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영광을

정우산기 2007. 3. 30. 13:30

한문명 최후의 계승국 고려 (4)

 

4) 쌍성총관부는 1356 년이 아니라, 1368 년에 격파했다

鴨綠江을 건너 威化島에 주둔했을 때 이유 없는 도망병이 길에 연이을 정도로 생겨났다? 西鴨綠江(遼水) 너머에 있던 高麗의 행정구역이 威化道였다. 威化島는 섬이 아니다. 遼西도 高麗 땅이라는 증거다. 遼水를 건넜는데도, 明은 가로막지 않았다. 明이 遼西에 없었기 때문이다. 遼東은 커녕 遼西조차 전진기지화 하지 못했다. 太白逸史도 恭愍帝가 여러 장수들을 보내 鴨綠江 이서의 八站을 공격하여 격파했다(諸將攻鴨綠江以西八站破之)고 했다.

鴨綠江을 건너 泰川(富江)이 비로 인해 강물이 불고 유속이 빨라 도강하다 빠져 죽는 자가 수 백 명이 발생 했다면서 이 당시 李成桂가 그 유명한 四不可論을 썼다고 날조했다. 李成桂는 “우리나라가 삼한을 통일한 이후 성실 근면하게 대국을 섬겼고, 홍무 2 년(1369) 明나라에 복종했던 정성도 그러했다(我國家統三以來事大以勤玄陵於洪武二年服事)”로 시작하는 上疏文은 쓰지도 않았다. 배달 이래로 우리나라를 성실 근면하게 섬긴 것이 中奴다. 그러니 저런 헛소리를 늘어 놓으면 즉결 처분감이 아닌가.

고작 西鴨綠江 너머 泰川(富江)도 비로 인해 강물이 불고 물 흐름이 빨라 도강하다 빠져죽는 자가 수백 명이 발생해 진군하지 못했다면서 東鴨綠江 하류의 섬으로 갔다가는 수만 명이 빠져 죽었겠다. 三國時代에는 현 黃河가 우리나라 최대의 격전장 중 하나였다. 富江 정도는 실개천이나 마찬가지다. 富江도 못 건너는데, 中奴가 쳐들어올 때마다 어떻게 물리쳤단 말인가.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鐵嶺 이서 땅을 가지고 티벳고원 북부에 있던 蒙汗에 투항하자, 蒙汗은 이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雙城摠管府를 두었다. 티벳고원 북부가 蒙汗의 東方限界線 이었기 때문에 雙城摠管府는 1258 년이 아니라 1270 년에 설치 했다고 전술했다. 黃河 하류 이북에 雙城摠管府를 설치 하면서, 東寧府와 연결해 長城 이북 땅을 가져간 것이다. 蒙古軍은 침입 하지도 않았다.

鐵嶺 이북 땅이 蒙汗의 雙城摠管府와 東寧府에 속해 있으므로 당연히 蒙汗을 몰아낸 明의 소유여야 한다고 했다고? 淸이 揚子江 이북에 버티고 있는데, 黃海와 渤海灣을 배타고 가서 지배할 것인가.

東寧府는 柴達木盆地에 있었지만, 날조사 에서는 雙城摠管府의 동쪽인 桑乾河 이동에 있었다. 그래서 종이 위에서 鐵嶺 이서 땅을 달라면서 雙城摠管府와 東寧府를 다 달라고 한 것이다.

천수기원 439 년(1357)...... 上께서는 처음 최영(崔瑩) 등과 의논 하시사 서북지방 회복의 계획을 정하시고 먼저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혁파하였다. 이어서 인당(印璫) 최영(崔瑩)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사 압록강 이서의 8 참(八站)을 공격하여 격파 하였다. 또 유인우(柳仁雨) 공천보(貢天甫) 김원봉(金元鳳) 등을 보내어 쌍성(雙城) 등의 땅을 수복 하도록 하였다(天授紀元四百三十九年......上始從瑩等議逐定西北恢收之計先罷征東行省繼遣印璫崔瑩等諸將攻鴨綠江以西八站破之又遣柳仁雨貢天甫金元鳳等收復雙城等地 太白逸史)

雙城摠管府를 탈환한 것은 高麗이다.

이상한 것은 東寧府 수복만 빠져 있는 점이다. 東寧府(西北地方) 탈환을 목표로 그 전단계로 征東行省을 혁파 했는데, 이유도 없이 직전에 東寧府 수복만 포기하고 훗날로 미룬다. 東寧府 역시 이 당시 탈환했다. 이 기사는 恭愍帝 5 년(1356)의 기사가 아니다.

雙城摠管府는 1356 년에 격파하고, 東寧府는 1370 년에 와서야 격파했다? 무려 14 년이나 시차가 발생한다. 雙城摠管府를 격파할 전력이 있었으면 東寧府도 격파할 수 있다. 雙城摠管府는 蒙汗의 皇城까지 옆에 있는 黃河 하류 이북 이지만, 東寧府는 고작 柴達木盆地에 불과하다. 1356 년이 아니라 1368 년에 雙城摠管府를 격파한 高麗軍에 놀라 蒙汗의 順帝가 도망갔던 것이다.

1 차 날조사에는 遼水가 桑乾河였다. 遼西 즉 桑乾河 이서에는 雙城摠管府가 있고, 遼東에는 東寧府가 있었다고 날조했다. 蒙汗 수도 현 北京(大都)은 桑乾河 東岸에 있다.

李成桂는 현 北京의 順帝를 朱元璋이 내쫓을 시간을 벌어 주고자 12 년 앞서서 雙城摠管府를 격파 했다고 날조했다. 그 덕에 朱元璋은 종이 위에서나마 1368 년에 蒙汗의 수도 근처에도 가지 않고도 심약(?)한 蒙汗의 順帝를 내쫓을 수 있었다.

그러나 實史에서는 桑乾河 이동도 雙城摠管府였다. 大都는 雙城摠管府 안에 있었다. 雙城摠管府는 黃河 하류 이북에서 百濟長城 이남 까지다. 桑乾河를 기준으로 百濟長城 이남 일부는 蒙汗 땅, 일부는 高麗 땅으로 하지 않았다. 長城은 장식물이 아니라고 했다. 雙城摠管府는 百濟長城 이라는 장애물에 의해 서쪽과 북쪽으로 부터 高麗의 침공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발해만 일부까지 잠식한 雙城摠管府가 明의 날조사 에서는 桑乾河 이서로 축소된다. 그래야 蒙汗의 수도가 무사할 수 있으니까. 雙城摠管府를 격파 하면서 고작 강 하나를 사이에 둔 蒙汗의 수도를 공격하지 않은 이유로 東寧府에 의해 방어되고 있다고 날조한 것이다. 雙城摠管府를 탈환한 高麗가 順帝가 있는 날조 東寧府 까지 탈환하면 안되니까, 紅巾賊의 침입을 받고, 그 결과 恭愍帝는 종이 위에서 몽진까지 떠나야 했다.

順帝를 내쫓는 것이 목표 이어야 할 紅巾賊이 우리나라를 침입하는 것으로 목표가 바뀐 것이다. 順帝가 雙城摠管府를 격파하는 高麗軍에 놀라 도망갔던 얘기는 紅巾賊에게 그대로 써먹었다.

淸은 지명을 확대 시키고, 李氏朝鮮은 지명을 축소 시켰다. 李氏朝鮮은 상실한 땅을 三國과 高麗의 무능으로 덮어씌운 것이다. 그래서 李氏朝鮮이 영토를 상실할 때마다 우리나라의 강역은 자꾸만 축소되어 갔다. 李氏朝鮮이 韓半島로 줄어들자, 韓半島에 東寧府, 雙城摠管府, 耽羅摠管府까지 두었다던 蒙汗이 정작 동북아 까지 부풀려진 中土는 방치한 셈이 되었다.

高麗가 1368 년에 雙城摠管府를 격파 하면서 順帝를 쫓아냈다. 恭愍帝는 “이와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간파해서 먼저 蒙汗의 年號 사용을 정지하고 蒙汗의 영향을 받아 제정한 관직명을 개정”한 것이 아니다. 대대로 蒙汗 여자가 太后로 있으면서 高麗를 흔들 때도 高麗의 年號와 官制를 사용했다.

소종(昭宗) 역시 朱元璋의 군대에 쫓겨 도망친 것이 아니고, 高麗軍에 쫓겨났다. 昭宗이 蒙古高原으로 달아났다는 것은 高麗가 長城 이북 땅까지 모조리 되찾았다는 증거다. 恭愍帝 때는 “高麗의 가장 암울한 시기”가 아니고, 高麗가 天子國 으로서의 위상을 되찾은 시기다.

蒙古는 蒙汗과 사한국(四汗國)으로 분할되고 서로 다투었으니까, 昭宗은 중앙아시아로 갈 수가 없었다. 蒙古高原은 원래 高麗 땅이니까, 高麗軍이 추격해올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昭宗은 서신을 보내 蒙古高原에 있어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했고, 恭愍帝는 좋다고 했다. 昭宗이 恭愍帝에게 혈족이자 인척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雙城摠管府 격파를 12 년 씩이나 앞당겨야 했을까. 1 년이나 2 년 쯤 앞당겨도 되는데? 1368 년에 격파한 雙城摠管府를 12 년이나 앞당겨 격파 했다고 날조한 것은 李成桂의 父 子春이 雙城摠管府 격파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고 날조하기 위해서였다. 李子春이 高麗로 귀화하기 전에 雙城摠管府를 격파해야 李子春의 협력이 절대적이라고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高麗는 東寧府도 탈환했다. 1369 년 12 월에 恭愍帝는 병력을 보내 東寧府를 격파하고 항복을 받았다. 세상의 어떤 나라가 기껏 되찾은 땅을 “추위와 기근으로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해 부근 주민들에게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한단 말인가.

시베리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단 말인가. 독일군은 미쳤다고 1, 2 차 대전 때, 러시아, 소련을 침공했단 말인가. 노르웨이, 핀란드도 세계 대전의 전화를 피해가지 못했다. 러시아-핀란드 전쟁(1939∼40)에서 소련은 수십만의 사망자를 냈는데, 대부분이 동사자 이거나 눈과 빙판 위에서의 이동이 서툴러서 핀란드인에게 살해 당했다. 그래도 소련은 끝내 그 추운 핀란드 영토를 할양 받았다.

東寧府가 있던 땅도 慈烏支 한웅 이래로 우리나라 영토다. 추우면 얼마나 춥고, 기근에 시달리면 얼마나 시달린단 말인가. 自國 땅의 기후도 모를 수 있는가. 高麗軍의 출전시기는 12 월 겨울 이므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더구나 李成桂는 1369 년 12 월에 출정해 해를 넘겨 1370 년 11 월에야 東寧府를 격파했다. 1 년이 걸렸다. 다시 말해 高麗軍은 東寧府의 혹한을 견뎌내고 승리했던 것이다.

李成桂는 추위와 기근 운운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濊貊族이다. 東寧府가 있던 柴達木盆地는 濊貊族이 천 년 가까이 살아온 땅이다. 李成桂 역시 高麗에 歸化하기 전까지 살던 땅이다. 李成桂는 雙城摠管府가 아니라 東寧府에서 살았다. 더구나 李成桂와 朱元璋이 합의한 날조 東寧府는 桑乾河 以西에 있었다. 桑乾河 이서의 현 北京은 1 월 평균기온이 ―5 ℃에 불과하다. 柴達木盆地는 이보다 훨씬 추워서 연평균기온이 -5~8 °C, 1 월에는 -18.2~ -7°C이다.

東寧府 격파에 병력을 1 만 5000 밖에 투입하지 않았다는 것도 거짓이다. 고작 7500 명을 지휘하는 장수를 원수로 삼았다는 소리다. 高麗는 언제나 대군으로 전투개시 전 부터 적을 압도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徐熙가 거란을 침공할 때도 80 만 대군이나 이끌고 갔다. 고작 1 만 5 천으로 공략할 수 있는 곳을 高麗가 백 년 넘게 방치했단 말인가. 高麗가 언제나 대병력을 동원하는 관례 때문에 遼東征伐을 하러 갔다던 李成桂가 회군하여 대병력을 배경으로 江陵帝를 폐위 시켰던 것이다.

(1370) 윤 3 월 己未 北元 요양성(遼陽省)의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왕우승(王右丞) 등은 요양(遼陽)이 본래 고려의 땅이라는 뜻에서 우리나라에 투항 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이를 청해왔다. 이때에 조정의 의견은 통일되지 못하였고 국사는 다난했다. 그렇지만 임금은 정몽주(鄭夢周)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촉(蜀)을 평정함을 축하 하도록 하였다. 김의(金義)는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을 죽여 버렸지만 조야가 모두 시끄러워, 이 일을 말하려는 자는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사실을 회답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유익(劉益) 등은 마침내 금주(金州), 복주(復州), 개평(蓋平), 해성(海城), 요양(遼陽) 등지를 가지고 명나라에 가서 붙게 되었다(閏三月己未北元遼陽省平章事劉益王右丞等以遼陽本高麗地欲歸附我國遣人來請時廷議不一國事多難然上遣鄭夢周如明賀平蜀金義殺明使蔡斌朝野騷然其欲言事者幾希以故未卽回答劉益等遂以金州復州蓋平海城遼陽等地歸附于明 太白逸史)

바로 東寧府에 대한 날조기사다. 거짓이라는 것은 海城에서 드러난다. 海城은 薩水(丹江) 이북에 있었다. 高句麗 때만 해도 長安城에 이은 또 다른 平壤城이다. 遼西 조차 8 站을 공격하여 우선적으로 수복 했는데, 海城은 長安城 바로 지척이므로 太祖 王建 때 부터 高麗의 영토였다.

요양이라는 지명 역시 원래는 산서성의 요라는 곳에 있다가 다시 난하의 동쪽으로 옮겨와서 지금은 현 요녕성의 요하 동쪽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실증 한단고기)

遼陽은 中奴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을 때 山西地方 즉 岷江 너머에 있었던 것이다. 남후(藍侯)가 백성들을 海垈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고(揆園史話), 大震國 武皇帝가 원 黃河[오주목(烏珠牧)의 동쪽 10 리에서 황수(潢水)를 굽어본다(契丹定界烏珠牧東十里臨潢水)]에서 거란과 경계를 정했다(太白逸史)는 사실에서 우리나라 영토가 대부분의 기간 동안 金沙江 이서 내지는 金沙江 이동까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柴達木盆地 이서에 있던 遼陽은 高麗의 영토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東寧府는 黃河 이동까지 포함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요양이 본래 高麗의 땅이라는 뜻에서 우리나라에 투항하려고(遼陽本高麗地欲歸附我國)” 한 것이 아니라, 1370 년 11 월 遼陽城이 함락되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는 恭愍帝 20 년(1370)으로, 이미 雙城摠管府를 탈환하고 蒙汗의 順帝도 도주하다 죽고 長城 이북도 수복했다. 昭宗이 蒙古高原으로 쫓겨나 蒙汗의 명맥을 잇고 있는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蒙汗은 東寧府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高麗軍의 공격을 받자, 東寧府 平章事 劉益과 王右丞은 별 수 없이 高麗에 항복했던 것이다.

高麗에 귀속된 東寧府를 明에 주자니, 高麗를 한없이 작은 나라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이때에 조정의 의견은 통일되지 못하였고 국사는 다난했다. 그렇지만 임금은 정몽주를 明나라에 파견하여 蜀을 평정함을 축하하도록 하였다. 김의(金義)는 明나라 사신 채빈(蔡斌)을 죽여 버렸지만 조야가 모두 조용할 뿐, 이 일을 말하려는 자 거의 없었다(時廷議不一國事多難然上遣鄭夢周如明賀平蜀金義殺明使蔡斌朝野騷然其欲言事者幾希).”고 한 것이다.

蒙汗은 高麗가 내쫓고, 중국 대륙은 明이 차지한다? 이런 등식은 성립할 수 없다. 종이 위에서 나마 紅巾賊이 順帝를 내쫓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날조 遼東은 물론이고, 이서도 李氏朝鮮 땅이니까, 해결책으로 明은 종이 위에서나마 東寧府를 격파하고 아무 이유 없이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포기했다. 그래야 李成桂와 李氏朝鮮이 고마운 “明을 성실 근면하게 섬“길 명분도 생기지 않겠는가.

그래도 李成桂가 장수가 되어 공략한 지역 이므로 李氏朝鮮은 李成桂의 무공을 자랑 하기로 했다. 그 결과, 東寧府를 평정하기는 했으나 “추위와 기근으로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부근 주민들에게 高麗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回軍 하였다”로 당치도 않는 이유로 낙착된 것이다.

高麗가 東寧府와 雙城摠管府를 다 격파 했으니까, 明은 東寧府와 雙城摠管府에 대한 권리가 없다. 東寧府와 雙城摠管府 땅은 원래부터 高麗 영토였다. 高麗가 東寧府와 雙城摠管府를 격파 했다는 것은 高句麗長城 이북도 회복했다는 말이다. 高麗의 長城 이북 진출을 방해할 장애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天山北路에 오고타이汗國에 이어, 차가타이汗國이 있었다고 하지만, 高麗가 長城 이북을 회복 하면서 여기만 몽고 땅으로 남겨 두지는 않았다. 天山 방면의 동부 한가(汗家)와 서부 투르키스탄(Turkistan)의 서부 汗家로 분열? 沃沮의 예로 보듯이 역사날조를 위해 필요하면 얼마든지, 동, 서, 남, 북으로 쪼개서 날조하는 것이 中奴의 수법이다. 北燕, 後燕, 西燕, 前燕, 南燕...... 필요 하다면 얼마든지 동, 서, 남, 북, 전, 후를 만드는 것이 中奴의 수법이다.

紅巾賊은 蒙汗의 順帝를 내쫓으려면, 長城 이북으로 가야 한다. 타림분지(塔里木盆地)를 수비하는 거란이나 柴達木盆地를 수비하는 濊貊族을 우선 격파해야 하는 것이다. 현 北京 까지는 먼 거리니까, 타림분지 보다는 柴達木盆地를 격파하는 작전을 누구라도 선호할 것이다. 紅巾賊은 1351 년 부터 일어났다고 했는데, 東寧府는 그 후로 20 년간이나 온전했다. 長城 이북을 따라 현 北京까지 침입해야 하는데, 엉뚱하게 長城 이남의 高麗 영토를 침입한 것이다. 西鴨綠江 이서로 침입해야 하지만, 8 站 조차 무사했다. 그런데도 蒙汗의 順帝는 제풀에 겁먹고 도망쳐 다니다 죽었다고 우긴다. 紅巾賊은 蒙汗으로 간 적이 없다. 그러나 날조사 에서는 宋이 揚子江 이남에서 망했고, 黃河 이남도 蒙汗 땅이었다.

홍건적(紅巾賊). 붉은 수건을 맨 도둑이라는 뜻이다. 農民叛亂 이라고 우기는데, 농민보고 도둑이라 할까. 그리고 中土는 자연상태에서 농사가 불가능한 연강수량 450mm 의 건조기후대라서 농민이 별로 없다. 유목민이나 있을까. 紅巾賊이 농민이든, 유목민이든, 도둑이든 중요한 것은 아니다.

대체 누구의 전력이 우세할 것인가. 정규군인 高麗軍인가, 지리멸렬한 도적 떼 紅巾賊인가? 高麗軍의 전력이 막강해서 蒙汗을 소멸 시키고 高麗의 영토를 회복한 것이 아닌가. 티벳고원 북부에서 高麗를 침입 하려면, 遼西의 8 站 부터 격파해야 하는데, 8 站은 恭愍帝가 1368 년에 이르러 격파했다. 紅巾賊은 高麗 조차 침입하지 못한 것이다. 恭愍帝는 종이 위에서 몽진을 떠났던 것이다.

◀ 포은 정몽주 초상


그러면 紅巾賊은 어디서 무엇을 했던가. 티벳고원 북부를 휘젓고 다녔다. 티벳고원에는 明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元나라는 매우 쇠폐하여 吳王 장사성(張士誠)은 강소(江蘇)에서 기병하였고, 여러 가지 일로 소란하였다(元室極爲衰弊吳王張士誠起於江蘇事多騷亂矣).” 恭愍帝가 “정몽주(鄭夢周 1337~1392))를 明나라에 파견하여 촉(蜀)을 평정함을 축하하도록 하였다(上遣鄭夢周如明賀平蜀 太白逸史)."는 날조기사도 中土에 雨後竹筍으로 나라가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蒙汗이 高麗軍에 쫓겨나자, 티벳고원 북부 에서는 中奴가 일어나 너도 나도 나라를 세우려고 혈안이었던 것이다.

高麗가 蒙汗을 내쫓고 국토를 회복한 여파가 中土의 혼란상으로 나타났다. 朱元璋이 일어나 일시에 中土를 통일한 것이 아니다. 紅巾賊은 도적 떼다. 도적은 사회가 혼란할 때 출현한다. 蒙汗이 빠져나간 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도적 떼를 앞세워 中土를 분할한 것이다. 그 좁은 땅에 너도 나도 왕이라고 일어나 다투는 와중에 高麗 침입은 꿈도 못 꾼다. 蒙汗도 高麗가 무신들의 권력투쟁에 정신없는 틈을 타서 高麗 영토에 자국의 군정기관을 설치했다. 朱元璋과 張士誠(1321~1367) 등이 中土를 차지하기 위해 정신없이 싸울 당시 국토를 회복한 高麗軍은 최강의 군대로 거듭나고 있었다.

朱元璋이 黃河 이남으로 中土의 지명을 밀어 냈으니까, 紅巾賊은 黃河 이남에서 활약한 것이 되었다. 淸이 遼水를 난하(灤河), 현 遼水로 밀어 내면서 黃河 이남의 지명까지 함께 밀어내자, 紅巾賊도 덩달아 한반도 근처까지 침입한 셈이 되었다. 紅巾賊이 종이 위에서 韓半島 까지 유린한 것은 雙城摠管府를 격파한 高麗가 막대한 타격을 입고, 恭愍帝가 몽진도 떠나야 蒙汗을 내쫓지 못하기 때문이다.

紅巾賊은 1368 년 이전에는 존재 하지도 않았다. 紅巾賊은 高麗軍이 雙城摠管府를 격파하자 蒙汗이 蒙古高原으로 쫓겨난 것을 기화로 티벳고원 북부를 차지하기 위해 일어난 도적 떼에 지나지 않았다. 中族들에 대한 억압 및 차별 정책에 분연히 봉기한 것이 아니라 땅 욕심에 中奴끼리 싸워댄 것이다. 中奴들은 蒙古의 억압 및 차별 정책을 무던히도 참고 견뎌내고, 蒙古의 멸시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티벳고원 북부에서 서로 싸운 무리 중 하나를 紅巾賊으로, 상대방을 高麗軍으로 설정했다. 紅巾賊이 朱元璋처럼 끝까지 살아 남았는지도 의문이다. 티벳고원이 평정될 때 까지 한 쪽은 紅巾賊, 다른 쪽은 高麗軍으로 날조하면 그만이다. 지명을 확대된 공간으로 밀어내면, 지리멸렬한 도적 떼조차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날조할 수 있는 것이다.

紅巾賊은 티벳고원을 휘젓고 다녔지만, 날조사에서 보듯이 매번 궤멸됐다. 이는 紅巾賊이 朱元璋이 이끄는 도적 떼가 아니거나, 朱元璋이 수세에 몰렸지만, 李成桂가 漢水 이남을 준다고 하자, 단번에 전세가 역전됐다는 뜻이다. 티벳고원 북부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5300 년 만에 차지했다. 黃河 이남을 약속받자, 朱元璋 아래로 모여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明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倭寇가 침범할 염려가 있다? 高麗가 明을 공격하지 않으면, 倭寇가 침입하지 않는가. 또 倭寇가 침범한다 한들, 高麗에 장수가 李成桂 뿐인가. 東寧府를 공격한 병력이 고작 1 만 5 천명 이라면서? 동아시아가 아니라, 韓半島만 차지했다고 해도 그보다는 훨씬 많은 병력을 투입해야 한다.

高麗를 침범한 倭는 게릴라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高麗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倭가 중국 남부나 海上에 있었다면 高麗가 당장 정복했다. 宋의 것이라고 날조한 유물이 對馬島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高麗 시대에 倭寇는 중국 대륙을 침범하지 못했다. 고작 韓半島에서 노략질한 것이다.

李成桂는 倭寇를 격퇴해 국민적 영웅(?)이 됐다고 했지만, 李氏朝鮮을 건국하고 나서도 倭寇는 극성이었다. 李氏朝鮮 때에는 明으로 변한 중국 대륙까지 침범했다. 이도(李祹 : 李氏朝鮮의 世宗이라 불리는 濊貊族)가 倭寇들에게 조공무역을 허락하고 나서야 겨우 없어졌는데, 이후로는 倭寇 침범이 아니라 크고 작은 倭亂이 李氏朝鮮 땅에서 일어났다.

근자에 중국(中國)이 왜(倭)를 정벌한다고 말하니 만약 우리 국경 까지도 전함을 나누어 정박 시킨다면 그들을 지대(支待)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허실을 엿볼까 두렵습니다. 倭는 온 나라가 도적질을 함이 아닙니다. 그 반민(叛民)이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一岐島))에 웅거하여 이 섬들이 우리 동쪽해안에 가까움으로 무시로 침구하여 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죄를 성언(聲言)하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먼저 이 섬들을 쳐서 그 소굴(巢穴)을 전복하고, 또 일본에 글을 보내어 도망한 적을 쇄환(刷還)시켜 귀순케 한다면 倭의 근심을 길이 떨쳐 버리고 중국(中國)의 군사가 이로 인하여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수군은 모두 수전을 잘하여 辛巳年(경효제 7 년 : 날조사의 충렬왕) 동정할 때 몽한병(蒙漢兵)이 주집(舟楫 : 배를 다루는데)에 익숙치 못함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때를 순응하고 바람을 기다려 움직인다면 성공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다만 배는 오래되면 썩고 군사는 늙으면 피로하는 것이며 또 지금 수군이 요역(傜役)에 피곤하여 날로 도망하고 흩어지기를 생각하오니 마땅히 이 기회를 타서 묘책을 결단하여 소탕함이 늦지 아니합니다
(近中國聲言征倭. 若並我境分泊戰艦則非惟支待爲艱亦恐覘我虛實 倭非擧國爲盜其叛民據對馬一歧諸島近我東鄙入寇無時 若聲罪大擧先攻諸島覆其巢穴又移書日本盡刷漏賊使之歸順則倭患可以永除中國之兵亦無因而至矣 今之水軍皆善水戰非辛巳東征蒙漢兵不習舟楫之比 若順時候風而動則易以成功 但船久則朽師老則疲 且今船卒困於傜賦日思逃散宜乘此機決策蕩平不可遲疑 高麗史 列傳 鄭地傳)

高麗 시대에 중국은 倭를 정벌할 수도 없는 것이 고작 티벳고원 북부의 나라이고, 그 당시까지도 揚子江을 오가는 배를 만든 것이 전부이다. 티벳고원 북부에 있던 明의 군사라고 해봐야 고작 紅巾賊이다. 東寧府도 종이 위에서만 공략하고, 高麗 역시 종이 위에서만 침입한 도적들이었다.

高麗 시대에 中國을 中國이라 불렀던가. 이 당시는 華夏族을 漢族으로 둔갑 시키기 전이고, 異民族의 나라를 中國의 왕조로 둔갑시키기 전이다.

高麗는 이미 1019 년에 전함을 이끌고 가서 화포를 앞세워 日本을 정복한 나라다. 쇼유키(小右記)에는 통상을 요구했다고 했지만, 통상 요구야, 19 세기 메국(米國)과 잉글랜드 등이 한 것이고, 속국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미 375 년에 黃海를 건너 韓半島 상륙작전을 실시한 우리나라다. 高麗 말은 우리나라가 水戰이 아니라 海戰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지도 천 년이나 된 시점이다.

高麗軍은 海戰에 능숙해서 1 차 麗蒙遠征 때에도 日本軍과의 전투를 도맡았다.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 에서도 蒙汗軍은 언제나 高麗軍 뒤에 숨어 있다. 高麗軍에 쫓긴 日本軍은 규슈(九州) 다자이후(大宰府 : 奈良)로 후퇴해서 농성전을 펼치며 高麗軍이 물려가기만을 기다렸다.

高麗의 항해술과 조선술이 막강함은 元史에도 나온다.


▲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 중에서



元나라의 전선들은 모두 돌풍에 부서졌으나, 高麗의 전함은 대부분 무사했다


2 차 원정 당시의 기술이다. 침몰한 것은 蒙汗의 배였던 것이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당시) 고려는 대선 300 척을 포함, 900 척의 배를 불과 4 개월 만에 만들어낼 수 있는 고도의 조선술이 있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축적된 기술이 아니었다(역사스페셜 6권)

高麗의 항해술과 조선술은 新羅 에게서 물려 받았다. 新羅는 375 년 당시 중국 동부에서 黃海를 건너 百濟 땅 韓半島를 침공, 성공적으로 교두보를 마련하고, 끝내 百濟를 韓半島 에서마저 구축해 日本에 웅거하게 만든 海上帝國이다.

막강 전함 거북선(龜船)은 李氏朝鮮이 아니라, 高麗가 개발했다. 李氏朝鮮實錄의 太宗 13 년(1413) 2 월 6 일에 “王이 臨津江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倭船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甲寅......上過臨津渡觀龜船倭船相戰之狀).”라 했고, 2 년 후에는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거북선의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左代言卓愼上兵備事宜......其六龜船之法衝突衆敵而敵不能害可謂決勝之良策更令堅巧造作以備戰勝之具愼時知兵曹 上覽之下兵曹).”고 상소했다. 李氏朝鮮 왕조 어디에도 거북선을 개발 했다는 내용이 없다. 거북선은 李氏朝鮮이 만든 전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麗蒙聯合軍의 日本遠征 후 高麗가 해상활동을 금지 당했다면, 조선술과 항해술도 퇴보하고 만다. 90 년이나 배를 만들지 못했다면, 거북선 같은 우수한 전함도 잊혀질 수밖에 없다. 蒙汗은 운좋게 高麗 땅을 차지했을 뿐, 高麗의 上國이 아니다. 해상활동을 하라 말라 할 수가 없다. 高麗는 雙城摠管府와 東寧府, 長城에 의해 중국 대륙과 동북아가 분단 되었기 때문에 海上을 통해 韓半島를 왕래했던 나라다.

日本 원정 당시 高麗軍과 蒙汗軍(蒙漢軍)은 각자의 배를 만들었다. 그래서 元史에 “元나라의 戰船들은 모두 突風에 부서졌으나, 高麗의 전함은 대부분 무사했다.”고 한 것이다.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에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하고 高麗의 배가 아니다. 무엇보다 蒙古襲來繪詞는 복제본이다. 壬辰倭亂까지 일으킨 倭奴가 거북선을 모를 리 없다. 온갖 것을 다 날조한 倭奴가 蒙古襲來繪詞는 그대로 두었다고 보는가.

李氏朝鮮은 어떻게 저 기사를 창작했을까. 우리나라 역사는 중국이 가졌다. 티벳고원 북부에 있는 中奴의 역사를 高麗史로 둔갑 시키면 高麗는 中奴의 나라로 변하고 만다. 中國史를 덧입히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뼈대는 있어야 한다. 李氏朝鮮史를 高麗史로 둔갑시킨 것이다. 李氏朝鮮은 對馬島를 정벌했다. 그때의 상황을 나누어 高麗史에 실었던 것이다. 李氏朝鮮史는 지지리도 못난 역사니까, 연대와 등장인물만 바꿔 그대로 베끼면, 高麗도 지지리 못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때 전라도와 경상도는 왜구(倭寇)의 소굴이 되었으며, 동북면은 철령위 문제로 근심스러웠으며, 경기 교주 양광도는 성을 수리하느라 곤경을 겪고 있었고, 서해 평양은 사신을 영접하느라 지쳤는데, 거기다가 징병을 하니 팔도가 소란하고 농사를 짓지 못해 모든 백성이 그것을 원망하였다(是時 全羅慶尙二道爲倭寇巢穴 東西北面方憂割地 京畿交州楊廣三道 困於修城 西海平壤道二道 迎候西獵 加以徵兵 八道騷然 民失農業中外之怨甚 高麗史 列傳 137 辛禑)

慶尙道와 全羅道가 韓半島에 있었거나, 중국 대륙에 있던 행정명을 역사날조 차원에서 韓半島로 옮겼을 것이다. 慶尙道와 全羅道가 倭寇의 소굴이 되었다는 것 역시 李氏朝鮮 초의 상황으로 추정된다. 즉 李氏朝鮮의 역사를 高麗의 역사로 각색한 것이다.

黃河 하류 이북 東北面은 雙城摠管府가 있었던 자리이고 鐵嶺衛도 있었다. 그러나 遼東은 嘉陵江 이동이다. 언제나 高麗의 영토였다. 平壤은 長安이자 開京이다. 西海는 타림분지다. 타림분지에서 사신을 맞았다고? 中奴조차 金沙江을 따라 내려왔다. 고작 八道? 西海 平壤, 八道를 보더라도 高麗의 영토를 韓半島로 축소했음을 알 수 있다.

李成桂는 韓半島로 遷都하고, 영토가 줄어든 변명이 필요했다. 遼東征伐이라 했지만, 실은 티벳고원 북부를 정벌하러 출전한 것이다.

紅巾賊의 수 차에 걸친 침입으로 高麗도 막대한 타격을 입어 국운의 쇠퇴를 가져 왔다고? 종이 위에서 침입한 것도 국운의 쇠퇴를 가져오나? 國運이 흥했기 때문에 高麗는 雙城摠管府, 東寧府도, 八站도 철폐하고, 明을 정벌하러 티벳고원 북부로 출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紅巾賊의 침입으로 “高麗도 막대한 타격을 입어 國運의 쇠퇴를 가져”와야 李成桂의 高麗 皇位 찬탈이 정당화된다. 그냥 놔두어도 망할 왕조라서 李成桂가 구국의 신념으로 高麗 왕위를 찬탈 했다고 해야 李氏朝鮮 건국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마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자들이 입에 침바르며 하는 소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

李成桂는 배달사와 朝鮮史를 말살하고, 동아시아의 天子國 高麗를 한낱 미개 中奴의 제후국으로 전락시킬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를 철저히 말살했다. 그런 李成桂이니 만큼 자신의 행적은 과대포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李成桂가 온갖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면, 高麗가 어떻게 동아시아를 지배한 대제국이 될 수 있었단 말인가. 李成桂의 전공을 늘리기 위해 종이 위에서나마 항해 능력도 없는 倭寇가 중국 대륙까지 침범해야 했고, 紅巾賊이 극성을 부려야 했던 것이다.

高麗 末에 우리나라가 혼란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紅巾賊과 倭寇가 침입해서가 아니라, 李成桂가 韓半島로 천도하고, 高麗의 지배층이 줄줄이 韓半島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李成桂가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권모술수로 출세했다는 사실은 東寧府 공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성계는 1369 년 12 월에 출정해 1370 년 11 월에야 東寧府를 격파했다고 했다. 1 년이나 걸린 것이다. 柴達木盆地는 李成桂의 고향이고, 누구보다 지리를 잘 아는데도, 제 동족조차 휘어잡지 못해 1 년이나 악전고투한 것이다. 그것도 蒙汗 황제가 이미 몽고고원으로 내쫓긴 상황에서. 李成桂가 얼마나 무능한지 알 수 있다. 고작 柴達木盆地를 정복하는데 1 년 가까이 미적거리면, 누구라도 司令官 교체를 생각할 것이다.

李成桂를 東北面元帥, 지용수(池龍壽)를 西北面元帥로 삼아 東寧府를 치게 했다? 東寧府가 西北面에 있는데, 무슨 東北面元帥? 1370 년 11 월에 池龍壽와 합세해 遼陽城을 함락시켰다는 말은 결국 李成桂는 遼陽城 함락에 실패하고 사령관이 교체돼 池龍壽가 東寧府를 탈환했다는 뜻이다. 池龍壽가 새로운 西北面元帥가 되자 東寧府를 함락 시켰다고 날조한 李成桂는 東北面元帥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東寧府를 공략하는 군대의 사령관에게 西北面元帥의 직함을 준 것은 雙城摠管府를 격파하는 군대와 동시에 출전했기 때문이다. 雙城摠管府 정벌군 사령관은 東北面元帥, 東寧府 정벌군 사령관은 西北面元帥라 한 것이다. 다시 말해 李成桂는 1369 년 12 월도 아니고, 雙城摠管府를 격파한 1368 년에 東寧府로 출전했다. 2 년이 지나도록 東寧府를 격파하지 못하자 池龍壽가 파견된 것이다.


▲ 최영장군 사당(崔瑩將軍 祠堂)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150 에 소재하고 있다.

遼東征伐로 날조된 明 정벌 당시 八道都統使 崔瑩(1316~1388)을 平壤에서 督戰케 하고 조민수(曺敏修, ?~1390)를 左軍都統使, 李成桂를 右軍都統使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우선 高麗의 행정구역은 八道 이상이다. 무엇보다 總司令官 崔瑩이 平壤城에 남아서 遼東征伐을 지휘 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韓半島 平壤은 더욱 더 말이 안된다. 오늘날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이상, 총사령관은 戰場에 있어야 한다. 崔瑩은 정벌군과 함께 출전한 것이다. “鴨綠江을 건너 威化島에 주둔했을 때 이유 없는 도망병이 길에 연이을 정도로 생겨났다(庚辰左右軍渡鴨綠江屯威化島亡卒絡繹於道禑令所在斬之不能止 高麗史 辛禑列傳)”? 威化島에서 李成桂가 叛亂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威化島에서 李成桂가 주저앉아 진군을 방해한 것이다. 이미 사전계략에 의해 曺敏修는 李成桂에게 넘어갔고, 李成桂는 威化島에서 崔瑩의 지휘권을 빼앗은 것이다.

티벳고원 북부를 제외한 동아시아를 전부 차지한 高麗는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주변국들을 위압하는 경향이 있었다. 거란을 정벌할 때도 徐熙는 80 만 대군을 이끌었다. 明 정벌군은 최소 수십 만 이었다. 崔瑩을 무력화시킨 李成桂는 곧바로 대군을 되돌려 高麗의 황성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李成桂는 江陵帝(날조사의 禑王)를 신돈(辛旽 ?~1371)의 자식이라 소문내고, 자신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변신했다. 江陵帝를 辛旽의 자식으로 매도 하고도 江陵帝의 아들을 황제로 옹립했다. 일단 皇統을 이어받지 못했다고 소문내면, 더 이상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유전자 검사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심 때문에 아무도 복종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창왕(昌王 1380~1389)은 9 살에 황위에 올랐다. 아무리 대제국이라 하나, 9 살 짜리가 권력을 장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듬해 폐위되고 살해 당했다. 공양왕(恭讓王 1345~1394)은 20 대 神宗의 7 대손으로 황실의 먼 방계혈족이다. 당연히 모든 것이 李成桂의 독단으로 이루어졌다. 이 당시 李成桂가 실질적인 高麗의 황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1270 년 雙城摠管府를 설치한 이후에야 蒙古는 간신히 수도를 현 北京에 정할 수 있었다. 蒙古는 서양도 정복하고, 서아시아도 정복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는 黃河 이북만 차지하고 현 北京(大都)에 수도를 정했다. 長安은 여전히 高麗의 수도였고, 高麗는 黃河 이남과 동북아의 주인이었다. 朝鮮의 계승국으로 자처 하면서도 蒙古는 長安조차 차지하지 못했다. 서양과 서아시아를 다 놔두고 현 北京에 안주했다. 그리고 高麗 皇帝를 사위로 삼는 것을 가문의 영광, 아니 나라의 영광으로 알았던 것이다.

蒙汗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 Istanbul)을 놔두고 사막에 둘러싸여 살았던 것은 현 北京에 있어야 세계 최고의 문명국 高麗의 온갖 문물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蒙古人에 버금가는 준지배자로서의 특권을 주었고, 문무 각 방면에서 重用”한 것은 高麗人이지, 色目人이 아니다. 色目人이 문명인이라서 蒙汗을 이끈 주역이라면, 몽한이 유럽에 있어야지, 중국 대륙에 있었겠는가. 유럽이 문명화된 땅이라면, 몽고는 동유럽에서 정복을 멈추고, 高麗 땅에 주저앉지 않았다.

유럽이 문명화된 땅이라면, 蒙汗의 附馬가 되는 것은 高麗 皇帝가 아니라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왕조의 프리드리히 2 세(Friedrich II Stupor Mundi 1215~1250)였다. 이 당시는 합스부르크( Habsburger)家도 소영주에 지나지 않았고, 호엔쫄레른(Hohenzollern)도, 로마노프(Romanov)도 등장하기 전이었다. 플랜태저넷(Plantagenets)도 소영주로 잉글랜드 자체가 유럽에서도 2 류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반해 高麗의 시조 王建의 족보조차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나오는 王建은 前蜀이 아니라 高麗의 王建이다. 우리나라 족보책까지 하나 남김없이 華夏族의 것으로 바꿔치기 했던 것이다.

이 당시 서유럽은 미개지 가운데 하나였다. 아라비아인들 조차 중국 대륙에 왔다가 韓文明에 감탄해 그냥 눌러 살았다. 유럽이 문명화된 땅이 아니라는 증거는 로켓 발명만 봐도 극명해진다. 최초의 로켓 走火는 高麗 初에 발명했고, 13 세기 초에는 이미 中奴(宋이 아니고 金汗)에서 蒙古로 그 기술이 전수됐다. 印度마저 1750 년대 말, 淸이 개량 없이 그대로 사용한 高麗 초기 로켓(? 혹은 高麗의 走火에서 中奴가 모방한 또 다른 로켓)인 火箭을 모방했다. 서양은 19 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잉글랜드의 콩그리브(William Congreve 1670~1729)가 인도에 전수된 高麗의 로켓을 모방해서 처음으로 로켓을 만들었다, 高麗가 로켓을 만든 지 무려 9 백년이나 지나서.

夫餘는 夫餘 스스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漢族이 夫餘에 쳐들어와서 점령해 버렸고, 高麗는 高麗대로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蒙古가 高麗에 쳐들어와서 차지해 버렸다? 만약 그때에 이보다 먼저 夫餘에 夫餘다움이 고스란히 있었다면 漢人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고, 高麗에 高麗다움이 있었다면 蒙古사람들은 蒙古로 돌아갔을 것이다?(嗚呼痛矣夫餘無夫餘之道然後漢人入夫餘也高麗無高麗之道然後蒙古入高麗也若其時之制先而夫餘有夫餘之道則漢人歸其漢也高麗有高麗之道則蒙古歸其蒙古也 檀君世紀 序)

夫餘는 漢寇를 물리쳤고. 高麗도 雙城摠管府와 東寧府 외엔 빼앗긴 것이 없고 그마저 다 수복했다. 夫餘는 夫餘다움이 있었고, 高麗도 高麗다움이 있었다.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은 朝鮮다움이 당연히 없었기에 國號만 베끼고, 우리나라 속국에게 스스로 속국 노릇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