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영광을

정우산기 2007. 5. 11. 14:12
< 후삼국의 위치 연구 >


통일신라(대륙)와 독립한신라(반도) 두 신라와 고려사이에 존재했던 후삼국은 어디에 있었을까 ?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역사서는 모두 한반도내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삼국은 단기간 존재했기 때문에 명확하게 기록된 사서는 없지만 흔적을 남긴 여러 사서를 근거로 살펴보자


< 주요검토내용 >


1. 후삼국(後三國)을 기록한 사서(史書)
2. 사서의 비교검토
3. 주도(州道) 지명에서 일치성(一致性)이 없는 부분이 있다.
4. 후삼국시대의 인물검토
5. 특이한 현상(現象)에 의한 후삼국(後三國) 위치
6. 고려(高麗)의 위치는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
                        


< 후삼국을 기록한 사서 >


1) {삼국사기} (신라본기, 궁예, 견훤열전)
2) {삼국유사} (진성여왕대왕, 김부대왕, 후백제견훤)
3) {고려사} (태조본기)
4) {구오대사(舊五代史)}{신오대사(新五代史)}
5) {송서(宋書)}


후삼국이란 궁예의 태봉국(그리고 왕건의 고려)과 견훤의 후백제 그리고 신라의 세나라로 있을 때를 말하고 있는데

이 시대를 나타내는 기록으로는 정사로써 {삼국사기}가 있고 야사인 {삼국유사}에 후백제 기록이 있고 {고려사} 태조의 기록이 있으며 {오대사} 및 {송사}에 고려초기가 기록되어 있다.


고려 초기의 역사 기록에 대한 과정을 대략 살펴보면 초기의 기록이 전화(戰禍)로 없어져서 고려 {태조실록}이 편찬된 뒤에 그것을 보고 {삼국사기}를 편찬했으므로

1차 사료는 고려 {태조실록}
2차 사료는 {삼국사기}
3차 사료는 {삼국유사}
4차 사료는 {오대사} 및 {송사}의 고려기록이 된다

그런데 1차 사료인 고려 {태조실록}은 최초 기록이 분실되어 1033년에 다시 편찬되었으므로 그것이 최초의 것과 같은가 다른가 하는 점과 어느 신라를 계승한 고려 기록인가를 분명히 가릴수 없다는 점이 사실상 문제의 촛점이다

더 어려운 점은 궁예 및 견훤에 대해서 {25사}에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25사}가 삼국 이전에도 한반도를 기록했다고 한다면 당연히 궁예와 견훤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음직한데 전혀 없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건과 궁예와 견훤의 기록에서 한반도 상황으로 볼 수 없는 부분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며 연구과제이다.


이제 위의 사서를 비교 분석하여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



< 사서의 비교검토(신라말과 高麗초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


{고려사}에서 1033년 "7대 실록"이 편찬된 이후에는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지만 그 이전은 없다.  

신라 7 ~ 8세기 일식의 관측지 연구에서도 한반도 중심의 기록임이 분명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7대실록}이 편찬되기전 100년의 기록이 문제이다.  
초기 실록이 없어져서 1033년에 새롭게 편찬되었는데 이 곳에는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이 없는 등 실제와 다를 수도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한다.

즉,
< 1) 고려 {태조실록} 과 {삼국사기}의 신라말 관계부분 >  


(가) 고려 {태조실록} 과 {삼국사기} 관계부분은 서로 영향을 미칠수 있다

행적이 같으니 서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태조실록』이 『삼국사기』에 영향을 미치느냐 아니면 『삼국사기』가 『태조실록』에 미칠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고려초기와 신라말은 같이 존재했던 시기이니 당연히 관계가 있는 내용은 같은 내용으로 기록될 수 밖에 없다


(나) 초기 {태조실록}은 언제 편찬되었을까?

사관(史館)과 사관(史官)이 설치된 때가 광종 이후로 보여지며 현종(1009-1031년)초 소실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사}에서)

초기 {태조실록}이 없어지고 다시 편찬된 {태조실록}에는 자연현상등 과학적으로 그 시대를 밝힐수 있던 자료가 부족하고 또한 중국에 있던 통일신라 및 한반도에 있던 신라와 후삼국에 대한 의문점을 밝혀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 1033년에 편찬된 {태조실록} 과 초기의 원(原) {태조실록}은 다를 수 있는가?

① 1013년 이전에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니 기억을 되살리듯 쓴것이 있다.

{태조실록} 은 일식 기록 등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이 적다는 것(일식 처음 1013년. 흑점 1009년)과 전쟁으로 자료가 유실된 상태에서 기록한 것이므로 다를 수 있으며 신라가 한반도에만 있다고 생각한 이후의 작품으로 보여지고 있으니 다르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② 김부식은 『예종실록』(1105-1122년사이)을 편찬하고 그후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김부식은 {예종 실록} 을 편찬하여 보고 송나라에 다녀온 이후 우리역사가 미진하므로 송나라에서 수집한 기록과 한반도에 있는 기록을 종합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라) 새로운 {태조실록} 이 {삼국사기}에 영향을 미쳤을까?

{태조실록} 이 편찬된 이후에 {삼국사기}가 편찬되었으니 당연히 영향을 미칠수 있다.
{태조실록}은  덕종 3년(1033년)에 황주량에 의해서 36권이 완성되어 편찬되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편찬되었으니 후삼국관계 기록은 앞에 편찬된 기록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를 기록한 것이나 신라말기의 기록은 1033년에 편찬된 새로운 {태조실록}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새로운 {태조실록}은 없어진 자료 때문에 1033년경의 고려상황에 맞추어 기록하였을 것이다.


(마) {고려사(高麗史)} 태조본기와 {삼국사기}의 차이점

고려 이전에 우리역사는 사, 로(泗 盧) 즉 영, 해(寧 海)지역에 있던 통일신라와 반도에 있던 신라로 구분되어 있으며 북쪽에 있던 발해와 이주(夷洲 : 지금의 대만)땅에서 왜(倭)가 일본이란 국호로 변경된 이후 시대 이므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차이점은 당연히 있었을것으로 사료된다.






{삼국사기}는 {고려사}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의 도표에서는 내용이 분명히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끝 내용을 밝혀줄 고려초기 {태조실록} 이 없는 상황에서 진실여부을 가릴수 없는 부분이다.

다음내용은 주의깊게 검토되어야 할것이다.

① 내용을 보면

㉠ 같은 내용이 시기가 다르게 기록된 것 : 918, 922, 923, 927년
㉡ 문자가 다른 것 : 918, 920, 927, 928년
㉢ 다른 시기가 같은 시대로 기록된 것 : 922


② 같은 달, 같은 해 같은 내용임에도 지명이 각각 대야성(大耶城)과 대량성(大良城)으로 다르다.

"삼국사기"에서 대야성(大耶城)에대한 기록

진흥16년 정월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
진흥26년  9월 완산주를 폐하고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였다.
선덕11년  8월 윤충이 대야성(大耶城)을 쳐 함락, 춘추의 딸도 죽고 부군 품석도 죽다.
효공 5년  8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
신덕 5년  8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
경명 4년 10월 견훤이 1만명으로 대야성(大耶城)을 쳐 함락하고 진예성(眞禮城)에 진군

☞ 대야성(大耶城)의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있으나 {고려사(高麗史)}에는 대량(大良)으로 되어 있고 현재 한국지리지에는 없으나 옛 강주(康州)가 있던 중국광동성 광주(廣州) 남쪽에 지금도 대량(大良) 즉 순덕(順德)이 있다.




☞ 비사벌-완산주(진흥16)-완산주폐지(진흥26)-대야주설치(진흥26)-완산주(신문왕)
현재 한국에는 완산(完山)이 있고 안휘성에는 완산(莞山)이 있다.


(바) {삼국사기}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동신성모상(東神聖母像)
(김부식의 동모신선상과 {고려도경}의 동신성모지당)


김부식이 송에 다녀온 (1111-1117) 이후 {삼국사기}는 1145년에 편찬되고 {고려도경}은 김부식이 송에 다녀온 이후 고려에 왔던(1123) 서긍이 지었는데

김부식이 송에 가기전에는 몰랐던 동모신선상을 서긍이 왔을때 고려에 모셔졌다는 것은 김부식이 다녀온 이후 새로 모신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로 미루어보면 송나라에서 가져온 동이(東夷) 기록이 우리역사를 정리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왕이 정화년간(政和年間)에 우리(高麗) 조정에서 상서(尙書) 이자양(李資諒)을 송(宋)으로 파견하여 조공하게 되었는데 이때 김부식이 문한(文翰)의 임을 맡고 수행하여 우신관(祐神?)이란 곳에 가서 여선(女仙)의 상(像)을 모신 일당(一堂)을 보았는데

관반학사 왕보(?伴學士 王乷)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 등은 아시오?"하며 말을 이어 "옛날에 어떤 제실에 여자가 있었는데 부군이 없어 아이를 배어 사람들의 의심하는바 되자 곧 배를 타고 진한에 이르러서 아들을 낳았다.  

이가 해동의 시주가 되고 제녀는 지선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仙桃山)에 있었다고 하는 바 이것이 곧 그 상이다.  

나는 또 대송국신사 왕양(大宋國信使 王襄)이 지은 동신성모제문(東神聖母祭文)에 어진 사람을 낳아 나라를 창시하였다." 는 구절을 보았는데 이 동신이란 곧 선도산신(仙桃山神)의 성자(聖者)임을 알 수 있으나 그 아들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 어느 때의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지금 다만 그 고사를 생각한다.


{고려도경} 제 17권 동신사(東神祠)

선인 문안에 있다.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 개성에 있었다는 기록이다.  
김부식이 송나라에 가기전 있었다면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신사는 김부식이 송에 다녀온 이후에 모셔졌을 것이고 뒤에 사신으로 개성에 온 서긍이 보았을 수 있는 것이다.


< 州, 道, 지명에서 일치성이 없는 부분이 있다 >


1) 신라9주 이외의 주명이 있다

후삼국시대에 신라 9주의 주명(州名)은 명주,전주,상주,무주,강주,양주,한주,삭주,능주(溟州,全州,尙州,武州, 康州, 良州,漢州,朔州,能州)이다.

- 본기에서 신라9주 이외의 주 : 운주, 연주, 순주, 치주, 해주(運州,  州, 順州, 淄州, 海州)
- 견훤전에서 신라9주에 속한 주명 : 상주,전주,완산주,강주,무주(尙州,全州,完山州,康州,武州)
- 견훤전에서 9주이외의 주 : 진주, 염주,백주, 정주,순주, 양주,(眞州, 鹽州,白州, 貞州,順州, 楊州) 완산주,무진주
- 궁예전에서 신라의 9주에 속한 주 : 상주(尙州)
- 궁예전에서 신라 9주 이외의 주 : 광주,충주,흥주,나주,죽주,양주,공주,견주,청주(廣州,忠州,興州,羅州,竹州, 楊州,公州,見州,靑州)
- {고려사} 초기(935년 이전) 신라 9주이외의 주 : 개주, 정주, 염주,백주,광주,충주,청주, 광주,나주,동주,운주,아주,등주,해주,용주,강주,기주,양주(開州,貞州,鹽州,白州,廣州,忠州,靑州,光州,羅州,東州,運州,牙州,登州,海州,龍州,剛州,基州, 楊州)


위와 같은 신라 9주 이외의 州명칭이 현재도 있는 것

- 한국 : 광주,충주,나주,양주,공주,청주,광주,해주,전주,상주
- 중국 : 광주,충주,라주,양주,청주,광주,해주,전주,등주,치주,백주

신라의 9주는 백제와 고구려를 패망시킨 신라의 "주"이므로 이 신라의 위치는 지명, 조공일정, 특산물생산지, 홍수, 일식관측지, 인구비교 등에 의해서 현 중국의 강회(江淮)지역에 있던 신라임이 밝혀지고 있으므로 9주 이외의 주명이 있는 것이 한반도 신라의 주명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2) 행정기록과 실제의 주현(州縣) 명칭이 다른 것이 있다


{고려도경} 3권 군읍 항목에 이르기를 '주현의 설치는 실제와 명칭이 맞지 않는다. '

앞에서 {고려사}에 소개된 도명과 다른 도명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는데 군읍에서 주현의 명칭이 실제와 기록이 다르다고 하였다.

이는 황해 서쪽에 있던 신라 기록과 한반도에 있던 신라 즉 두 신라 기록을 하나의 기록으로 보고 정리하고 이를 바로 고려에서 인용하다 보니 실제와 기록이 다르게 되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3) 고려의 도명(道名)에서 이상부분이 있다


고려 초기 도명에 없는 도가 {고려도경}에 있다.
고려시대 도명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그와는 다른 도명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지리지에 문제가 있음을 뜻한다.

① {고려사} 권56에서 고려의 도(道)와 {고려도경}에서 성종(981-997)때 10도는 관내도, 중원도, 하남도, 강남도, 령남도, 령동도, 산남도, 해양도, 삭방도, 패서도이고
현종(1009-1031)후 5도 2계 즉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 교주도, 서해도, 동계, 북계가 있었다.  

그런데 1123년 서긍이 쓴 {고려도경}권 3에서는 봉분(封墳)에 나주도, 광주도, 연산도(羅州道, 廣州道, 燕山道)가 있었다고 기록하였고 군읍에는 주현(州縣)의 설치는 실제와 명칭이 맞지 않고 취락이 번성한 곳일뿐이라 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 (최초 선화5년)

- 1127년 서주빈(徐周賓)이 빌려갔으나 분실
- 1137년 강서성 남창현 홍주에서 해도 2권만 발견
- 1167년 건도본(乾道本)제작
- 포정박(1728-1814) - 건륭(1735-1795)때 건도(乾道)발견 - 1921년 영인발행함

☞ 건도(乾道)는 1167년 송(宋)년호이다.

건도본은 서긍의 "고려도경"을 운남성 징강현인화조씨소산당에서 40권을 판각하여 출판하였고 이를 건도본이라 칭함 위에 {고려도경}에 소개된 도명은 {고려사(高麗史)}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긍이 잘못 기록할 수도 있고 {고려사}의 기록과 다른 도명이 있을 수도 있다.


3) 지명에서 이상 부분이 있다


(1) 고려태조 훈요 10조에 있는 차현(車峴)은 어디인가 ?

{고려사}의 태조 훈요10조에서
차현(車峴)과 공주강(公州江) 이남의 인물은 등용하지 말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차현과 공주강에 대하여 살펴보자.
차현으로 표기된 곳은 없고 현재 차현(車峴)을 차령(車嶺)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차령은 한국에는 천안과 공주 사이 차령산맥으로 보고 있고 중국에도 안휘성 함산현(含山縣)에 있다고 하였다.  

중국 함산의 북쪽에는 평원 백마하 동명 주류성 항성이 있고
서쪽으로 동성 잠산 독산 덕안 무령 광주 나주 등이 있고
남쪽에는 진해 무주 정주 광주 대량 강주 등이 있다.

웅주를 940년에 공주로 변경하였다고 하였으나 기록에는 주현의 명칭을 고치다라고만 되어 있는데 3년 후 공주강(943년 훈요10조에)으로 표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에는 웅주를 분주로 고쳤다고 하였으니 분주와 웅주와 공주가 같다고 볼수가 없다.

그러므로 차현과 공주강으로 왕건의 위치를 살펴보는 것도 더 자세히 연구가 되어야할 사항이라 하겠다


(2) {송사} 고려지역은 고려전(高麗傳)에서 구주속기주(九州屬冀州) 및 현도(玄 )지역으로 표기되고 있으니 고려초기 수도와의 관계는 없는가 ?


{송사(宋史)} 외국 고려전(外國 高麗傳)에 의하면 고려는 우(禹)의 구주(九州)인 기주(冀州)에서 고구려(高句麗)를 이어가는 나라로 현토(玄 )지역에 있다고 하였는데 송나라 제작 우적도에서 "기주"는 태행산맥 북쪽이고 현재의 기주는 하북성중부 석문의 동쪽에 있다.

현도는 고구려의 북평 태원 은산 신성과 옥저의 해주 사이에 있었으니 현 하북성 북쪽이 현도가 될 수 밖에 없으므로 기주와 현도의 관계에 의하면 고려의 초기 건국 위치에 의문이 있을수 있으며 의문의 주와 인구 등에 의하여 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10세기 이후의 고려 수도는 개성임이 일식관측지 연구에서 확인되고 있으니 10세기 이전인 고려 초기의 수도 위치와 후삼국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3) 벽골지 축조 이후와 신라말 견훤시대 지명이 같지 않다.
(김제는 산동성 동명 남쪽에도 있고 전라북도에도 있다)



김유신 탄생지라는 진천, 흘해왕때 축조되었다는 벽골지가 있는 김제, 진흥왕때 설치되었다는 완산주와 같은 완산의 전주, 신라에서 사독지라 하여 제사 지내던 청해진이라는 완도 등이 있는 전라도 지역에는 벽골지를 축조한 320년 이후에 신라와 백제의 전투기록이 있었으므로 당연히 신라말과 같은 지명이 등장 할 수도 있으나 없다.

즉 견훤과 신라 및 고려의 전투지명과 같지 않다.
왜 일까?

김제의 벽골지가 진짜 삼국시대 벽골지이고, 전남 완도가 진짜 청해진이고, 전라도가 백제본토와 후백제 지역이라면 사서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벽골지 축조 이후나 후삼국시대의 지명이 같은 것은 있어야 하며 전라도가 백제에게 빼앗긴 기록이 있어야 하고 다시 신라가 빼앗은 기록이 있어야 한다.

{25사} 및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등장하는 모든 기록이 일치하는 중국내의 삼국 즉 우적도 범위에 일치하는 역사를 부정할수 있는 반증을 해야 하고 한반도에서 후삼국과 일치되는 설명이 되어야 한다.


(4) 신라 수도 금성과 왕건 부친의 금성은 다른가 ?


금성은 신라 초기부터 수도로 기록되고 있다.  
궁예가 있을때는 물론 신라의 수도 명칭이 금성이 아니고 월성 및 명활성이라 하였으나 {신 구당서}에는 신라 수도는 금성으로 되어 있는데 궁예의 부하이며 왕건의 부친인 왕륭이 태수로 있던 곳이 금성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

금성이 신라 초기의 수도였다가 신라가 망하고 경주로 변경시켰다고 하였으나 {신 구당서}에서 신라 수도는 금성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중국에 사로신라가 있었음이 지명 특산물 일식등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1660년 발행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 지금의 사로(泗盧)지역인 덕안의 동쪽에 경주가 있었으나 지금은 회원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지금 경상도에는 경주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도 {중국25사}에 있는 신라 수도 금성을 반도로 옮겨 올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신라의 수도 금성이 어디이며 왕륭의 금성이 어디인가하는 점이다.

왕건의 부친 왕륭이 태수로 있던(896년) 지역인 금성은 과연 어디였을까 ?  
신라와 같은 시대에 있었으며 궁예의 부하이므로 신라 수도 금성(金城)과 같은 곳일 수는 없다.


(5) 개성과 송악과 開州는 같은 곳인가 ?
(高麗 초기 수도 위치는 어디인가?)

초판 {태조실록}도 없고 {7대실록}도 없고 {고려사}에 의한 고려역사와 신라말기에 기록을 믿을 수 밖에 없으나 사서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은 {송사}와 {고려사}와 {삼국사기}에서 차이점과 인구의 차이로 미루어 고려의 초기 수도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 송악과 개성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 >


효소왕 3년(639) 겨울 송악, 우잠(松嶽 牛岑)의 두성을 쌓다.
성덕왕 12년(713) 12월 개성(開城)을 쌓다.
헌강왕 3년(878) 고려 태조 왕건 송악군(松岳郡)에서 태어남.
효공 2년(898) 궁예가 수도를 송악군으로
효공왕 9년(905) 궁예가 도성을 철원으로 옮김.
경명왕 2년(918) 고려 태조 즉위
경명왕 3년(919) 도성(都城)을 송악군(松岳郡)으로 하다.

☞ 송악(松嶽)과 송악(松岳)은 같은가 그렇지 못한가 ?
☞ 송악과 개성(開城)은 같은가 다른가 ?
☞ 개성과 개주는 같은가 다른가 ?


(6) 고려가 사신(使臣)을 보냈는데 사신의 기록에서 지명
(고려가 보낸 사신 박암과 왕봉규시대 지명이 중국에는 있다.)


① {신오대사}에서

동광원년(923)에 오월국문사(吳越國文士) 박암(朴巖)을 고려에서 후당에 보냈다.
오월과 가까운 곳에 고려 신라 지명인 강주, 대양, 회화, 고, 울, 백, 완산, 나주(康州, 大良, 懷化, 高, 鬱, 白, 莞山,羅州), 황산등이 있다.


② 후당(後唐)역사라면 신라본기에 수록되겠는가?

☞ 경명왕 8년(924) 정월

사신을 후당으로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천주(泉州)절도사 왕봉규도 또한 사자를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遺使入後唐朝貢泉州節度使왕봉규亦遺使貢方物)


☞# 경애왕 4년(927) 3월

3월에 황룡사탑이 搖動(요동)하여 북쪽으로 기울어졌다.
고려태조는 후백제와 싸워 친히 近嶽城(근악성)을 격파하였다.  
후당 명종은 權知康州事 왕봉규(권지강주사왕봉규)를 懷化大裝軍(회화대장군)으로 삼았다.

4월에 권지강주사 왕봉규는 사신 임언을 후당으로 파견하여 조공하니, 후당 명종은 그를 중흥전에 불러대하여 물자를 하사했다.  

康州(강주) 소관인 突山(돌산)등 네 고을이 고려 태조에게 歸順(귀순)하였다.
(太祖親破近巖城唐明宗以權知康州事왕봉규爲懷化大裝軍
4월知康州事왕봉규遺使임언入後唐朝貢明宗召對中興殿賜物康州所管突山等四鄕歸於)

☞ 왕봉규는 신라인인가 아니면 당나라 사람인가 ?
☞ 왕봉규가 당인(唐人)이라면 그 사실이 신라사에 적힐 이유가 있는가 ?
☞ 왕봉규가 신라인이라면 인사권을 당에게 빼앗긴 것인가 ?
☞ 천주, 강주, 회화(泉州, 康州, 懷化)는 광동성 호남성에 있는데 그 일부가 고려 태조에게 귀순될수 있는가 ?


(우리나라 지도에는 강주, 천주, 회화의 지명이 없으나 중국에는 광동성 강주, 대량과 함께 있다.)


4. 후삼국 시대의 人物검토


1) 왕건이란 이름을 가진 인물이 중국인명사전에 있다
  

# {구오대사} 136

전촉-왕건진주항성인야 연건지유자야 건졸연습위위
(前蜀-王建陳州項城人也 衍建之幼子也 建卒衍襲僞位)

# {오대사} 63    

전촉-왕건자광도허주무양인야
(前蜀-王建字光圖許州舞陽人也)

# 중국인물사  

후위 - 광영인 관종  기청이주자사
(後魏 - 廣寧人 官終  冀靑二州刺史)
당--- 영천인자중초
(唐--- 潁川人字中初)
전촉 - 무양인 건분촉    
(前蜀 - 舞陽人 建奔蜀)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은 "촉"의 임금 왕건이 고려태조와 같은 시대 인물이라는 점이고
그의 출생지가 주(周)와 고조선의 경계인 서화가 있는 지역이고,
당(唐)과 통일신라의 경계인 항성(項城) 출신이라는 점이다.  
항성은 신라땅이다.  
그런데 촉나라 임금이 되었다.  

그가 죽은 해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위 두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고 {고려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
또한 {삼국사기} 에도 미치지 않았을까 ?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2) 견훤에 대한 기록도 여러가지 이다
진성6년(892)에서 936년까지 45년간


(1) 견훤의 출생에 대한 설이 많다는 것은 그의 활동 위치에 대한 의문과 함께 증폭되고 있다.  적어도 이 시대는 인간이 존재하던 시대이고 신화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견훤은

☞ {삼국사} : 견훤 이씨-견씨(李氏-甄氏) : 아자개 4남을 둠 견훤도 그 중 하나
☞ 이비가기(李碑家記) : 진흥대왕(504-578)과 백륭부인의 아들 구륜공-선품-작진과 왕파리가 원선(아자개)을 낳고 아자개는 견훤을 낳다
☞ 고기(古記) : 광주 북쪽 한부자의 딸과 지렁이에게 견훤이 출생
견훤에 대한 기록에서 차이점이 많다.  

이것은 천년전의 일이므로 더욱 의아스럽다.


(2) 신라9주와 다른 주명이 있고 견훤의 활동지명도 중국에 있으므로 그의 활동무대를 반도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신라의 9주와 또다른 주명이 있고 대량(大良) 즉 대야(大耶)라는 지명이 중국에는 있고 반도에는 없으며 강주(康州)도 중국 고지도에는 대량 근처에 있는데 지금은 남강이 근처에 있고 또 광주(廣州)가 근처에 있다.  

그러므로 견훤의 활동위치도 자세히 알수가 없다.  
({고려사}에는 대량(大良)이라 하고 {삼국사기}에는 대야(大耶)로 기록되어 있다.)


(3) 견훤의 아버지가 고려(高麗)에 항복했다고 하는데 아자개와 견훤의 관계 기록은 견훤과 그 아들과의 관계 기록에 못미치고 있다.

☞ 아자개는 경명왕2년(918)에 고려태조에 귀순했다(삼국사기, 고려사)고 기록하고 있는데 견훤의 아버지가 아자개라면 아버지는 항복하고 아들은 반역하고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  

그런 일이 있다면 왕건으로부터 아자개에게 아들을 설득하라는 기록이나 그와 비슷한 기록은 왜 없을까?

(4) {중국25사} 에는 궁예 견훤의 기록이 없으니 반도 기록(?)

궁예에 대하여 {중국25사}에는 기록이 없고 {삼국사기}에만 있으니 반도에서 활동한 것으로 볼수도 있으나 고려태조 왕건 기록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중국에 없다는 것으로 반도 기록이라 못 박을수도 없다.


5. 특이한 현상에 의한 후삼국 위치


1) 궁예와 도적들의 복장
(진성5년(891)에서 경명2년(918)6월까지 28년간)

☞ 효공왕9년(905)赤衣賊 黃衣賊이 궁예에 항복하다.
☞ 진성10년(896) 赤袴賊이 서울 서쪽까지 침입


(1) 궁예와 관계된 의문점---도적들의 착용 의복의 색깔

어떤 형태의 유행이던 언젠가는 되풀이 되고 있다.  
도적들이 자기들의 집단표시로 일정한 복색을 하고 다녔다면 그것은 어떤 지역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땅이 좁은 곳에서는 도적이 창궐한다 하여도 일정한 복색을 하고 있을수 없다.  
일정한 복색을 하고 다녔다면 그것은 광활한 지역에서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한족 역사에는 홍건적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한 1033년 이후에 한반도에서 복색을 같이 한 도적의 기록은 없다.  

궁예와 신라에서 도적들이 이상한 복장을 하고 다녔다면 이것으로 궁예가 있던 지역을 가늠 할수도 있을 것이다.


2) 高麗 및 조선 인구의 차이와 高麗 초기 실록과의  상관관계

인구는 전쟁과 병마로 준다하여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많아진다.  
자연세계에서 약육강식에 의해서  사라지는 종도 있지만 인간은 지금까지 번창하여 왔다.  한부족이 없어진다 하여도 그 땅에는 새로운 인간이 들어와 매우고 있는데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역사에서 삼국시대 인구의 기록으로 살펴본바 조선초기의 인구 기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인구의 조사가 잦았으므로 기록에 의하면 조선초기 인구는 약 50만(북쪽양계 빼고 37만) 정도로 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 수도 인구는 13만이고 전체 고려인구는 210만명(송사)으로 되어 있으니 조선의 강역보다는 더 넓은 지역의 고려땅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 초기 실록이 없어진 것과 어떤 관계는 없을까 ?

7대 실록이 편찬된 1033년 고려 강역의 영향을 받아서 고려 기록이 잘못 기재되고 그로 인하여 {삼국사기}가 김부식시대의 고려강역에 맞추다보니 그렇게 된것인가
우리는 두 신라와 후삼국에 대하여 보다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6. 고려의 위치는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는가 ?


1) 고려 태조가 한반도에서 건국을 하였다하면 다음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

☞ 중국에 있던 사로신라가 통일후 만든 행정조직 9주 명칭이 관계없는 지역에서 사용된 이유
☞ 광동성 지역인 강주(康州), 광주(廣州), 대량(大良) 등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는 기록은 어떻게 설명하며 절강성 영파에 있는 '고려사관유지'는 무엇이라 설명해야 하는가 ?
☞ 견훤은 고려 사람이 진호를 고의로 죽였다하여 백제 고도인 웅진으로 진격하였다 하였으니 웅진의 위치가 한반도에 있다고 해야 할것이지만 {25사}와 우적도 및 중국지도가 있는 한 웅진을 한반도로 옮길수는 없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929년)
☞ {송사}에서 우(禹)의 9주중 하나인 기주(冀州)와 현도 지역에 있었다는 고려는 어떻게 설명할까 ?
☞ 조선인구보다 많은 고려 인구가 살던 지역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1) 고려태조가 중국에서 건국하였다면 한반도 고려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려사에 의한 1013년 이후의 고려의 일식관측지는 경기도 개성을 중심으로 한반도로 밝혀졌다.

☞ 중국에 있던 고려가 언제 무대를 옮겼다고 하겠는가?
☞ 궁예와 견훤에 대한 기록이 왜 {중국25사}에는 안보이는가?


3) 고려 태조 기록은 여러 자료가 있으므로 신라말과 고려초기 기록은 전체에 의해서 규명되야 한다.

☞ 고려의 건국지를 어디로 보아야 하는가?
또한 궁예의 태봉국과 견훤의 위치에 대한 것도 새롭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 맺음말 >

우리역사는 의문투성이다
어찌 이 방대한 역사를 일개인이 밝힐 수 있겠는가 ?
이러한 문제점, 의구심에 대한 연구를 학자들이 깊이있게 연구하고 밝혀야 한다
이미 연구해 놓은 자료만 가지고 평생 먹고 살수는 없는 것 아닌가 ?
출처 : 쉬즈곤
글쓴이 : 쉬즈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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