭歲久不解 太白逸史)"다. 新羅가 일어난 땅은 三加羅를 두고 싸운 3 차 三韓의 辰韓이다(立都徐羅伐稱國辰韓亦曰斯盧 太白逸史). 辰韓 6 部가 斯盧國이 되고, 新羅로 국호를 변경했다.

新羅는 黃山江(揚子江) 유역에서 건국했다. 일식기록으로 찾은 新羅의 초기 都城은 武漢이다. 新羅는 3 차 辰韓에서 출발한 나라고, 伽倻로 발전한 弁韓도 黃山江 유역에 있었다. 辰韓과 弁韓이 揚子江 하류에서 동서로 나란히 위치했던 것이다. 辰韓이 서쪽, 弁韓이 동쪽이다. 伽倻는 현 南京을 수도로 했다. 馬韓은 辰韓과 弁韓 위쪽에 있었다.

황산벌 전투는 揚子江 유역(黃山江)에서 있었다. 百濟가 漢水 유역을 상실했다고 하지만 일부를 상실한 데 지나지 않는다. 高句麗에 이어서 新羅가 漢水(黃河) 유역을 차지 했으므로 百濟의 영토는 중국 동해안을 따라서 黃山江(揚子江) 유역까지 내려왔다. 三國史記에도 三國의 영토가 개의 이빨처럼 얽혀 있다(犬牙相制)고 했다. 中國 東海岸은 마지막까지 百濟 영토였다. 그래서 新羅가 그대로 발해만으로 진격 한다면, 배후공격의 위험에 놓이게 되므로 황산벌(중국 동해안)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중국 대륙 동해안에서 활약했다. 임존성(任存城)은 중국 대륙 동해안에 있었던 것이다. 白江 전투는 발해만에서 있었다. 군대를 파병하기에 너무나 멀어서 百濟가 멸망하고 3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서 사이메이 여왕(齊明女王)이 암살되는 우여곡절 끝에 倭는 지원군을 파병할 수 있었다. 百濟 식민지 왜(倭)가 중국 남부에 있었다면 羅唐聯合軍이 百濟를 침략했을 때, 왜(倭)는 백제와 함께 싸웠어야 한다. 3 년 이라는 시차가 절대 발생할 수 없다. 百濟復興 運動은 중국 동부와 발해만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三國志 倭人條의 “帶方에서 馬韓, 伽倻를 거쳐 倭에 이르는” 길은 海路가 아니라 水路다. 帶方은 岷江 이서에, 伽倻는 揚子江 하류에, 倭는 伽倻 아래에 있었다. 馬韓은 伽倻와 新羅 이북에 있었다. 馬韓은 東夫餘 및 百濟의 땅이 되었다. 中土의 사람들은 金沙江(黃河)과 黃山江(揚子江)을 따라서 이들 나라를 들락거린 것이다.

 

新羅 사람들은 스스로 少昊金天의 후손이어서 성을 金氏로 하였다? 新羅 노인들이 말하길 秦나라가 망하여 그 유민들이 馬韓의 동쪽에 와서 살았다고 秦韓이라 했다는 이 엉뚱한 소리는 辰韓이 檀帝의 직접 통치지역임을 부정하기 위해 쓴 後漢書 辰韓편의 날조기사를 그대로 베낀 헛소리다.

어째서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新羅의 조상에 대한 기록이 있는가. 新羅本紀 맨 첫머리에 나와야 할 기사가 百濟本紀 맨 마지막 왕편에 기록됐다는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다. 중국의 역사책을 보면, 날조사(의 일부)를 아무 데나 집어넣는다. 과연 金富軾이 스스로 나눈 항목까지 무시할 정도로 여기저기 어지럽게 아무데나 썼겠는가. 金富軾의 평론이 아니다.

위의 날조기사가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는 “辰韓은 馬韓 동쪽에 있다. 그 나라의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스스로 일컬어 말하기를 秦나라의 부역을 피하여 韓國으로 오자, 馬韓은 그 나라의 동쪽 경계지점을 할애하여 그들에게 주었다. 그들은 城柵이 있으며, 그들의 언어는 馬韓과 달랐다(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 三國志).”로 바뀌었다. 後漢書, 三國史記에서는 秦나라 유민이 왔고, 三國志에서는 秦나라를 피해 도망쳐 왔다.

땅을 나누어 같이 살아? 어느 세상에 제 땅을 스스럼없이 나누어주던가. 그 한 치의 땅 때문에 中土에서는 끝도 없이 싸우지 않았던가. 그래서 春秋時代에는 백 개가 넘는 나라가 있었고 5 胡 16 國도, 5 大 10 國도 있었다.

소호금천(少昊金天)의 후손이라는 秦나라 사람들은 辰韓이 아니라 중국 남부로 가서 倭가 되었다. 온몸에 문신하고 옷이라곤 “큰 천에 구멍을 뚫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고 있”는 게 전부였다. 華夏族의 전통복식이다. 성책(城柵)은 무슨? 성책은 방어하는데 사용하는 것이지, 倭奴처럼 약탈로 살아가는 자들한테는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다. 馬韓이 땅을 할애해주자, 秦나라의 부역을 피해온 자들은 馬韓 사람보고 오지 말라고 城柵을 쌓았다고?

이전에도 中土에서 도망쳐 나온 자들이 있었다. 秦나라에 통일된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의 사람들이 馬韓 땅도, 辰韓 땅도 아닌, 番朝鮮(番韓) 땅으로 도망쳐왔다. 나라를 세운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호의에 기대어 番朝鮮의 한 구석에서 살았을 뿐이다.

壬辰 31 년(B.C. 209), 진승(陳勝 : 秦나라 말기의 농민 반란 지도자)이 군대를 일으키니 秦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려웠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진나라에 병합된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땅의 사람들)들이 도망해서 番朝鮮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雲障)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하여 감독케 하였다(壬辰三十一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口分置於上下雲障遣將監之 北夫餘記).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의 백성들이 어째서 莫朝鮮도 아닌, 番朝鮮으로 갔는가. 거리상으로 가깝다는 점도 있지만,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番朝鮮이 眞朝鮮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眞朝鮮은 檀君이 다스리는 우리나라 중심지라서 오랑캐를 들여놓아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馬韓의 동쪽 땅을 떼어 秦나라인에게 주고 秦韓이라 했다는 後漢書, 三國志의 날조기사를 본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 대륙에 우리나라와 中土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국경선은 명확하다. 서로 뒤섞일 수가 없다. 中奴는 한 치의 땅을 두고 백 개가 넘는 나라가 싸운 적도 있었다. 중국 대륙에 우리나라와 中土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면, 三國이 전투를 벌일 때마다 중국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이 경우, 三國이 서로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中土부터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 대륙에는 三國만 있은 게 아니라, 東夫餘, 樂浪, 伽倻, 沃沮, 등 다수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다. 中土는 우리나라에 비집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辰韓의 남해안 薩水 이남은 檀君이 제후들에게 封土로 주었다. 新羅가 일어난 3 차 辰韓은 檀君王儉이 제후들에게 준 땅의 일부다.

 

고시씨(高矢氏)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山河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高矢氏之後 封于南東之地 山河秀麗 草木暢茂 曰靑丘國 宅樂浪忽 揆園史話 檀君紀)

이 당시는 아직 列水 이남이 정복되지 않아서 남동쪽이라 함은 揚子江 이북을 가리켰다. 淮水 유역이 靑丘國이었던 것이다.

고시씨(高矢氏)는 청구국(靑丘國)으로 나아가 山川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문무(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高矢氏就靑丘國 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昜 五穀豊肥 民皆衣輕 而食肥涼 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 文武亦得以幷興 揆園史話 檀君紀)

양이(暘夷) 당시에도 高矢氏는 揚子江 이북을 다스렸다. 앞의 말을 부연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檀君王儉에 복종치 않았던 揚子江 이남은 얼마 뒤 扶餘가 평정했다. 설유(稧兪)의 난을 평정하고 나서, 그 전에 확보한 揚子江 이남을 합쳐 제후들의 봉토를 조정했다. 封土를 扶餘에게 준 扶蘇에게는 高矢氏의 封土인 樂浪忽을 다스리게 하고, 高矢氏에게는 揚子江 이남을 주었던 것이다.

부여(夫餘)가 남이(南夷)를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天王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靑丘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南夷의 사람들도 함께 神人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하였으니, 후의 진(辰)·변(弁)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夫餘之平南夷也, 洌水以南 完服王化 以故靑丘之民 得漸遷居 及洪水旣平 南渡者益多 於是南夷之人 幷沾於神化 遂變其俗 後之辰弁諸族 皆是也 揆園史話 檀君紀)

여기서의 辰·弁은 3 차 辰韓, 弁韓이라고 했다. 고작 揚子江 하류 유역을 가리킨다. 南夷는 揚子江 이남의 사람들로 南夷가 辰·弁의 뭇 부족이라는 것은 좁은 韓半島 남부에 三韓을 우겨넣을 때나 가능한 말이다.

“高矢氏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弁辰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獨高矢氏後裔 廣處東南 轉流爲辰弁諸族 後之所謂三韓者 皆其孫也 揆園史話 太始紀)." 高矢氏의 후예들이 거처한 동남쪽은 揚子江 하류 이북이고, 더욱더 이동한 곳은 揚子江 이남이다. 南夷가 곧 후대에 辰·弁의 뭇 부족들이 아니라 해도 新羅가 高矢氏의 후예인 것만은 틀림없다. 나중에 漢나라 유민까지 가세한 秦나라 유민들은 辰, 弁의 동남쪽을 파고들어와 中國倭가 되었던 것이다.

少昊金天의 후예는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史記에 보면, 少昊金天의 후예라던 秦나라가 전욱고양(顓頊高陽)을 선조로 한다고 변신한다. 少昊金天은 軒轅의 아들이 아니고, 顓頊高陽은 軒轅의 외손자가 아니라고 전술했다. 少昊金天, 顓頊高陽은 軒轅보다 앞서 살았다.

秦나라가 母系血統 이라면서, 그 母系의 부(父)가 少昊金天이 되고, 顓頊高陽이 될 수 있는가. 母系社會에서는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거느리기 때문에 父를 확정할 수 없다. 중국의 母系社會에서는 다수의 여자와 다수의 남자간의 결합이라고 한다. 성씨 확정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같이 유전자 검사라도 하지 않는 한, 절대 누구를 부(父)로 하는지 알아낼 수 없다. 누구 자식인지 모르니까, 少昊金天의 자식도 되고, 顓頊高陽의 자식도 된다고 한 모양이다.

新羅가 秦나라 유민이 세운 나라면, 어떻게 三國史記가 되는가. 二國史記라고 해야된다.

金城(武漢)은 千年古都가 아니다. 新羅는 高句麗의 南進으로 중국 남부로 밀려나야 했다. 평로치청(平盧淄靑)이 金城 근처까지 장악하자 新羅 황제가 피난간 적도 있고, 新羅 말기에는 後百濟, 後高句麗의 건국으로 또 다시 수도를 옮겨야 했다. 우리나라를 韓半島로 축소하자, 新羅의 수도를 옮길 만한 장소가 없었다. 낙동강을 新羅와 伽倻가 분할해야 했기 때문이다. 新羅는 伽倻 지역으로 천도한 적이 없다. 그래서 千年古都라고 날조한 것이다.

新羅가 長安을 차지한 동안에는 長安에 도읍한 것이 분명하다. 長安城은 동아시아의 지배자가 거주하는 제1 皇城이었다. 당연히 新羅도 동아시아의 지배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三國遺史에 “新羅 전성시대 서울 안에 호수가 17 만 8 천 9 백 36 호”가 있다고 했다. 長安이 新羅의 수도였다면, 몇 배는 더 많은 인구가 수도에 살았을 것이다.

新羅로 간 연남생(淵男生)이 현 洛陽에 묻힌 것은 大震國이 長安城을 차지하기 전이었다. 義慈帝와 寶臟帝를 꾸짖던 인물도 新羅 황제 神文帝다. 중국은 우리나라 역사책을 베껴 써도 너무도 철저히 베껴 온갖 것을 다 썼다. 하긴 우리나라 3 皇 5 帝도 베껴 3 皇 5 帝라 하고 제천의식까지 따라한 미개국이니 일러 무삼하리요.

高隋, 高唐 전쟁의 양 당사국은 高句麗와 新羅였다. 新羅는 唐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主力軍이었다. 新羅는 멸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가 아니라, 高句麗를 대신하는 대제국을 꿈꾸던 나라다. 이것은 高句麗 멸망 당시 新羅가 漢水(黃河) 하류를 차지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唐의 국력으로 7 년간 전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高句麗人, 百濟人의 復興運動으로 新羅의 군사력이 분산되었기 때문에 그나마 唐은 新羅를 상대로 7 년이나 싸울 수 있었던가. 그러나 속국 唐이 감히 上國 新羅에게 대들 수 있는가. “대책은 없고 단지 大國의 처분만 바랄 뿐이다”는 唐이 新羅에게 한 소리다. 新羅는 7 년이나 대든 나라에 이후 2 백 년이나 지원할 그런 나라가 아니다. 같은 민족 高句麗, 百濟도 멸망시킨 나라가 아닌가.

百濟復興軍 한테도 연전연패 하면서 人肉을 먹으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唐나라 군대를 新羅가 구해주었다. “陳地에 머물고 있는 주린 군사(唐軍)들이 아이를 바꿔 서로 먹는 일이 없게 하였다.”(三國史記) 간신히 기아에서 빠져나온 소정방(蘇定方 ; 592~667)은 뒤도 안돌아보고 唐으로 도망쳤다. “大軍(蘇定方의 군대)이 철수한 후에 賊臣 福信이 江西에서 일어났다(大軍廻後 賊臣福信起於江西 三國史記)." 우리나라 사람들은 江西라는 지명을 우리나라에서 찾지 못하자, 강의 서쪽이라 풀이한다. 그러면 新羅軍은 강의 동쪽에 있었다는 말인가. 이 경우 강 반대편에서 일어났다고 하지 않나. 江西는 지명이다.

중국 동남부에 江西省이 있다. 그곳이 아니다. 지금의 행정구역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江西라는 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남동부에는 없었다. 지명이 계속해서 밀렸기 때문이다. 江西는 발해만에 위치했다. 大軍이라는 것도 唐이 중국 내륙부에 웅크리고 있던 구질구질한 소국임을 金富軾이 몰랐던 것이 아니고, 朱元璋이 왜곡한 것이다. 또 百濟復興軍이 200 여성(城)에서 일어난 것을 두고 韓半島에는 200 여성이 들어가지 않는다며 20 여성으로 줄이는 사람까지 있다. 발해만과 중국 동부에는 다 들어간다.

唐이 百濟復興軍을 新羅에게 떠넘긴 게 아니라, 新羅가 唐에 떠넘겼다. 百濟復興軍이 결사항전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高句麗는 淵男生이 배신한 걸 알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었다. 百濟復興軍을 그대로 두면 高句麗로 진격하는 新羅軍이 배후공격의 위협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속국 唐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唐이 어떤 나라인가.

百濟復興軍에 꼼짝없이 포위되어 어린아이를 잡아먹던 군대가 唐나라 군대다. 그런 형편없는 군대이니만치 軍紀 빠진 군대를 唐나라 군대라고 1300 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 까지 줄곧 불러오고 있다. 唐軍은 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 新羅軍은 高句麗를 침공하는 동시에 百濟復興軍 까지 상대 해야만 했었다.

그런 唐이 高句麗人을 끌고 가는 데는 잽쌌단 말인가? 上國 新羅가 있는데, 속국이 高句麗人을 끌고 갈 수 있는가. 高句麗 유민 2 만 8000 여 호를 강제이주 시킨 것은 新羅였다.

後唐 明宗 때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王逢規)가 임언(林彦)을 보내 조공 했다고? 비록 新羅 말기에 後三國이 경쟁하고 있다고는 하나 한 때 三國을 통일한 新羅가 속국 唐이 분해되어 생긴 後唐에 조공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後唐의 明宗이 王逢規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고? 속국이 분해되어 생긴 나라가 上國 新羅의 신하를 제 신하로 임명할 수 있는가. 後唐 明王이 王逢規였다, 이사원(李嗣源)이 아니라. 王逢規는 장왕(莊王) 이존욱(李存勖 923 - 926 재위)의 양자라는데, 성이 갈렸는지 이극용(李克用 ; 856~906 後唐 太王)부터 이름을 바꾼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新羅는 멸망하기 직전에도 後唐 王을 懷化大將軍으로 임명한 것이다. 물론 中土에 들어선 나라들은 新羅에 조공하는 한편으로 大震國에도 조공해야 했다.

新羅 文武王을 임해군공(臨海郡公)으로 봉했다고? 新羅 文武王은 三國을 통일한 대제국의 황제였다. 실제로는 新羅 文武帝가 唐王 李治를 郡公에 봉했다. 高句麗, 百濟 멸망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唐이 高句麗, 百濟 멸망 전쟁에 지원(?)하고 받은 대가는 李治가 新羅의 郡公으로 봉해진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최치원(崔致遠 857~?)이 관리로 있던 양주(揚州)는 新羅 땅이다. 崔致遠은 新羅의 관리였다. 新羅館, 신라방(新羅坊)? 韓半島에서 온 新羅人이 머물던 곳이다. 물론 新羅館, 新羅坊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中奴가 역사날조 하면서 바꾼 말이다. 현 揚州에 있는 高麗館도 韓半島에서 온 高麗人들이 머물던 곳이다. 물론 高麗館이라 부르지 않았다.

계림(桂林)은 百濟 땅이었다가 新羅 땅(韓半島의 鷄林은 李氏朝鮮이 붙였다. 李氏朝鮮은 가짜 檀君陵에 가짜 箕子墓 까지 만든 나라다)이 되었다. 그런 桂林을 보고 “江은 푸른 비단 띠를 두른 듯하고, 山은 碧玉으로 만든 비녀 같다(江作靑羅帶 山如碧玉簪 韓愈)”고 한 게 唐人 이겠는가, 新羅人 이겠는가.

새삼스럽게 밝힐 필요도 없겠지만, 高句麗의 주 정복대상국은 티벳고원 북부에 사는 오랑캐들이 아니라, 百濟와 新羅를 비롯한 우리나라였다.

中國은 벌써 정복 되었다. 朝鮮上古史도 中奴가 廣開土境大勳跡碑의 문자를 깎아 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始祖 朱蒙聖帝 부분에 중국의 왕조로 날조한 漢나라가 정복된 사실이 나와 있던 것이다. 前漢 말 부터 중국은 내내 우리나라의 속국으로 살았다. 물론 朝鮮, 배달의 속국이기도 하다.

중국은 처음에 高句麗의 속국 이었다가, 百濟의 속국(吳, 越, 燕, 齊, 魯)으로, 또 다시 高句麗의 속국(北魏)이 되었다가 新羅의 속국(隋, 唐)이 되어 高句麗와 싸워야 했다. 隋, 唐이 新羅 편에 붙어 高句麗 침공에 나선 것은 新羅의 국력이 高句麗와 버금갈 정도로 신장됐음을 말해준다. 新羅가 여전히 소국이라면, 新羅에 붙은 隋, 唐은 高句麗에 의해 망할 각오를 해야 한다.

百濟도, 高句麗도 정복했다던 唐이 약소국 新羅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누구라도 最弱體國 新羅 부터 정복할 것이다. 隋의 楊廣은 제 아비까지 죽이고 왕위에 오른 자다. 唐의 李世民은 제 형제와 조카 수십 명을 죽이고 제 아비를 위협해서 왕위에 오른 자다. 그런 자들이 新羅 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는가.

高句麗 땅 500 리가 뭐가 대단해서 반환을 거부한 新羅가 “대책은 없고 단지 大國의 처분만 바랄 뿐이다”라며 전국토를 唐에 내놓겠다며 매달리는 건 모순 아닌가. 누구나 500 리를 반환하고 당당하게 사는 길을 택할 것이다. 500 리를 반환하지 않아도 될 만한 대등한 국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반환을 거부했다. 唐의 부당한 요구마다 거부하지 않고 다 들어주겠다는 新羅의 대답에 李世民은 어째서 기뻐 날뛰지 않고 탄식했단 말인가. 新羅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할 수 없어서 탄식한 것이다. 高句麗의 상대가 되지 못함에도 끝없이 파병할 수밖에 없었던 唐의 신세(唐은 新羅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 즉시 高句麗에 정복될 수밖에 없었다)를 한탄한 것이다.

무측천(武則天 624~705)은 효소왕(孝昭王 643~702)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애도하기 위하여, 2 일간 조회를 하지 않았다. 일개 제후국의 왕이 죽었다고 정치를 이틀씩이나 중단하는가. 上國의 皇帝가 붕어 했으니까, 조회를 중단한 것이다. 隋나라, 특히 唐나라는 新羅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살아간 비참한 속국이었다. 이 당시 新羅는 高句麗와 대등한 국력을 자랑했다. 그래서 隋, 唐은 기꺼이 新羅의 속국이 되기로 자청한 것이다. 唐玄宗의 이름이 興光으로 聖德帝와 같아서 융기(隆基)로 고쳤던 것이다.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 新羅는 善德女王 때 高句麗에 버금가는 강국이었다. 女王이라서 주변국들이 업신여겼다면 연달아 女王이 등극할 수도 없다. 부인을 임금으로 삼은 것은 唐이었다.

武則天은 李世民의 후궁으로 그 아들 李治의 부인이 된 여자였다. 唐나라 내에서는 李治 대신 실권을 장악했지만, 수시로 거란과 말갈의 침입을 받았다. 자신의 친척을 한 명 보내 임금으로 삼겠다고 한 것은 高句麗였을 것이다. 新羅였다면 李治와 武則天이 新羅에 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皇龍寺 9 層塔을 세우면서 같은 얘기가 또 나온다. 唐나라 道人이 地藏律師한테 “新羅는 여자가 임금 자리에 올라 위엄이 없어 인접국가에서 가볍게 보고 침략이 빈번하니, 9 層塔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역사를 뒤바꾸면서 날조자가 틀려 李世民의 대사로 배당했다는 걸 모르고 두 번이나 써먹은 것이다.

정말 新羅가 타국에 기대 산 나라였다면, 절대 千年王國을 건설하지 못했다. 건국 되자마자 망했어야 한다. 한없이 당당하게 살았다고 날조한 隋도 37 년 밖에, 唐도 290 년 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唐이 新羅 보다 28 년 먼저 망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新羅에 의지해서 살던 唐은 新羅의 국력이 약해지자 더 이상 지원을 받지 못해 망한 것이다. 新羅는 우리나라 왕조에서 세 번째로 긴 역사를 갖고 있다. 朝鮮, 배달 다음으로 긴 역사를 가진 왕조가 新羅다.(高句麗는 北夫餘까지 포함해서 9 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다)

新羅는 東中國海와 黃海를 건너서 韓半島를 개척하고 倭列島 까지 개척한 나라다. 百濟가 멸망한 뒤에는 日本列島(669 년 倭列島에서 바뀐 이름)까지 식민지로 삼은 나라다. 이 땅의 사학자들이 폄하하는 것 같은 약소국이 절대 아니었다. 新羅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바뀐 것은 李氏朝鮮에 들어와서였다. 이 말은 高麗時代 까지 新羅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근거가 없었다는 의미다.

어째서 新羅를 唐에 빌붙어 사는 약소국으로 날조했는가. 물론 唐이 新羅에 빌붙어 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新羅가 唐에 의지해서 삼국을 통일한 약소국이어야 우리나라 영토가 축소되기 때문이다. 날조사는 창작이 아니라, 기존 역사를 바꾸고 축소한 것에 불과하므로 三國을 통일한 新羅 외에 마땅히 우리나라 영토가 줄어들었다고 손쉽게 날조할 수 있는 왕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