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영광을

정우산기 2006. 12. 15. 12:25
古代 三國의 무대는 中國대륙이었다
  - 월간 신동아 97년 2월호에서 발췌-
 
"고려시대 김부식이 남긴 "삼국사기에는 다양한 천체현상과 기상이변들이 나타난다. 많은 과학자들이 이 기록들을 과학적으로 검증해온 결과 고구려, 신라, 백제가 한반도에 있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국사학계는 침묵만 지켰고, 실험결과는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전에 묻혀가고 있다. 왜 그럴까? 당시의 현장을 재추적해 보았다. " -서문 
     (전략)한국 역사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서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은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 세계의 천문학을 주도하다는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천체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캘리포니아 과학기술대학에서 연구원 생활한 박교수는 삼국시대의 천문상태로 가기 위한 프로그램을 짰다.   천문현상은 정연한 물리법칙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천체역학적 계산에 의해 몇 천년 전의 기록도 그 진위여부를 과학적으로 밝힐 수가 있다.
       이처럼 천문현상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작업은 특히 고대사 연구에서는 특별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사서(史書)에 기록된 정치, 사회,문화적인 내용들은 집필자의 주관이나 역사적 변천과정에서 선별되고 왜곡될 소지가 높은 반면, 천문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은 그 성질상 변조가 어렵고 설혹 조작이 있었다고 해도 대부분 조작사실을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일본학자들의 우리나라 천문기록에 대한 역검증을 해볼수 있는 기회다.
      박교수는 먼저 중국 사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우리만의 독자적 관측기록인 태백주현과 달이 행성을 가리는 엄폐현상에 대한 검증작업을 벌였다. 이 기록이 정확하다고 판정되면 천문관측에 대한 우리의 독자성을 일차적으로 보장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금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인 태백주현은 신라에 4회, 백제3회, 고구려1회등 모두 8회가 기록되어 있다. 이중 금성이 태양에서 멀리 떨어짐으로써가장 밝아지는 시기를 계산해본 결과 삼국시대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4개로 50%의 적중률을 보였다.
     또, 다른 우리의 독자기록인 달이 행성을 가렸다는 엄폐현상을 보자. 달이 행성을 가렸다는 기록은 신라에 17회, 백제2회로 모두 19회이다. 여기서 백제의 기록 중 1회는 동일한 시기에 신라에 기록이 있고, 나머지 1회는 중국의 진서(晉書)에도 나오므로 이를 제외한다면 신라의 17회 기록이 우리만의 독자 관측으로 일단 상정할 수 있다.
     박교수가 계산한 결과17회 현상 중 9회는 천체역학적으로 실현이 확인됐고, 3회는 달에 상당히1~3도)접근하였으며, 2회는 다른 행성이 달에 근접했다. 이 역시 삼국사기의 기록들이 천체역학적 계산 결과와 매우 인상적인 일치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일식기록의 관측
 
       박교수는 일단 한국과 중국의 일식 기록이 대부분 일치한다는 점을 고려해 북위 10도에서 60도(위도), 동경 90도에서 150e(경도) 지역을 분석대상으로 잡았다. 이는 한반도를 포함해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까지 고려한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킨다. 이를 다시 50×60, 즉 3,000개의 블록으로 나눠 일식 관측이 어디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졌는지(최적관측지)를 파악해 보기로 했다.  작업은 방대했다. 워낙 광범위한 지역을 고려하다 보니 일식 자료를 입력하고 컴퓨터를 돌리는 시간만도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이윽고 삼국의 일식을 볼 수 있는 최적관측지가 컴퓨터 모니터에 지도로 나타났다.
      그런데, 컴퓨터 지도가 이상했다. 이 작업에 처음부터 참여해 마지막 결과물을 살펴보던 박교수팀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나왔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최적관측지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에서 , 그것도 서로 지역을 달리해 나타난 것이다.
     신라의 경우 일식 기록이 있는 2세기까지는 최적관측지가 중국 양자강 유역으로 표시된 반면, 7세기 이후, 즉 후기신라(통일신라)는 한반도로 나타났다. 또 백제는 발해만 유역, 기록횟수가 가장 적은 고구려(11회)는 백제보다 더 북방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실제로는 지역이 더 넓고, 다양하지만, 기술이 모자라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그림을 보고 어딘지 모를까봐 왼쪽에 한반도의 위치를 표시해봤습니다.
백제와 신라가 장마의 기록이 한달이상 차이가 나는 것은 지금과 같이 백제와 신라가 동서로 위치한 것이 아니라, 남북으로 위치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실은 천문학적 검증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박교수가 실험한 것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총 67회의 일식 기록중 동아시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식 54개. 이를 관측한 나라별로 분류한 다음, 최적 일식 관측치를 추적한 결과다. 기록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최적 관측지는 바로 그 국가의 위치가 된다. 이는 서구에서도 보편적으로 공인받는 방법이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당시 중국의 일식기록을 베꼈다면 중국의 특정 장소에 삼국의 최적관측지가 일치해 나와야 하는데, 위치가 서로 확연하게 다르다. 그렇다고 한반도는 더욱 아니다.
      무언가 계산방법이 잘못된 것일까. 방법론이나 천문학적 계산에 있어서 오차는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고대 삼국은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에 위치했다는 말인가. 박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 실험결과 삼국의 최적 관측지가 위도상으로 서로 매우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은 중국의 사서를 베껴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김부식이 당시의 중국 사서에서 일식기록을 베껴서 쓸 때, 삼국마다 이렇게 다르게 배치할 확률은 계산상 0.03%에 불과하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이는 삼국의 일식기록이 서로 다른 중국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관측한 결과임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오히려 중국의 일식기록이 삼국의 관측기록을 차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후한의 일식기록은 외부에서 들어 적었다는 기록 건수가 전체의 40%에 이릅니다. 특히 고구려 태조84년(서기116년)의 일식기록에 대응하는 후한서, 오행지 일식기사에는 "요동이문(遼東以聞:요동으로부터 들었다.)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는 동이(東夷)족 자료가 전달됐을음 의미할 수 있습니다."
 
    2. 삼국은 한반도에 없었다.
 
        박교수는 삼국이 대륙을 근거지로 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삼국사기에 나타난 홍수기록이다. 먼저 신라의 홍수기록을 살펴보면 2세기에서 4세기까지는 음력 4~5월에, 5세기 이후부터는 음력 6~7월에 큰물(홍수)이 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장마와 같은 기상현상은 1백~2백년 사이에 변하지 않는 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기록 역시 지구상에서 위치가 다른 두 곳에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음력 4~5월에 큰물이 나고, 그 이전과 이후에는 강우량이 적은 곳이 어디인가. 동아시아에 산재한 기상측후소가 최근 50년~1백년간 축적한 강수량 자료를 분석해본 결과 양자강 유역과 그 이남으로 드러났다. 같은 방법으로 음력 6~7월에는 산동반도와 한반도지역에 강우량이 많았고, 이 시기 양자강 유역과 그 이남지역은 강우량이 많지 않은 것이 확인됐다. 결국 이 같은 기상학적 특성은 신라의 일식기록으로 찾은 것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는 큰물 기록이 각각 7회와 6회만 나와 통계적 분석이 신라보다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백제의 경우 큰물이 발생한 달이 5월에 3회, 6월에 4회가 있었고, 고구려의 경우 5월에 3회, 6,7,8월에 각각 1회씩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백제는 신라보다 큰물이 한달 정도 늦고 고구려는 백제보다도 약간 늦은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기상기록 역시 일식기록으로 추적한 최적관측지의 위치와 일치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런 과학적 결과를 두고 정작 기뻐해야 할 국내 사학계는 무거운 침묵만 지켰다. 고대사 전공의 한 국사학자는 "일본인들이 삼국사기를 부정한 데 대한 통쾌한 반증이기는 한데, 그 결과가 아무래도...."  하며 말끝을 흐렸다. 사실 국사학계로서는 박교수의 결과물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상태다. 지금까지 쌓아온 고대 삼국에 대한 학문적 업적은 모두 한반ㄷ를 토대로 성립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고대 삼국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주장은 재야 사학계에서 일찍부터 주장되어 온 바이다. 이중재, 오재성씨 등 재야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저서를 통해 삼국이 처음부터 한반도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 고대사의 미스터리는 풀 수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3. 기상전문가의 또다른 증명
 
        재야사학자들중 21년동안 기상청에서 근무한 기상관측 전문가 정용석씨는 기상학적 자료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삼국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주장을 폈다.  먼저 홍수와 가뭄에 관한 삼국시대 기록을 살펴보자.
      삼국사기에는 신라 파사왕 29년에
"홍수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10도로 사실을 보내 정부의 양곡을 풀어 구제하였고..."
로 기록돼 있다. 파사왕 29년은 서기로 108년. 바로 이 해는 백제 기루왕 32년인데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  엉뚱하게도 백제에서는
"봄,여름에 가뭄이 있어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는 끔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같은 계절에 둘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빠져 있는 상황은 마찬가지인데, 신라쪽은 홍수때문이라고 하고 백제는 가뭄 때문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한반도에 삼국이 있었다고 할 때, 신라지역인 경상도와 강원도는 홍수로 난리가 났고, 백제지역인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는 약 6개월 동안 가뭄이 들어 민심이 흉흉했다는 뜻이다.
      정용석씨는 이 기록은 한반도의 기상원칙으로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지구의 자전원칙과 전향력으로 볼 때 북반구에서는 기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상식. 따라서 한반도에서 위와 같은 상황이 되려면 대륙에서 습기가 많고 규모가 큰 저기압이 황해를 건너오는 동안 도중에 바다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공급받아 일단 백제 땅을 껑충 뛰어 넘은 뒤 경상도와 강원도땅에 포화상태가 된 수분에너지를 뿌릴 때, 신라지역에서는 홍수가 발생한다.
      그럴 경우 같은 시기 6개월동안의 긴 가뭄을 일으킨 큰 고기압덩어리는 한반도에 있을 자리가 없게 된다. 이렇게 오랜 기간 지속적인 가뭄 현상을 일으키는 기단은  그 규모가 최소한 수백km에서 수천km의 반경을 유지하며 요지부동이거나 이동속도가 아주 느린 특성이 있다. 기상학 용어로는 "블로킹 기단"이라고 하는데, 강수현상을 일으키는 공기덩어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범위가 크고 넓다. 즉 백제뿐 아니라 홍수상황에 있는 신라와 고구려까지 가뭄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공기의 흐름으로 볼 때, 백제 지역에서 대규모 홍수가 나고 신라지역에서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면, 억지로나마 해석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정반대 현상은 기상학상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이 기록은 기록 자체가 잘못 됐거나, 아니면 삼국의 위치가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삼국의 기후현상이 현 한반도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증거는 더 많이 나타난다.
     " 신라 벌휴왕 9년(서기192년)여름 4월에 서울에 눈이 3자나 내렸다(삼국사기)."
     " 신라 눌지왕 41년(서기457년)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삼국사기)."
     " 백제 기루왕23년(서기99년)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콩을 죽였다(삼국사기)."
 
       먼저 여름 4월은 지금으로 말하면 양력 5월6일 입하가 지난 때이다. 한반도의 신라지역은 대체로 12월하순을 전후해 첫 눈이 내리고 늦어도 3월 초순이며 눈이 그치는 곳이다. 또 지금의 경주는 3,4개월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에만 눈이 내릴 수 있는 따뜻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곳이다.
      그런데, 벌휴왕9년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눈이 3자(76cm로 추정)나 내려 극심한 피해를 주었다면 보통의 기상이변이 아니다. 옛날 제왕들은 때아닌 계절에 눈이나 서리가 내리서 곡식을 해치는 일이 생기면 정사(政事)를 잘못 처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판결한 죄인을 다시 심사하거나 가벼운 죄인은 석방하는 등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사서에서도 기상이변을 비중있게 다루는 것이다.
      문제는 신라에 기상이변이 발생했다면 홍수 때의 공기이동처럼 백제땅에도 더 많은 눈이 내려야 한다는 점이다. 백제의 기상현상은 신라지역보다 대개 1개월이상 빨리 내리고 또한 경주보다는 늦게까지 내리게 된다. 그런데 백제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아예 기록이 누락됐거나 실제로 신라와는 강역이 달라 백제에서는 발생하지 않은 것일 것이다.
     서리현상은 더욱 그렇다. 눈의 경우 간혹 한반도 백제에 많이 내리고 신라에 적게 내릴 수는 있어도 서리는 그렇지 않다. 대륙에서 찬 공기가 이동해 와 한반도에서 그 성질을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서리는 신라 따로 백제 따로 구분해서 내리지 않는다. 특히 곡식을 해칠 정도로 무서운 서리는 더 그렇다.
     따라서, 곡식을 망가뜨릴 정도의 서리가 백제 지역에 내렸다면 경상도와 강원도 산악 지방에 서리가 내리지 않을 확률은 없다. 그러나, 백제에 피해를 준 서리가 신라에는 나타나지 않고 반대로 신라에 피해를 준 서리는 백제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역시 삼국이 한반도에서 인접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4. 토함산은 화산(火山)인가?
 
       "...신라 진평왕 31년(서기509년) 봄 3월에 모지악산의 땅이 탔다. 구덩이 너비가 4보, 길이가 8보, 깊이가 5척이나 되었고, 10월15일 꺼졌다..."
      " ...신라 무열왕 4년(서기657년) 가을 7월에 동악(東岳) 토함산의 땅이 타서 3년만에 꺼졌다..."
       국내 사학자들은 모지악 산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했고, 토함산은 현재 그대로 경주에 있는 토함산으로 본다. 또, 토함산의 화산활동에 대해 일부 사학자는 천연가스의 폭발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들 화석연료가 생기는 층이 경주 일대에 있어야 하는데, 세계지질학계 보고에 의하면 한반도는 석탄이외에는 화석연료가 없는 지층이라고 한다.
       만약 경주 토함산에서 천연가스가 3년 동안이나 뿜었다고 한다면 최소한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해발 750m의 평범한 화강암석으로 이루어진 경주 토함산은 천연가스가 나올 수 있는 산도 아니고, 더더욱 화산폭발에 의한 휴화산도 아니다. 한반도 어느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토질과 석질의 산인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은 분명히 토함산이 화산활동을 했음을 보여준다. 먼저 화산활동에는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지진이 따라 붙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열왕때 토함산이 불기둥을 뿜기 241년전인 실성왕15년(서기416년)에 "토함산이 무너져 샘물이 솟았고 물기둥의 높이가 3장이나 되었다는 기록과 186넌전인 자비왕 14년(서기471년)에는 신라의 서울 땅이 갈라져 동서남북 넓이가 20장이나 되는 대규모 강진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즉, 토함산은 화산활동을 하기 전에 전주곡으로 지진현상까지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토함산은 어디에 있을까? 정용석씨는 중국 "안휘성 소호시 합비"라는 곳에 함산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토함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화산으로 용암을 뿜어내는 활화산일 때는 토함산이 되지만, 요즘 말하는 휴화산일때는 토(吐)하지 않기 때문에 함산(含山) 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대륙의 지형지리지인 중국지에 이하면 함산은 화산활동을 한적이 있는 휴화산이고, 그 인근의 합비 지역은 화산활동의 여파로 토질이 좋아 작물이 잘 자란다고 한다.
고대사(高代史)의 수수께끼들
   비단 천체현상이나 기상학적 개념으로 보지 않아도 우리나라 고대사에는 여전히 수수께끼들이 많다. 중국의 사서에 고구려가 당나라에 낙타등을 선물했다는 기록이나, "일본서기"(원본22권)에 "백제가 낙타, 노새, 양을 보냈다."등의 기록은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보는 한 있을 수 없는 현상들인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정창원에 보관돼 있는 바둑판인 "목화자단기국"은 백제가 보낸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바둑판 측면에 열대지방에느 있음직한 낙타그림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후략)
  그는 지난 94년 삼국시대의 천문기록에 대한논문을 발표하기 1년전에 단군시대에 대한 천문기록을 이미, 연구발표한 바 있다고 말했다. 사실 이때의 경험이 삼국시대 천문기록을 검증하게 된 원인이 됐다는 것. 그러나, 그가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은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고 한다.
     최근에 들어서야 단군시대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국사학계에서는 아직도 단군을 신화시대로 취급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대표적인 사서로는 단기고사와 한단고기를 들수가 있다. 단기고사는 발해이 건국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엮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편년체 역사서이다. 여기서는 역대 단군임금들의 행적등이 일일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자들로부터 위서(僞書)라는 낙인이 찍혀 외면돼 왔다. 이 서적들이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이 과장되어 있다는 이유였다.
      "위서(僞書)라고 대접을 받지 못하는 단군조선에 관한 책에도 천문현상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동아시아 제국들은 천체현상이 지상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주술적 믿음 하에 천체운행에 대해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책이 위서(僞書)냐 아니냐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바로 당대의 천문현상의 현장으로 돌아가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방법은 삼국시대 천문기록검증과 같은 식입니다. "
      박교수에 따르면 이들 단군 역사서에는 모두 12회의 천문현상에 대한 기록이 수록돼 있다고 한다. 일식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로 가장 많고 목성,화성,토성,금성,수성등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결집현상, 그리고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 군데씩 기록돼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오행성 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이다. 제13세단군인 홀달단제 50년(무진년), 즉 BC 1733년에 다섯 개 별이 누성(동양천문학에서 표시하는 별자리 이름)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난 BC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컴퓨터로 샅샅이 조사했다.
     검정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1733년으로부터 바로 1년전인 B.C.1734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해 7월13일 초저녁 다섯 개의 별이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고,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 있어.별빛이 한층 찬란하게 빛났다. 천문학적으로도 매우 드문 현상이었다.
한편 B.C.1733년을 기점으로 하여 오행성이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80년전인 B.C.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도표) 단군조선시대의 천문현상 기록 일람표
 

순서

시기

기록내용

비고

1

2세 단군 부루58년(B.C.2183)

일식

?

2

13세단군 홀달 50년(B.C.1733)

오성취루

1년오차

3

17세단군 여을 20년 여름(B.C.1533)

일식

?

4

29세 단군 마휴 9년(B.C.935)

남해 썰물

4년후 실현

5

6세 기자 2년 7월(B.C.918)

일식

4년후 실현

6

32세 단군 추밀 13년 3월(B.C.837)

일식

4년후 실현

7

35세 단군 사벌 8년 4월(B.C.765)

일식

연도 일치

8

19세 기자 1년 봄(B.C.579)

일식

연도일치

9

39세 단군 두홀 21년 8월(B.C.525)

일식

월까지 일치

10

44세 단군 구물 3년 2월(B.C.423)

일식

월까지 일치

11

47세 단군 고열까 48년(B.C.248)

일식

연도 일치

12

36세 기자 인한 35년(B.C.241)

일식

연도 일치


  박교수는 " 기록연수가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계산법과 3천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 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 떨어질 확률은 계산 결과 0.007%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이다.
    오행성 결집 현상과 함께 박교수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기록. 두 사서모두 제 29세 마휴단제 9년 (B.C.935년)때 "南海潮水退三尺"이라 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 있다. 조수면의 변화는 달과 태양의 조석력에 의해 일어나므로 천체운동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 오행성 결집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B.C.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 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 후인 B.C.931년 11월 22일에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천문학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대목이라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 기록을 써넣었을 가능성은 0.04%에 지나지 않았다. 재미있는 점은 일식기록에서도 4년의 오차가 바생한게 2건이나 된다는 점이다. B.C.935년에 근접한 일식 기록으로는 6세 기자임금 2년(B.C.918년) 7월의 기록과 32세 단군 추밀 13년(B.C.837년) 3월의 기록이다. 이들 기록때에는 일식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정확히 4년후에는 각각 대응시킬 수 있는 일식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이는 단군역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연대 계산상 오차가 있었다는 가정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것을 통계적으로 체계적인 오차라고 한다. -편집자주) 단군시대 일식과 관련해 박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사실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었습니다. 일식 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 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 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는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
     중국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 기록이 주나라 때인 B.C.776년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단제 때인 B.C.2183년에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400년이나 앞선다는 점, 그리고, 10개의 일식기록중 5개의 기록(4년후로 계산한 2개의 기록까지 합치면 모두 7개)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중 2개는 연도뿐 아니라 월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교수는 밝혔다.
일부사학계도 연구 결과 인정
     연구 결과 박교수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동안 일본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 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전적으로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날조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왜곡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하기도 여렵지만, 천문 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특히 단군 조선시대의 천문관측기록은 중국보다 월등히 앞선 연대이기 대문에 중국 기록을 베낄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서들이 후대에 추가되고 윤색되었다는 점도 있으나 상당 부분은 단군 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
   박교수의 연구는 그동안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실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중략)이처럼 한 천문학자의 집요한 연구결과가 기존의 학문세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여러 학문들이 분할돼 자기의 영역만 찾을 것이 아니라 인접 학문들과 공동보조를 맞추면 의외의 소득을 거둘 수 있다는 귀중한 사례를 보여준 것읻. 그러나,  박교수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사학자들도 없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학계의 반응

    삼국시대 천문관측 연구 논문을 발표한 이후 국사학을 전공하는 어느 학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천문학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남의 학문에 끼여들어 근거도 없는 말을 하느냐라는 것이었다. 무엇이 근거 없는지를 대보라고 하니까 국사학자들이 연구하고 판단한 상식과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과학자는 과학적인 결과만 놓고 말할 뿐입니다. 과학적으로 연구 결과가 틀렸다면 얼마든지 정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결과를 인정한다면 학문에 있어서 다시 생각해 보는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박교수는 왜 역사가 국사학자들만의 것이냐고 반문했다. 한국인이면 당연히 한국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보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출처 : 한걸음...나의길을 가련다 ^^~
글쓴이 : 어라이브리 원글보기
메모 : 속속들이 검증되는 대륙삼국과 고조선의 증거들.