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영광을

정우산기 2007. 4. 12. 17:05

ㅇ 연개소문은 당의 1차 침공을 막고 바로 중원으로 공격하여 서토를 정벌하였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는 연개소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대기에 가로되)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義表雄偉)하고 의기호일(意忌豪逸)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마시며,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에는 반드시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 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緯)로 삼고, 하늘을 경(經)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온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써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없이 모두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삼국사기』 「열전」을 보면 연개소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의표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장하여 작은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송나라 신종(神宗)이 왕개보(왕안석)와 국사를 의논할 때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다가 어째서 이기지 못했는가?'하니 왕개보는 '개소문이 비상(飛上)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고 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소문도 또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 기록을 볼 때 연개소문은 무자비하고 포악한 독재자가 아니다. 그는 국난에 처한 고구려를 구한 영웅이자., 부하들과 백성들을 사랑한 정치가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패자는 역사에 아무런 말도 못하는 법이다. 승자인 당과 신라는 자신들의 기록을 남길 때 그들의 적이었던 연개소문을 흉포한 인물로 깎아내렸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껏 알고있는 연개소문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지양하고 객관적으로 연개소문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2. 연개소문과 다섯자루의 칼

삼국사기를 보면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은 중국 사서를 인용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이 칼을 다섯 자루씩이나 차고 다녔다는 것에 대해 독재자로서의 위엄과 과시를 나타낸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니는 것이 연개소문이 독재자의 증거가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연개소문의 독재만 생각했지, 왜 그가 칼을 다섯 자루 씩이나 차고 다녔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연개소문은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을까? 그 답은 바로 『한원』이라는 사서에 있다. 『한원』 「고려조」에는 고구려 남자들이 허리에 은띠를 차는데, 왼쪽에는 숫돌을, 오른쪽에는 칼 다섯 자루를 달고 다닌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왜 고구려 남자들은 무엇 때문에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을까? 이를 밝혀줄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다음과 같이 유추할 수 있다. 구당서를 보면 고구려에서는 혼인 전 자제가 경당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주변국과의 투쟁을 통해 성장한 나라이니, 아무래도 일반 백성들의 무술 연마에 사용했을 것이다. 즉 이 칼은 장식품이 아니라 생활상의 필요와 함께 성인이 되고 나서도 칼쓰기, 활쏘기, 말타기 등 각종 무술을 연마하는데 꼭 필요한 도구로 쓰였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결국 연개소문이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다는 것은 삼국사기 개소문전에 기록된 대로 독재자로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고구려 남성들의 평범한 일상사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가지고 독재자의 증거로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가 아닐 수 없다.



3. 연개소문은 왜 신라의 구원 요청을 거절했나?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이 신라가 구원요청을 하러왔을 때 신라에게 땅을 달라고 요구한 걸 가지고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지, 그가 왜 무슨 목적으로 신라의 구원을 거절했으며 왜 고구려의 옛 땅을 돌려달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과연 연개소문은 왜 신라의 구원을 거절했을까?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구원요청을 거절한 이유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신라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돌려주는 문제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고구려의 안보와도 직결되는 백제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더 큰 이득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는 신라 대신 백제를 동맹국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를 보면 의자왕이 643년 11월에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항성을 취해 신라가 당과 통하는 길을 막으려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했다가 철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었음을 가리키는 기록이다. 양국이 동맹을 체결하고 공동 출병을 했다는 것은 643년 11월보다 이른 시기에 두 나라 사이에 교섭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협상하러 간다는 사실을 백제에서 알았다면, 백제 또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협상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김춘추에 대한 정보를 얻게된 것은 혹자(或者)를 통해서이다. 혹자, 즉 어떤 사람은 누구일까? 이는 필시 고구려인이 아닌 백제인일 가능성이 크다. 신라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갔고 있던 백제가 고구려-신라간의 협상을 결렬시키기 위해 고구려에 김춘추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은 크다. 이런 가능성을 좇는다면 연개소문은 백제와 신라 양국을 저울질하면서 어느쪽과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한 가를 판단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당과 일전을 겨룰 것을 염두에 두었으므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동맹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서 선택된 국가가 백제였다. 당시 백제는 신라보다 국력이 강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 식민지를 건설할만큼 해양강국이었다.

만약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한다면 백제는 당과 연합을 할 것이고, 그리 된다면 고구려는 서해 상에서 적의 군대를 막기가 어렵게 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안보 차원에서 백제를 선택하는 것이 신라를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백제를 동맹국으로 선택함으로써, 자연히 왜국과의 교섭 또한 활발해졌다.10) 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을 맺자, 신라가 왜국과 교섭할 것을 우려해 왜국과의 외교 정상화에도 빠르게 움직인 탁월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한가지 말해둘 것은 김춘추가 거짓으로 고구려의 옛땅을 돌려준다는 편지로 고구려로부터 빠져나온 것을 가지고 연개소문을 구전 설화인 구토설화에 나오는 용왕과 비유하여 어리석은 인물이라 치부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당의 대군을 물리친 전략의 귀재인 연개소문이 그깟 한낱 어린애의 말장난을 믿었으랴...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놓아준 이유는 다음과 같다.  김춘추는 협상실패로 인해 정치적 입지가 고구려에 가기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게다가 고구려인의 반(反) 신라 감정이 고조되고,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전선이 구축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더 큰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그를 놓아준 것이며, 협상을 통해 충분한 실익을 얻은 셈이었다.



4. 연개소문, 만리장성을 넘어 저 멀리 강소성까지 가다

안시성 싸움에서 패배한 당군은 결국 퇴각을 결정하였다. 우리는 안시성 싸움에서 고구려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지금의 북경지방을 차지했다는 전설과 함께 연개소문이 저 멀리 산동성과 강소성에 그 발자취를 남겼다는 전설이 내려져오고 있다.

“연개소문은 요동의 싸움을 양만춘 · 추정국 두 사람에게 맡기고 정병 3만으로 적봉진(赤峰鎭:상곡, 지금의 하간) 등지를 습격하니 당의 태자 치(治:당 고종)가 어양(漁陽)에 머물러 있다가 크게 놀라 급함을 알리는 봉화를 들어 횃불이 하룻밤에 안시성까지 연락되었다. 당태종은 곧 임유관(臨渝關:산해관) 안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곧 군사를 돌이키려고 하였다.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그 봉화로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음과 당태종이 장차 도망할 것을 짐작하고 추정국은 전군을거느리고, 양만춘은 성문을 열고 급히 내달아 공격하였다.

                                                          (중략)

“연개소문이 지나(支那:중국)에 침입한 것도 기록에는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오늘 북경 조양문(朝陽門)외 7리지(里地)의 황량대(詤糧臺)로 비롯하여, 산해관까지 이르는 동안에 황량대라 이름하는 지명이 10여 처인데, 전설에 ‘황량대’는 당 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식을 저장해놓은 것이라고 속여 고구려 사람이 습격해오면 복병으로 맞아 공격한 곳이라 하니 이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고, 산동(山東) · 직예(直隸:하북성) 등지에 띄엄띄엄 고려(高麗) 두 글자를 위에 붙인 지명이 있어 전설로는 그것이 다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곳이라고 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60리 쯤에 있는 고려진(高麗鎭)과 하간현(河間懸) 서북쪽 12리쯤에 있는 고려성(高麗城)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지역 깊숙이 들어갔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북경시 순의현의 고려영(高麗營) 유적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채호는 고려영은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이 주둔했던 성으로 보았다. 『북경 순의현지』에는 당나라 때 지금의 북경에 고구려인이 이주해왔다는 단 한 줄의 기록이 남아있다.

연개소문이 북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만리장성을 넘어야했다. 그런데 당시 만리장성은 그리 대단한 장벽이 아니었다. 5호 16국시대, 남북조 시댕 많은 북방민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만리장성같이 일직선상에 쌓은 성은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적군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성으로서의 의미를 잃는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기란 누워서 떡먹기처럼 쉬었을 것이다.

최근 북경민족대학 황유복 교수는 북경 동북쪽의 황량대에서 ‘고려포보(高麗鋪堡)라 새긴 비석을 발견하였다. 이는 연개소문의 중원지역 공략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구려 정복을 운운하던 당 태종이 이런 쇼를 벌인 것은 고구려가 적어도 1일권 안에 있었음을 반증한다고 했다. 그가 발견한 황량대를 연결하면 고구려군이 활동하던 것은 북경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본다면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깊숙이 지금의 북경까지 쳐들어갔다는 주장은 설득력있어 보인다.

그런데 위의 전설 말고 산동성과 강소성에는 연개소문에 관련된 전설이 무려 6가지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① 산동성 봉래시의 전설: 봉래 인근에서 당 태종과 연개소문이 전쟁을 벌였는데 이 때 당태종의 형이 전사를 한다

② 산동성 즉묵시의 전설: 당 태종이 산동성 즉묵 마산에서 연개소문에게 포위되어 사로잡힐 뻔 할 때 신라출신 용양장군 김걸이 당 태종을 구하고 자신은 연개소문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는 전설

③ 강소성 비주의 전설: 고구려군과 당의 설인귀군 간의 격전

④ 강소성 숙천의 전설: 연개소문이 당의 설인귀군과 전쟁에서 연전연승했다는 전설

⑤ 강소성 염성: 염성 건호현에는 몽롱탑(蒙朧塔)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거미줄이 쳐진 빈 우물에 숨어 살아났는데 나중에 이 은공을 잊지 못해 그 우물이 있는 곳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어둡고 어려움(朦)에 처해 있을 때 우물 속 거미줄이 몸을 보호해 줘 목숨을 건진대서 몽롱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고 한다.

⑥ 강소성 금호: 고려성이 있는 지역


위의 전설들은  고구려 연개소문이 수군으로 중원의 산동.강소성 일대를 대대적으로 침략을 했으며이에 당태종은 친히 정벌코자..나섰지만도리어 연개소문에 전략에 휘말려 당태종 자신이 죽을 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위 전설은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한 지역에 한 인물에 대해 그것도 6가지나 내려오는 건 어찌 설명해야 할까?  현학계에서는 이런 사실을 얼토망토 않은 사실이며 또한 기록에전하는 바가 전혀 없다 하여 한같 재야사학의 엉뚱한 주장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단순히 전설로만 치부하기에는 연개소문과 관련된 전설이 너무 많다. 위의 전설 말고 어니하, 독목관, 분하만 등 연개소문에 관련된 전설은 중국 각지에 퍼져있다.

중국은 소위 춘추필법이라고, 자국의 불리한 역사는 기술하지 않았다. 일례로 고구려와 후한의 대전쟁인 좌원대전 역시 기록하지 않은 그들이 과연 그들이 우러러보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겼다는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을까?

연개소문이 고구려 수군을 통한 중원 정벌시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흔히 고구려하면 막강한 기마병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당시 강력한 수군을 가지고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수군을 활용하여 백제와 후연을 굴복시켰고, 고수대전 시 건무(영류왕)는 수군으로 패강에서 수나라 수군을 몰살시켰다. 게다가 보장왕 때 고구려는 신라와 당의 교역을 방해했는데 이는 강력한 수군이 뒷받침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연개소문의 수군을 통한 중원에 심장부로 통할수 잇는 요충지산동과 강소성일대 침공은 그냥 전설일까? 전설역시도 그 이유와 원인이 있으니전하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지 않을까 싶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여지기 때문에 오히려 위와 같은 전설, 신화 등이 그 역사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본다. 연개소문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리고 연개소문이 위 지역에서 얼마나 큰 활약을 떨쳤으면 연개소문과 관련된 전설이 저 멀리 중국 산동성과 강소성 일대에 나타날까?

위와 같은 전설을 단순한 전설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분명 연개소문이 위 지역에 쳐들어갔고, 그랬기 때문에 위와 같은 전설이 남아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어니하라는 전설에서는 어니하에서 당 태종의 말이 진흙수렁에 빠져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사로잡혀 항복문서 쓰기를 강요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강소성 몽룡탑 동북방에 세니하라는 강이 있는데 이 세니하가 어니하에 등장하는 어니하는 아닐까?

참고로 현재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한단고기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도망가는 당 태종을 추격하여 결국 당 태종을 사로잡아 수도 장안성에서 당 태종의 항복을 받고, 하북, 산서, 산동, 양쯔강 이북을 전쟁 배상으로 받아냈다고 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한단고기는 위서라며 위 내용은 거짓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 실패 이후 연개소문에게 궁복을 내렸는데, 연개소문이 이를 받고도, 당 태종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기록과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 방자하여 고구려 사신이 가지고 온 글 또한 궤변으로 가득찼음, 당나라 사신을 오만한 태도로 대했다는 기록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고구려가 전승국으로서, 당에게 전쟁 배상을 물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전승국인 고구려가 패전국인 당으로부터 전쟁을 일으킨 대가로, 당의 영토를 이양하라고 요청할 수 있는 노릇이다.

즉, 당 태종의 항복이 사실이든, 아니든, 고구려가 당의 영토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 방자하였다는 기록은 무엇을 말할까? 혹시 연개소문이 당 태종의 항복을 받지는 않았을까? 물론 이 기록은 연개소문을 깎아내리려는 저의에 빚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을 했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당에 대해 그들의 기록대로 교만하고 오만하게 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참고로 어니하에 빠진 당 태종이라는 전설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어니하에서 당 태종을 사로잡아 당 태종을 위협하며 항복문서 쓰라고 강요하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런 내용의 전설이 남아, 소설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연개소문이 당 태종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중국이 역대 최고의 황제로 숭상하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붙잡혀 항복문서 쓰기를 강요당하는 전설이 내려올 수 있을까? 이는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문서를 바쳤다는 것과 더불어 넒은 중원대륙을 고구려와 당이 양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당 태종의 항복기사를 다룬 『한단고기』는 그 내용 자체가 역사적 사실면에서 세인으로부터 찬반론을 일으키고 있고, 요동침공 관련 기사에 문제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당 태종과 요동침공 관련 기사의 석연찮은 태도나 삼국사기의 미묘한 의문 등을 보건대, 『한단고기』의 관련 기사를 무시하기보다는 일단 관심을 갖고 검토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는 연개소문을 중국인의, 신라인의, 유학자의 눈이 아닌 고구려인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기상을, 고구려인의 발자취를  저 멀리 중원에 떨친 일대의 호걸이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 고당대전이 고구려의 승리로 돌아간 것은 비단 고구려와 당뿐만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이 패전함으로써, 동방지역(고구려, 백제, 신라를 포함한 동쪽지역)을 직접 영유하려던 당의 계획은 좌절되었는데, 이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문화권, 당 중심의 천하질서로 묶으려던 당의 계획이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고당대전의 승리로, 고구려는 예전처럼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동방의 패자임을 실력으로 입증한 셈이다. 고당대전의 승리는 고구려만의 것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고당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개소문이야 말로 “조선 4천년 역사상 첫째 가는 영웅”이라 할 만하다.

 

5. 연개소문, 중국의 전설이 되다

 

①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은 여러 종류이다.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淤泥河)> 등 확인된 종류만해도 네 종류나 된다. 어니하와 분하만은 독목관과 대강의 줄거리가 비슷하다.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薛仁貴)가 구해준다는 이야기로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주연이고, 당 태종이 조연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에게 쫓겨 도망간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포(白袍)를 입은 설인귀가 등장한다. 연개소문은 특유의 비도(飛刀)를 사용해 대항하지만, 설인귀에게 패해 죽는다. 당태종은 위지공(尉遲公)에게 설인귀를 찾게 하는데, 설인귀를 시기하는 상관 장사귀(張士貴)는 그를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설인귀는 산신묘(山神廟)에서 달을 보며 신세 한탄을 하다가 위지공이 몰래와 끌어안자 놀라서 도망가다가 병을 얻고 만다. 당(唐)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들로부터 독목관을 빼앗으려 공격했으나, 오히려 고구려 장군 안전보(安殿寶)에게 장사귀의 아들과 사위가 포로로 잡힌다. 장사귀는 할 수없이 설인귀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는데, 먼저 설인귀의 부하 주청(周靑) 등이 안전보와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자, 설인귀가 병든 몸을 이끌고 출전해 안전보를 죽이고 독목관을 탈환한다."

 

 경극에 비춰진 연개소문은 용맹한 장군으로 묘사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나는 칼이라는 비도(飛刀)를 차고, 등에 깃발 모양의 고기를 하였는데, 이는 이민족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푸른 빛의 얼굴 화장은 위엄이 있는 그의 모습과 아울러, 동방 즉 고구려의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경극을 보면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에 대해 두려워 하며, 무술이 뛰어난 인물로 보면서 잔인하고, 사납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일본의 전통극 가부끼에 등장하는 김시민 장군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일본군에게 있어 진주성 대첩은 치욕스러운 전투이고, 그런 진주성 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을 좋게 볼리 없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나, 설인귀가 죽이지도 않은 연개소문을 죽였다는 것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한 중국인들의 심리를 잘 다룬다 하겠다. 연개소문을 두려워 한 그들의 심리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전설의 영웅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이 사용했다는 날아다니는 칼 ‘비도(飛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② 연개소문의 비도(飛刀)와 설인귀의 신전(神箭)

 

 앞에서 연개소문의 상징 다섯자루의 칼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연개소문의 다섯자루 칼은 고구려 남자들의 일상생활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다섯자루 칼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으니 바로 ‘비도(飛刀)’이다. 송원 때의 『사략』에는 연개소문이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생전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자,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전장에서의 실제 모습을 그린 것이다.

 

 경극 <독목관>에 등장하는 ‘날아다니는 칼’을 사용하는 연개소문과 맞붙는 설인귀의 무기는 신통력 있는 화살, 신전(神箭)으로 이는 무기를 통해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대립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연개소문의 ‘비도’는 권위용이 아닌 실전용이었다. 사략은 연개소문에 대해 “키는 열 척인데, 진홍색 사복(獅服)을 입고 적규마(赤虯馬)를 타고, 허리에는 두 개의 활집을 매고,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으니, 바로 고려장군 갈소문(曷蘇文)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실전에 나섰을 때 모습으로 여차하면 목숨을 잃는 전장에 나서면서 거추장스런 권위용 칼을 다섯 자루씩 지고 나갈 장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의 다섯 자루 칼이 실전용이라는 것은 이 칼이 ‘비도’라는데서 알 수 있다. 경극에서는 날아다는 칼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칼이라면 한 자루면 충분하지 다섯 자루일 이유가 없다. 비도는 고구려 고유의 ‘비도술(飛刀術)’, 또는 ‘비검술(飛劍術)’을 위한 무기인 것이다.

 

③ 공포의 고구려 비도술

 

『신간전상당 설인귀 과해정료 고사』(新刊全相唐薛仁貴跨海征遼故事:이하 『고사』로 약칭)는 명(明) 성화(成化) 7~14년(1471~1478) 사이에 북경에서 간행된 사회이다. 『고사』에 실려있는 <막리지 비도대전(莫利支 飛刀對箭)>이란 그림은 연개소문이 사용했던 비도술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측 위쪽에 ‘천자’라고 쓴 당 태종이 있고, 아래측 좌측에 신전을 든 설인귀, 우측에 비도를 든 막리지 연개소문이 잇다. 연개소문은 설인귀의 화살에 맞서 칼을 던지고 있다. 이것이 일부 전통무예 연구가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하던 검이나 도를 던지는 고구려 특유의 비도술(또는 비검술)의 실상이다. 그림에서 연개소문이 던지는 칼은 신통력으로 날아다니는게 아닌 그의 무술 실력 때문이다.

 고구려를 침략한 수 · 당군은 고구려 장수들의 ‘비도술’에 혼이 빠졌을 것이다. 옛 싸움에서 장수들의 무예 실력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장수들의 무예가 그 군대의 승패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창이나 칼을 가지고 덤빈 중국 장수들은 열이면 열 고구려 장수들에게 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창이나 칼이 닿기도 전에 묵직한 칼이 번개처럼 목을 관통했거나 갑옷을 뚫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 태종은 경극에 묘사된 것처럼 연개소문의 비도술에 혼쭐이 났으며, 그 어느 장수도 그에게 맞설 수 없었다. 비도술은 연개소문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고구려 장수나 전사들의 검술이었고, 연개소문은 비도술에 가장 정통한 무장이었을 것이다.

 

비도가 일어나 공중에서 춤을 추네

화살과 비도가 먼지를 일으키며 대적하네

비도가 화살을 대적하니 노을빛이 찬란하네

화살이 비도를 대적하니 화염이 일어나네

공중에서 두 보배가 대적하니

두 장수 모두 신통력으로 겨루네           -『고사』에 묘사된 연개소문의 비도술-

 

④ 청룡의 화신 연개소문

 

 경극을 보면 연개소문의 복장을 홍포(紅袍)로 묘사한다. 『사략』에서 연개소문의 복장을 ‘진홍색 사복(獅服)’으로 묘사한 것이나,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에서 연개소문을 ‘문무에 능한 홍포장군’이라고 묘사한 것이 그 예이다. 중국인에게 있어 붉은색은 각별하다. 그들은 광적으로 붉은 색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경극에서도 붉은 색은 긍정적인 인물을 가리키고, 검은색은 지혜로운 인물, 푸른색과 녹색은 민간의 영웅호걸, 금색과 은색은 신이나 귀신을 나타내는데, 연개소문이 홍포로 묘사되었다는 것은 설인귀가 백포를 입고 있기 때문이라 해도 예사롭지 않다. 

 

 경극 <분하만> 서두를 보면 연개소문이 영혼으로 등장해 "나는 본래 청룡으로서 세상에 내려온 것이다"라며 자신을 청룡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설인귀는 백호(白虎)로 등장한다. 청룡과 백호는 풍수나 고대 천문학의 사상(四象)에서 동쪽과 서쪽을 의미한다. 고구려가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점에서 이는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을 동쪽을 지키는 사방신으로 승화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당시 중원의 서쪽과 동쪽이 당과 고구려에 의해 분할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고사』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온 군영에서 두 장군(연개소문과 설인귀)을 환호하니, 온 세상이 두 사람을 강하게 하네/ 당조(唐朝)가 이 두 장군을 얻는다면 천하가 태평지 않은들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이는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의 신과 같은 무예에 경탄한 나머지, 그를 중국의 장수로 회유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런 마음이 동쪽을 지키는 청룡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경멸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연개소문에 대한 경외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를 청룡의 화신이라 평한 것이다.

 

↑당 태종에게 비도 4자루를 날리는 연개소문과 그 비도를 막기 위해 화살을 쏘려고 하는 설인귀↑

칼 한자루를 쥐고 말 탄 장수가 연개소문이고, 화살을 겨누는 장수는 설인귀, 칼 4자루가 날아가는 곳에 있는 말탄 자는 당 태종 이세민이다.


참고문헌 및 사이트

신채호, 조선상고사

이덕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김용만,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서병국. 대제국 고구려사

서병국, 고구려인의 삶과 정신

임승국, 한단고기
집필자 knightblack님께서 집필하신 것으로 좋은 글이며, 우리 대한민국인이 생각하여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