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영광을

정우산기 2007. 4. 12. 10:52

 

 

 

 배달국은 환단고기외에 숙종때의 진본이 발견된 규원사화에도 환웅께서 박달을 다스리셨다고 언급이 되어있어 신빙성있는 사료입니다.

 

 

 

 

 

 

중국 하남 박물원에 소개된 “동이”

 

 




-> 하남성 개봉시에 위치함(1927년 개원)




하남박물원(河南博物院)

东夷人是中华民族先民的主干部分
동이인(東夷人)은 중화민족 조상의 주요한 줄기부분(主幹)이다.

张发颖在《凤图腾东夷人及其文化贡献》〈《社会科学辑刊》2001年第2期〉一文中认为东夷文化
  范围的遗存遍布燕山南北,包括辽宁阜新查海文化,沈阳新乐文化,山东大汶口文化,河姆渡文化
  以及其后的赵宝沟、兴隆洼、牛河梁及殷商文化,东夷文化以凤为图腾,不是统一的文化体系,
  而是对有记载以来生活在这地区先民的泛称,以凤为祖图腾,繁衍为以各种鸟为子图腾的北方凤图腾的
  东夷先民,都是在燕山山脉东夷文化圈中发展起来的。从伏羲到夏商二代,起主导作用的也是东夷文化。
  东夷族人发明了带羽毛弓箭,创造了文字,制作青铜器与冶铁,制造舟、车,发展农业与治水。
  为中华民族文化的发展和推进,起到了关键和决定性作用,华夏文明是龙凤后裔融合而后共同创造的。

 

 

 

[번역]



장발영(張發潁)의 저서
<봉황토템 동이인 및 그 문화의 공헌>- <시회과학집간>2001년 2기- 에서

동이문화의 유적분포는

- 연산(燕山)의 남북과
- 료녕(遼寧)의 부신사해문화(阜新查海文化)를 포함해서
- 심양(沈陽)의 신락문화(新樂文化),
- 산동의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하무도문화(河姆渡文化)와

그 후의


- 조보구(趙寶溝), 흥륭와(興隆洼), 우하량(牛河梁) 및
- 은상문화(殷商文化)까지

동이문화는 봉황(鳳凰)을 토템으로 하였다.

통일된 문화체계는 아니지만
문헌에 기록된 이후의 생활은 이 지구(地區)의 조상들의 범칭(광범위한 동이문화)이다.
  
봉황을 모(母)토템으로 삼고
각종 새들을 자(子)토템으로 하는 북방 봉황토템 동이의 조상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연산산맥(燕山山脈)의 동이문화권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복희(伏羲)에서 하상(夏商) 2대까지 동이문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것이다.

동이족 사람들은

- 깃털달린 활과 화살을 발명했으며,
- 문자를 창조했으며,
- 청동기를 제작하고,
- 철을 단련했으며,
- 배(舟)와 수레(車)를 만들었고,
- 농업을 발전시키고 치수(治水)를 하였다
.

동이족이 중화민족의 발전과 진보를 위하여 주된 역할과 결정적 작용을 하여
화하문명(華夏文明)은 용봉(龍鳳)이 융합되어(화하족의 용과 동이족의 봉문화가 융합되어)
공동으로 창조된 것이다.

 

 

 

 

 

 

 

 

















(가림토 사진)


(관련지도)

 

 

 

 

 

 

 

 

 


(안원전 : 동이 홍산문화의 위대성)







이 문화를 발굴함으로 인해서
중국은 황하중심 문화 전파론을 지양하고
이른 바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산동 반도에서 발견되는 북신문화-대문구-용산문화가

바로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문화가 바로 고조선 중심지였다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학자 “부사년”이 주장하였던
이하동서설의 주인공인 夷가 바로
고조선인이거나 그 선조였다는 이론으로까지 확산될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홍산 문화는 황하문명 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성곽이나 왕궁터등이 발견되어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까지 되었습니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배달국(=규원사화에 나오는 박달)이

바로 홍산 문화(B.C.4500∼B.C.2500), 더 나아가 홍산 문화의 전신인
흥륭화 문화, 신락 문화(B.C.6000∼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산 문화는
요녕 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6천년(B.C.4,000)의 신석기시대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됩니다.


홍산 문화는
앙소 문화의 채도와
이전 단계의 연속 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 등을 융합하여
한 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 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東夷族'의 활동지역을 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 동북부와 산동 일대, 양자강하류 유역 등입니다.

산동 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 문화인데,

북신 문화는
7천년 전까지 소급되어지고
황하의 자산, 배리강 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 4500년경의 이지역 대문구 문화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습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 서쪽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써
東夷系 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됩니다.


홍산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입니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 판을 잘라 묘실 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상류 역 요녕성 우하량 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
은 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합니다.


역사상에서
홍산 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대결을 벌였던 치우의 세력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 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홍산 문화 이후
하가점 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 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 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홍산(紅山) 문화는
소하연(小河沿) 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 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하연 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하층 문화,
구체적으로 풍하(豊下)문화에서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전 2천4백년 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 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동, 요서 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 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까지 합니다.


이 홍산 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큽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 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 문화”를 들고 있습니다.



홍산 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 산동 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북신 문화-대문구 문화-용산 문화-악석 문화로 이어지는 산동 문화와 흥륭화 문화,신락 문화-홍산 문화-하가점하층 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도 산동 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이었나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전백찬” 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사적 상에 보이는 辰國(고조선?)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중국학계에서도 은나라 때까지 화하 족이 하북성과 산동성을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표) 시대별, 지역별 문화 현황

 

 

 

 

<홍산문화 유적>

 

 

 

 

 

 

 


 

 

 

 

 

 

 

 

 

 

  갑골문자 ‘천부경(天符經)’ 발견

 

 

 


< 천부경 - 사진자료 >

고려시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더불어
오은(五隱)중에 한사람인 농은(農隱)의

유집에서 발견된 천부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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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대종언어연구소(www.hanja.com), 일요시사 9월 29일자



< 특종 “갑골문자 ‘천부경(天符經)’발견, 단군.환웅 실재성 높아 >


민족이나 개인에게 있어서 역사(歷史)는

존재의 정체성과 더불어

과거와 미래를 자리매김하는 가장 분명한 준거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역사는 자주적인 역사를 이어왔음에도

주변의 중국역사에 비해 열등한 모습으로,

그리고 일본의 강점이라는 치부를 지닌 왜소화된 이미지로 투영돼왔다.

이러한 데는 우리 역사의 실체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의식의 결여,

여기에 편입한 강단사학(講壇史學)의 영향도 적지 않다.

우리 고대사(古代史)는 그러한 역사 관행의 피해를 본 대표적인 분야.

이로인해 찬란한 고대사를 증거해주는 사료(史料)는 위서(僞書)로 치부됐고,
재야사학자들의 몫으로만 남아왔다.

그런데 최근 우리 고대사의 실제 모습을 증거해줄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발견돼

향후 국내의 학계는 물론 역사의식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언어학자 박대종씨가 동방문자(漢子)의 기원인 갑골(甲骨)문으로 쓰여진

우리 선조의 유집 "농은유집(農隱遺集)" 천부경(天符經)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갑골문의 뿌리가 단군조선 이전인 환웅(桓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밝혀낸 것.

이에 따라 본지는 "농은유집 천부경"의 의미와

박대종씨의 연구 성과가 갖는 의의를 국내 최초로 소개하기로 한다.


< 갑골문과 천부경 >


갑골(甲骨)문은

속칭 한자(漢子)라 불리우는 동방문자의 가장 이른 시기의 형태로 알려진 문자이다.

갑골문이란 명칭은

그 문자가 주로 거북껍질(龜甲)이나 소의 어깨뼈 등에 칼로 새긴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1,899년 중국 하남성 은허(殷墟)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갑골문은

은왕조(B.C 3400~3100)때 도성의 유적지인 은허에서 출토되어 은허문자라고도 한다.

한편 천부경(天符經)은

한 민족 최고(最古)의 나라로 알려진 환국(桓國)에서 비롯,

구전되어 오던중 환웅(桓雄)의 명에 의해

신지(新誌) 혁덕(赫德)에 의해 최초로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되었고

후에 신라의 최치원이 옛비석에서 신지(新誌, 단군시대의 천황의 명령을 전하고
출납의 임무를 전담하다가 혁덕이후 기록을 담당했던 벼슬의 이름,
앞의 신지혁덕과는 다른 사람임)가

쓴 전자(篆字)로 된 고각본(古刻本)을 찾아내어

그것을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것이다.

단군숭배를 기초로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따르면

배달겨레의 거룩한 3대 경전으로

- 조화경인 "천부경"과
- 치화경인 "참전계경"이 있는데

- 총 81자로 구성된 "천부경"은

환웅께서 태백산(백두산) 신단수(神檀樹)아래에 내려오셔서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위하여 만 백성을 가르칠 적에 조화의 원리,

곧 우주 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진경(眞經)이라고 한다.

"천부경"은 고려말까지 전해져 내려오다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왕조때 묻히게 됐다.

그러던중 1916년 대종교도 계연수(桂延壽)가 묘향산 석벽에서 이를 발견하여

1917년 인편으로 탑본을 대종교에 전하게 되어 비로서 다시 맥을 잇게 됐다.


< 농은유집 천부경의 발견 >


앞서 언급했듯 갑골문은 1899년 중국대륙에서 최초로 발견됐지만
고대최고의 문자학서인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은
후한(後漢 A.D 25~ 220)의 허신(許愼)조차도 갑골문을 몰랐었다.

중국에서 갑골문을 본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중 청나라 말기인 광서 25년(1899)

금석학자이자 국립대 총장인 왕의영에 의해 처음으로 연구되었다.

그런데

고려말 충신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의 유품에서 발견된 천부경문(天符經文)에서

은허 갑골문과 동일한 글자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는 두가지 측면에서 일대 사건에 비유될만한 충격적인 일이다.

하나는

갑골문 하면 오직 중국대륙 내부에서만 발견되는 종래의 고정관념이 깨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금으로부터 약 650년전의 인물인 민안부가 중국대륙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을 보고
천부경을 작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중국대륙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미해독된 갑골문자들이

농은유집 천부경에 다수 발견, 확인됐다는 점이다.

농은 민안부는

- 목은 이색,
- 포은 정몽주,
- 도은 이숭인,
- 야은 길재,
- 수은 김충한과 더불어

6은(六隱)으로 불리었던 충신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신하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주목할 점은 조선조 이맥이 "태백일사"에서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 이색,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증언한 점이다.

이색은 민안부와 당시 교분이 두터웠고

범세동은 민안부와 같이 두문동에 들어간 72현 중의 한사람이다.

이는 민안부도 천부경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고려충신 72현들 사이에서 천부경은 여러 부 작성되어 귀중하게 보관되었고,

이번에 발견된 농은 민안부의 천부경은

그의 후손인 민홍규씨가 2000년초 송호수 박사를 찾아가 선보임으로써 공개된 것이다.

또 주목할점은 민족경전인 "삼일신고"의 내용중
발해 문왕인 지은 "삼일신고봉장기"에
단군이 신지에게 "삼일신고"를 그리라는 명을 내렸다는 구절이 나온다.

"천부경"이 "삼일신고"의 한쌍임을 고려할 때
천부경에 대해서도 동일한 그림문자로 돌위에 새겼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또한 "후조선기"에는


‘기자(箕 子)가 부여의 법학지였던 왕수긍(王受兢)을 초빙해 박달나무에 은문(殷文)으로

삼일신고를 쓰게하여 그것을 읽었다’라고 기록이 있다.

종래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일반적으로 기자는 은나라의 현인(賢人)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빼앗자
B.C 1122년에 동쪽 조선으로 들어와 기자조선을 건국한 이로 알려져있는데
B.C 1122년이면 지금으로부터 3122년으로 은허 갑골문 시기와 일치한다.

(펀주: 기자조선-고조선 변방의 한 지역.

고조선의 진한 마한 변한 중에서 변한에 세워진 고조선의 제후국.)

이를 종합할 때


민안부의 "농은유집 천부경"은 기자의 초빙(招聘) 및 지시하에 왕수긍이

삼일신고와 함께 은문(은허갑골문)으로 쓴 진본을

후대에 일급 서예가(농은일 가능성이 많음)가 지금으로부터 최소 6백년전 이상의 옛날에
정밀모사한 모사본으로,

왕수긍이 쓴 당시 연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3100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자 이전의 원본 천부경,

즉 단군 나아가 환웅시대의 천부경까지 고려 하면 천부경 자체는 그보다 훨씬 멀리까지

소급된다.


< 중국갑골문의 한계 >

중국한자의 근원은 갑골문과 고대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이다.

시기적으로는 은나라의 뒤를 이은 주나라 유물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은문에 비해 발전적인 형태가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금문은 은문으로 칭해도 무방하다.

농은유집 천부경문에는 은문이나 금문에서 발견되지 않는 글자가 있고,

은문, 금문으로 해독이 불가능한 글자가 있어

천부경이 갑골문에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구체적으로

농은유집 천부경문에 기록되어 있는 중복을 제외한 총 46개의 문자중

은허갑골문에서 이미 발견된 글자들은 총 32자(69.6%)이다.

이중 갑골학을 지금껏 주도해오고 있는 중국학계에서도 정확히 해독하지 못하거나

불명(不明)으로 취급한 문자들이 있다.

지(地), 환(環), 동(動), 태(太), 등이 그것이다.

동(動)자 안에 포함된 중(重)까지 합칠 경우

천부경문에 포함된 글자 중 미해독 글자는 총 다섯 글자가 된다.

특히

지(地)나 환(環)과 같은 고자(古字)의 발견은

기존 갑골학계의 연구가 불충분하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박대종씨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은허문에  와 같은 글자가 발견됐지만 중궁의 갑골문 권위자들은  을 지(地)가 아닌 다른 글자로 감정을 했다는 것이다.

곽말약은 그의 저서 "복사통찬(卜辭通簒)"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모양을 그린 ‘떨어질 타(墮)’는 본 글자라고 고찰하였다.


서중서도 갑골문자전(甲骨文字典)에서 무너질‘휴’자로 곽말약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天一一地一二人一三’에서와 같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표현한 천부경문이 천지인이 아닌 천타인(天墮人) 일리 없다.

또한 환(環)에 대해 중국학자들은


미해독문자 또는 '그물견자’로 풀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박대종씨의 설명이다.

금문(金文)에서도 농은유집 천부경 내에 포함된 글자들중

五, 六, 七, 八, 九를 제외한 41자중 11자(26.8%)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미해독문자로 분류된 환(環)자는 농은유집 천부경문으로 해독되고 있다.

 

 

 

 



출처 :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글쓴이 : 진공에너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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