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영광을

정우산기 2007. 3. 30. 13:35

 

) 자오지 한웅은 중국 대륙의 서토를 정복했다

천문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百濟와 新羅가 건국 초부터 日蝕을 발해만과 揚子江 유역에서 관측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百濟와 新羅가 어디서 옮겨온 나라가 아니라, 渤海灣과 揚子江 유역에서 건국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百濟가 갈라져 나온 高句麗 역시, 中國 대륙에서 건국할 수밖에 없었다. 高句麗의 초기 일식이 중가리아분지 및 大興安嶺山脈 이북 에서만 관측되는 것은 高句麗의 일식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三國史記에 기록된 高句麗 일식은 高句麗가 관측한 전체 일식의 1~2 %에 지나지 않는다.

遼水는 우리나라의 국경이 아니었다. 遼西까지도 우리나라 땅이었기 때문이다. 朝鮮時代 遼水가 현 遼水라면, 三國이 어떻게 중국 대륙에서 건국할 수가 있는가. 朝鮮時代에는 遼水가 동북아 끝에 있었다가, 三國時代에는 遼水가 중국 대륙 끝으로 끌려갔다는 것인가. 그 후 또 다시 遼水가 동북아 끝으로 밀려나고? 그러나 朝鮮의 일식기록도 중국 대륙에서 관측했다.

三國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한 것은 三國 이전의 국가가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이다. 白山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 神市가 중국 대륙에 있었을 경우, 동북아의 문명이 중국 대륙보다 앞섰다는 『列國時代의 갑옷-朝鮮 갑옷의 발전에 관한 시론』이 성립할 수 없다. 배달의 중심지는 동북아에 있다가 중국 대륙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 청이 만든 날조 여지전도



우리나라가 중국 대륙으로 중심지를 옮겨간 시기는 배달 14 世 慈烏支 桓雄 때다. 우리나라는 배달 말기부터 중국 대륙을 중심지로 삼았다.

4 천년 전 ...... 현재의 호북, 호남, 강서 등지는 이미 묘족(苗族)들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黎)이며, 군주는 치우다(한단고기, 임승국)

왕동령(王桐齡)의 中國民族史에 나오는 말이다. 임승국 선생은 바로 아래에서 “慈烏支 桓雄인 치우(蚩尤)를 군주로 하는 구려국(九黎國)의 백성들을 苗族 혹은 유묘(有苗), 三苗라고 하며 현대의 苗族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九黎가 苗族의 나라라면, 漢族에 정복됨으로써 九黎 아닌 다른 나라가 되어야 한다.

정복자는 慈烏支 桓雄이었다. 임승국 선생의 해석 대로라면, 우리민족은 원래부터 중국 대륙에 살고 있었고, 中奴가 들어와 우리민족을 정복한 것이 된다. 그러나 王桐齡의 글은 문맥상 으로도 중국에 漢族이 들어와 苗族을 정복한 것이 九黎다(九黎는 배달의 별칭이고, 蚩尤는 慈烏支 桓雄의 별칭이다)

우리민족은 韓(漢)民族이지, 苗族 혹은 有苗, 三苗가 아니다. 중국도 東夷族이라 불렀을 뿐이다. 훗날 明이 韓國史와 中國史를 바꾸면서 秦始王 呂政(秦始王은 呂不韋의 자식임)이 우리민족을 濊貊族 이라고 했다고 날조한 것이 전부다. 하나의 종족을 두고 온갖 명칭을 다 갖다 붙인 것은 濊貊族 밖에 없다. 민족명은 아무 것이나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과 관련 있는 것으로 짓기 마련이다. 한국(桓國)에서 시작하고, 그 구성원을 구한(九桓)이라 한 우리나라가 한족(桓族, 韓族, 漢族)이 아니라면, 누가 한족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 당시 중국의 한족(漢族)은 없었다. 날조 역사에서도 중국의 漢族은 漢나라 때 와서야 문헌상에서 창작된 종족이다. 그나마도 문헌상 漢나라는 고작 기원전 202 년에 등장한 나라다.

사람들은 漢이 중국의 漢나라를 가리킨다고 생각 하지만, 본래 漢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 문자가 녹도문(鹿圖文)에서 漢字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을 桓族, 韓族, 漢族이라 번역한 것이다. 漢水, 漢江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은 시대는 달라도 한인(桓人, 韓人, 漢人)이라 불렀다. 北夫餘人도, 高句麗人도, 百濟人도, 新羅人도, 大震國人도, 高麗人도 언제나 한인이었다. 서로를 구분할 때나 高句麗人이고, 百濟人, 新羅人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증 한단고기에는 王桐齡의 글을 아래와 같이 해석했다.

4 천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黎)이며, 군주는 치우다.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가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로 바뀌어 있다. 이 글자 한 자 때문에 문장 전체의 뜻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주 아주 이상한 문장이다. 원래 苗族이 살고 있었고,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 왔는데, 이렇게 해서 생긴 나라는 中國이 아니고, 우리나라라고 한다. 이 나라의 지배자 역시 우리나라 통치자라는 것이다.

정말 王桐齡이 ‘중국의 한족(漢族)’이라는 의미로 썼다면, 苗族이 우리민족 이라는 뜻이라면, 明이 붙인 漢國에 착안하여 중국인이 진출했다고 우긴 것이라면, 문장 서술까지 바꾸어야 한다.

4 천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들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이며, 군주는 치우다. 그 뒤 중국의 한족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대체 중국인이 언제, 어디에서 민족 대이동을 했다는 것인가. 우리민족은 기원전 3898 년에 한웅 거발한(居發桓)이 무리를 이끌고 사백력(斯白力 : 시베리아)에서 黑水와 白山 사이로 이주 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중국인은 민족 대이동을 한 사실이 없다. 원래부터 중국 대륙 한 구석에 살고 있던 종족이다. 그래서 神市本紀에서 “공손헌원(公孫軒轅)이란 자가 있었으니 토착 백성들의 우두머리였다(有公孫軒轅者土着之魁)”고 했던 것이다. 中土人(支那人)은 토착민이 대대로 정복되어 외부 유전자와 섞임 으로써 만들어진 종족이다. 公孫軒轅은 중국이 황제헌원(黃帝軒轅)이라 부르는 인물로 헌구(軒丘)로 유배 보낸 우리나라 사람 公孫의 후손이다.

 

우리나라는 배달 개천 당시부터 중국 대륙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桓因 : 한인) 뒤에 桓雄氏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白山과 黑水 사이에 내려왔다(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 三聖紀全 上篇)."

백산(白山) : 중앙아시아 일대의 天山山脈과 알타이산맥이라는 설과 白頭山이라는 설이 있다. 임승국씨는 白頭山으로 비정 하는데 임승국씨는 『한단고기』에서 “白頭山은 유사 이래로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또 최근 일부에서는 이 白山을 중국 甘肅省의 太白山 이라고 하는 학설을 퍼뜨리는 이도 있으나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白頭山을 빼고 중국의 太白山이 白山 이라고 함에는 보다 확실하고 확고한 근거가 필요한 것이다. 중국 『二十五史』에 보이는 ‘白山’이나 ‘太白’이 의심없이 지금의 白頭山임을 밝혀둔다.”고 말했다 (임승국 선생의 의견을 따른다. 다만 중국대륙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제천의식은 白頭山을 떠나게 된다. 대신 제천을 담당하는 후국을 둔다. 후술한다)

여기서 나오는 黑水도 黑龍江이라는 설과 바이칼호수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있다(편저자는 바이칼호수로 比定한다).

4천년 전 ...... 현재의 호북, 호남, 강서 등지는 이미 묘족(苗族)들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黎)이며, 군주는 치우다.

漢族은 우리민족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王桐齡(중국역사학자)의 글을 읽어보면, 중국 즉 中原에서 한족이 들어왔다고 썼음을 알 수 있다. 慈烏支 한웅 때 中土를 정복 하면서 토착종족인 苗族과 접촉했던 것이다.

◀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치우의 모습 : 이 그림에서도 동두(銅頭)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므로 苗族은 현재의 湖北, 湖南, 江西 등지에 살고 있지 않았다. 李成桂가 揚子江 이남을 朱元璋에게 주었을 때, 朱元璋은 華夏族을 揚子江 이남 전체로 밀어냈다. 苗族들이 현재의 湖北省, 湖南省, 江西省 등지에서 살게 된 것은 겨우 6 백년 밖에 안된다.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苗族과 접촉하게 된 곳은 티벳고원 북부로 우리민족이 진출했다는 얘기다. 이렇게 해서 중국 대륙을 포함, 동아시아를 강역(疆域)으로 한 우리나라 이름이 九黎, 군주는 蚩尤였던 것이다.

“東夷는 대륙의 동쪽에, 華夏族은 대륙의 서쪽에 있다”고 한 史記는 中土(西土)를 대륙이라 바꾼 것이다. 華夏는 中土 토착민의 총칭으로 우리나라의 피지배종족 이었다. 慈烏支 한웅이 정복할 당시 토착민 일부가 中土 서부로 밀려난 것이다. 그러나 토착민이 中土 서부에 있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나라는 배달 5 世 天皇 태우의(太虞儀) 한웅의 아들 태호(太昊) 때부터 中土를 지배하고 있었다.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정복할 당시에도 고신씨(高辛氏)가 中土 서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東夷는 中土로 들어간 太昊와 高辛 등이 中土밖에 살고 있는 同族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 東夷가 中土를 정벌해 회대(淮垈)와 海垈에 눌러 살게 된 것이다. “東夷는 中土의 동쪽에, 華夏族은 中土의 서쪽에 있다” 함은 피지배종족 華夏의 관점에서 본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중국의 남부지방 귀주성(貴州省) 등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인 苗族은 蚩尤氏를 종족의 시조로 여긴다.”(http://bluecabin.com.ne.kr/kyuwon/tasiki.htm 참조). 苗族이 정복된 시기가 4 천년 전인 것으로 보아, 苗族의 시조는 慈烏支 한웅이 아니다. 慈烏支 한웅은 81 명의 친척을 장수로 삼아 中土를 정복했는데, 이들 蚩尤氏들은 中土(淮垈)에 정착했다. 漢族이 진출하자 苗族을 포함한 中土 토착민 일부는 서쪽으로 밀려 났는데, 시간이 흘러 蚩尤氏의 후예가 번성하자 앞서 정착한 淮垈에서 벗어나 더욱 깊숙이 서쪽으로 들어가 苗族들을 지배하고 산 것이다.

“司馬遷의 史記에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다는데 蚩尤가 가장 사납게 굴어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었다. 헌원(軒轅)이 섭정 했는데 蚩尤의 형제가 81 인이 있었다. 이들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였다.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銅頭鐵額)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五丘杖), 도극(刀戟), 태노(太弩)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蚩尤는 옛 天子의 이름이다’라고 했다(司馬遷史記曰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天下莫能伐軒轅攝政蚩尤有兄弟八十一人並獸身人語銅頭鐵額食沙造五丘杖刀戟太弩威振天下蚩尤古天子之號也 三聖紀全 下篇)."

어떻게 형제가 81 인씩이나 될 수 있는가. 람세스 2 세(Ramses II)도 그렇게 많은 아들을 갖지는 못했다. 太白逸史 神市本紀의 ”집안과 종당(宗黨)에서 장수될 만한 인재 81 명을 골라(選兄弟宗黨中可將者八十一人)"가 정확한 기술이다.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졌다(獸身人語銅頭鐵額)” 라함은 갑옷 입고 투구 썼다는 말이다. 中土는 아직도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로부터 4 백년 후인 요(堯) 때 후직(后稷)이 농사법을 가르쳤다. 곡식이 뭔지 몰랐던 華夏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 등의 곡식을 먹는 것을 보고, 쌀알이 꼭 모래처럼 작으니까 “모래를 먹었다.(食沙)”고 한 것이다.

◀ 중국 벽화 속의 치우천황 : 중국의 입장에서 그린 벽화가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던 치우의 모습이다

헌원(軒轅)이 최후의 승자라면, 慈烏支의 위세가 천하에 떨쳐질 수 있는가. 왕동령(王桐齡)도 慈烏支 한웅에 의해 정복된 中土가 우리나라의 일부가 되었다고 했다. 苗族이 살던 땅을 蚩尤가 정복해 九黎에 병합 시켰다고.

 軒轅은 慈烏支 한웅에 패해 도망친 유망(楡罔)을 대신해 섭정했던 것이다. “이때 軒轅이란 자가 있었는데, 楡罔이 패하여 달아나고 蚩尤氏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蚩尤氏에게 대항하여 싸웠다(時有軒轅者聞知楡罔敗走而蚩尤氏爲帝欲代以爲君乃大興兵與蚩尤氏拒戰 揆園史話 太始紀)." 楡罔을 패퇴시킨 후에야 蚩尤氏가 제위에 올랐다는 것은 거짓이다. 慈烏支 한웅은 배달의 통치자가 된 후에 中土를 정복했다. 軒轅은 楡罔이 도망치자, 왕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軒轅 역시 慈烏支 한웅에게 패해서 慈烏支 한웅의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威振天下)” 天子는 軒轅이 아니라 蚩尤였던 것이다.

“蚩尤氏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 되었기에 黃帝氏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撼 黃帝氏亦不得自安 揆園史話)." “軒轅의 무리들은 모두다 신하 되기를 원하며 공물을 바쳤다(軒轅之屬皆稱臣入貢 太白逸史 神市本紀)." “軒轅은 이로부터 편안하지 못하여 그 대가 끊길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했다. 史記에 이르되 (軒轅이) 산을 뚫어 통로를 내며 일찌기 편안히 살지 못하였으며 탁록(涿鹿)의 강에 고을을 옮겼으나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전장(營衛)에서 살았다(軒轅以來世不自安終其世而未嘗安枕而臥史記所謂披山通路未嘗寧居邑于涿鹿之河遷徙往來無常定處以師兵爲營衛 太白逸史 神市本紀)."   三聖紀全 下篇 에서는 "涿鹿의 벌판에서 軒轅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涿鹿之野擒軒轅而臣之)."고 했다.


◀ 태호복희의 초상

태호(太昊 伏羲)조차 中土를 封土로 받았다. 그런데 어째서 慈烏支 한웅은 제후들이 다스리는 中土를 정복 했는가. 시간이 흐르자 제후들이 점차 말을 안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벌’했다. “유망(楡罔)의 정권이 쇠약 하여지니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다(楡罔衰政乃興兵出征 太白逸史 神市本紀)." 李氏朝鮮 중기의 책이라서 그렇다. "楡罔이 정치를 하면서 급하게 모든 읍의 두 백성(이 글 바로 앞에 神農과 少昊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神農과 少昊의 백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神農과 少昊는 楡罔의 부하다)들이 제휴하도록 했으나 떠나는 백성들이 많아져서 세상의 道가 매우 어지러워졌다.(楡罔爲政束急諸邑携二民多離散世道多艱 太白逸史 神市本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기사는 이렇다. “楡罔의 정권이 덕을 잃으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연전연승하고, 적병들을 혼미케 하여 혼란에 빠지게 하고, 헌원(軒轅)의 무리들이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였다면서 湖南, 湖北, 江西 등지만 慈烏支 桓雄이 지배한 九黎(구려, 구리) 땅일 수 있는가. 배달의 통치자 慈烏支 한웅이 湖北, 湖南, 江西 등지만으로 만족했단 말인가.


▲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헌원의 모습



慈烏支 한웅이 고작 湖北, 湖南, 江西 일대만 지배했다면, 어떻게 “천하의 태평을 맹세”할 수 있는가. 중국 문헌에도 慈烏支를 가리켜 천하의 임금이라 했다(蚩尤古天子之號也). 전쟁에서 패한 軒轅은 慈烏支 한웅의 신하가 되었다.

이 때에 자부선생(紫府先生)의 일곱번 신에게 제사 지내는(七回諸神) 역법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왕이 있는곳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고 三淸宮을 세우사 그곳에 살게 하였는데,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 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紫府先生造七回諸神之曆進三皇內文於天陛天王嘉之使建三淸宮而居之共工軒轅倉頡大撓之徒皆來學焉 馬韓世家)

헌원(軒轅)이 일어나자 바로 탁록(涿鹿)의 벌판에 나아가 헌원(軒轅)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고 뒤에 오장군(吳將軍)을 보내어 서쪽으로 고신(高辛)을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軒轅之立也直赴涿鹿之野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神市本紀)

이와 똑같은 글이 원동중(元董仲)의 三聖紀 에도 있다.
헌원(軒轅)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涿鹿)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고신(高辛)을 쳐 공을 세우게 하였다(軒轅之立也直赴涿鹿之野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제곡고신(帝梏高辛)이 黃帝(軒轅)의 증손이라면, 黃帝를 신하로 삼은 기사 바로 뒤에 나올 리가 없다. 서쪽이라 함은 아직 정복하지 않은 中土를 말한다. 高辛만이 아니라, 神農도 끊임없이 나온다. 高辛과 神農은 姓이기 때문이다. 中奴가 五帝라 부르는 인물들은 軒轅의 자손이 아니다.

吳나라는 우리나라의 제후국이다. 吳나라는 慈烏支 한웅이 정복한 中土의 최전방에 위치했다. 高辛의 나라와 접해 있어 吳나라에 침공군을 집결시킨 것이다.

高辛에 대요(大撓), 창힐(倉頡), 神農 등도 가세하여 中土를 나눴다. 軒轅은 티벳고원조차 저 혼자서 지배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吳장군”은 “吳나라의 장군으로”의 오기다. 神市本紀의 “軒轅黃帝가 즉위함에 이르자”는 “黃帝軒轅이 일어나자”의 오기다. 필사하는 과정에서 잘못 적은 것이다.

軒轅은 皇帝가 아니었다. 秦始王 이전에는 皇帝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中奴 스스로 날조하지 않았던가. 皇帝라는 호칭이 三皇五帝에서 한 자씩 따왔다고? 軒轅은 帝位에 오를 수 없었던 인물이다. 中奴의 날조사 에서는 5帝가 모조리 軒轅의 자손으로 나온다.

春秋戰國時代를 통일한 呂不韋의 자식이 도토리 같은 春秋五覇[날조사에 의하면 제(齊)의 환공(桓公), 진(晋)의 문공(文公), 송(宋)의 양공(襄公), 진(秦)의 목공(穆公), 초(楚)의 장왕(莊王)을 말한다]나 戰國七雄(秦,魏,趙,燕,齊,韓,楚)과는 다르다고 뭔가 특별한 것으로 불리고 싶다고 해서 3皇 5帝에서 한자씩 따 皇帝라고 했다나. 그러나 皇帝가 三皇五帝에서 한 자씩 땄다는 말부터가 거짓말이다.

기원 전후로 한자는 이미 2 만자를 넘었다고 했다. 이름에 공통적으로 ‘皇’과 ‘帝’가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그 많은 글자 가운데 어째서 3‘皇’이라고 하고, 5‘帝’라고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皇帝’를 염두에 두고 明 때에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5帝는 軒轅의 자손 이라면서, 皇帝라는 호칭은 3皇 5帝에서 한 글자씩 땄다면서, 炎‘帝’, 黃‘帝’라 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3皇 5帝가 누구인가는 문헌마다 제각각이다. 三皇만 해도 史記에서는 천황(天皇)·지황(地皇)·태황(泰皇)이라 하고, 河圖에서는 天皇·地皇·人皇이라 하고, 尙書大典에서는 수인(燧人)·복희(伏羲)·神農이라 하고, 백호통의(白虎通義)에서는 伏羲·神農·축융(祝融)이라 하고, 춘추운과추(春秋運科樞)에서는 伏羲·여와(女媧)·神農이라 하고, 尙書에서는 伏羲·神農·黃帝라 했다. 五帝도 史記와 世本 등에서는 黃帝·전욱(顓頊)·제곡(帝梏)·堯·舜이라 하고, 帝王世紀에서는 少昊, 전욱(顓頊), 帝梏, 堯, 舜이라 하고, 禮記에서는 伏羲, 神農, 黃帝, 少昊·顓頊이라 하고, 周易에서는 伏羲, 神農, 黃帝, 堯, 舜이라 했다.

모두가 3皇 5帝를 언급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원래 中奴史에는 3皇 5帝가 없다는 의미다. 3皇 5帝 역시 우리나라 역사에서 착안해서 明 때 졸속으로 만들어낸 것이다(한단고기의 三神五帝本紀 참조).

3皇은 여러 황제 가운데 가장 뛰어난 3 인으로 桓因(한님), 배달을 개천한 神市氏 桓雄(거발한한웅), 慈烏支 桓雄(蚩尤天皇)을 일컫고(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5帝는 관념적인 존재로 천지창조의 주관자 黑帝, 赤帝, 靑帝, 白帝, 黃帝(黃帝軒轅이 아니다)를 말한다.

천황(天皇)·지황(地皇)·인황(人皇)이 당시 인간세상의 황제였다고? 땅위의 皇帝가 누구였나. 배달과 朝鮮의 天皇이다. 天皇은 배달, 朝鮮의 통치자에 대한 호칭이다. 하늘의 皇帝라는 뜻으로 천손민족을 자부한 우리민족이 아니면 쓸 수 없다. “天子라는 호칭은 東夷(배달)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생각했기 때문에 天子라고 한 것이다(天子之號稱始於東夷父天母地故曰天子 獨斷)”라는 蔡邕(채옹 : 後漢의 학자)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天皇·地皇·人皇은 우리민족에게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희한하게도 3皇 5帝는 모두 넉자 이름이다(千字文에도 나타난다).

기원전 수천 년 전에 하나같이 넉자 이름을 가진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물론 성은 있었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넉자 이름을 가지지 않았기에 제요도당(帝堯陶唐=堯)은 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이라고도 하고 제순유우(帝舜有虞=舜)는 제순중화(帝舜重華=有虞氏)라고도 한다. “우순(虞舜)은 맥족(貊族)이며, 貊族은 東夷의 부족을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자손이다(中國史前史話-臺灣大學의 徐亮之 교수 저)."라더니, 무슨 帝舜重華? 날조사를 창작하던 인간들이 제각각이 썼던 것이다. 帝舜有虞라 하고 帝舜重華라 날조당한 인물의 실명은 우순(虞舜)이다.

더욱 기가막힌 것은 아들은 모두 2 자 姓인데, 炎帝神農, 黃帝軒轅, 帝舜有虞의 母는 모두 강씨[姜(羌)氏], 희씨(姬氏), 요씨(姚氏)로 1 자 姓이다. 모두 2 자 姓 가진 남편을 만났다고 생각 하겠지만, 중국 문헌에 이 당시 中土는 母系社會였다. 모계사회란 다수의 남편이 있어서 부(父)를 확정하지 못해(유전자 검사법이 없으니까) 부득이 母의 姓氏를 따르는 사회다. 더구나 中土의 모계사회는 더욱 현란하여 다수의 여자와 다수의 남자가 ‘결혼’하는 형태였다. 결국 태어난 아이들에게 남자의 姓을 하나씩 골고루 붙여줄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였던 것이다.

神農의 母가 姜氏이고, 黃帝의 母가 姬氏 라면서 그 아들을 炎帝神農, 黃帝軒轅이라 부르는 것은 父의 성을 따랐다는 것인데, 神農과 軒轅 이후로는 母의 성으로 돌아가 姬氏, 姜氏라 불러, 姬氏의 시조가 軒轅, 姜氏의 시조가 神農 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軒轅의 아들이 소호금천(少昊金天)이고, 軒轅의 외손자가 전욱고양(顓頊高陽)이라고 횡설수설한다. 제곡고신(帝梏高辛)은 軒轅의 증손자, 帝堯陶唐은 軒轅의 고손자로 변신했다. 날조사에 의하면 결국 軒轅은 姬氏의 시조 이면서 姬氏를 姓으로 물려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母系社會였다는 것은, 軒轅의 아내는 하나가 아니었고, 軒轅의 아내들은 남편이 하나가 아니라는 소리다. 뭘 근거로 軒轅의 아들, 손자라고 하는지 밝혀야 할 것이 아닌가. 후대에 일관성 없이 날조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얘기다.

中土에서 母系社會를 구성한 것은 華夏族이지, 우리민족이 아니다. 미개 華夏族의 치부를 감추고자 우리민족을 끌어들인 것이다. 華夏라는 명칭은 周나라 武 임금 때에 "華夏와 蠻貊이 따라 오지 않음이 없다(華夏蠻貊 罔不率俾 周書)"라 한 글에서 비로소 처음 나타났다. 周나라를 건국할 때만 해도 中土人들은 華夏와 陌(貊), 漢族으로 뚜렷이 구분됐다. 하지만 漢族(?)도 점차 모계사회 풍습에 빠져들어 周나라 말기 이후 혹은 漢나라 이후는 華夏族과 구분이 안 갔을 것이다. 그래서 高句麗와 百濟가 저들을 통틀어 한위노(漢委奴)라 했다.

“혹 말하기를 창힐(倉頡)은 高辛과 더불어 역시 모두 蚩尤氏의 후예다(或曰倉頡與高辛亦皆蚩尤氏之苗裔 太白逸史 神市本紀)." 帝梏高辛은 軒轅의 후손이 아니라 蚩尤氏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帝梏高辛 뿐만 아니라, 少昊金天, 顓頊高陽 도 軒轅과는 혈통의 연결이 없는 사람들이다. 모두 軒轅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軒轅을 신하로 잡은 다음에 오나라에 장군으로 보내 서쪽으로 高辛을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太白逸史 神市本紀)." 神農, 高辛 등은 모두 성이다. 그래서 무수한 神農과 高辛, 少昊 등이 있었다. 神農은 소전(少典)의 아들로, 神農을 성으로 바꾼 것이다.

 


▲ 백두산 천지의 풍경



우리나라 중심지가 中國 대륙으로 옮겨가자, 더 이상 太白山(현 白頭山)은 祭天儀式 장소로써의 기능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현 白頭山이 화산폭발하기 전에는 보통 크기의 산이라서 우리나라의 靈山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 太白山은 神市氏가 처음으로 정착한 땅이라서 우리나라 靈山이 된 것이지, 높고 큰 산이라서 우리나라 靈山이 된 것이 아니다). 너무나 멀기 때문이다. 교통이 발달한 요즘도 먼 거린데, 탈 것이라고는 말과 가마밖에 없었던 그 옛날, 제사 한 번 지내러 가기 위해 6 개월씩, 1 년 씩 투자할 수는 없다. 1 년에도 몇 번씩 祭天儀式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戊戌 28 년(B.C. 1583), 구한(九桓)의 여러 한(汗)들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三神과 上帝에게 제사지냈으니, 한인(桓因), 한웅(桓雄), 치우(蚩尤) 및 檀君王儉을 함께 배향 하였다(戊戌二十八年九桓諸汗于寧古塔祭三神上帝配桓因桓雄蚩尤及檀君王儉而享之 檀君世記)."에서 보듯이 16 世 檀君 위나(尉那)가 제후국의 한(汗)을 모조리 대동하고 太白山까지 가서 매번 제사 지내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중국 대륙에 새로운 靈山을 마련해야 했다. 西安 서쪽의 太白山은 長安, 鷄林(桂林), 星宿海와 함께 아마도 중국 대륙의 지명 중에서 유일하게 옮겨지지 않은 지명일 것이다. 朝鮮時代 제사를 올린 곳은 여러 장소로 그 외에도 寧古塔, 九月山 등이 있는데, 모두 중국 대륙에 있다.

섬서성(陝西省)에 太白山이 있다는 사실은 朝鮮의 도읍도 그 근처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朝鮮時代에는 여러 번 遷都했으나, 太白山에서 먼 곳에 도읍할 수는 없다.

위서(魏書)·물길전(勿吉傳)에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太白 이라고 한다. 범과 표범·곰·승냥이 등이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위에 올라 가서는 방뇨를 하지 않았다. 하였고, 北史·勿吉傳에도 역시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중원의 말로 ''太白''이라 하며, 풍속에 그곳을 매우 삼가며 공경한다.(魏書勿吉傳曰國有徒太山魏言太白有虎豹熊狼不害人人不得上山鏽溺…云云 北史勿吉傳曰亦國有徒太山華言太白俗甚畏敬之 揆園史話)."? 太白山은 우리나라 말이다. “한웅(居發桓桓雄)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太白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 오시니 이곳을 神市라 하고 이분을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桓雄率衆三千降于太白山頂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 三聖紀全 下篇)." 역사를 남의 나라 말로 기록하나? 역사를 뒤바꾸면서 우리나라 말까지 제 것이라 우긴 것이다. 이제껏 太白山이 남의 나라 말인 줄 알고 太白山, 太白山 했단 말인가.

"이 때에 한 곰족(熊族)과 한 범족(虎族)이 이웃하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신단수(神檀樹)에 와서 빌기를 '원하옵기는 변하여 신계의 백성(神戒之氓)이 되게 하옵소서' 하였다. 환웅(桓雄)이 이 말을 듣고 '가르칠만하다'하고, 이에 주술(呪術)로써 뼈를 바꾸고 정신을 고쳐 신(神)이 보낸 깨우침을 가지고 영(靈)을 삼았다. 그리고 쑥(艾 : 애) 한 줌과 마늘(蒜) 스무 개를 주면서 경계 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체를 얻을 것이다.' 하였다(時有一熊一虎同隣而居嘗祈于神壇樹願化爲神戒之氓雄聞之曰可敎也乃以 呪術換骨移神先以神遺靜解靈其艾一炷蒜二十枚戒之曰爾輩食之不見日光 百日便得人形 三聖紀全 下篇)."

이 기록에서 桓雄(거발한한웅)은 熊族과 虎族에게 산(蒜 : 마늘) 스무 개를 준다는 내용이 나온다. 마늘의 자생적인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및 천산산맥 일대 중가리아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기록은 우리민족의 천산산맥 기원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마늘(蒜)은 파(蔥), 쑥(艾)과 함께 아득한 태고적부터 우리 겨레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온 소중한 식품이며 약재이다. 우리의 옛 문헌을 살펴보면 마늘의 기원을 추측할 수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파미르 고원에는 ''마고성(麻姑城)''이라고 하는, 바둑판처럼 네모지게 생긴 城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천부단(天符壇)''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은 지상천국 이었다. 여기에 4 형제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형제 중의 하나가 禁忌를 범하여 4 형제 모두가 쫓겨나게 되었다. 아버지가 연대책임을 지운 것이다.

쫓겨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맏아들은 천산산맥을 지나 북쪽으로 가고 둘째는 동쪽 중국으로, 셋째는 서쪽 중동지방(수메르지역)으로, 넷째는 남쪽 인도로 가서 각각 인간을 다스렸다. ''환국(桓國)''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 ''麻姑城''을 가리킨다. 또한 ''桓雄''은 이들 형제 중에서 직계 宗孫이었다. 桓雄은 天山山脈을 지나서 요동, 만주 등의 기름진 땅에 도착하여 농경사회를 일구었는데 이때 파미르 고원에서 가져온 파와 마늘이 나중에 여러가지로 큰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신계지맹(神戒之氓) : 맹(氓)이라 함은 外來의 이주민, 외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마늘(蒜)은 天孫(神國)의 의미를 쑥(艾)은 토착민(氓)의 의미를 갖는다.

코리(Khori)族이 고리국(槀離國)사람? 비리(卑離)가 부이르 호수? 蒙古族은 1270 년 이전까지는 蒙古高原에 살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았다.

수백 개씩 城을 쌓은 高句麗나 百濟를 서슴없이 유목국가라 부르는 것이 이 땅의 사학자들이다. 유목국가에 대한 개념 정립부터 안돼 있어서 그렇다. 하기야 東洋史를 날조한 인간들도 高句麗나 百濟가 수백 개씩 성을 쌓은 기록을 남기고도 遊牧民族이라 우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蒙古高原과 티벳고원에 가보면, 유목민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천막 치고 살다가,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천막을 걷고 가축을 몰아서 간단하게 이동한다. 가축만 빼면 천막 안에 있는 것이 遊牧民이 가진 전부다. 유목민에게 그 이상의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蒙古高原에 蒙古族이 살게 된 것은 12 세기 후반이고, 티벳고원에 티벳이 살게 된 것은 明 때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유적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었다. 수시로 이동하는 유목민에게는 高度文明을 개발할 시간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이삿짐이 간단해야 하니까, 고도문명을 개발해야 할 이유도 없다. 정착생활은 문화의 기원이다.

匈奴도 유목민이라 오르도스(鄂爾多斯)로 이주 했다고 간단히 날조 당했다. 그러나 오르도스는 천문기록으로 나타나는 高句麗 疆域이다. 蒙古年表 대로 기원전 4 백 년경에 匈奴族이 오르도스로 이주 했다면, 우리나라 강역을 빼앗긴 것이고, 보통 큰일이 아닌데, 桓檀古記 어디에도 匈奴族을 포함해서 蒙古族의 침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기원전 425 년 부터 삼신영고(三神迎鼓)의 제사를 지냈고, 감찰관을 파견하여 효도 잘 하는 자와 청렴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고, 燕나라 사신이 새해 문안인사를 올리는 한가한 얘기나 있고, 다만 구물(丘勿) 檀帝가 붕어하고 태자 여루(余婁)가 즉위한 것이 큰 사건이다. 성을 쌓거나, 燕나라가 변두리나 遼西에 침범하다가 내쫓긴 것이 가장 큰 사건이다.

匈奴나 蒙古에 대한 기사라고는 온통 한가로운 얘기뿐이다. “甲申 원년(B.C. 2137) 天皇(4 世 檀君 烏斯丘)의 동생 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다(甲申元年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 檀君世紀)." “戊寅(B.C. 703)년에 흉노(凶奴)가 番韓에 사신을 파견해 天王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칭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戊寅凶奴遣使番韓求見天王稱臣貢物而去 三韓管境本紀 番韓世家 下)."

“甲辰 6 년 열양(列陽)의 욕살(褥薩)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 하시고 곧 그 땅에 封하니 그가 흉노(凶奴)의 조상이 되었다(甲辰六年命列陽褥薩索靖遷于弱水終身棘置後赦之仍封其地是爲凶奴之祖 檀君世記)."

弱水 : 곤륜산(崑崙山)에서 흘러 내리는 강, 부력(浮力)이 약하여 기러기의 털도 가라 앉는다고 한다. 옛날에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적인 강이다. 천문기록으로 찾은 한국사에서는 약수의 위치를 티벳고원 동쪽으로 비정한다. 옮겨진 지명이다.

凶奴 : 곧 흉노(匈奴)이며 지금의 몽고지방에서 살았다. 후에 고구려에게 쫒겨 티벳으로 들어간다.

蒙古가 蒙古高原에 없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日本이 베낀 大震國의 일식기록이다. 日本이 베낀 710 년에서 792 년까지의 일식관측지가 蒙古高原 이북이다. 蒙古高原이 蒙古 땅이라면, 黑龍江 상류의 黑水女眞을 숙여진(熟女眞)처럼 전력화하지 않고서는 蒙古高原 이북을 지킬 수 없다. 수초나 찾아 떠돌도록 방치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蒙古高原이나 오르도스에서 티벳고원 북부의 漢나라를 위협할 수 있는가. 중국이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했다고 날조한 결과, 종이 위에서 匈奴가 오르도스로 이동했던 것이다.

천문기록으로 살핀 高句麗의 강역이 동아시아 북부로 나타난 이상, 新羅가 揚子江에서 건국하고 百濟가 동북아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高句麗가 滿州에서 소국으로 출발했다던가, 百濟와 新羅가 韓半島에서 건국했다는 주장은 성립할 여지가 없다. 고리국[槀離國 : 北夫餘의 시조 해모수(解慕漱)의 조상이 槀離國 사람이다] 역시 蒙古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