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영광을

정우산기 2007. 1. 17. 11:31

 

1) 광개토경대훈적비는 중국 대륙 정복을 기념해 세운 전승비다

삼국지 위서 한전은 한과 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南與倭接) 면적은 사방 4 천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馬韓)·진한(辰韓)·변진(弁辰)이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褊頭)고, 왜와 가까운 지역(近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변진의) 독로국(瀆盧國)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
(與倭接界)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今辰韓人皆褊頭男女近倭亦文身......其瀆盧國與倭接界 三國志 魏書 東夷傳).”

위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왜의 위치가 韓半島 밖이 아니라 韓半島 안쪽, 즉 三韓의 남쪽인 韓半島 남부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껏 “倭는 日本列島에 있다”는 고정관념 속에서 이 기사를 보아 왔으므로 이 기사가 말해 주는 위치 비정을 무시해 왔는데 이런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한의)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南與倭接)”는 기사를 해석하면 倭는 도저히 日本列島 내에 있을 수 없게 된다. ‘접(接)’은 육지로 서로 경계할 때 쓰는 낱말이지, 바다 건너 이웃한 지역을 말할 때 쓰는 단어는 아니다.
만약 바다 건너 倭가 있었다면 ‘바다(海)’로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표시한 이 기록이 유독 남쪽 경계를 표시할 때만 바다를 생략할 이유가 없다.
또한 辰韓條의 ‘근처에 倭가 있다(近倭)’는 구절과 弁辰 12 개국 가운데 하나인 독로국(瀆盧國)이 ‘倭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는 구절도 倭가 日本列島가 아니라 辰韓과 瀆盧國 근처의 韓半島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살아있는 한국사 1 (단군조선에서 후삼국까지 ) "왜는 일본열도가 아닌, 한반도에 있었다" 중에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저것이 바로 倭奴가 任那日本府를 착안하게 된 대목이다. 중국 대륙에 倭가 있었기에 우리나라를 韓半島에 집어넣자, 倭도 종이 위에서 韓半島로 이동한 것이다.

“25 史의 권위를 이길 수 있는 학자나 학설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어째서 모르는가?” 이 땅의 사학자들이 모두 저런 생각을 갖고 있길래, 우리는 지금껏 “三韓은 韓半島에 있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三國과 朝鮮의 일식기록에 반하는 모든 학설이나 역사책은 거짓이다. 三國志는 우리나라 역사책을 분해해서 만든 책의 하나로 三韓을 韓半島에 우겨넣기 위해 明이 대대적으로 날조했다.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중국의 역사책은 다 진실이고, 우리나라 역사책은 다 틀렸다는 그 헛된 믿음부터 바꾸어야 한다. 대체 自國史는 모조리 거짓이고, 他國史는 모조리 진실이라 믿는 것부터가 잘못이고, 남부끄러운 일 아닌가. 우리나라는 역사를 과장한 적이 없다. 과장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위대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百濟가 山東省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은 가끔 나오는데, 이런 사람들도 중국 역사책이 왜곡 되었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하지만 後漢의 일식기록이 渤海灣이다. 燕나라가 渤海灣에 長城을 쌓았다고 우긴다. 중국 역사책의 虛構를 지적하지 않고도, 地名을 밀어낸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도 우리나라를 중국 대륙에 위치시킬 방법이 있단 말인가.

三國은 중국 대륙의 중심지에 있었다.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倭와 접해 있으며 면적은 사방 4 천리쯤 된다(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는 韓半島를 염두에 두고 고친 것이다.


▲ 대만의 北濱南雅奇石



왜(倭)는 韓半島에 없었다. 三國의 남쪽에 있던 왜(倭)는 韓半島가 아니라, 중국 대륙에 있었다.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海陸諸倭 太白逸史)"이라 했다. 倭는 섬과 섬에 가까운 중국 대륙 해안가에 살았던 것이다. 百濟城을 白帝城으로 바꾼 中奴이다. 일단 수법을 개발하면 무진장으로 써먹었다. 臺灣(대만) 역시 對馬島에서 바꾼 것이다.

임나(任那)는 본래 대마도(對馬島)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 되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임나는 비로소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구주(仇州)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어 다스렸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任那自本在對馬島西北界北阻海......後對馬二島遂爲任那所制故自是任那乃對島全稱也 自古仇州對島乃三韓分治之地也 本非倭人世居地 太白逸史)

對馬島 즉 臺灣의 서북 경계는 臺灣海峽과 닿은 해안이다. 對馬의 두 섬은 對馬島가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對馬島(臺灣)를 二分한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강을 바다라 불렀다고 했다. 강이 바다니까, 강으로 나누어진 두 지역은 각각의 섬이었던 것이다. 對馬島에도 강은 꽤 있다. 그 중에서도 臺灣山脈의 중간쯤을 가르는 동서의 두 강을 연결해 바다라 하고, 아래 위를 섬이라 불렀던 것이다.

仇州는 섬이 아니다. 섬에는 모두 島가 붙기 마련이다. 中國倭가 對馬島에 거주 했으니까, 對馬島 맞은편, 즉 臺灣海峽과 접한 땅이 仇州였던 것이다.

협보(陝父)는 장차 개혁될 것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浿水)를 따라 내려와 해포(海浦)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니 곧 가라해(加羅海)의 북안(北岸)이다. 여기서 수 개월 동안 살다가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라 한다. (광개토경호태황이) 뒤에 임나(任那)를 병합하여 연정(聯政)을 세워 이를 통치 하였는데, 3 국은 바다에 있고 7 국은 뭍에 있었다(陝父乃知將革誘衆裏糧舟從浿水而下由海浦而潛航直到狗邪韓國乃加羅海北岸也 居數月轉徙于阿蘇山而居之是爲多婆羅國之始祖也 後倂于任那聯政以治三國在海七國在陸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伽倻도 揚子江 하류에 있었는데, 新羅 동쪽에 있었다. 지금의 東支那海가 그 당시는 伽倻海(加羅海)였다. 우리나라를 韓半島로 축소하다 보니까, 新羅 아래쪽에 그려 넣을 수밖에 없었지만, 伽倻는 중국 동해안에 위치했다.

南支那海는 뭐라 불렀을까. 百濟海다. 黃海는? 夫餘海다. 三國統一 후에는 중국 대륙과 접한 바다를 新羅海로 통일했을 것이다. 高麗時代에는 南支那海, 東支那海를 합해서 高麗海, 西海는 黃海로 불렀다. 西海로 부르지 않은 것은 따로 西海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韓半島 東海를 東海라 부른 것은 神市氏가 배달을 개천할 당시 부터이다. 언제부터 日本海라 불렀는가. 일본이라는 국명이 669 년에 생겼다. 그러나 日本海라 부른 것은 역사날조학이 발흥한 18 세기 이후이다.

 

日本의 東海는 어디였을까. 태평양? 아니다. 우리나라 東海를 東海라 불렀다. 列島는 百濟 식민지로 출발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列島로 건너간 百濟人들도 韓半島 東海를 東海라 불렀던 것이다. 百濟는 黃海와 東海를 內海로 삼은 대제국 이었다. 아니, 南中國海에서 東海(최소한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까지는 百濟 영토였다)까지, 伽倻와 倭가 있던 해안을 제외한 동아시아 해안 대부분을 영토로 가진 大帝國 이었다 (新羅는 6 세기 중반까지 해안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韓半島를 침공할 당시는 揚子江의 물길을 따라 바다로 나왔다).

옛날에는 日本에 東海島, 南海島, 西海島라는 지명이 있었다. 오늘날 日本은 南海島가 시코쿠(四國), 西海島가 큐슈(九州), 東海島가 도쿄(東京)에서 오사카(大阪) 일대라고 우긴다. 도쿄에서 오사카 일대는 섬의 일부이지, 섬이 아니다. 그래서 東海道라고 우긴다.

도쿄에서 오사카 일대가 東海道라면, 나머지 혼슈(本州) 지방은 北海道인가. 그러나 홋카이도(北海道)라는 말 자체가 北海道 라는 뜻이다. 이름 없는 섬은 없다. 누가 섬에다 이름조차 붙이지 않고, 섬을 구획한 이름만 붙인단 말인가. 그것도 큐슈(九州)는 서해도, 시코쿠(四國)는 남해도라고 하면서 유독 혼슈(本州)만 이름없는 섬으로 방치할 수는 없다. 동해道 이전에 동해島 부터 명명했다.



▲ 일본열도



日本 땅은 메이지(明治)가 홋가이도(北海道)를 정복할 때 까지 시코쿠(四國), 큐슈(九州), 혼슈(本州) 세 개였다. 원래 南海島, 西海島, 東海島였던 것이다. 北海道는 아이누族의 땅으로 이전에는 에미시(蝦夷)라고 불렀다. 西海島를 九州라 부른 것은 中國倭가 日本(西海島)으로 이주한 다음 부터다. 中國倭가 살던 중국 대륙의 지명을 그대로 갖다 붙인 것이다.

南海島가 시코쿠섬, 西海島가 큐슈섬이 되려면 어디가 東海島 여야 하는가. 당연히 혼슈섬 전체이다.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이른바 日本의 新羅侵攻計劃이다.

신라를 침공하기 직전인 761 년 11 월, 일본은 실제로 각 지역에 절도사를 임명하여 전쟁에 동원할 선박과 선원, 군사의 수를 모두 점검했다. 최종적으로 보고된 수는 백촌강 전투에 동원된 군사력의 2 배 수준 이었다. 동해도, 남해도, 서해도에서 각각 마련된 배는 모두 394 척, 군사는 총 4 만명 이었다.(역사스페셜 6권)

주목할 것은 西海島(규슈), 南海島(시코쿠) 외에 東海島에도 배와 군사를 집결 시켰다는 대목이다. 韓半島를 침공하기 위해 韓半島 남해의 반대편인 ‘도쿄에서 오사카 일대’에 배를 집결 하는가.

이를 부인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일본함대 집결지의 하나가 韓半島 南海와 접한 후쿠오카(福岡) 였다는 사실이다.

후쿠오카와 이웃 도시인 마에바라에 걸쳐 있는 오래된 성터다. 성문 터에 세워진 비석은 이 성이 756 년 부터 쌓기 시작한 이토성 이라고 전한다.
이토성 북쪽에 슈센지(修善寺)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슈센지는 군함을 집결 시키는 관청으로, 이런 관청을 설치한 것은 전쟁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756 년, 후쿠오카의 작은 반도에 세운 이토성은 새로운 전쟁을 위해 만든 병참기지 였던 것이다.
모토오카쿠와라 유적 발굴 현장은 큐슈에서 최초로 발견된 제철 유적이다. 현장에서 발견된 불순물을 조사한 결과, 이토성의 축성시기와 동일한 것으로 확인 되었다. 발굴 현장에는 화살촉이나 철검 같은 무기류도 발견되어, 제철공장 옆에는 무기공장도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서 제련한 철로 무기를 만들어 이토성에 공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분명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스페셜 6권)



▲ 일본열도 2



“군함을 집결시키는 관청”은 西海島(규슈) 북단에 있고, 배 집결지는 정반대편인 태평양과 면한 해안이다? 통신수단 이라고는 봉화가 전부인 그 옛날에 관청과 집결지가 떨어져 있을 수는 없다. “군함을 집결시키는 관청”은 집결지 내에 있었다. 2 차 대전 당시 메영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에 제 2 전선을 개설할 당시에도 잉글리쉬 해협과 도버해협 사이의 최단거리로 진공했다. 일본은 한반도와 면한 해안에 전함을 집결 시켰던 것이다.

759 년에 전국에 500 척의 배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7 개도 가운데 북육도에 89 척, 산음도에 145 척, 산양도에 161 척, 남해도에 105 척, 4 개도에 나누어 한가한 달마다 꾸준히 만들라고 했다. 또 배의 완성시기는 3 년 안이라고 못박고 있다.(역사스페셜 6권)

작은 섬은 단일행정구역 이었다. 南海島(시코쿠)는 南海道, 西海島(규슈)는 西海道이다. 北陸道(호쿠리쿠), 山陰道, 山陽道 (그리고 東海道)는 혼슈섬에 있었다. 배 건조는 되도록 비밀로 하기 위해 韓半島와 면한 해안의 반대편에서 했다. 南海道 남단에서 배를 만든 것이다. 北陸道, 山陰道, 山陽道 역시 혼슈섬의 태평양에 면한 지역 이었다. 태평양에 면한 해안에서 배를 건조한 다음, 진공에 즈음하여 韓半島에 면한 해안에 함대를 집결 시켰던 것이다. 韓半島 남해 및 동해와 면한 해안이 일본군의 출발지점 이었던 것이다. 東海道는 韓半島와 면한 츄우코쿠(中國) 산지 일대[도쿄에서 오사카 사이가 아니고,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오사카 사이(쓰루가:敦賀까지)다. 이 당시 日本의 수도는 도쿄(東京)가 아니고 나라(奈浪)이다]고, 東海島는 혼슈섬이다.

혼슈가 東海島라는 사실은 옛날에는 우리나라(韓半島)의 東海가 日本의 東海 였다는 명백한 증거다. 우리나라의 東海가 日本의 東海였기 때문에 東海島가 도쿄에서 오사카 일대라고 날조 해야만 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것은 日本의 배 건조 능력이다. 394 척에 군사가 4 만명이면 말, 무기, 보급물자를 빼고 척당 백 명의 군사가 탔다는 것인데, 14 세기의 遣明船이 13~14 명이 탈 수 있었다고 했다. 매번 난파하고 침몰하기 일쑤라 스가와라노 미치사네(管原道眞 : 845~903)조차 9 세기 말에도 東中國海를 건너길 거부한 일본이 8 세기 중반에 백 명이 승선 가능한 큰 배를 만들 수 있었단 말인가. 백 명이 탈 수 있는 큰 배는 14 세기에도 “한여름 밤의 잠꼬대”에 불과한 얘기였다. 백 명이 승선할 수 있는 큰 배를 건조할 능력이 있었다면서 구차하게 大震國에게 연합 하자고, 몇 년씩 애걸 했다는 것인가.

李成桂가 昌王(1380~1389)을 내세워 韓半島로 천도한 1388 년 까지 明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1368 년 高麗가 蒙汗을 내쫓자 朱元璋 및 장사성(張士誠 1321~1367) 이하 中奴가 雨後竹筍으로 일어나 中土를 분할하기 위해 정신없이 싸우느라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런 미개 소국에 뭔가를 배우겠다고 遣明船을 보냈단 말인가.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던” 華夏에게 무엇을 배우겠다고? “남녀가 들에서 함부로 野合”하는 것이나 배울까, 그 외에는 華夏 에게서 배울 것이 전무했다. 또한 14 세기에는 華夏族 출신의 中國倭가 日本으로 이주한 지도 어언 6 백년이 지나서 “男女가 들에서 함부로 野合”하는 것이라면 日本도 일가견이 있었다.

朱元璋은 日本과의 접촉을 금지해 海禁措置까지 취했다. 朱元璋이 죽자마자 1399 년에 遣明船을 보냈던가. 그걸 두고 14 세기에 遣明船을 보냈다고?

무엇보다 李氏朝鮮 전기에만 무려 4,800 여 건의 日本國王使, 去酋使, 규슈(九州)탐제사와 대마도주특송사(對馬島主特送使), 제추사 등 온갖 명칭의 倭奴使節을 시도 때도 없이 보내 明과의 통교를 주선해 달라고 애걸복걸한 日本이다.
日本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의 朝鮮觀, (참고서적 : 三宅英利 著, 河宇鳳 옮김 ‘歷史的으로 본 日本人의 韓國觀’, 풀빛, 1990, 三宅英利 著, 趙學允 譯‘近世日本과 朝鮮通信使’, 景仁文化社, 1994, 國史編纂委員會‘韓國史9’, 大韓民國文敎部國史編纂委員會, 1984, 박경희 엮음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日本史’,일빛, 1999)

어쨌거나 형편없는 항해술과 조선술 이나마 9 세기에 中國倭가 전수해 주었으니까, 8 세기에 日本이 척당 백 명씩 타는 큰 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東支那海, 南支那海라 이름 붙인 것은 朱元璋 때다. 朱元璋이 중국 대륙 전체로 지명을 옮긴 후 秦이 黃河 이남을 통일한 것으로 날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秦은 中土(티벳고원 북부)를 통일하지 못했다. 中土 서쪽은 기원전 19 세기 이래로 유목민의 땅이었다.

東支那海가 伽倻海니까 加羅海의 北岸은 揚子江口에서 杭州灣이다. 협보(俠父)는 浿水를 따라 내려와 海浦로 부터 항해해 加羅海의 북안에 이르렀다. 浿水는 丹江 이니까, 海浦는 金城(武漢) 내에 있었다. 金城의 항구 海浦에서 揚子江을 따라 揚子江口로 나와 杭州灣으로 갔던 것이다. 杭州灣 남쪽에 구야한국(狗邪韓國)이 있었다(陝父......浿水而下由海浦而潛航直到狗邪韓國乃加羅海北岸也).

廣開土境好太皇 당시, 倭는 10 개국으로 그 가운데 3 국은 臺灣에 있고, 7 국은 뭍에 있었으니까, 육지의 倭가 차지한 면적이 더 컸다. 揚子江口와 그 주변에는 伽倻가 있었으니까, 육지의 倭가 차지한 땅은 선하령(仙霞嶺) 산맥과 무이산맥(武夷山脈) 일대에서 구룡강(九龍江)이나 한강(韓江)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아소산(阿蘇山)은 仙霞嶺山脈이나 武夷山脈에 있었을 것이다. 九龍은 九州에서 바꾼 이름이 분명하다. 오늘날은 江 이름만 남았지만, 그 옛날에는 倭가 사는 뭍 전체를 九州라고 했다.

“辰韓은 倭와 가까운 지역이다(辰韓......南與近倭......南與倭接).” 三國志의 저 구절은 이름이 같은 것을 기화로 해서 朝鮮의 管境 三韓을 3 차 三韓에다 포개어 놓은 것이다. “辰韓은 옛 辰國이다(辰韓者古之辰國也)”라며 최초의 三韓, 즉 朝鮮의 管境 三韓을 슬쩍 집어 넣었다. 三韓은 “帶方의 남쪽”이 아니라, 서쪽에 있었다.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다(韓在帶方之南).”는 날조 漢四郡에 따른 기술이다.

帶方은 朝鮮, 漢 전쟁 이후 高豆莫汗이 협(劦)장군에게 봉토로 준 岷江 이서의 일부이다. 조그만 지역이라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韓在帶方之南)”다는 식의 기준으로 삼을 만한 지명도 못된다. 더구나 高句麗가 樂浪을 멸망시킨 大武神烈帝 이전에 帶方은 멸망했다.



新羅가 건국한 辰韓은 54 제후국을 거느린, 朝鮮의 통치자 檀君이 직접 다스리는 辰韓(辰國,眞國))이 아니다. 新羅는 현 武漢에서 건국했고, 辰國은 薩水가 남해안 이었다. 12 제후국을 거느린 辰韓은 없다. 3 차 三韓은 朝鮮의 三韓이 사라진 후에 생긴 지명이다. “진한 6부(辰韓六部)”라고 했다(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新羅의 辰韓은 단일국가이지,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있지 않았다. 赫居世가 왕이 되자, 辰韓이 斯盧로 개명했다. “도읍을 서라벌(徐羅伐)에 세우고 나라를 辰韓으로 하고, 또한 사로(斯盧) 라고도 하였다(立都徐羅伐稱國辰韓亦曰斯盧 太白逸史)." 전쟁없이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辰韓 6部”가 행정구역이지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朴赫居世가 나라를 세울 때는 이미 高鄒牟가 제위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군사적 재능으로 檀君의 사위가 되고, 大統까지 이어받은 高鄒牟가 정벌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을까. 新羅의 시조 朴赫居世가 “부여제실(夫餘帝室)의 딸 파소(婆蘇)”의 아들이기 때문이다(斯盧始王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朴赫居世는 13 세에 왕이 되었는데, 이때가 기원전 57 년이다.

婆蘇는 기원전 70 년 내지 69 년에 朴赫居世를 임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70 년 내지 69 년 당시의 檀君은 高豆莫으로 기원전 108 년 부터 檀君으로 있었다. 그 당시는 일찍 혼인 했음에도 혼전임신이니, 婆蘇는 15 세쯤에 朴赫居世를 임신 했다고 가정하면, 일단 高豆莫의 딸일 가능성은 없다. 高鄒牟와 혼인한 於瑕羅는 北夫餘 6 世 檀君 高無胥의 둘째 공주이다. 婆蘇는 高無胥의 첫째 공주였던 것이다. 高豆莫은 49 년간 제위에 있었다. 高豆漠의 아들 無胥는 제위에 오르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고, 그 때문에 제위에 고작 2 년 있었다.

高鄒牟는 北夫餘 1 世 檀君 解慕漱의 후손이고, 朴赫居世세는 北夫餘 6 世 檀君의 외손자다. 혈통으로 따진다면, 朴赫居世가 제위 적격자 였으나 나이가 어렸다. 이미 제국은 해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제후국들은 저마다 독립을 획책했다.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年十三 嶷夙成有聖德 高句麗國本紀)”었다고 해도 12 세의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高鄒牟는 제국의 영광을 재현할 역량을 이미 확인 시켜준 22 세의 성인 이었다. 高鄒牟가 제위를 계승해도 결국은 자신의 혈통으로 이어진다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이 이미 혼인 했다는 사실을 高鄒牟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高無胥가 高鄒牟에게 帝位를 물려 주었으나, 朴赫居世가 있었기에 모두가 순순히 따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高鄒牟는 해결책으로 高無胥의 외손자에게 나라 한 쪽을 떼어 주었을 것이다[伽倻 건국은 기원전 42 년 이라고 한다. 기원전 42 년은 高鄒牟가 정복활동을 완료한 때로 高句麗 영토 한 쪽에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방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伽倻의 시조 首露王의 출생에 대한 기술은 남아 있지 않지만, 高鄒牟의 정벌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首露王 역시 高無胥의 혈통(高無胥에게 셋째 딸이 없었다는 기록은 없다)이 아니라면, 新羅 땅에서 일어난 나라일 것이다].

“高矢氏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진변(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 이다(高矢氏後裔 廣處東南 轉流爲辰弁諸族 後之所謂三韓者皆其孫也 揆園史話 太始紀)"에서 三韓은 3 차 三韓이다. 高矢氏를 비롯, 蚩尤氏, 神誌氏에게 봉토를 하사한 神人王儉은 1 차 辰韓을 다스렸다.

1 차 辰韓의 남해안(薩水 ; 현 丹江)에서 倭 까지의 거리는 위도 5° 가량 차이난다. 500km 정도 떨어진 거리다. “개마국(蓋馬國)은 일명 웅심국(熊心國)이라 하니 개마대령(蓋馬大嶺)의 북쪽에 있으며 구다국(勾茶國) 으로부터 거리가 200 리다. 勾茶國은 옛날에는 독로국(瀆盧國)이라 칭했고 북개마대령(北蓋馬大嶺)의 서쪽에 있는 나라다. 월지국(月漬國)은 그 북쪽 500 리에 있다(蓋馬國一云熊心國在蓋馬大嶺之北距勾茶國理百里勾茶國舊稱瀆盧國在北蓋馬大嶺之西月漬國在其北五百里 太白逸史 桓國本紀)"고 했다. 蓋馬大嶺은 오늘날의 秦嶺山脈 이니까, 北蓋馬大嶺이 될 수 있는 것은 陰山山脈 뿐이다. 陰山山脈 북쪽에 주인씨(朱因氏)의 후손을 봉한 蓋馬國이 있었다. 勾茶國(瀆盧國)은 陰山山脈 서쪽에 있었으니까, 倭로 부터 천 수백 km나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瀆盧國은 倭와 경계가 접해 있다(其瀆盧國與倭接界).”는 三國志의 기사도 사실이 아니다.

월지국(月漬國)은 그 북쪽 500 리에 있었으니까 蒙古高原 남단이다. 箕準이 衛滿의 꾐에 속아 난창강(瀾滄江)을 따라 들어가자 “제가(諸加)의 무리들이 上將 卓大를 받들어 모두 함께 길을 떠나 월지(月支)에 이르러 세운(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 北夫餘紀)" 나라가 後三韓이다 (蓋馬大嶺이 오늘날의 秦嶺山脈 이고, 北蓋馬大嶺이 陰山山脈 이므로, 대파산맥(大巴山脈)은 南蓋馬大嶺으로 부른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3 차 三韓과는 거리가 더욱 벌어진다.

 

倭는 3 차 三韓의 辰韓 (및 弁韓) 옆에 있었다. 그래서 新羅가 倭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서 왜의 위치를 추측해 보자.
“마한(馬韓)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다. 변진(弁辰)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 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http://www.chess-cat.com/what_09.htm, 왜는 일본열도가 아닌, 한반도에 있었다) (馬韓在西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이 역시 韓半島를 염두에 두고 날조한 대목이다. 朝鮮의 管境 중 서쪽에 있었던 것은 番朝鮮이다. 3 차 三韓의 馬韓은 중국 대륙 동부에 있었다. 1 차, 2 차, 3 차 그 어떤 馬韓도 남으로 倭와 접한 적이 없다. 弁辰 12 國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12 國을 거느린 것은 1 차 番韓과 馬韓 이었다. 3 차 辰韓은 3 차 弁韓 서쪽에 있었다.

邪馬台(일본이 야마다이國이라고 주장하는 촌락)가 列島에 있었다면, 중국은 물론이고 高句麗, 百濟, 新羅, 伽倻도 그 존재를 알 수 없었다. 高句麗, 百濟, 新羅, 伽倻가 해상무역 국가였다면, 列島 역시 무역 상대국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일정한 수준의 문명을 이식 받아야 했다. 그러나 列島는 5 세기 까지도 벌거벗고 산 미개 땅이었다. 先住民 외에 韓半島人들이 개별적으로 이주했을 뿐, 百濟가 식민지를 건설한 4 세기 말까지 列島는 그 어떤 나라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는 未知의 땅이었다.

송서(宋書) 왜국전(倭國傳)은 “왜국은 고려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
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중국 남북조 송나라(420∼479) 때에는 왜가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열도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후에 발간된 중국측 문헌들은 모두 왜가 일본열도에 자리잡고 있다고 기록했다.
(http://www.chess-cat.com/what_09.htm, 왜는 일본열도가 아닌, 한반도에 있었다)

이름이 같은데 착안해서 中國倭를 列島倭에다 포개버린 대목이다. 원래 中國倭는 바다와 중국 대륙에 흩어져 있었다. 점차 구축되어 마지막 순간에는 中國倭가 해상에 있었고, 다음 순간 海上마저 정복 되었다. 이때가 8 세기였다.

高麗와 高句麗는 朱元璋이 역사날조 하면서 고의적으로 섞어 썼다. 朱元璋과 李成桂 등이 高麗 영토를 권모술수로 나눠가진 탓에 高麗가 대제국이라는 사실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宋은 420 년에서 479 년까지 있던 中土의 날조 南朝의 하나다. 中奴는 역사를 바꾸면서 연대를 일치 시키지 않았다. 그러니까 宋 때 倭가 海上으로 밀려 났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倭는 廣開土境好太皇에게 정복된 이후 5 세기 초부터 말까지 조공을 한 끝에 모든 倭를 아우르는 倭王의 칭호를 받았는데, 海上으로 밀려난 후에도 倭王의 칭호에 집착했다는 것은 우습다. 高麗의 동남쪽 큰 바다는 東支那海와 南支那海이다. 高句麗는 百濟를 중국 대륙 남부에서 완전히 구축한 504 년 이후 중국 남해안 및 동해안 일부를 차지했다. 그러므로 倭國이 高麗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는 것은 504 년 이후 倭가 뭍에서 해상으로 밀려났다는 뜻이다.

倭를 海上으로 몰아낸 것은 新羅이다. 文咨好太烈帝 이후 黃山江 이남으로 수도까지 이전 당하자, 新羅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오직 倭를 정복하는 것 뿐이었다. 倭가 뭍에서 쫓겨나자, 臺灣이 유일한 倭의 근거지가 되었다. 新羅는 375 년에 韓半島까지 침공한 나라이다. 그런 新羅에게 대만 정복쯤은 간단했다. 그러므로 三國遺史의 皇龍寺9層塔도 날조됐다. 우선 皇龍寺塔을 세웠다는 643 년에는 중국 대륙에 4 國(高句麗, 百濟, 新羅, 唐)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皇龍寺塔을 643 년에 세웠다고 날조한 것은 당시 新羅를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다는데 착안한 것이다.

영락(永樂) 10 년 삼가라(三加羅)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任那)에 통일 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聯政) 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烈帝)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永樂十年三加羅盡歸我自是海陸諸倭悉統於任那分治十國號爲聯政然直轄於高句麗非烈帝所命不得自專也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倭人은 百濟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倭人百濟之介也 太白逸史) 中國倭는 원래 지리상 百濟에 접한 관계로 百濟의 지배를 받다가 廣開土境好太皇의 중국 대륙 정복으로 高句麗의 지배를 받았다.

倭는 燕에 속하지 않았다. 燕이 倭 옆에 없었기 때문이다. 北燕, 後燕, 西燕, 前燕, 南燕 모두 옛 長江(怒江) 너머(中土 西部)에 있었고, 春秋戰國 時代의 燕 하나만 옛 長江 남안 즉 淮垈 이남에 있었다.

倭는 燕에 속한다. 이 말은 中奴가 현 揚子江 이남으로 기어나온 明 때 고친 날조기사이다. 이 당시에는 春秋戰國時代의 燕이 중국 남부에 있다고 날조했다. 淮垈 너머에 燕이 있었기 때문이다. 黃河 이남으로 中土가 확대되자, 淮垈는 揚子江 하류와 黃河 하류 사이가 되었다. 종이 위에서 燕이 倭와 접하자, 倭는 燕에 속한다(倭屬燕 山海經)고 날조한 것이다.

◀ 정상두개골과 편두

그러나 한편으로는 倭는 中國에 속했다.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本非倭人世居地 太白逸史)."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倭人은 어디서 왔을까. 列島에서 오지는 않았다. 列島 최초의 나라가 성립한 것은 395 년. 日本은 9 세기 까지도 중국을 안전하게 오고갈 항해술이 없었다고, 일본 역사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럼 동남아에서 왔던가. 아니다. 倭人이 남방계 아시아인이면, 이질적인 생김새라고 명시해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三國志에서 고작 “편두(褊頭)하고 文身한다”고 했을 뿐이다. 褊頭는 인위적으로 만든다. 요컨대 倭人은 남방계 아시아인이 아니라 북방계 아시아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아니다. “옛부터 구주(仇州)와 대마도(對島)는 곧 三韓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自古仇州對島乃三韓分治之地也本非倭人世居地 太白逸史)."고 했다.

 


「삼국지」

「후한서」

진한·변한

변진(변한)

진한

변진(변한)

신체

문신

왜와 가까우므로 남녀는 역시 문신을 한다.



그 나라가 왜와 가까이 있어 문신한 사람이 조금 있다(其國近倭 故頗有文身者).

편두

아이가 태어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 한다. 지금의 진한인은 모두 편두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되도록 하려고 모두 돌로 눌러놓는다(兒生欲令其頭扁 皆桇之以石).


체격


그 사람들의 형체는 모두 크다.


그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신체가 장대하다(其人形皆長大).

두식

(漢人이)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가 된지 3년이나 되었다.

머리카락이 길다.


머리카락이 아름답다(美髮).

의복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다.

의복은 깨끗하다.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살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다(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의복은 깨끗하다(衣服潔淸).

직물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는 법을 알아 겸포(唨布)를 짠다.

또 광폭세포(廣幅細布)를 짠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줄을 알고 겸포를 짠다(知蠶桑 作唨布).


三韓의 복식에 대한 연구(경남대 최혜경 교수에서 발췌) 



倭人은 中土에서 왔던 것이다. 褊頭는 華夏族의 풍습이다. 전술 했다시피 褊頭는 노예식별 표시이기 때문에 中土에서 벗어난 倭人들은 더 이상 褊頭를 할 필요가 없는데, 오랜 관습이라 한 것일까. 물론 이주 당대에는 倭人도 褊頭였다.

 

"진한(秦韓)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秦나라가 망해서 도망해온 사람으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 韓國의 馬韓 땅이 적당할 것 같아 馬韓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고 하였다(秦韓耆老自言 秦之亡人來避苦役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後漢書)? 하필이면 인구 밀집지역인 韓半島 남부의 동쪽 땅이 적당할 것 같았다고? 馬韓 동쪽에는 辰韓 말고 弁韓까지 우겨 넣었다. 馬韓 땅이 원래 ⼚자처럼 생겼다는 날조다. 동쪽 끄트머리만 弁韓 땅이었다는 날조다. 秦나라 유민이 동쪽으로 도망치다 곧장 黑龍江으로 가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韓半島로 빠졌다고?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 순순히 제 땅을 내줬다고?

저 날조기사에 나오는 秦韓은 1 차 辰韓이다. 秦나라가 망한 해는 기원전 207 년이다. 北夫餘 1 世 檀帝 解慕漱 때이다. 馬韓의 동쪽에 있는 辰韓 역시 1 차 辰韓이다. 解慕漱가 직접 통치하는 眞朝鮮이다. 그 어떤 馬韓도 倭와 접한 적 없다고 했다. 倭는 伽倻 남쪽에 있었다. 3 차 馬韓과는 弁韓과 東夫餘에 의해 뚝 떨어져 있었다. 3 차 辰韓 동쪽에 있었다.

新羅가 일어난 3 차 辰韓은 平壤을 공격하기 딱 좋은 지역이다. 비록 北夫餘의 皇城은 아니지만, “戊申 2 년(B.C.193) 檀帝께서 上將 연타발(延佗勃)을 파견하여 平壤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 떼와 衛滿의 무리에 대비케 했(戊申二年帝遣上將延佗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 北夫餘紀)“을 정도로 요충지다. 우리나라는 慈烏支 한웅 이후 高麗 末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곳에 도읍했다. 그러니까 위험천만한 中奴들을 우리나라 깊숙이 그것도 핵심지역 가까이에 살게 할 리가 없다.

壬辰 31 년(B.C. 209)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키자,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사람들이 番朝鮮으로 도망쳐온(壬辰三十一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口 北夫餘紀) 적도 있다. 중국에서 귀순하는 자들을 番朝鮮에 살게 한 것은 檀帝가 다스리는 辰(眞)朝鮮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209 년 番朝鮮의 上下 운장(雲障)에 나눠 살게 한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사람(秦이 中土를 통일 했으므로 이미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등은 망했다. 秦의 中土 통일 후에도 燕나라인, 齊나라인, 趙나라인들은 자신들을 秦나라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는 中土의 행정구역이나 마찬가지였다)들도 衛滿과 결탁해 番朝鮮을 빼앗았다.

이 당시 莫朝鮮은 멸망하고 없었다. 설령 莫朝鮮이 존속 한다고 해도 莫朝鮮은 中土人을 받아줄 수 없었다. 莫朝鮮이 무너지면 辰朝鮮이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 중국왜의 이주경로



이미 秦나라인(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출신자) 수 만명이나 와서 番朝鮮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을 감독하기 위해 장수까지 파견했다. 番朝鮮으로 도망친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출신자도 수 만명인 것으로 봐서 中土를 통일했다는 秦나라가 망한 후 도망친 秦나라인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 이상 받아주면, 감독 자체가 곤란하니까, 秦나라 유민까지 받아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秦나라 遺民들은 어디로 갔을까. 대륙 끝까지 갔다. 그래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避苦役)”고 했던 것이다. 바로 중국 대륙의 南東海岸 으로 後代에 이들을 일러 倭라고 불렀다. 倭의 실체는 바로 중국이다. 바로 萬里長城을 쌓았다는 秦始王의 백성이다. 중국이 倭라고 하면, 중국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니까, “秦나라가 秦韓”이라 날조한 것이다. “지금 辰韓 사람 모두 편두(褊頭)이고, 倭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역시 文身을 하기도 한다(今辰韓人皆褊頭南與近倭亦文身 三國志 魏書).”며 중국과는 무관한 듯이 날조기술 했지만, 中國倭의 실체는 華夏였던 것이다.

“秦韓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秦나라가 망해서 도망해온 사람으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 韓國의 馬韓 땅이 적당할 것 같아 馬韓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고 하였다?(秦韓耆老自言 秦之亡人來避苦役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後漢書)" 秦나라 사람들이 중국 남부로 가서 倭의 무리로 살았던 것을 이용해 辰韓이 檀帝의 직접 통치 지역임을 부정했던 것이다. “新羅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小昊金天)氏의 후손이어서 姓을 金氏로 하였다?(新羅人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三國史記 新羅本紀 赫居世 편도 아닌, 百濟本紀 義慈王 편에 써 있는 날조기사 이다. 秦나라 사람들이 중국 남부로 가서 倭의 무리로 살았던 것을 이용해 3 차 辰韓에서 건국한 新羅마저 중국인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다. 이상한 문장이다.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으면 倭人들이 어디서 왔는지도 기술해야 할 것이 아닌가. 원래 한단(桓檀) 역사서에는 倭가 秦나라 출신자라 적시되어 있었다.(신찬성씨록 참조)

진나라 유민들이 이주해 왜인이 되었다.

하지만 李氏朝鮮 에서는 呂政이 皇帝로 격상되어 있어 李陌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本非倭人世居地 太白逸史)”는 애매한 문장으로 바꾼 것이다.

明은 山海經을 뜯어고쳐 倭가 燕에 속한다고 했다. 그러나 倭의 실체는 秦나라 遺民이다. 中土의 戰國 時代에는 倭가 없었다.

 

舊唐書에는 “倭國은 옛날의 왜노국(倭奴國)이다(倭國者古倭奴國也)”고 했다. 秦나라 출신의 倭는 倭奴國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러나 舊唐書는 明 때 쓴 책이므로 日本을 가리켜 쓴 글이다. “일본국은 동해의 동쪽에 있는 나라로서 예전에는 왜노국(倭奴國)이라 불렀다(日本國在東海之東古稱倭奴國或云惡其舊名故改名日本以其國近日所出也).”는 蒙汗史(元史) 역시 明 때 날조했다. 列島倭는 예전에 倭奴國이라 불리지 않았다. 百濟는 자국이 세운 나라라를 노예국이라 했을 리 없고, 高句麗 역시 같은 한민족인 百濟人이 세운 나라니까, 노예국이라 부르지 않았다. 新羅 역시 列島에 식민지까지 세웠다. 舊唐書와 元史의 이 구절만 봐도 明 때 날조한 책이 명백하다.



▲ 교토(京都) 우즈마사(太秦)의 광륭사(廣隆寺)



日本은 舊唐書와 元史의 저 구절을 보고 우리나라의 노예국이 아니라, 중국의 노예국 이라며 감격스러워 하고 있다. 그래서 서둘러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 금인(金印)을 새겨 국보로 지정했다. 그러나 왜노국(倭奴國)은 정식 국명도 아니고, 왜(倭)를 더욱 비천하게 부르기 위한 별칭 이었다. 왜노국(倭奴國)이 지극히 “아름답지 못한 이름”이라는 건 대체 언제쯤 알아 차리려나?

日本은 왜노국(倭奴國)이다. 倭奴 中國倭가 列島로 대거 이주해 오늘날 日本人 유전자의 25.8 %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이 무지 좋아할 것으로 보인다. 진하승(秦何勝 : 일본명은 하타노 가와카쓰)이 秦始王의 후손 이라고 우기던데, 이제는 日本 전체가 秦나라의 후손이라 우길 수 있으니까[날조에 눈이 뒤집힌 코류지(廣隆寺)에서는 “아니다. 우리는 秦始皇의 후손이다. 秦始皇도 秦氏, 우리도 秦氏 아닌가”라고 우기고 있다. 그러나 누차 말했듯이 秦始王은 성은 영씨(嬴氏)였고, 진짜 성은 呂氏였다. 秦始皇을 ‘秦氏皇’, ‘秦氏 皇帝’라 생각한 걸까. 코류지에 가면, “呂不韋 아들이 우리 선조”라는 비석을 볼 수 있다]

기모노(着物)의 시초는 3 세기경 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중국 역사책에 3 세기경, “큰 천에 구멍을 뚫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고 있었다(http://www.anseo.dankook.ac.kr/~ahns/cul-67.html)"고 적혀 있는 왜(倭)는 中國倭이다(3 세기에 中奴는 日本으로 항해할 능력조차 없었다. 中奴가 대이주를 했다면, 당연히 언어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中奴가 9 세기에야 겨우 일본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일본이 10 세기 까지 한국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면 열도에서는 뭘 입었나.
벗고 살았다.

오우진(應神) 천황 시대에 봉녀(縫女) 두 명을 보내 주어서,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韓服)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 이었다고 한다.

토우테이칸(藤貞幹)이 일본결척(日本決尺)을 인용해 쇼오꼬오하쯔(衝口發)에서 한 말이다. 藤貞幹은 18 세기 일본인이다. 그러므로 韓服은 李氏朝鮮의 복식을 가리켰다. 李氏朝鮮은 高句麗가 아니라, 百濟 복식을 이어받았다.

기원전 4 세기(朝鮮時代)에 썼다는 山海經은 우리나라를 두고 “군자국은 북쪽에 있으니, 사람들은 의관을 했다”고 했다. [“君子國은 북쪽에 있으니, 사람들은 의관을 했으며, 칼을 차고, 짐승을 잡아먹으며 사냥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았다(君子國在其北衣冠帶劍食獸使二大虎在旁其人好讓不爭 山海經 海外東經)." 옛날에는 사냥이 군사훈련의 일종이었다. 군사훈련을 하고 나면, 사냥물은 당연히 그 자리에서 잡아 나눠 먹었다. 사냥은 운치라도 있지, 中土는 4300 년 전까지 짐승이 주식 이었다. 后稷이 농사법을 가르쳐준 4300 년 전까지 쌀도 구경하지 못해서 우리나라 보고 모래를 먹는다고 한 미개인들이다]

慈烏支 한웅의 中土 정복 이후 우리나라 사람으로 “淮垈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漢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蚕織牧 資以爲業 揆園史話 檀君紀).” 우리나라는 배달시대부터 비단으로 옷을 해 입었던 것이다.

“高矢氏는 청구국(靑丘國)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高矢氏就靑丘國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昜 五穀豊肥民皆衣輕煖而食肥俍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文武亦得以幷興 揆園史話 檀君紀)." 朝鮮 개국 당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고 의관하기를 즐겨 했던 것이다.

後漢書, 三國志에는 “馬韓 사람들은 잠상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馬韓人知田蠶作撓布 後漢書)”고 했다. 다시 말해 중국은 기원후에 들어서자, 비단과 솜, 베를 만드는 법을 잊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中土에 들어간 후로 기술발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잠상(蠶桑)과 길쌈의 기술이 거듭 발전하는데, 中土는 그대로 이니까,(퇴보했을 수도 있다), 우수한 상품에 밀려 中土는 더 이상 비단을 만들지 않게 된 것이다.

 

中國倭의 3 세기 복식이 그로부터 華夏의 2 천 년전 복식과 동일 하다는 점에 주목하자. “큰 천에 구멍을 뚫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고 있었다”는 中國倭의 옷이나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는 華夏의 옷이나 표현만 다를 뿐, 똑같은 디자인이다.

날조 中國史에서도 華夏는 殷나라 때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
(중국의 복식사, http://www.anseo.dankook.ac.kr/~ahns/cul-67.html)

華夏가 기원전 천 수백 년 때 이미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는 것에서 벗어 났다면, 華夏 출신의 中國倭가 3 세기에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三國志)”을 수는 없다. 누가 2 천 년전의 미개 복식으로 회귀할 것인가. 中土에서 중국 대륙 끝으로 이주할 당시에도 華夏의 복식이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오래도록 변함없는 華夏의 복식이었다. “큰 천에 구멍을 뚫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고 있었”던 倭奴의 복식은 朱元璋이 揚子江 이남을 차지할 때까지 中奴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秦나라, 漢나라의 남자들은 포(袍), 곤의(褌衣), 고(袴), 관(冠), 건(巾), 책(幘)을 입지 못했다. 漢나라에서는 수구(袖口)를 축소시킨 것를 만들어 입지도 못했다. 漢나라 벼슬아치들은 평상시에 곤의(褌衣)를 입지도 못했고,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신을 신지도 못했다. 北夫餘의 복식이다.

日本書紀에 541 년과 544 년 新羅의 伽倻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百濟 聖王이 주재한 대책회의에 참석하는 기사가 있어? 大伽倻가 新羅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百濟와 더불어 倭와 연합해? 날조 중국사를 보고 창작한 기사다.

280 년에 이르러 斯盧國王이 辰韓 세력을 대표하여 미개 진(晋)에 조공 했다고? 新羅는 溫祚 당대에 百濟에 조공했다. 高句麗에는 廣開土境好太皇에 이르러 조공했다. 高句麗와 斯盧國 사이에 百濟가 끼어 있어 斯盧國은 高句麗와 직접 맞닿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조공할 필요가 없었다. 高句麗가 조공하지 않는 新羅를 정벌하려고 해도 百濟부터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中土는 高句麗 영토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나 타림분지(塔里木盆地)와 접해 있다. 조공을 안하면 당장 정벌을 받는다. 265 년에 선 진(晋)이 280 년 부터 高句麗에 조공하기 시작했던 것은 280 년에야 晉이 高句麗 영토와 맞닿았기 때문이다. 晉은 百濟와는 遼西로 접해 있기 때문에 高句麗, 百濟에 다 조공해야 했다.

479 년 加羅國王 하지(荷知)가 齊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란 작호를 받았다(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는 南齊書의 기사는 高句麗 역사서를 보고 베낀 날조기사이다. 5 세기는 廣開土境好太皇이 중국 대륙, 아니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를 정복한 때다. 伽倻가 자국을 정복한 高句麗에 사신을 보내지 않고, 고작 中土 한 구석을 차지한 중국, 그것도 南朝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받았다?

중국이 高句麗에 정복당한 伽倻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중국은 高句麗 건국 당시부터 속국 이었다. 배달 개천 초기부터 우리나라 식민지였다. 대대로 우리나라 사람이 파견되어 제후로서 통치한 땅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이 동아시아를 정복할 때에도 그 땅이나마 잃지 않으려고 숨조차 죽이고 있던 나라였다. 고작 漢나라 중기에 반짝 하고 침략을 일삼았을 뿐, 蒙古干涉期(?)를 제외하면 高麗 末까지 내내 우리나라의 속국이었던 것이다.

“倭는 5 세기 초부터 몇 차례 사신을 보낸 끝에 5 세기 말 宋나라 황제에게 도독(都督) 倭, 新羅, 任那, 秦韓, 慕韓 6 국 제군사(諸軍事)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 왜국왕(倭國王)의 칭호를 밝혔다(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宋書)"고? 정복은 高句麗에 의해 되고, 장군과 왕이라는 호칭은 宋나라에 주장하나?

◀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


倭人이 秦나라인이기 때문에 宋나라인도 똑같은 미개 족속이었다. 그런데 倭가 宋에게 장군과 왕이라는 호칭을 구걸 했다고? 高句麗 皇帝로부터 安東大將軍 倭國王 칭호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新羅, 伽倻를 통솔하는 대장군이 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나머지 9 개 倭國을 통솔하는 大將軍의 호칭을 받았던 것이다.

應神이 列島에 도착했을 당시, 列島는 옷조차 없어서 벌거벗고 있었다(衝口發 : 藤貞幹) 벼이삭은 5 세기 말까지도 손으로 쥐어뜯어 수확했다(고대국가와 천황 : 田村圓澄). 집? 그런 것도 없었다. 6 세기 까지도 그냥 흙구덩이에서 풀로 지붕이나 가리고 살았다(田村圓澄).

그런데도 日本은 3 세기에 큐슈(九州)에 ‘야마다이국(邪馬台國)’이라는 번듯한 나라가 있었다고 날조했다. 邪馬台는 중국 대륙에 있던 倭의 하나다. 그 뿐이 아니다. 九州에다 높이 12 m의 망루대와 촌락을 만들어놓고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이라 부르며 전세계에서 관광객을 끌어 들이고 있다. 요시노가리 유적은 韓半島人이 사는 곳에다 395 년에 세운 百濟 植民地 倭의 군사기지다.

倭가 문맹자 집단 이라서 大韓海峽도 못 건넜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바이킹은 문화민족이라서 잉글랜드를 정복 했던가. 日本列島의 倭人(아이누族은 제외)들은 일본인들이 그렇게도 염원하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민족”이 아니라, 항해 끝에 그 땅에 정착한 종족이다. 韓半島에서 기원전 3 세기 부터 건너간 사람들, 4 세기 말 이후로 列島를 식민개척한 百濟人, 新羅人에 이어 8 세기 전후로 新羅에 정복당한 후 필사적으로 도망친 中國倭가 日本人들의 조상이다.

應神이 열도에 도착할 때까지는, 列島는 선주민 아이누族과 韓半島人들이 사는, 이름도 없는 섬에 불과했다. 列島는 귤화위지(橘化爲枳)의 미개 땅이었다. 그 땅으로 간 모든 것이 퇴보했다. 배우는 것조차 거부했다. 천문학만 해도 몇 번이나 가르쳐 주었던가. 曆博士 왕보손(王保孫), 관륵(觀勒), 高麗 천문관, 李氏朝鮮 천문관해서 네 차례나 가르쳐 주었건만 일식관측 조차 못하다가 서양인에게 배웠다.

植民母國 百濟 멸망 후에 日本은 적국 新羅 선박에 얹혀서 대륙을 오갔다.

백제배, 신라배 신세만 졌던 일본이 직접 외항선을 큰 바다에 띄우게 된 것은 9 세기 들어서였다. 그러나 아직도 조선술 및 항해술이 미약했기 때문에 일본의 견당사선들이 조난 당했다는 침통한 기사가 상세하게 일본역사에 전하고 있다. 9 세기 말에 스가와라노 미치사네는 조정으로 부터 견당사로 임명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는 것을 중지해 달라고 우다(宇多) 천황에게 주청했다. 스가와라노 미치사네는 당시 문장박사이며 장관직에 있었던 최고로 존중받는 학자였다.
천황은 그의 주청을 받아 들였고 이후 견당사 제도 자체마저 폐지 시키는 등 당나라와의 교류를 중단시켰다.
(일본문화사, 홍윤기)

隋書에는 遣隋使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가 韓半島의 百濟를 거쳐서(백제 멸망 이전) 隋나라를 오갔고(上遣文林郎裴清使於倭國度百濟), 日本書紀에는 3 차 遣唐使 타카무쿠노 쿠로마로(押使 高向玄理) 일행이 新羅를 거쳐 唐나라에 갔다고 나와 있다.

遣隋使, 遣唐使. 이런 것은 없었다. 종족명 까지 우리나라 피지배계층 이라는 뜻의 鮮卑族인 隋와 唐은 보고 배울 문물이 전혀 없는 미개국 이었다. 鮮卑族 자체가 문명과는 거리가 먼 유목민이다.

中土의 유목민들은 주로 高句麗로 견한사(遣漢使)를 보냈다. 隋, 唐은 上國 新羅로 遣漢使를 보냈다. 그러나 隋, 唐에 이르면, 中土는 문명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倭는 百濟로, 日本으로 바뀌고 나서는 大震國으로 遣漢使를 보냈다. 그러니까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는 百濟 땅 한반도를 거쳐서 중국 대륙의 百濟로, 타카무쿠노 쿠로마로(高向玄理) 일행은 新羅 땅 한반도를 거쳐 大震國으로 遣漢使로서 갔던 것이다.

일본천황의 치세 때에 조서를 내려서 묻기를 ‘이웃나라’와 ‘달갑지 않은 나라’는 어찌 구별하는가. 답하기를 ‘이웃나라는 큰 당나라이며, 달갑지 않은 나라는 신라이로다.”[영집해(令集解 859~876) 제3권]

큰 唐나라? 일본문헌에는 大唐國이라 적혀 있을 걸~ 18 세기 이후 역사날조 하면서 大震國에서 글자 한 자 바꾸었던 것이다.

遣漢使라는 말은 三國史記를 편찬할 당시부터 있었다. 中土의 나라들이 高句麗, 百濟, 新羅로 遣漢使를 파견한 것을 明이 遣唐使로 고쳤다. 三國史記에는 朝貢國 新羅, 百濟가 高句麗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太白逸史만 해도 “百濟 新羅 가락(駕洛)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다(百濟新羅駕洛皆入貢不絶)”고 했다. 遣隋使, 遣唐使라고 바꾸었으니까, 안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列島倭는 사정이 다르다. 百濟 식민지가 植民母國의 적국으로 문물을 배우러 갈 수는 없다. 列島倭는 高句麗가 아닌, 百濟로 견한사(遣漢使)를 보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장구한 大陸史를 부정하는 이 땅의 사학자들은 고작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文의 사라진 일부 자구해석에만 처절하리만치 매달리고 있다. 그러나 廣開土境大勳跡碑를 세운 長壽弘濟好太烈帝가 과연 비문의 문자해석에나 매달리기를 바랄까. 長壽弘濟好太烈帝가 알아주길 바랐던 것은 高句麗가 정복했던 광대한 땅이다. 高句麗가 朝鮮을 계승했다는 사실이다. 숙적 百濟를 정복한 위업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이 정복한 땅은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다. 그렇다면 廣開土境大勳跡碑는 어디에 있었나. 중국 대륙이다. 韓半島와 滿州는 高句麗軍이 밟을 필요도 없는 땅이다. 중국 대륙의 百濟軍이 패해 百濟 皇帝가 항복하면서 百濟의 전영토가 정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북아에다 비를 세울 이유는 없다.

廣開土境大勳跡碑는 전승기념비다. 廣開土境好太皇은 百濟와 新羅, 伽倻, 東夫餘가 있고 倭가 있는 중국 대륙과 토번(吐蕃)이 있는 중앙아시아[廣開土境大勳跡碑를 보면, 廣開土境好太皇은 즉위 8 년에 吐蕃을 정복했다. 吐蕃은 747 년 고선지(高仙芝 : ?~755)가 정벌할 때까지도 파미르 고원 너머 중앙아시아에 있었다. 廣開土境好太皇은 중앙아시아까지 정복했던 것이다]를 정복한 것이다.

◀ 광개토경대훈적비문중 일부


廣開土境好太皇은 중국을 정복할 필요가 없었다. 중국은 高句麗와 百濟의 상대가 되지 않아, 끝없이 눈치를 보고 있던 소국 이었다. 중국은 朱蒙聖帝 때 정복된 이후 우리나라의 충실한 속국이었다.

역사를 날조한 李成桂는 碑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碑는 축소 韓國史를 증명하는 거짓 증거물 이기도 했다. 그래서 축소 역사에 맞춰 비문 내용까지 바꿔 가짜 비를 제작했다.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비롯해서 中原高句麗碑나 울진봉평비(蔚珍鳳坪碑) 등 모든 비가 날조 역사에 맞춰 새로 새긴 가짜 碑다.

원래 廣開土境大勳跡碑는 高句麗 영토에 세웠다. 百濟 영토에 세우면, 당장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百濟 영토를 바라다 볼 수 있는 국경지대에 세웠을 것이다. 廣開土境大勳跡碑가 세워진 구체적인 장소는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었던 百濟 영토에 가까운 西鴨綠江(嘉陵江) 혹은 黃山江(揚子江), 漢水(黃河), 浿水(漢水) 유역으로 압축된다. 漢水 유역에 세웠다면, 訥縣(현 洛陽)과 百濟의 초기 도성이 있던 현 開封 사이의 국경지대이다. 百濟의 제 2 皇城(長沙)이 高句麗 땅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 黃山江(揚子江) 유역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진짜 廣開土境大勳跡碑를 어디에 세웠던 간에 가짜 비는 東鴨綠江 유역에 세웠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을 西鴨綠江에서 東鴨綠江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복종하며 쥐새끼처럼 살았던 華夏는 그 사실을 지우고자, 우리나라 문화재들을 방치하고 있다. 훼손되고 붕괴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文을 깎아낸 것도 모자라, 관리를 내세우며 파괴해 한 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깨어져 나갔다. 碑의 파손을 막는다는 구실로 5 년에 한 번씩 합성 수지액을 주사하는데, 그 부분이 변색되고 표면까지 심하게 마모됐다. 중국이 늘상 하는 짓이지만, 말은 보호한다 면서도 실제로는 훼손하고 있다.

19 세기 말부터 中奴와 倭奴가 비문변조를 합리화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칠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석회칠을 할 때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글자를 마구 집어넣고 불리한 글자는 뺐기 때문에 탁본을 만들 때마다 글자가 다르다.

어째서 일본은 廣開土境大勳跡碑에다 석회칠을 하고, 비문을 깎아 내야만 했는가. 日本이 우리민족의 지배를 받던 하잘 것 없는 “벌거숭이” 왜(倭)라는 사실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日本軍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5 년 동안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 1884 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만듬]을 연구했고, 淸日戰爭을 전후하여 일본군 참모본부의 장교들이 수차에 걸쳐 현지에 가서 비문을 조사했다. 露日戰爭이 끝난 1905 년에는 비를 일본으로 운반할 계획까지 세웠다. 日本軍 주도하에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날조하여 이른바 ‘任那日本府’라 하여 倭의 韓半島 진출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고, 나아가 일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征韓論으로 발전했다.

倭奴의 논리에 따르면, 韓國이 고대 일본을 지배한 사실이 밝혀진 이상, 征倭論 및 미래 한국의 일본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인 셈이다! 倭奴의 논리에 의하면, 노예들 스스로 列島를 우리나라에 바쳐야 하는 것이다!

廣開土境大勳跡碑에 “百濟와의 전과를 최대의 업적으로 현시한 것”은 그 당시 百濟가 동아시아 제1의 대국이었기 때문이다. 유독 百濟만을 百殘이라 하고 百濟 皇帝를 殘主라 한 것은 百濟에 대한 원한이 너무도 깊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百濟를 굴복시킨 것이 廣開土境好太皇의 최대업적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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